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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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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6세의 집권,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왕실 회화 아틀리에오스트리아의 대공녀, 마리 앙투아네트드 로렌 합스부르크 (1755-1793) 1770-1774년, 캔버스에 유채, 64×52cm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 대공녀는 베르사이유 궁에서 1770년 5월 16일, 루이 15세의 손자이며 훗날 루이 16세가 되는 왕세자 루이와 결혼했다. 당시 열 네살에 불과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움은 베르사이유 사람들을 금세 매혹시켰고,  수많은 사람들이 루이 15세에게 새로운 앙세자비의 초상화를 요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루이 15세는 왕실 회화 아틀리에에 소속된 모사가들에게 마리 아투아네트를 그린 초상화 여러 점을 제작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 타원형 초상화는 기존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 아니라, 1769년에 ..
루이 15세, 프랑스 예술의 절정기 이야생트 리고 (1659-1743)대관식 복장을 입은 어린 루이 15세 (1710-1774)1715년, 캔버스에 유채, 189×135cm  루이 15세가 아주 어렸을 때의 모습을 담은 첫 공식 초상화이다.1715년 루이 14세가 자신의 손자인 루이 158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남겨 놓고 서거한 바로 다음날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으며, 1717년에 완성되어 루이 15세 및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프항스의 섭정을 맡았던 숙부 오를레앙 공(公) 필립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이 초상화는 리고에 의해 복제화와 판화로 제작되어 프랑스 전역에 널리 배포되었기 때문에, 어린 루이 15세를 표현한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알렉시 시몽 벨 (1674-1734)루이 15세에게 약혼녀의 ..
루이 14세, 그 찬란한 시기 - 베르사이유 궁전 -                            앙리 테스틀랭 (1616-1695)열 살 때의 루이 14세의 초상16478년 캔버스에 유채. 205×152cm  164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어린 루이 14세이 열 살 때 모습을 대형 초상화로 제작한 것이다.작품 속의 어린 루이 14세는 황금 백합 무늬가 있는 크고 푸른 왕가의 망토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성령 기사단의 훈장이달려 있는 목걸이를 걸고 있다. 어린 군주를 보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그가 앉아 있는 왕좌 아래에 두 단짜리받침대를 그렸으며, 약간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듯한 구도를 취했다. 그림의 좌측 하단에는 화가의 팔레트가 놓여 있으며,왕은 월계관을 손에 들고 있는데, 이는 가장 영예로운 화가들에게..
일본의 장황(粧潢) 일본의 장황(粧潢)   일본에서 장황이라는 용어는 8세기 나라시대의 쇼소인 문서에 처음 보이며 주로 경전과 만다라, 불화 족자 등불교 미술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0세기 후반부터 일본 고유의 문화가 발달하면서 장황의 대상이 병풍그림, 미닫이문 등생활속의 감상물로 옮겨 갔고 이후 엔기, 모노카타리 등 세속적인 주제의 두루마리 그림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가마쿠라 시대(12-14세기)에는 중국 송나라와 활발한 교류를 통한 선종(禪宗) 풍의 서화 족자가 장황의 대다수를 차지하였으나,무로마치 시대(14-16세기) 이후에는 일본의 독자적인 미감으로 바뀌어 갔다. 전통 가옥의 손님맞이 방에 '도코노라'라는전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차를 마시며 족자를 감상하는 다도문화가 발전하고, 비단 회장을 두르는 방식이 다양해지..
중국의 장황(粧潢) 중국의 장황(粧潢)                                        중국의 장황은 한대(漢代)에 비단과 종이를 글과 그림의 바탕으로 사용하면서 시작되었다.두루마리 장황은 당대(唐代)에 이어 완벽한 수준으로 발전했고, 이 시기 만들어진 기본형식은 송 · 원 · 명 · 청대까지 이어진다.족자는 중당(中唐)까 무렵에 불교의 걸개 그림의 세로 형식과 두루마리의 앞부분 회장 방식이 결합하면서 나타났고, 명대(明代)를거치면서 설치장소와 장식성이 고려되면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된다. 한대에 시작된 병풍은 당대에 이르러 비단과 종이로 장황한접이식과 화려하게 장식한 나무 받침대에 끼워서 세우는 형식이 나타나 궁궐의 황제 자리를 상징하거나 실내를 분할하는 용도로 쓰였다. 중국황실의 장황은 한 · 당대에..
한국의 장황(粧潢) 한국의 장황(粧潢)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종이 제작기술을 물론, 이를 꾸미는 장황기술도 함께 도입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각종 불화와 불경, 족자 · 두루마리 · 첩 등으로 장황되었고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대량의 기록물을 손쉽고 튼튼하게 엮을 수 있는 책 장황도 널리 보급되었다.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갖추는데 장황은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두루마리 조선왕실의 두루마리 장황은 본문의 주변을 아름다운 비단으로 둘러 장식하고 뒷면은 종이로 배접하여 본문이 상하지 않고오래 보존될 수 있도록 하였다. 두루마리를 말고 펴기 쉽도록 둥근 축하축을 연결하고, 축 양 끝에는 옥이나 나무로 축두를만들어 장식하였다. 말았을 때 드러나는 표지 부분은 여러 무늬가 직조된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비단을 사용하기..
어두움의 숭고함 모든 벽은 門 이다   먼동이 튼다.   어두움도 아니고 밝음도 아닌...   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좋아한다.뒷모습에는 연민과 그리움이 있다. 그리고 그늘이 있다... 어두움도 아니고 밝음도 아닌, 어두움 속에서 어두움을 보는 것.그것은 알 수 없는 세계이자, 알고 싶은 세계이다... 우리 시대의 대선사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나는 이 분들을 만나면서 나누었던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한다...     김호석 화백 著 『모든 벽은 門이다』서문(序文)중에서      성철 스님 (1912-1993) 종이에 수묵 채색, 1994 스님의 진영 중 가장 먼저 그린 그림이 성철 스님 초상화다.종이가 황색을 띠는 것은 전통방식 그대로 들기름을 먹였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185×95cm, 수묵, 1994..
평양도 / 태평성시도 / 풍류도 평양도(平壤圖) ·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 풍류도(風流圖)          평양도(平壤圖) 10폭 연대미상, 지본채색, 각 131×39cm, 10폭 병풍, 서울대학교박물관 평양도는 이미 조선중기부터 병풍 형식으로 그려졌음이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기록에 나타나 있다. 평양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명승지로서,중요한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거점으로서, 또 기자조선(箕子朝鮮) 정전법(井田法)의 유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중시되었다. 그래서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위로는 정조(正朝) 같은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들까지 많은 수요가 있었다. 현재 전하는 평양도 중에는 김홍도의 원화(原畵)에 의한 목판본(木版本) 평양도 병풍들이 여러 점 있는 것도 이런 당시의 수요를 잘 보여준다. 즉 그림으로 그리기에는 벅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