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루이 15세, 프랑스 예술의 절정기

 

 

 

 

 

 

 

 

 

 

 

 

이야생트 리고 (1659-1743)

대관식 복장을 입은 어린 루이 15세

(1710-1774)

1715년, 캔버스에 유채, 189×135cm

 

 

루이 15세가 아주 어렸을 때의 모습을 담은 첫 공식 초상화이다.

1715년 루이 14세가 자신의 손자인 루이 158세를 유일한 후계자로 남겨 놓고 서거한 바로 다음날부터 제작되기 시작했으으며, 1717년에 완성되어 루이 15세 및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프항스의 섭정을 맡았던 숙부 오를레앙 공(公) 필립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이 초상화는 리고에 의해 복제화와 판화로 제작되어 프랑스 전역에 널리 배포되었기 때문에, 어린 루이 15세를 표현한 초상화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알렉시 시몽 벨 (1674-1734)

루이 15세에게 약혼녀의 초상화를 보여주는 큐피트

1724년, 캔버스에 유채, 99×124cm

 

 

 

1721년 스페인과 가족 협정을 맺게 된 프랑스 왕실은,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당시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5세와 엘리자베타 파르네세 사이에서 태어나 막 세 살이 된 마리나 빅토리아 데 보르본을 루이 15세와 혼인시키고, 또한 루이 15세의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 필립의 딸들 중 한 명을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인 아스투리아스 왕자와 혼인시킴으로써,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간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22년, 루이 15세와 결혼할  때까지 왕실 교육을 받기 위해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가 프랑스에 도착했다. 이 공주는 베르사이유 궁정에서 '왕비 공주님'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루이 14세와 마드무아젤 드 라 발리에르 사이에서 태어나 적자로 인정받았던 콩티 공주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724년에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왕자가 사망하여 오를레앙 공의 딸과의 결혼 계획이 무산되고, 왕실 내에서 루이 15세가 아직 어린 마리나의 빅토리아 공주가 아닌, 결혼 적령기에 든 다른 여인과 빠른 시일 내에 결혼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됨에 따라, 이중 결혼으로 스페인의 관계를 공고히 하겠다는 프랑스 왕실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는 1725년 4월에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루이 15세는 그 해를 넘기지 않고 곧바로 일곱 살 연상의 폴란드 공주인 마리 레슈친스카와 혼인 했다. 오른쪽에 붓과 팔레트를 든 화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큐피트는 방금 완성된 듯한 여섯 살의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초상화를 그녀의 약혼자인 열네 살의 루이 15세에게 선보이고 있는데,  혼인이 결정되면 서로 초상화를 주고 받았던 당시 왕실의 관습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724년에 궁전 관리부의 주문으로 제작되었고, 원래는 루이 15세의 전신을 모두 표현한 그림이었으나 후에 타원형으로 잘라내어 그 형태를 다시 잡은 것이다.

 

 

 

 

 

 

프랑수아 스티에마르 (1680-1740)

프랑스의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 (1703-1768)

1725년경, 캔버스에 유채, 206×137cm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간의 이중 결혼 계획이 무산되어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가 1725년 4월에 자국으로 돌아간 지 몇 달 후, 루이 15세는 페위된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 1세의 딸인 마리 레슈친스카 공주와 혼례를 올렸다. 작품 속의 마리 레슈친스카는 베르사이유 궁의 정원으로 보이는 장소를 거닐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의 앞에 있는 작은 큐피트는 백합꽂 무늬가 수놓인 방석 위에 곱게 포장한 왕관을 들고 앞길을 인도하고 있고, 동양풍의 복장을 한 시종이 백합곷 무늬로 장식하고 담비 털을 덧댄 망토를 받쳐 들고 왕비의 뒤를 따르고 있다. 이 작품을 그릴 당시 왕비의 실물을 볼 수 없었던 스팅마르는 장 바티스트 반 루가 그린 왕비의 초상화를 보고 얼굴을 따라 그렸다.

 

 

 

 

 

샤를 앙드레, 일명 카를 반 루 (17025-1765)

갑옷을 입은 루이 15세 (1710-1774)

1751년경, 캔버스에 유채, 271×193cm

 

 

 

카를 반 루는 유럽에서 프랑스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1748년에 루이 15세의 새로운 공식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게 되었다. 당시 그는 출전을 앞두고 천막 안에서 말에 오르려는 루이 15세이 모습을 초상화 속에 표현했는데, 전통적인 공식 초상화를 기대햇던 왕실의 요구에는 부합되지 않는작품이었다. 하여 이후 1750년에 왕실에서는 반 루에게 또 다른 왕의 공식 초상화를 한 점 더 그릴 것을 주문했으며, 그는 보다 전통적인 왕의 이미지를 담은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이 초상화는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진 복제품으로, 카를 반 루의 아틀이에에서 제작한 것은 분명하지만 어떤 것이 원본 작품이었는지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 초상화는 루이 14세의 다른 수많은 초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그가 입고 있는 전통적 스타일의 화려한 갑옷을 통해 중세시대의 전설적인 전쟁 영웅이었던 왕실의 선조들 및 프랑스 왕실의 수호 성인인 성 루이를 루이 15세의 이미지 속에 투영하고자 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샤를 조제프 나투아르 (1700-1777)

1750년 마리 제피린 드 프랑스의 탄생에 대한 우의화

1750년, 캔버스에 유채, 194×190cm

 

 

루이 15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는 1745년, 자신의 사촌이자 스페인의 공주인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와 혼인햇다. 하지만 이듬해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1747년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딸 마리 조제프 드 삭스 공주와 재혼했다. 새로운 앙세자비는 몇 차례의 유산 끝에 1750년 아이를 출산했지만, 모두가 바라던 왕자가 아니라 딸이었다. 이렇게 태어난 마리 제피린은 궁정에서 '마담 프티트'라고 불렸지만 생후 5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이의 탄생과 관련된 역사화는 우의화로 제작하는 전통에 따라 이 작품 역시 우의적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프랑스를 상징하는 여성이 백합꽃 무늬가 수놓아진 망토를 두른채 결혼의 신 히멘의 팔에서 어린 공주를 건네 받고 있으며 출산의 여신 주노(헤라)와 그녀의 전령사인 여신 이리스가 그 모습을 따스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한편 소문의 여신 파마는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알리기 위해 트럼펫을 불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프랑스의 용맹한 기상을 상징하는 기사가 그려져 있다. 오른쪽 전경에는 센 강을 상징하는 여성이 항아리에 기대고 누워 강이 지나는 지역에서 수확된 듯한 과일을 선물하고 있으며, 그 곁에는 마른강을 상징하는 여성의 모습도 보인다. 그 왼쪽에는 한 아기 요정이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으며, 그 왼편의 두 정령은 프랑스와 폴란드의 연합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진 방패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후경의 오른쪽에는 왕국의 수도를 상징하는 튈르리 궁이 그려져 있고, 그 앞에는 프랑스 국민들이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며 아이의 탄생을 기뻐하고 있다. 나투아르는 왕실에 태어날 아이가 왕자일 것이라 속단하고 그림 속의 아이를 남자아이로 표현했다가 공주 탄생 소식에 여자아이로 수정했고, 1750년 9월 2일 이 작품을 베르사이유 궁에 선보였다.

 

 





루이 토케 (1696-1772)아벨 프랑수아 푸아송 드 방디에르,마리나 후작 (1727-1772) 1755년, 캔버스에 유채, 135×104cm


마리니 후작은 누이인 퐁파두르 부인이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어 총애를 받게 된 1745년 이후로 각종 특권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실ㅈ로 루이 15세는 열여덟 살이었던 그를 당시 궁전 관리부의 총감직ㅇ르 맡고 있었던 랴를 푸랑수아 폴 르노르망 드 투르넴의 후임자로 일찍부터 지명하기도 했다. 웅장한 궁전을 떠올리게 하는 실내장식을 배경으로, 수단으로 짠 조끼 위에 모피로 가장자리를 두른 푸른색 비단 ㅂ레벳의 외투를 걸치고 왼쪽 가슴에는 성령 기사단으 십자가를 부착하는 등, 일종의 대례복 차림을 하고 있다.

 

 





장 마르샬 르레두 (1711년경-1795)대관식 복장을 입은 루이 15세 (1710-1744) 1763년, 캔버스에 유채, 277×195cm

 

 

1759년, 궁전 관리부 총감은 카를 반 루가 1750년에 그렸던 루이 15세의 초상화를 교체하기 위하여 그의 조카인 루이 미셀 반 루에게 새로운 초상화를 의뢰하였다. 당시 7년 전쟁에서 패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새로운 초상화에서는 전쟁을 진두 지휘하는

왕의 모습 대신, 대례복을 입고 군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것이다.

 

 

 

 

 

피에르 고베르 (1662-1744)

루이즈 엘리자베스 드 프랑스 (1727-1759)와

앙리에트 드 프랑스(1727-1752)

1730-1732년경, 캔버스에 유채, 108×88cm

 

 

 

루이 15세는 마리 레슈친그카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첫째가 1727년 8월 14일 베르사이유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 루이즈 엘리자베스(엘리자베스 공주)와 안 앙리에트(앙리에트 공주)였다. 둘 중에서 언니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스페인 왕 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르네시오 왕비의 막내 아들이자 엘리자베스 본인과는 오촌 지간이 되는 파르마 공 펠리페 데 보르본(1720-1765)과 1739년에 결혼했다.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에서 태어난 여러 딸들 중에서 유일하게 결혼을 했던 그녀는 1749년부터 파르마에서 살다가 1757년에 베르사이유로 돌아왔는데, 결국 파르마 공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2년 후인 1759년 12월에 베르사이유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한편,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지만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앙리에트 공주는 1752년 2월에 베르사이유에서 눈을 감았고, 궁정 전체가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매력적인 초상화는 이 둘의 여동생이자 '마담 트루아지엠(셋째 공주)'로 불렸던 마리 루이즈(1728-1733)의 초상화와 한 쌍을 이루는 작품으로, 루이 14세 통치 말기와 루이 15세 통치 초기에 궁정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초상화가인 피에르 고베르가 그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아델라이드 공주

1745년 이후, 캔버스에 유채, 104×141cm

 

 

 

1732년,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다.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는 여덟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죽었고 아델라이드 공주의 여자 형제들은 1727년에 태어난 장녀 엘리자베스 공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아델라이드 공주 또한 결혼을 하지 않고 아버지 루이 15세와 함께 베르사이유에서 생활했으며, 루이 15세가 서거하고 조카인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도 궁전을 떠나지 않았다. 1745년, 루이 15세는 슈아지 성의 침실 문 위쪽 벽을 장식하기 위하여 장 마르크 나티에로 하여금 그때까지 자신과 함께 베르사이유에 살고 있었던 두 딸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는데, 그때 제작된 초상화가 바로 엘리자베스 공주의 쌍둥ㄷ이 자매인 앙리에트와 아델라이드 공주의 초상화이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1739년에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와 결혼하여 프랑스를 떠났고, 다른 자매들은 1738년부터 퐁트브로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베르사이유에 남아 있었던 루이 15세이 딸들은 이 두 사람뿐이었다. 작가는 앙리에트를 꽃의 여신 플로라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그림 속 아델라이드 공주는 동물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한쪽 어깨를 드너낸 채 한 손에는 활을 들고, 또 다른 손으로는 화살통에서 화살을 하나 뽑아내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를 나타내는 전통적인 상징을 갖추고 있다. 모델을 신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처음에는 우의적인 의미를 많이 내포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인물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초상화를 그릴 당시 겨우 13살에 불과했던 어린 아델라이드 공주를 독립적ㅇ고 대담한 이미지를 가진 사냥의 여신 아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녀의 미모뿐만 아니라 확고한 성격 또한 잘 드러내고 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의 1748년 초상

1762년, 캔버스에 유채, 146×113cm

 

 

 

1725년에 루이 15세와 결혼하여 왕비가 된 마리 레슈친스카는 42세가 되던 해인 1748년에 장 마르크 나티에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주문했다.

당시에 나티에는 국왕 부처 및 공주들의초상화를 여러 점 제작하면서 그 실력을 인정 받았던 대표적 화가였다. 1748년에 살롱에 전시된 이 초상화에서 레슈친스카 왕비는 대례복이 아닌 평범한 복장을 한 모습으로 수수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가 직접 요청한 것이라고 한다. 부산스러운 궁정을 벗어나서 조용한 곳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은 마음을 이런 방식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작품이 왕비의 실제 모습과 대단히 닮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으면서도, 왕비의 모습을 너무 소박하게 그렸다는 점에 대해서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왕실 사람임을 알려 주는 모티프는 안락의자의 등받이에 보일 듯 말 듯하게 그려진 몇 개의 백합 문양뿐이다. 이후로 나티에가 아닌 다른 어떤 화가에게도 초상화를 의뢰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나티에에게 이와 동일한 작품을 여러 점 복제할 것을 지시하엿고, 그렇게 복제된 작품즐을 궁정 대신들의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로 선물하기도 했으며, 판화로 제작핧 것을 명하기도 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

퐁트브로 수도원의 루이즈 공주

1748년, 캔버스에 유채, 82×66cm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 사이에는 딸이 여덟 명이나 있어서 1738년 국왕 부처는 제일 어린 네 명의 딸들을 퐁트브로 수도원으로 보내기도 결정한다. 공주들이 베르사이유 궁에 머무는 비용이 너무 큰 탓이었는데, 실제로 공주들은 각자 여러 명의 하인들를 두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퐁트브로 수도원의 수녀원장에게 맡겨진 어린 공주들은 무용과 음악 교육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하지만 국왕 부처는 단 한번도 공주들을 찾아오지 않았고, 빅투아르 공주는 열 살, 소피아 루이즈 공주는 열두 살이 되어서야 부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펠리시테 공주는 끝내 부모를 보지 못하고 1744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마음으로는 늘 딸들을 잊지 않고 있었던 루이 15세는 1747년에 장 마르크 나티에를 수도원으로 보내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특히 성장한 딸들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로 아내 레슈친스카를 기쁘게 해 주고자 했던 그는 이 일을 모두 비밀리에 진행했다. 딸들의 초상화를 보고 매료되었던 왕비는 자신의 초상화도 그려줄 것을 주문했을 정도였다고. 이 작품으 나티에가 그린 그림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루이즈 공주를 그린 것으로,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그녀는 겨우 열 살이었다. 상상 속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녀는 실제로 퐁트브로 수도원에서는 입지 않았을 호화로운 궁정 복장을 하고 손에는 작은 꽃바구니를 들고 있다. 루이즈 공주는 열세 살 때 베르사이유로 돌아왔고, 1770년 이후부터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여 종교 활동에만 매진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이사벨라 드 보르본 파르마 공주 (1741-1763) 1749년, 캔버스에 유채, 158×115cm


1741년 12월 31일 스페인 궁정에서 태어난 이사베라 드 보르본 파르마는 루이 15세의 손녀이다. 1727년에 루이 15세의 장녀로 태어난 엘리자베스 공주는 열두 살 때 루이 14세이 손자이자 스페인의 왕으로 등극한 펠리페 5세의 아들인 펠리페 드 보르본 왕자와 결혼하여 인판타, 즉 스페인의 공녀가 되었고 불과 열네 살의 나이에 이사벨라를 낳았다. 1748년에 펠리페 왕자는 파르마 공작이 되었고, 가족들과 함께 모두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이 작품은 이사벨라와 엘리자베스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베르사이유에서 지낸 몇 달 동안 장 마르크 나티에가 그린 것이다. 당시 나티에는 루이 15세의 딸들과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의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작품 속 파르마 공주는 당시 일곱 살이었지만, 붉은 명주실과 금실로 자수가 놓여진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어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드레스 밑에 입은 '파니에'로 인해 한껏 부풀려진 드레스 덕분에 그녀의 태도는 사뭇 딱딱해 보인다. 나이에 어울리게 묘사된 부분은 매우 섬세하게 표현된 얼굴 뿐이다. 이사벨라는 1760년에 오스트리아 제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자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이며 훗날 요제프 2세로 황제에 등극하는 요제프 황태자와 결혼했으나, 비엔나로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1763년에 요절했기 때문에 황후가 되지는 못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왕세자비 마리 조제프 드 삭스 (1731-1767) 1751년, 캔버스에 유채, 113×105cm



루이 15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는 1745년 2월에 스페인의 마리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와 결혼했으나, 그 이듬해인 1746년 7월에 아내가 첫 딸을 낳고 며칠 후에 숨을 거뒀고 이때 태어난 딸마저 두 돌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더났다. 그는 1747년 2월에 마리 조제프 드 삭스와 재혼을 했다. 새로운 앙세자비가 된 마리 조제프 드 삭스는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딸로, 열여섯의 나이에 베르사이유 궁에 입성했다.드레스덴 궁정에 있던 프랑스 대사는 그녀가 프랑스로 오기 얼마 전에 그녀의 용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녀는 금발머리와 생기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의 크고 푸른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재기 발랄한 느낌을 주는 외모이죠.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귀여운 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왕세자비의 공식 초상화가 갖춰야 할 면모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그녀는 자수가 놓인 화려한 궁정 예복을 입고 손에는 부채를 들고 있으며, 담비 털이 둘러져 있고 프랑스 왕실의 상징인 백합꽃으로 장식된 푸른 벨벳 망토를 둘러 왕실 사람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당시의 유행에 따라 머리에는 화장 가루를 뿌렸고, 뺨에는 붉은 연지를 발랐다. 1765년에 남편인 왕세자 루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가지 그녀는 늘 이렇게 단장을 했다. 이 초상화는 1751년 살롱에 전시되었는데, 당시는그녀가 새로운 왕위 계승자인 부르고뉴 공작을 낳아 궁정에서의 지위가 확고해진 시기였다. 그녀 본인은 이 초상화가 자신의 실제 모습과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러 차례 모사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매듭을 만들고 있는 아델라이드 공주 1756년, 캔버스에 유채, 89×77cm


1750년대에 들어서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의 넷째 딸인 아델라이드 공주는 그녀가 평소 바랐던 대로 국왕인 아버지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녀는 베르사이유 궁 2층에 있는 왕의 침실과 매우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냈다. 특히 왕세자인 오빠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뿐만 아니라 왕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게 된 그녀는 궁에서 공식적인 실세가 되었다. 스물 네 살의 아델라이드 공주가 매듭 짓기를 하고 있다. 그림 속 공주는 평범한 놀이를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엄청난 힘이 뿜어져 나오는 모습이다. 흔들림 없는 시선에서 그녀의 강인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루이 조제프 자비에 드 프랑스,부르고뉴 공작 (1751-1761) 1754년, 캔버스에 유채, 130×97.5cm


루이 조제프 자비에 드 프랑스는 1751년 9월 13일, 루이 15세의 아들인 왕세자 루이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 조제프 드 삭스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왕권은 오로지 남자만이 계승할 수 있었기에, 그의 탄생은 왕실의 영속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751년에 이미 그의 어머니인 마리 조제프 드 삭스 왕세자비와 1750년에 태어난 공주의 초상화를 그려 그 실력을 인정 받았던 장 마르크 나티에는 왕세자 탄생을 기념하기 위한 목적으로 1754년에 이 작품의 제작을 의뢰 받게 되었다. 약간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향해 서 있는 왕자는 일곱 번째 생일을 맞을 때까지 남자 아이에게 여자 아이의 옷을 입혔던 당시 궁정의 관례에 따라 담비 털로 장식된 푸른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다. 당시에 일곱 살이 되지 않은 남자 아이들의 양육은 전적으로 여자들에게 맡겨졌으며, 특히 베르사이유 궁에서는 왕실에서 태어난 남자 아이들을 《왕실 아이들의 거처》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루이 조제프는 7살이 되던 날, '브르고뉴 공작'이라는 정식 칭호를 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자신의 성별에 맞는 남자 옷을 입기 시작했으며, 교육을 담당할 가정교사를 배정 받게 되었다. 그러나 부륵고뉴 공작은 불과 아홉 살 때 나무로 만든 장난감 말에서 떨어져 죽고 말았다. 따라서 왕위는 그의 동생인 베리 공작이 계승하게 되었고 후일 그가 왕위에 올라 루이 16세가 되었다.

 





프랑수아 르투트르 (1712-1784)화려한 장식틀이 있는 추시계 1758년, 금 도금된 청동, 황동, 유리, 에나멜, 78×37cm

 

이 벽걸이용 시계는 로코코 양식 작품의 수작(秀作)으로, 몸체는 꽃 넝쿨로 꾸며져 있고 꼭대기에는 터키 식 터번을 두른 아이가 장식되어 있으며, 비대칭적인 좌우의 곡선이 마치 작품 전체를 휘감아 도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다. 프랑수아 르루트르는 1741년 파리에서 시계 제조 분야의 장인 지위를 수여 받은 이래로 《무늬 플레지르》라는 궁정 기관에서 일하면서 전성기를 보냈다. 이 시계는 다른 추시계 두 점과 함께 1758년에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 자비에(1751-1761)의 처소를 꾸미기 위해 제작된 작품으로 공작의 침실에 설치되었었다.

 

 

 

 

 

 

프랑수아 위베르 드루에 (1727-1775)

루이 15세의 손자 랴를 필비 드 프랑스,

아르투아 백작(1757-1836)과 그의 누이 마리

아델라이드 크로틸드 드 프랑스 (1759-1802)

1763-1764년, 캔버스에 유채, 129.5×9*7.5cm

 

 

1757년, 루이 15세이 아들인 루이 페르낭 왕세자 부부의 셋째와 넷째 아들이자 훗날 각각 루이 16세와 루이 18세가 되는 베리 공작과 프로방스 백작을 하나의 화폭에 담은 초상화를 제작했던 프랑수아 위베르 두루에는 그로부터 5년 후에는 그 두 왕자의 동생이자 훗날 샤를 10세가 되는 맏이이자 후에 피에몬테-사르데냐의 왕비가 되는 클로틸드 공주를 담은 초상화도 제작하게 되었다. 작품 속의 어린 왕자와 공주는 목에 리본을 단 숫염소를 타고 천진하게 놀고 있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궁정 예복으로 인해 제법 격식을 갖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알렉상드르 로슬랭 (1718-1793)

왕세자 루이 드 프랑스 (1729-1765)

1767년, 캔버스에 유채, 121×86cm

 

 

왕세자 루이드 프랑스는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아이에서 태어난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성년이 될 때까지 생존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와 엘리사베타 파네시오 사이에서 태어난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와 1745년에 결혼했짐나, 아내는 이듬해에 딸을 낳은 후 숨을 거두고 말았고 그때 태어난  딸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1747년에 결혼했지만, 아내는 이듬해에 딸을 낳은 후 숨을 거두고 말았고 그때 태어난 딸마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는 1747년에 폴란드의 오아이자 선제후 아우구스트 3세의 딸인

 작센의 공주 마리 조제프 드 삭스와 재혼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게 되었는데 그 중 아들 셋은 훗날 루이 16세(재위 1774-1792년), 루이 18세(재위 1814/1815-1830년)가 되어 프랑스를 통치하게 됐다.1765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왕세자 루이를 프랑스 기병대 중 하나인 용기병의 제복을 입은 모습으로 표현한 초상화이다. 로슬랭은 원래 모리스 캉탱 드 라투르가 파스텔화로 제작했던 초상화를 토대로 하여 왕세자의 얼굴을 그릴 예정이었지만, 당시 왕세자의 얼굴을 그릴 예정이었지만, 당시 황세자가 폐병 때문에 캉탱 드 라 투르의 초상화 속 얼굴과 달리 무척 수척해지게 되었고, 이에 왕세자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리도록 하기 위하여 로슬랭에게 다시금 포즈를 취해 주었다. 결국 왕세자 루이는 폐병을 이기지 못하고 같은 해 말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고블랭 왕립 제조소

프랑스 왕실 문장이 들어 있는 새로운 휘장

(두 번째 모델)

1732-1740년경, 양모와 명주로 짠 테피스트리. 355×275cm

 

 

샤를 르 브룅이 밑그림을 그리고 고블랭 앙립 직물 제조소에서 제작한 프랑스 왕실의 휘장은 무려 70년이나 사용되었다.

이후 1727년에는 이를 교체하기 위하여 프랑스 왕실 문장이 담긴 새로운 휘장의 모델 제작이 시작되었다. 이에 피에르 조스 페로는 1732년에 트롱프뢰유 효과가 강조된 새로운 휘장의 밑그림을 그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 왕실의 두번째 휘장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휘장의 디자인은 르 브룅의 것에 비해 단순해졌다. 이렇듯 새로 제작된 휘장은 미우 다채로우면서도 명료한 구성 속에 왕실의 다양한 상징물들을 담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요소들은 왕실의 초상화에 사용되는 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그려진 액자틀로 감싸져 있다. 전체적으로 왕의 공식 초상화 양식과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또한 다양한 건축적 요소들을 감싸고 있는 꽃 넝쿨 장식을 사용함으로써 왕실의 문양과 상징물들이 갖는 엄격한 정치적 느낌을 순화하고 있다. 이 밑그림을 사용한 휘장은 모두 스물여덟 점이 제작되었고, 프랑스 왕실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을서 왕실의 여러 거처나 대사관에 배치되었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는 베르사이유 궁전의 《앙티샹브르 드 뢰유-드-뵈프(둥근 천장창이 있는 대기실》

에도 이 휘장 세 점이 걸려 있었다.

 

 

 

 

 

 

프랑수아 데포르트 (1661-1743)

일곱 여덟 마리의 사냥개들에 포획된 사슴

1729년, 캔버스에 유채, 102×135cm

 

 

1729년, 궁전 관리부의 총감이었던 양탱 공작은 당시 열아홉 살이었던 루이 15세를 위한 개인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사슴 정원》이 있는 궁전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는 궁전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는 공간의 대대적인 보수를 지시했다. 그곳은 1726년에 오래된 '망사르드 지붕'을 개조하여 궁정 요리 연구실로 사용되었다가 1728년에는 다시 간단한 보수를 통해 조류 사육장으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이 방의 장식을 위하여 제작한 네 점의 사냥을 주제로한 그림이 그려지게 된 것이다.

 





(上)파리  퐁-오-슈 제조소 (추정)루이 15세의 흉상 1745-1760년경, 납 성분의 유약을 바른 자기. 51.2×26.5×25cm

(下)파리-퐁-오-슈 제조소 (추정)마리 레슈친스카의 흉상 1745-1760년경, 납 성분의 유약을 바른 자기. 51.5×24.2×18.5cm


루이 15세와 그의 부인인 마리 레슈친스카 왕비의 모습을 표현한 이 흉상들은 인물을 표현한 부분과 받침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인물상의 아래 부분이 피라미드 형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것을 받침대의 정사각형 틀 속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제작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조각상을 제작하면 상황이나 장소에 따라서 받침대를 바꾸어 설치할 수 있으며, 특히 상당히 규모가 큰 작품들을 제작할 때에는 기술적으로도 편리했기 때문에 권장되었다. 루이 15세이 흉상은 1732년부터 그가 서거한 1774년까지 왕의 전담 조각가로 활동하며 매년 두세 개의 흉상을 제작했던 장 바티스트 르 무안 2세(1704-1778)의 청동 흉상들 중 하나의 본을 따서 제작된 것이다. 이에 반해 마리 레슈친슨카의 흉상은 어떤 작품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장 마르크 나티에 (1685-1766)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된 퐁파두르 부인 1746년, 캔버스에 유채, 101×82cm


평민 가정에서 태어난 잔 앙투아네트 르 노르망 데티올은 자신의 가족과 가까이 지내던 부유한 농장주의 조카인 샤를 푸랑수아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1745년 2월에 스물 셋의 아이로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고 같은 해 7월에는 관례에 따라 입궁 자격을 얻기 위해 귀족 작위를 받았으며, 마침내 9월에 베르사이유의 한 공간에 거처를 마련하게 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루이 15세는 퐁파두르 후작부인이 된 자신의 정부를 위해 궁정 초상화에 사용했던 방색대로, 퐁파두르 부인을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국왕의 정부로 실세를 누리게 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1751년에 자신의 동생을 궁전 관리부의 총감으로 임명하여 왕의 예술 관련 정책들을 일임했고, 이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 작품을 동생에게 선물했다. 또한 궁정 내에서 미술 후원가이자 수집가로 명성을  떨쳤으며, 루이 15세의 예술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연인 관계는 1752년에 끝났지만, 그녀는 1764년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루이 15세가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구로 남아 있었다.

 





니콜라 키니베르 폴리오 (1706-1776)퐁파두르 부인의 처소를 위해 제작된 의자 1757-1760년경, 조각괸 나무에 채색, 96×55×61.2cm


파리와 베르사이유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벨뷔성은 1748년부터 1751년 사이에 퐁파두르 부인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다.넓게 펼쳐진 센 강변의 풍경을 따라 파리까지 내려다 보이도록 세워진 이 성은 베르사이유의 위성 거처들 중 가장 세련된건물에 속한다. 비교적 크기가 작은 이 성의 1층에는 접견 및 사교 모임의 용도로 사용된 방들과 퐁파두르 부인을 위한 처소가,그리고 2층에는 왕의 처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지붕 아래층에는 성에 초대된 영주들을 위한 처소들이 마련되어 있었다.퐁파두르 후작부인의 처소는 터키 풍의 침실로 유명했으며, 특히 화가 키를 반 루가 그린 동양적 주제의 회화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루이 16세는 1774년에 고모들인 아델라이드 공주 및 빅투아르 공주 그리고 소피 공주에게 벨뷔 성을 하사하여 자적인 거처로 사용하도록 했는데, 그때 이 의자들은 비투아르 공주의 서재에 자리하게 되었다.

 





랴를 파로셀 (1688-1752)말을 타고 지나가는 근위병들이 있는 국왕 근위연대의 훈련장 1744년, 캔버스에 유채, 154×139cm




샤를 파로센장군과 여러 명의 장교들이 참여한 군사 회의 1744년, 켄버스에 유채, 154×139cm


1729년에 태어난 왕세자 루이는 여섯 살까지 베르사이유 궁전 남쪽 날개관에 있는 《왕실 아이들의 거처》에서 왕비를 비롯한 궁정 여인들의 보살핌을 받다가, 일곱 살이 되던 1736년부터는 궁전 중앙 건물의 1층, 왕비의 처소 바로 아래에 위치한 왕의 장남만이 사용할 수 있는 거처로 옮겨, 장관 대신들로부터 왕세자로서의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세로운 왕세자를 맞이하기 위하여, 궁정에서는 오래된 이 거처의 정비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1744년에는 화가 사를 파로셀에게 출입문의 상단부를 장식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이때 제작된 작품은 마치 미래에 주어질 책무에 대한 왕세자의 마음가짐을 다져두기라도 하려는 듯 군사적인 주제를 담게 되었는데, 실제로 왕세자 루이는 그 이듬해에 아버지 루이 15세와 함께 퐁트누아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첫 전투를 경험하게 되었다. 파로셀은 루이 14세를 위해 베르사이유 궁전 및 마를리 성에서 일했던 화가 조제프 파로셀의 아들이었으며, 화가가 되기 전에 군에서 복무했던 경험을 살려 전쟁화를 전문적으로 그리게 되었다.




장 바티스트 마리 피에르 (1714-1789)포도 수확, 또는 바쿠스 신의 승리 1768년, 캔버스에 유채, 277×255cm


루이 15세가 정부인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위하여 짓기 시작한 프티 트리아농이 완성되어 갈 무렵인 1768년, 왕립 회화 · 조각 아카데미 소속의 화가들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속 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프티 트리아농의 여러 방과 식당을 장식할 작품 제작을 의뢰 받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작업은 장기간 지체되었고, 결국 이 작품들은 1774년에 루이 15세가 서거하고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른 후에야 완성되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첫 포도 수확 및 포도주의 발명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작품의 전경에는 관능미가 물씬 풍기는 바쿠스 신의 여사제들이 사티로스가 수확ㄷ해 온 포도를 받아 즙을 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피에르의 예술 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작품으로, 로코코 양식의 우아함과 당시 새롭게 대두된 고전주의 양식의 엄격함이 어우러져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세브르 왕립 제조소하늘색 리본 장식이 그려져 있는뒤바르 부인의 식기 세트 1769-1770년, 유약을 바르고 금을 입힌 도자기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뒤바리 부인은 상당한 수의 도자기 세트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세트들은 구성품의 수가 적을수록 값이 비쌌다.그녀가 베르사이유 궁에서 주로 사용했던 도자기 세트는 1769년에 그녀의 대신인 장 바티스트 뷔포를 통해 입수한 것으로, 이 식기들의 중앙에는 장미꽂과 그것을 둘러싼 꽃 화환이 그려져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푸른색 리본과 꽃넝쿨 장식이 서로 얽혀 있는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이전의 도자기 들에는 표면 전체에 색이 칠해져 있었지만, 이 도자기 세트는 특히 그릇의 이벽에서 무엇보다도 도자기 본래의 흰색이 돋보이도록 장식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당시의 도자기 제조 기술이 한 단계 진화했음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만큼 가격 또한 매우 비쌌는데, 뒤바리 부인이 이전에 구매했던 보다 소박한 디자인의 도자기 가격이 개당 12리브르였던 것에 반해, 이 셋트는 개당 42리브르였다고.




로크레 지조소 (추정)플로라 여신의 모습으로 표현된 뒤바리 부인 1770-1775녀경,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자기.38.5×20.7×14.5cm


뒤바리 부인(1743-1793)은 루이 15세의 마지막 정부였다. 그녀는 원래 '잔 베퀴'라는 이름을 가진 평민 출신이 여성이었지만, 좋은 교육을 받은 덕분에 한 징세 청부업자이 미망인의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미모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은 파리의 저명 인사인 장 바티스트 뷔포가 소유하고 있던 명성 높은 의상실에서 판매원으로 일을 하면서부터였고, 그때부터 초대를 받아 여러 살롱에 출입을 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는 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던 뷔포 부인의 살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잔 베퀴는 이곳에서 장 뒤바리의 눈에 띄게 되었다. 이 미모의 여성을 이용하여 왕과 정부 대신들로부터 잇속을 차릴 계획을 세운 그는 루이 15세의 눈에 띄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왕의 관심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귀족의 작위가 없으면 궁에 출입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툴루즈 지방의 소귀족이었던 장 뒤바리는 그녀를 자신의 친형인 기욤과 결혼시켰고, 이 결혼을 통해 '뒤바리 백작부인'이 된 잔 제퀴는 1769년 4월 22일에 공식적으로 궁정에 데뷔할 수 있었다.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의 전 정부였던 퐁파두르 후작부인과 마찬가지로 미술 후원가로서의 역할은 하고자 했지만, 정치적으로는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당시 그녀의 궁전에서의 위치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는데, 특히 왕실 일가의 공식 화가인 프랑수아 위베르 두루에와 공식 조각가 오귀스탱 파주에게 자신의 초상 작품들을 주문하여 제작한 것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세브르 왕립 제조소뒤바리 부인의 푸아리에 펜꽂이 1770년경,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에 금 도금.8.3×17.5×1.17cm


잡화상이었던 시몽 필립 푸아리에(1720-1785)는 1770년 12월 18일에 뒤바리 부인이 베르사이유 궁의 처소에서 사용할 '작은 수레국화 장식에, 위아래의 청동 틀에는 금가루를 입힌, 프랑스 자기로 만든 작은 크기의 휴대용 펜꽂이'를 가져와 그녀에게 팔았는데, 그 가격은 192리브르에 베르사이유까지의 운송료가 6리브르 였다고 한다. 푸아리에는 자기를 이용한 이런 형태의 물품들을 최초로 고안했던 인물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세브르 제조소의 장부에도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는 다양한 형태로 도자기판을 잘라낸 뒤, 베르나르 반 리젠부르와 로제 반 데르 크뤼즈와 같은 유능한 청동 조각가와 가구 제조인이 만든 가구에 이 도자기 장식을 접목시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자기 제품을 만들었다. 뒤바르 부인게게 이 펜꽂이를 가져가기 5일 전에도 그는 그녀에게 1,800리브르짜리 '목색 바탕에 꽃무늬로 이루어진 원형 장식이 표현되어 있고, 청동에 금가루를 입혀 호화롭게 장식한 프랑스 자기로 만든 함과 그 받침대'를 가져다 팔기도 했다.(뉴욕메트폴리탄 미술관 소장)
인용서적 / 『프랑스 국립 베르사이유 특별전 』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화 1 <행복소망>  (0) 2019.03.18
루이 16세의 집권,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  (0) 2019.03.13
루이 14세, 그 찬란한 시기  (0) 2019.03.11
일본의 장황(粧潢)  (0) 2019.03.10
중국의 장황(粧潢)  (0) 2019.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