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628) 썸네일형 리스트형 면앙정 十年을 經營ᄒᆞ여 草廬 三間 지여내니나 ᄒᆞᆫ 간 ᄃᆞᆯ ᄒᆞᆫ 간에 淸風 ᄒᆞᆫ 간 맛져 두고江山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십년을 계획하여 초가삼간을 지어 내니나 한 칸, 달 한 칸, 청풍 한 칸 맡겨 두고강산은 들일 곳 없으니 (병풍처럼)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의 가치관과 면앙정을 지은 까닭을 이 한 편의 시에서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1524년 이 정자 지을 땅을 구입하여 십년의 준비 끝에 면앙정을 세운 것이다.지금의 면앙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한 칸 방을 들이고 나머지는 마루 형태다.내가 한 칸, 달이 한 칸, 바람이 한 칸을 차지하고 강산은 발치 아래 두고 감상하겠노라 했다. 넉넉하고 투명한 풍류이자 가히 낭만의 최정상이 아닐런지... 표문(表文)송순의 과거시.. 고택과 사람들 창평 장전마을 앞 동산 위에 자리한 석전 이최선이 세운 문일정(聞一亭) 석전 이최선이 쓴 '문일정聞一亭' 편액이최선의 스승 노사 기정진이 쓴 편액석전 선생은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담양 창평 장전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조선 성리학 6대가 노사 기정진의 애제자로, 조선말 나라가 위태롭자 '삼정책'을 지어 나라를 바로잡고자 했으며 외세에 맞서의병을 모아 나라를 지키고자 했고, 가뭄에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도 힘썼다.한편 석전의 아들은 청고(靑皐) 이승학, 손자는 옥산(玉山) 이광수 이며이들은 3대에 걸쳐 애국애족, 의병활동에 참가했다.문일정 바로 뒷편에 자리한 이규형의 묘소양녕대군 15대손인 그는 이곳에서 강학을 했다고. 그의 후손 이최선의 일가 자제는 훗날 나라의 독립과 문화, 그리고 학문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학봉 고인후 / 녹천 고광순 이라는 편액이 내걸린 창평 면사무소본디 창평군이었던 것을 일제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명목으로 일부 면은 광주, 곡성으로 떼어주고12개 면을 담양군으로 흡수해 오늘의 창평면이 된 것으로, 그렇게 조각낸데는 임란과 의병활동으로기세가 높았던 창평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해석이 주를 이룬다고.전라도 순찰사巡察使(관찰사) 이서구李書九(1754~1825)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비석 뒤의 글은 마모돼 판독이 불가인데, 기록으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서구는 전라도 관찰사만 두 번을 지낸 인물.호남 지방에는 유독 이서구에 관한 각종 설화와 미담이 많이 전해진다.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의 후손으로 실학자인 연암燕巖 박지원 朴趾源(1737~1805)에게 학문을 수학했다. 창평 월봉산 자락 유천柳川마을에 장대하게 선 의병.. 정송강 소고 이른 아침, 담양 고서면 소재 소나무가 도열한 '송강정' 돌계단을 오릅니다.1562년, 스물일곱의 정철은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으로 나아간다.당시 붕당이 치열했던 명종과 선조 연간이었지만 정철은 비교적 승승장구하면서도 번번이 탄핵과 파직으로권력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담양으로 내려온다.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낙향을 거듭한 것. 1854년 49세에는 대사헌의 직위에 올라 선조의 총애를 받게된다.허나 서인의 영수였던 정철은 율곡이 타계(1584)한 이후 동인의 탄핵을 받는다.1585년 50세에 그는 네 번째 낙향하여 1589년까지 5년 동안 칩거하게 된다.송강 정철의 시문집 遺稿>'가사문학관'에 전시된 1585(선조 18)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창평에서 4년 동안 지내면서, 임금을 그리는.. 담양 서편제 판소리 유적 답사 담양 수북면사무소 앞에 자리한 이 비는 1978년 전남지사였던 전석홍 시절 대방리 청소년수련원 초입에 세웠다는 사진을 보고병풍산 자락을 여기저기 헤메다가 결국은 수북면사무소 앞으로 옮겼음을 알게 되었다. 1940년 출간한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는 이날치(1820~1892)의 수리성(거칠고 탁한 소리)은성량이 거대하여 중 신관 사또 부임 대목에서 나팔 소리를 흉내 내면 실물 나팔 소리와구분이 안 되고, 그가 '뎅뎅'하고 인경 소리를 내면 실제 인경 소리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고 전한다.애원과 한탄으로 청중의 한숨과 눈물을 자아내게 하다가도 해학과 골계로 포복절도케 하는소리와 발림을 보면 천하장관이었다고. 처음에는 빠른 몸동작으로 줄타기에 소질을 보여 '날치'라는 예명을 얻게 되었는데줄타기 명수로 만.. 앙리 마티스 "창조란 우리 안의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창조를 위한 노력은 마땅히 내면에서 나와야 한다.물론 외부에서 가져온 것으로 자신의 감정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앙리 마티스-1948년, 캔버스에 유채, 146×97cm, 파리 국립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1912, 캔버스에 유채, 190.5×114.5cm, 모스크바, 푸시킨 미술관 예술가로서의 마티스의 삶은 자유에 대한 경이로운 탐구였다.그의 인생 역정은 첩첩이 난관에 쌓인 가시덤불이었고 위험한 선택으로 가득했으나동시에 매우 아름다운 깨달음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말과 인터뷰덕분에 우리는 세상 곳곳을 '여행한 이의 몽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앙리 마티스는 1869년 12월 31일, 외가가 있던 프랑스 북부의 섬유 .. 장성호 수변 右 숲속길 제방에 올라 바라본 장성호반 수문 아랫쪽까지 수위가 내려간 경우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수변 右측 길을 걸어 본지가 몇 년이 흘렀는지.... 얼마 전에 걸었던 반대편 쪽 출렁다리가 눈에 들어 오고... 간간히 흙길도 걷게 된다. 예전엔 볼 수 없었던 건물도 보이고... 개인 별장으로 보인다. 예전엔 볼 수 없었던 데크 시설물도 보이고... 건너편은 수변 左길의 두 번째 출렁다리이다. 호수 멀리로 남창골 가인봉이 눈에 들어 온다. 간간히 시설되어 있는 데크 광장. 거의 막바지 데크 광장엔 나뭇잎과 가지 등이 어수선하게 널려있고... 요트와 각종 보트가 물살을 가르는 모습. 수변 右길의 마지막 데크에서... 되돌아 가는 길. 웬 낚시꾼이 약 50여 센티미터 쯤으로 보이는 베스를 막 잡아 올리.. 장성호 수변 左 출렁길 장성호長城湖 영산강의 지류인 황룡강 상류계에 있는 인공호수이다. 장성호는 영산강유역 종합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1976년 9월 장성읍 용강리에 높이 36m, 길이 603m, 총저수용량 8,970만t에 이르는 장성댐이 건설되었다.2014년에 2m 높이기 사업으로 높이 38m, 제방 길이 620m, 총저수용량 103,883천t으로 확장되었다. 전체 유역면적은 12,280ha으로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까지 뻗어있다.. 장성호 수변길은 내륙의 바다인 장성호와 숲의 정취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출렁길’ (제방 좌측길)과 ‘숲속길’ (제방 우측길)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대표 걷기 길과 전라남도 추천 관광지로 선정된 바 있다. 호숫가 가파른 절벽을 따라 세운 데크 길을 걷노라면 아름다운 탁 .. 이전 1 2 3 4 ··· 3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