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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산행·여행·풍경

시성詩聖 임백호林白湖

나주羅州 영모정永慕亭

 

 영모정 앞에 우뚝 선 선생의 기념비

 

임백호의 시심詩心을 안고 영모정 앞을 유장하게 흐르는 영산강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1987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520년(중종 15) 임붕(林鵬)이 건립한 정자로, 처음에는 임붕의 호를 따서 ‘귀래정(歸來亭)’이라

불렀으나 1555년(명종 10) 후손이 재건하면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재의 건물은 1982년 다시 중창한 것인데 건축적으로 고졸한 맛은 약하나,

영산강을 조망하며 선 주변의 팽나무와 괴목나무 등 수목이 울창하고 주변 조경이 일품이다.

 

 ‘歸來亭羅州林公鵬遺墟碑(귀래정나주임공붕유허비)’

‘白湖林悌先生紀念碑(백호임제선생기념비)’와 시비(詩碑) 등이 있으며

영모정 아래론 백호임제선생기념관이 있다.

 

정자는 구릉 위 중앙에 남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주위에 넓은 터를 닦고 수목을 둘렀다.

온돌방 1칸과 누마루 2칸으로 주위에 폐쇄적 벽과 문으로 공간을 구성하였다.

구조형식은 낮은 단층의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2m 가량 되는 긴 원형 장대석 주초를 세우고

그 위에 이보다 약간 짧은 원형 나무기둥을 세웠다.

 

 

 

전면과 우측면의 창호는 띠살창을 달았고 뒷면과 우측면 창호는

당판문(唐板門 : 마루청의 널문)을 달았으며, 하부 고맥이를 적벽돌로 치장하였다.

가구방식은 기둥머리에 간결한 들보[樑]와 도리를 걸어 결구하였는데, 중앙간에서는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치고 동자주(童子柱)와 종량을 세웠으며,

그 위에 판대공(板臺工)과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섞어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백과사전 참조)

 

 

당唐의 시인 두보를 시성詩聖이라 칭하고 쌍벽을 이루는 이태백을

시선詩仙이라 칭한다는 사실 정도는 내남 없이 잘 아는 사실.

 

그로부터 수백 년 후 이땅에 시성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이 나주에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백호 임제 선생.

 

오늘의 '영모정' 기행을 제안하신 일포 선생님께서

기념관 앞 석비를 읽어내리는 모습.

 

 

 

 

 

 

정자(正字) 임자순(林子順)에게 주다

바다를 넘는 것은 어느 날이 되시는지?

천만 기쁜 마음으로 한라산이 반만 보이는데서 대략 기술하고, 시를 읊는 곳에

응당 일념(一念)을 보내며 머무는 사이 자주 옥음(玉音)을 보내 주시오.

이것이 나의 소망이오. 공무로 바빠서 대감 앞으로 축하하는 편지는 닦아 올릴

겨를이 없다가 오늘밤에 써서 올리니 엎드려 이해해주시기 바라니 여하(如何)오?

앞서 정부(亭賦)를 보내주셨는데 현판(懸板)에 올려 영구히 전하려 하니,

모름지기 한가하실 때에 다시 다듬어 주시오.

저버리지 않으면 고맙겠소이다. 삼가 문안하외다.

 

정축년 동짓달 초하루 면앙노인(俛仰老人)

 

 

 

- 위는 56세 년하인 임백호에게 면앙정 송순 선생이 보낸 편지다.

1579년 송순의 87세 때 면앙정에서 과거 급제 61주년을 축하하는 회방연(回榜宴)이 열렸다.

그 자리에서 호조판서를 지낸 29세 년상의 이후백(李後白),  26세 년상의 박순(朴淳), 좌의정

13세 년상의 정철(鄭徹) 등 대선배들과 함께 송순선생의 가마를 멘 일화는 조선조 내내

인구에 회자되는 아름다운 풍류였다는 사실.

 

훗날 한말의 문장가 이건창(李建昌)은 면앙정을 찾아와 당시를 회상하며

금수담아아담수(今誰擔我我擔誰)'나는 누구의 가마를 메며 내 가마는 누가 메줄 것인가'

라는 시를 남긴 바 있다.

 

 

 

 

나라에서는 대곡선생, 인간으로는 박계형판서

평생의 지기셨는데 이제 다 돌아가셨으니

한강엔 슬픈 바람만 불고 종산엔 조각달만 남았습니다.

옷소매를 적시는 만줄기의 눈물 통곡을 멈추고 임지로 가옵니다.

 

 












아름다운 난간 서쪽에 푸른 수초 물결치니
한없는 이별의 정에 해는 기울도다.
방초는 어느 때나 가는 길에 다할 것인가
청산 어느 곳에 흰 구름이 많다더냐?
외로운 배는 꿈속의 푸른 바다 일이요
삼월은 안개속 궁안의 동산 꽃이로다.
동이속 술 비기 쉬우며, 사람은 흩어지기 쉬우니
들새는 원망하듯, 노래하듯 하도다.






백광훈은 임백호보다 12년 년상이었지만 친구 같은 문우로
전국 도처에 많은 화제를 남겼다.

 

 

 



























도위가 돌아보는데 갑옷을 걸쳤구나
오고가는 어지러운 산은 원근에 이었는데
말발굽에 가을 풀은 향기를 잃었구나.
갈림길에서 슬퍼함을 이상히 여기지 마오
유령산의 매화는 파발꾼이 드물다오.

 

 

 

진동부(陳同父): 송나라 문장가.  반초(班超): 서역을 정벌해 정원후(定遠侯) 벼슬을 한 후한(後韓) 사람.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지은 임정랑 묘갈문]

 

 

임정량묘갈문

 

공은 휘는 제(悌), 자는 자순(者順), 성은 임(林)씨로 나주 사람이다.

선대는 고려조에서 드러나 본조에 이르러 휘 평(枰)이 강정(康靖:성종의 시호) 때 무과로 뽑혀 근위(近衛)의 임무를

수행하고 호남 병마우후(兵馬虞候)가 됨에 탄식을 하며 이르기를 "나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성장하여 문호를

세우고 이제 3품관까지 이르렀으니 또한 족하다" 하고 드디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제사를 삼가 받들고 종족과 화목하도록 집안을 가르쳤다. 그 후로 휘 붕(鵬)이 기묘사화 때 태학(太學)의 학생들을

느리고 대궐 앞에서 지키고 다투었던 바 「기묘당적(己卯黨籍)」에 실린 사실이며, 후에 등과하여 동도윤(東都尹)

이러렀으니 휘 진(晉)을 낳았다. 무인으로 명망이 있어 영남 · 서호남 · 서북변의 5도절도사를 역임했는데 장수

노릇하며 수십 년 동안 재리를 전혀 챙기지 않아 집에 좋은 방석 하나 없었고 영변부와 탐라부에는 공의 부친의

정청비(政淸碑)가 서 있다. 모친은 남원윤씨로 좌참찬 휘 효손(孝孫)의 4세손인데 명세종 가정 28년(1549) 12월

20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타고난 재질이 절등하여 하루에 수천 언(言)을 외울 수 있고 문장이 호탕했는데 시에

특장이 있었다. 시종 만력 4년 우리 소경(昭경: 宣祖) 9년(1576) 감시(監試)에 「탕음부(蕩陰賦)」와 「유독시(留犢詩)」

를 바쳐 진사 제3인으로 뽑히고 그 이듬해 대과에 제2명으로 올랐다. 문사로서 이미 세상에 이름이 날로 높아졌는데

그 당시 동서 붕당의 의론이 일어나 선비들은 며예로 다투며 서로 추켜세우고 끌어들이고 하였다.

공은 자유분방하여 무리에서 초탈한데다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은 까닭으로 벼슬이 현달하질 못했다.

당시 당로의 어떤 사람이 의론을 견지하길 좋아하여 능히 남을 잘되게 하고 못되게 하고 하는 일이 많았다. 공은

그의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를 않고 하기를 "저이는 사람 얼굴을 하고서 도깨비 행동을 하는 자다. 화가

곧 미칠 것이다."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몇 년 못가서 그는 과연 패망하였다.

공은 성품이 산천을 유람하길 즐겨하여, 일찍이 속리산에 들어가 대곡선생(大谷先生)을 스승으로 섬겼다.

당시 인사들이 모두 공을 법도의 바깥으로 보고서 그 취할 바는 문사뿐 이라고 하였으나 이찬성 이이(李珥), 허학사

봉, 양사군사언(楊使君士彦) 같은 분들은 그 기기(奇氣)를 허여하였다 한다. 일찍이 고산도 찰방이 되어 북관으로

나갔는데 향사군, 허학사, 차태상 천로와 더불어 함께 가학루에 올라 시를 주고 받아서 1권이 엮어졌다. 또 서북도

마평사, 관서도사를 역임했는데 모두 소경(昭敬) 연간이었다. 오늘에 이르도록 관새(關塞) 사이에 시편들이

왕왕 전하고 있다. 벼슬은 예조정랑 겸 사국지제교에 이르고 만력 156년(1587) 8월 11일 돌아가시니 나이 39세였다.

풍강(楓江), 백호, 벽산(碧山), 소치(嘯癡)는 모두 별호인데 만년에 바꾸어 겸제(謙齊)로 하였다. 풍강은 금성

(錦城: 나주의 옛 이름)의 서편에 있는데 오늘에 이르도록 임씨의 구업(舊業)이고 백호는 옥과현에 있는데 무진장

이라 이르는 곳이다. 공인(恭人)은 경주김씨인데 조부는 휘 천령(千齡)이니 강정(康靖) 때 이름 있는 분으로 직제학

지냈으며, 부친은 휘 만균)萬筠)으로 공희(恭僖: 중종의 시호) · 공헌(恭憲: 명종의 시호) 연간에 벼슬하여

대사헌을 지냈으며, 모친은 순흥안씨다. 가정 27년 7월 3일에 태어났으니 공보다 1년 앞이며 공이 돌아가신

4년 후 12월 6일 돌아가시어 합장을 하였다. 묘소는 나주의 회진 위에 있다. 아들은 지(地) · 준(埈) · 탄(坦) · 계

인데 모두 호걸스러워 명족으로 일컬음을 받았다. 준은 중흥(中興: 인조반정) 초에 행의(行誼)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기는 숙부 문화현령 환의 뒤를 잇고 추천하는 이가 있어 장차 크게 쓰일터이었는데

호조좌랑으로 마쳤다. 여서는 셋으로 병조좌랑 김극년 영의정 허공 교(許喬), 후릉참봉 양여백이다. 지금 자손으로

성을 이은자가 3세에 몇 사람이 있으니, 탄은 강(綱)을 낳아 어려서 재주로 이름이 있어 상사(上舍: 진사)에 올랐는데

불행히 요절하였으며, 강은 정(楨)과 지(榰)를 낳았다.

외손 허목은 삼가 쓰다.

 

※ 허목은 임백호의 외손자이며, 영의정 이원익의 외손녀서(外孫女壻)다.

 

자료 인용: 임인채 편저 [시성 임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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