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르사이유 궁전 -
앙리 테스틀랭 (1616-1695)
열 살 때의 루이 14세의 초상
16478년 캔버스에 유채. 205×152cm
164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어린 루이 14세이 열 살 때 모습을 대형 초상화로 제작한 것이다.작품 속의 어린 루이 14세는 황금 백합 무늬가 있는 크고 푸른 왕가의 망토를 걸치고 있는 모습이며, 성령 기사단의 훈장이달려 있는 목걸이를 걸고 있다. 어린 군주를 보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리기 위해 그가 앉아 있는 왕좌 아래에 두 단짜리받침대를 그렸으며, 약간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듯한 구도를 취했다. 그림의 좌측 하단에는 화가의 팔레트가 놓여 있으며,왕은 월계관을 손에 들고 있는데, 이는 가장 영예로운 화가들에게 관을 수여하겠다는 의지로 추정된다. 또한 그의 왼손에 든왕홀로 미술을 의미하는 또 다른 상징인 구체와 나침반, 제도용 삼각자, 그리고 조각상을 가르키고 있다. 크고 붉은 주름 잡힌 천이 루이 14세 위로 드리워져 일종의 닫집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어 웅장한 느낌을 자아낸다.
샤를 푀르송(1609-1667)주피터의 모습으로 표현된 루이 14세의 초상 1653년 경, 캔버스에 유채, 166×143cm
루이 14세를 신화 속 인물로 표현한 것으로서, 작품 속에서 그는 주피터(ㅈ우스)의 지물인 번개를 오른손에 들고 있으며,그의 발치에는 주피터의 상징물인 독수리가 앉아 있다. 아래쪽 글귀에는 '이 젊은 군주가 바로 새로운 주피터'라고 적혀 있다.힘을 상징하는 떡갈나무 잎 관을 쓰고, 발은 메두사의 머리로 장식되어 있는 페르세우스의 방패 위에 발을 올려 둔 모습이다.루이 14세가 대략 열다섯 살 정도의 소년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653년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고 한다.이 작품은 이른바 '신화적 초상'이라는 장르에 속하는 그림이다.
클로드 르페브르 아틀리에 (1632-1675)루이 14세의 초상 1670-1675년경, 캔버스에 유채, 196×155cm
작품 속의 왕은 갑옷을 입고 레이스 깃을 목에 두르고 있으며, 금실로 수를 놓고 붉은 리본으로 화려하게 강조한 의상 위로 성령 기사단의 십자가가 달려 있는 푸른 리본이 가로질러 거려 있다. 왕관은 탁자의 앞 부분에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가 있는데, 이 두 가지 물품은 17세기의 왕이 갖는 두 가지 근본적인 기능이자 역할, 즉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로서의 역할과 군대를 통솔하여 전쟁을 지휘하는 왕으로서의 역할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후경에 범선이 한 척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작품은 해군을 통솔하는 왕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아마도 1670년대 중반의 네덜란드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 함대가 시라쿠사와와 팔레르모의 대양 밎리파리 섬엣 승리를 거두었던 해상 전투를 배경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는 이 초상화가 필립 드 상페뉴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현재는 클로드 르페브르의 아틀리에서 만들어진 작품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작자 미상 (17세기)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의 초상화가 있는 트롱프뢰유 1660-1665년경, 캔버스에 유채, 123×168cm
붉은 커튼 위에 핀으로 고정되어 있는 루이 14세와 그의 아내 마리 테레즈의 판화 형식의 초상화를 표현한 '트롱프뢰유이다. 붉은 커튼 사이로 보이는 커튼 뒤쪽의 인물로 인해 작품의 입체감이 두드러지고 있으며, 이를 통해 트롱프뢰유의 효과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 트롱프뢰유 (Trompe-I'oeil) '눈속임' 또는 '속임수 그림' 등으로 번역되는 회화의 장르로 마치 실제의 것으로 착갈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을말한다. 구도 및 명암, 양감, 질감 등을 '회화 양식'을 사용하여 실물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이 트롱프뢰유의 주 목적이다.
시몽 르나르 드 생탕드레 (1613-1677)안 도트리슈 모후와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 왕비가 함께 그려진 초상 1664년, 캔버스에 유채, 133×186cm
지혜와 평화를 상징하는 인물로 표현된 안 도트리슈 모후와 마리 테레즈 왕비가 서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초상화로서, 도상학적인 측면에서 각별히 중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도트리슈는 갑옷을 입은 채 크고 붉은 깃털 장식이 달린 투구 위에 왼손을 올리고 있으며, 곁에는 뱀으로 된 머리카락이 꿈틀대는 메두사 머리로 장식된 방패가 놓여 있어, 전통적으로 지혜, 또는 신중함을 뜻하는 알레고리인 미네르바(아테나) 여신의 상징물들로 꾸민 모습이다. 마리 테레즈는 백합꽃 무늬가 수 놓아진 드레스를 입고, 왼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스페인 왕 펡리페 4세의 딸인 마리 테레즈와 루이 14세가 1660년에 결혼을 함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의 군사적 적대 관계에 사실상 종비부를 찍게 되었는데, 이 작품은 모후 안 도트리슈와 마리 테레즈 왕비가 맞잡은 손을 통하여 이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라 쿠스투 (1658-1733)장 바티스트 콜베르 (1619-1683) 1715-1716년경, 대리석, 84×75×32cm
콜베르는 궁전 관리부 총감이자 재정 총감, 왕실 국무성과 파리 시, 성직부 그리고 해군성의 총감으로서 막중한 임루들을 맡고 있었고, 그 위치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국가의 사법 및 행정, 재정, 예산 부처의 개혁을 단행했고 파리의 도시 미관을 개선시켰으며, 왕립 아카데미 및 공방들을 설립하고 해외 무역을 재정비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해군에도 큰 발전을 가져 왔다. 루이 14세는 콜베르를 언제나 깊이 신임했으며, 그에게 많은 특혜를 베풀었다. 뛰어난 솜씨로 조각되어 있는 가발과 의복을 보면 콜베르의 사회적인 지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야생트 리고 아틀리에 (1659-1743)
루이 14세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31×97cm
루이 14세의 초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바탕으로 만든 축소판이다. 이 작품의 모델이 된 초상화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양주 공작이 1700년에 서거한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2세의 유언에 따라 1701년에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가 되었을 때, 할아버지의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을 담아 스페인으로 가지고 가기 위해 주문한 것이었다. 원 작품에서 루이 14세는 담비 털을 덧대고 황금 백합 무늬가 수놓아진 파란색 대관식 망토를 입고서 연단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또한 검은 가발을 쓰고 성령 기사단의 훈장이 달린 금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으며, '레갈리아', 즉 프랑스의 왕을 나타내는 상징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루이 14세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꼭대기가 백합 모양으로 되어 있는 왕홀, 허리춤에 차고 있는 대관식용 검, 그리고 그의 왼쪽으로 황금 무늬의 푸른색 방석 위에 놓여 있는 '정의의 손'과 프랑스의 왕관이 모두 프랑스 왕의 상징물들이다. 왕의 힘을 상징하는 기둥 앞에 서 있는데, 이 기둥의 받침 부분은 '정의'를 우의적으로 나타낸 여인상을 새긴 저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이 정의의 알레고리는 한 손ㅇ는 저울을, 반대편 손에는 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이를 통하여 프랑스의 왕들이 백성에 대해 가져야 하는 첫 번째 덕목이 바로 정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좌는 오른쪽 깊숙한 곳에 그려져 있고, 주름 잡힌 천이 왕의 모습 위로 마치 닫집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완성된 리고의 대형 초상화는 결국 마드리드로 전해지지 못했다. 양주 공작이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좌에 앉자마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작자 미상 (17세기)
마리 안 드 부르봉,
일명 마드무아젤 드 블루아 (1666-1739)
1670-1671년경, 흰 대리석, 원형 부조, 33×27×10cm
루이 14세는 자신의 외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어머니 안 도트리슈가 서거하자, 더 이상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공공연히 혼회의 여인들을 만나기 시작했고 루이즈 드 라발리에르를 만나 네 아이를 갖게 됐다. 셋째로 태어난 마리 안 드 부르봉은 두 오빠가 죽은 후 1667년에 적자로 인정 받았고, 동생인 베르망 두아 백작도 그 뒤를 이어 적자로 인정받았다. 그 후 루이 14세의 비적출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마리 안이 궁정 내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던 대(大) 콩데의 조카인 콩티 공(公) 루이 아르망 드 부르봉과 1680년에 혼인하게 되었다. 이 원형 장식물에는 그녀가 아직 앳된 소녀였을 때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작자 미상 (17세기)
루이 드 부르봉,
베르망두아 백작 (1667-1683)
1670-1671년경, 흰 대리석, 원형 부조, 31×26×10cm
피에르 미냐르 (1612-1695)
루이즈 마리 안 드 부르봉,
일명 마드무아젤 드 투르(1674-1681)
1681년경, 캔버스에 유채, 132×96cm
이 작품은 오랫동안 루이 14세와 그가 총애했던 정부 루이즈 드 라 바리에르 사이에서 태어난 후 적자로 인정을 받았던 마리 안 공주, 즉 마드무아젤 드 불루아(1666-1681)의 초상화로 여겨져 왔으나, 루이 14세와 라 발리에르 이후에 왕의 총애를 받게 된 몽테스팡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루이즈 마리 드 부르봉, 즉 마드무아젤 드 쿠르가 죽은 뒤 그녀를 회고하며 그린 초상화일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 작품 속에서 여섯 살 정도의 소녀는 손에 든 조개 껍질에 담긴 비눗물과 빨대를 가지고 비누방울을 만들며 놀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실제 마드무아젤 드 쿠르는 1674년 11월 12일에 태어나 여섯살이 되던 해인 1681년 9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17세기 당시 삶의 허무함을 상징하던 이미지였던 비누방울이 그려져 있다는 것은 작품 속의 소녀가 어려서 죽었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설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샤를 르 브룅 (1619-1690),
보두앵 이바르 (1611-1680)
명예의 휘장
고블랭 왕립 제조소 제작
1693-1727, 양모와 명주로 짠 테피스트리, 282×222cm
이 휘장은 마치 왕실에서 주문하여 만든 것처럼 화려하지만, 이 휘장의 바탕이 된 작품은 원래 왕실이 아닌 개인이 주문했던 것이다. 그 작품을 주문했던 인물은 바로 루이 14세가 성년이 되기 전에 재무 장관을 역임했던 니콜라 푸케(1615-1680)였다. 뛰어난 미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던
푸케는 1653년에 건축가인 루이 르 보, 화가 샤를 르 브룅 및 정원사 앙드레 르 노트르로 하여금 파리의 남동부에 있는 보-르-비콩트 지역에 멋진 성을 한채 짓도록 했는데, 그 결과 당시 프랑스에서는 본 적이 없을 만큼 실로 화려하고 완벽한 성이 완성되었다. 푸케는 1661년 8월 17일에 이 성의 준공식을 열고, 어린 루이 14세와 왕실 일가, 그리고 궁정의 인사들을 초대하여 성대한 파티를 개최하는 듯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된 이후, 직권 남용 등의 독직 혐으로 루이 14세의 재상인 콜베르에게 고발되어 구금되었고, 결국 모든 재산을 몰수 당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아래에서 일하던 예술가들은 왕실의 건축 작업 쪽으로 편입되었다.
자크 뷔레트 (1631-1699),
프랑수아 레스팽골라 (1644-1705),
피에르 라두아로 (?-1716)
아메리카 대륙
1679-1681년경, 금으로 도금된 청동 부조, 80×51×2cm
금으로 도금한 청동을 세부적으로 조각하여 장식한 이 화려한 투구는 《돔의 숲》에 있는 정자 내부를 장식하기 위해 만든 여뎗 개의 장식물 중 한 점의 일부였다. 베르사이유 궁의 여러 정원 중 하나인 《돔의 숲》은 건축가 쥘 아르두앵 망사르의 지휘로 조성된 세련되고 아름다운 정원이다. 망사르는 자신이 베르사이유에서 처음으로 맡게 된 이 정원의 장식을 위해 프랑수아 지라르동과 그 동료 작가들의 도움을 받았고, 1679년에는 금은 세공사 피에르 라두아로가 이들과 합류했다. 이 투구는 4대륙을 상징하는 4개의 장식물들 중 아마도 유럽을 상징하는 장식물의 꼭대기를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더ㅔ, 갈리아의 수탉이 꼭대기를 장식하고 있고 얼굴 부분을 가리는 면갑은 루이 14세의 상징인 로도스의 아폴론으로
꾸며져 있다.
장 바티스트 드 샹페뉴 (1631-1681)메르쿠리우스의 전차 1673년경, 캔버스에 유채, 51×52cm
베르사이유 궁 내 왕의 《그랑 아파르트망》중 《메르쿠리우스의 방》의 중앙 천정화를 제작하기 위하여 그린 초벌화이다.
작품의 중앙에는 신이자 동시에 '수성'이라는 행성을 의인화한 이미지인 메르쿠리우스가 카두케우스 지팡이를 들고, 날개 달린 모자 페타소스를 쓴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의 수레를 끌고 있는 것은 수탉인데, 수탉은 경계심이 많다는 특성 때문에 메르쿠리우스를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메르쿠리우스의 왼편에서 두루마리 종이를 펼쳐 든 채로 작은 푸토가 씌워주는 월계관을 받고 있는 여성은 웅변의 뮤즈인 폴림니아이며, 이는 메르쿠리우스가 화술을 관장하는 신이라는 점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수탉과 더불어 경계심이 많은 동물이자 작품의 오른쪽에 그려져 있는 두루미 앞에 앉아 날개가 달린 자신의 이마를 검지로 가리키는 자세를 통해 과학과 예술의 신인 메르쿠리우스의 지성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은 '경계심'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삼각자와 나침반, 각도기, 기하학적인 도며들이 그려진 천 조각 등은 '과학'과 '예술'을 상징한다.
아래쪽으로 네 명의 푸토들이 리라를 들고 잇어 메르쿠리우스가 이 악기를 발명했음을 상기시켜 주는데, 메르쿠리우스는 아폴론으로부터 소를 훔친 것을 용서받기 이해 이 악기를 그에게 양보했다. 메르쿠리우스의 수레는 작은 큐피트 신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새벽별'의 인도를 받아 나아가고 있으며, 이 '새벽별'은 머리에 별을 달고 손에 든 트럼펫으로 날이 밝았음을 알리고 있다. 또, '이슬'은 두툼한 구름 아래에서 항아리 속에 든 물을 붓고 있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후경에는 황도 12궁의 일부가 그려져 있는데, 메르쿠리우스의 수레는 점성술 상에서 수성의 궁인 처녀좌와 쌍둥이좌를 지나가고 있다. 작품의 네 모서리는 부채꼴 모양의 귀가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실제로 구현될 천장 벽화의 네 모서리에 같은 모양으로 장식 액자가 구현될 것임을 표시해 놓은 것이다.
가스파르 마르시 (1624-1681),앙셀름 플라망 (1647-1717)오레이티아를 납치하는 보아레스, 또는 공기
1674년, '그랑드 코망드'라는 이름의 프로젝트가 시행되면서 베르사이유 궁전에 있는 《물의 화단》을 꾸미기 위한 24개의 조각상과 8개의 대리석 군상이 만들어졌다. 이 프로젝트는 루이 14세를 상징하는 '태양'이 예술에,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을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즉 흙, 공기, 물 그리고 불로 상징되는 세상의 질서와 그것들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큰 의도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끝내 완성되지 못햇고, 납치 장면을 표현한 세 점의 군상과 몇몇 조각상만 완성되어 당초의 계획과 다른 장소에 놓이게 되었다.
1693년, 루이 14세는 이 군상의 축소품을 청동으로 제작하도록 하여 베르사이유 궁전의 《수집가의 방》에 보관했다.
마셸 코르네이유 2세 (1642-1708)제피로스와 플로라 캔버스에 유채, 179×127cm
그랑 크리아농은 루이 14세가 베르사이유 궁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친 몸을 쉬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때문에 그랑 트리아농의 장식은 특히 왕이 열정적으로 좋아하던 대상 중 하나인 꽃을 중심으로 한 자연의 테마가 주를 이룰 수 밖에 없었고 왕의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백 송이의 꽃들을 화분째 정원에 옮겨 심고 매일같이 꽃을 가랑 주었다. 그런 맥락에서, 궁전의 회화 장식 주제로 '제피로스와 플로가'가 선택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제피로스는 오로라의 아들이자 바람의 신 중 한 명으로서, 플로라라는 님프와 사랑에 빠져 그녀에게 꽃과 정원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이 이야기는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변신 이야기』에서 시로 표현한 신화 이야기로, 그랑 트리아농의 장식을 맡았던 화가인 주브네 및 코르네이유 2세는 이 이야기로부터 영감을 받아 궁의 장식을 제작했던 것이다. 작품 속에서 플로라는 모든 시선이 집중되는 정 중앙에 그려져 있고, 나비의 날개를 단 모습으로 표현된 제피로스는 자신의 튜닉에 모아 담은 꽃들을
플로라에게 내밀고 있다.
에티엔 알레그랭 (16944-1736)궁전 《북쪽 화단》의 전경 1688년, 캔버스에 유채, 234×295cm
루이 14세가 그랑 트리아농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했던 작품들 중 한 점으로, 원래 코텔 회랑 끝에 있는 커다란 《포르티코의 방》을 장식하기 위한 그림이었다. 이 작품 속에는 프랑스의 조경 설계가 앙드레 르노트르의 감독하에 1660년대 초에 재정비된 베르사이유 궁의 《북쪽 화단》의 모습과 더불어 오른쪽에는 축조가 마무리된 궁전의 북쪽 날개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작품 중앙의 중경에는 《왕관의 분수》와 두 개의 《피라미드관의 분수》와 두 개의 《피라미드 분수》가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화단은 작은 나무들을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자르고 다듬어 만든 여러 가지 '토피어리'와 대리석 조각품들로 꾸며져 있다. 또한 화단으로 이어진 계단의 양 측면에는 두 개의 청동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왼쪽은 앙투안 쿠아조보의 「웅크린 아프로디테」이며, 오른쪽에 있는 것은 지오반니 바티스타 포기니의 「칼 가는 사람」으로, 고대의 유명한 조각상들을 복제한 것이다.
피에르 드니 마르탱 (1663년경-1742)《아름 광장》에서 바라본1722년 베르사이유 궁의 전경 1722년 캔버스에 유채, 139×150cm
1722년에 제작된, 베르사이유 궁의 전경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아마도 조부인 루이 14세가 1710년 9월에 서거한 후 궁을 떠났던 젊은 루이 15세가 다시 돌아온 것을 기념하며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루이 15세는 몇 년 간 파리에서 살다가 궁전의 증축 공사가 끝난 이후인 1722년 6월 15일에 베르사이유로 돌아왔다. 전경에 그려져 있는 아름 광장은 마치 공사를 준비하기 위해 자재 등을 쌓아놓는 공간처럼 표현되어 있고, 광장 뒤쪽으로 베르사이유 궁이 펼쳐져 있다. 작가는 좌우의 《대신의 안뜰》과 그 안쪽에 자리한 《왕실의 안뜰》, 또 그보다 더 안쪽에 자리한 《왕실의 안뜰》과 그 안쪽에 자리한 《왕실의 안뜰》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는데, 이 《왕실의 안뜰》공간에 위치한 성이 바로 루이 13세가 지었던 베르사이유 궁 최초의 성이다. 당시 이 성은 벽돌과 석재를 주재료로 해서 청석으로 지붕을 얹었으며, 그 위에 금으로 도금한 캄파네를 놓은 형태로 지어졌다. 그 후 오랜 기간의 공사를 통하여 성을 확장했으나, 루이 13세가 처음 지었던 성의 형태, 즉 안뜰을 감싸고 있는 'ㄷ'자 형태의 구조는 유지되었다.
미셸 코르네이유 2세 (1642-1708)미다스 왕의 심판1701년, 캔버스에 유채, 직경 106cm
그랑 트리아농을 장식했던 작품 중 하나이다. 루이 14세는 수많은 궁정 인사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고, 베르사ㅏ이유의 허영과 허식으로부터 몸을 피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하여, 1686년에 도자기 타일로 장식되어 있던 트리아농 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리석으로 된 그랑 트리아농을 짓도록 했다. 완공 직후인 1688년부터 궁 장식을 위한 여러 회화 작품 제작이 화가들에게 의뢰되었으나, 1689년에 발발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때문에 그 제작이 중단되기도 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미다스 왕의 심판'이다 작품 중앙의 뒤쪽에서 왕관을 쓰고 있는 프리지아의 왕 미다스는 리라를 연주하는 아폴론과 목신판의 피리를 연주하고 있는 반인반수의 '사티로스'인 마르시아스 둘 중에 누가 더 뛰어난 음악가인지를 결정해야 했는데, 결국 마르시아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에 노한 아롤론은 미다스에게 무지의 죄를 물어 그의 귀를 당나귀 귀로 바꾸어 버렸고, 마르시아는 감히 태양의 신과 재주를 겨루려 했던 죄로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지는 형벌을 받았다. 즉 이 작품의 숨겨진 의미는, 감히 루이 14세의 권위와 위엄에 대적하려 하는 자는 무모하다는 것이었다. 왕권 모독은 프랑스 왕의 백성으로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중죄였기 때문이다.
루이 빅토르 나블레 (1819-1886)베르사이유 궁 내 루이 14세의 침실 1861, 캔버스에유채, 63×95cm
루이 14세의 명에 따라 통치 말기에 베르사이유 궁 한가운데에 지어진 그의 침실 모습을 담고 있다. 원래 이 침실의 옆방을 사용하고 있었던 그는 자신의 수석 건축가인 쥘 아르두앵 망사르를 시켜 궁전의 중앙 살롱의 벽을 장식용 띠벽을 이용하여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일종의 복층과 같은 형태인 이탈리아 식으로 개조하고, 《거울의 방》으로 이어지는 커다란 세 개의 문을 없앤 뒤 그 자리에 창문을 마주하고 있던 금색과 흰색의 기둥 장식은 철거하지 않은 채로 두었고, 왕실 컬렉션에 포함된 초상화와 종교화, 풍속화 등도 문의 위쪽 벽 및 복층 장식용 띠벽의 위쪽에 그대로 두었다. 각별히 격식을 갖춰 만들어진 이 침실은 그때부터 왕의 기상 및 취침 의식이 치러지는 장소이자 궁정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왕권을 상징하는 이 방의 기능은 루이 15세를 이어 루이 16세까지 유지되기는 했으나, 이례적으로 루이 15세는 이 침실을 사용하지 않고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별도의 아늑한 침실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크게 훼손되었으나 1830년대에 복원되었다.
앙투안 브누아 (1632-1717)루이 14세 1705년, 검은 대리석, 금 도금, 원형 부조, 72×62×6cm
67세가 된 루이 14세의 옆 모습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그 사실적인 표현이 인상적이다.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모델의 얼굴에 대고 직접 본을 뜬 후, 그것을 이용하여 굉장히 사실적인 작품을 만드는 독특한 연출 기법으로 유명한 작가였다. 사진 기록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이 초상 작품은 세월의 흐름과 노화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 군주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이 제작된 1705년 당시, 루이 14세는 손자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5세의 왕자를 지켜주기 위해 유럽을 상대로 힘겨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그 전쟁은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 작품에 나타난 왕의 얼굴에는 노쇠의 흔적이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만, 정성들어 다듬은 듯한 여러 층의 풍성한 곱슬머리 가발에서는 여전히 국왕으로서의 위풍당당함이 느껴진다. 루이 14세는 통치 초반부터 때 이른 탈모증을 감추기 위해 가발을 썼지만, 이 가발은 점차 그의 왕권을 상징하게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다라 루이 14세를 표현한 공식 초상들은 이 가발을 점점 더 크고 풍성하게 묘사했다. 여기 이 작품은 왕을 미화하여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왕들 중 한 명이었던 루이 14세를 그 어떤 역경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초인적인 힘을 지닌 듯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 인용서적 /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이 16세의 집권,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0) | 2019.03.13 |
---|---|
루이 15세, 프랑스 예술의 절정기 (0) | 2019.03.12 |
일본의 장황(粧潢) (0) | 2019.03.10 |
중국의 장황(粧潢) (0) | 2019.03.10 |
한국의 장황(粧潢) (0) | 2019.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