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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한국의 장황(粧潢)

 

한국의 장황(粧潢)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종이 제작기술을 물론, 이를 꾸미는 장황기술도 함께 도입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각종 불화와 불경, 족자 · 두루마리 · 첩 등으로 장황되었고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대량의 기록물을 손쉽고 튼튼하게 엮을 수

있는 책 장황도 널리 보급되었다.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갖추는데 장황은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다.

 

 

두루마리

 

조선왕실의 두루마리 장황은 본문의 주변을 아름다운 비단으로 둘러 장식하고 뒷면은 종이로 배접하여 본문이 상하지 않고

오래 보존될 수 있도록 하였다. 두루마리를 말고 펴기 쉽도록 둥근 축하축을 연결하고, 축 양 끝에는 옥이나 나무로 축두를

만들어 장식하였다. 말았을 때 드러나는 표지 부분은 여러 무늬가 직조된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비단을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그 끝에 단면이 반달모양인 앏은 축상축을 달았다. 축의 중간에는 명주실로 엮은 끈을 부착하고 그 끈 끝에 놋쇠 · 녹각 · 상아

따위로 만든 꽃이를 달아 부착하여 둥글게 말린 두루마리가 풀리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고정함으로써 꺾임이나 마모가 없게 하였다.

 

 

 

◐ 태조 즉위 전 호적 ◑

李太祖戶籍原本

 

고려高麗  두루마리香 옥축두 · 흑각꽃이종이에 먹 | 전체 81.0×472.0cm, 본문 55.7×386.0cm,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제131호

 

 

영흥 준원전濬源殿에서 보관하고 있던 태조 이성계의 호적을 1731(영조7)년 어명에 따라 서울의 장인을 보내

두루마리로 장황한 것이다. 8장의 낱장 호적의 가장자리를 흰색 무늬의 비단으로 두르고 푸른색 무늬비단을 좌우에 붙였다.

나무 상축에는 붉은색 비단 끈을 부착하고 하축에는 옥축두를 끼웠다. 왕실 두루마리 장황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숙종비 인경왕후 왕세자빈책봉 교명 ◑

肅宗妃仁敬王后王世子嬪冊封敎命

 

조선朝鮮 1761(현종 12)년

두루마리香 | 옥축두 · 놋쇠꽂이

비단에 먹 | 전체 33.7×300.0xcm, 교명문 31.0×193.5cm

 

 

 

 

 

 

숙조비 인경왕후 金氏를 왕세자빈에 책봉하는 문서이다.

말았을 때 두루마리 전체를 감싸는 표지에는 붉은 바탕에 '壽' 자 등 갖가지 무늬를 짠 두툼한 비단을 사용하였다.

오색다회 격자무늬 끈이 표지비단과 어울려 두루마리를 말아놓은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 장조 왕세자책봉 교명과 상자 ◑

莊祖王世子冊封敎命 · 櫃

 

조선朝鮮 1736(영조 12)년

두루마리香 | 옥축두 · 놋쇠꽃이

교명 비단에 먹 | 전체 35.0×313.0cm

상자 나무에 흑칠 · 금니 | 21.8×29.7×22.0cm

 

 

 

 

 

 

 

 

영조가 그의 아들(사도세자 훗날 장조로 추존)을 왕세자에 책봉하는 문서이다.

감색 구름무늬 비단 등 세 가지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회장하고, 뒷면도 색채가 화려하고 두툼한 비단으로 배접하였다.

오색다회 끈과 옥축두 등을 갖추는 조선시대 교명의 장황 형식을 잘 보여준다.

 

 

 

◐ 장조비 헌경왕후 왕세자빈 책봉 교명과 상자 ◑

莊祖妃獻敬王后王世子嬪冊封敎命 · 櫃

 

조선朝鮮 1744(영조 20)년

두루마리香 | 옥축두 · 놋쇠꽃이

교명 비단에 먹 | 전체 35.5×290.0cm

상자 나무에 흑칠 | 20.4×47.3×20.5cm

 

 

 

 

 

■ 교명을 싸는 데 사용한 붉은색 연꽃넝쿨 무늬 비단보자기이다.

연꽃잎을 화려하게 표현하고, 연방과 연잎을 통해 연꽃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네 모서리에는 삼각형의 금박지에 감색 술을 달아서 장식하였다.

 

 

■ 구름과 보배 무늬가 들어가 있는 황색의 비단으로 만든 보자기이다.

구름을 주 무늬로 하여 여백에 보배 무늬를 채워 넣었다. 장조비 헌경왕후 왕세자빈 교명의 중간회장에도

동일한 무늬가 보인다. 이 보자기로 교명을 싸고 자주색 끈으로 묶어서 보관하였다.

 

 

 

 

 

 

◐ 영조계비 정순왕후 왕비책봉 교명과 상자 ◑

英祖繼妃貞純王后王妃冊封敎命 · 櫃

 

조선朝鮮 1759(영조 35)년

 

 

두루마리香 | 옥축두· 놋쇠꽃이 0cm,

교명 비단에 먹 | 전체 33.7×300. 교명문 31.0×193.5cm 

상자 나무에 주칠 | 13.7×46.6×14.0cm

 

 

 

 

 

 

 

 

 

정순왕후 金氏를 왕비로 책봉하는 문서이다.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날인되어 있는 어보는 '조선왕보朝鮮王寶'이며, 1744(영조 20)년붙터

기존의 '시명지보施命之寶' 를 대체하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 정순황후 김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문서의 상자세트와 보자기이다.

상자는 나무에 외주홍칠을 하고 금니로 상상의 동물을 그려 넣었다. 교명을 싼 보자기는

붉은색 비단에 도식화된 꽃무늬를 금박으로 찍어서 장식하였다.

 

 

 

 

 

 

 

◐ 헌종비 효현왕후 왕비책봉 교명과 상자 ◑

憲宗妃孝顯王后 英祖繼妃王妃冊封敎命 · 櫃

 

조선朝鮮 1837(헌종 35)년

두루마리香 | 옥축두 · 놋쇠꽃이

교명 비단에 먹 | 전체 36.2×316.0cm, 교명문 33.0×190.0cm 

상자 나무에 주칠 | 21.6×49.6×21.0cm

 

 

 

 

 

헌종 3년에 제작된 헌종비 효현왕후 金氏의 왕비책봉 교명과 상자이다.효현왕후의 왕비 책봉 행사를 기록한 의궤에 교명 제작에 관한 내용과 함께 교명과 구름모양 꽂이 등 장황 관련 도설이 실려 있는데실물과 일치한다. 교명 장황이 끝나면 속보자기로 싸고 솜으로 빈 공간을 메우고 의향을 담아 겉보자기로 싸고 솜으로 빈 공간을메우고 의향을 담아 겉보자기에 싸는 봉과封裏 절차를 행한 후 책봉례에 대비하였다

 

 



 







■ 헌종과 효현왕후 가례 때 의궤

 

조선朝鮮 1837(헌종 3)년종이에 먹 | 44.6×31.9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세계기록유산

 

 

 

◐ 영조가 세손(정조)에게 내린 글과 통  ◑
조선朝鮮 1776(영조 52)년

두루마리香 | 옥축두 · 놋쇠꽃이

글 종이 먹 | 전체 69.5×178.0cm, 본문 82cm 

통 나무에 주칠 · 금니 | 지름 13.6cm, 높이 82.2cm

 

 


영조가 왕세손(정조)에게 내린 글[論書]이다.
글 뒤에 붉은 비단을 댄 후 상 · 하축에서부터 앞면으로 감색 구름무늬 비단을 양 날개처럼 회장하였다.특별히 귀한 글답게 독특한 장황 형식을 보여준다. 축두가 바깥으로 나오지 않은 형태이다.


 

 

 

 

 

 

◐ 이성윤 위성공신교서 ◑

李誠胤衛聖功臣敎書

 

조선朝鮮 1613(광해군 5)년

 루마리香 | 나무축두  · 녹각꽃이

종이에 먹 | 전체 43.5×313.0cm, 교서문 36.5×236.8cm, , 개인 소장, 보물 제1508호

 

 

 

임진왜란 때 광해군의 항전을 도운 공로로 임금으로부터 받은 교서이다.

신하에게 내리는 교서는 주로 무늬 없는 황색, 감색 명주로 장황하여 왕비 등 왕실 가족의 책봉 문서인 교명의 화려한 장황과 달리

차분하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교서 하축의 나무축두와 녹각 꽂이도 격을 낮춰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이삼 양무공신교서 ◑

李森楊武功臣敎書

조선朝鮮 1728(연조 4)년

두루마리香 | 나무축두  · 녹각꽃이

종이에 먹 | 전체 43.5×274.0cm, 교서문 39.1×195.1cm, 개인 소장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이삼에게 내린 교서이다.

장황 비단, 녹각꽂이 등 100여 년 전 광해군대이 공신교서축과 비교시 큰 변화 없이 장황되었다.

다만 무늬있는 비단을 쓰고 꽂이 윗부분에 귀면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장식성이 증가한 모습을 보여준다.

 

 

 

 

 

족자

 

족자는 서화를 종縱 방향으로 펼쳐서 걸어놓기 편리하게 만든 장황 형식이다.

족자로 장황하는 것을 장족(粧簇), 작족(作簇)이라고도 하는데, 도화서에 소속된 배첩장(褙貼匠)이 담당하였다.

서화 감상물 또는 기록물 중에서 매우 진귀한 것과 어진과 같이 예배를 드리는 경건한 대상을 족자로 만들기 때문에

 다른 어느 장황 형식보다 최고급의 재료를 사용했다.

 

족자를 만드는 방법은 먼저 서화의 뒷면에 종이와 비단으로 배접하여 튼튼하게 보강한 후

작품과 어울리는 비단으로 앞면을 장식한 다음 벽에 걸 수 있도록 위아래에 나무 축을 달고 끈을 매단다.

평상시에는 두루마리처럼 감아서 끈으로 붂은 다음 보자기에 싸서 상자에 넣어 보관한다.

 

조선 왕실에서는 왕의 초상을 족자로 만들어 진전에 모셔놓고 제를 지냈으며 공신들에게는 초상 족자를 상으로 내려주었다.또한 왕과 왕비의 능묘 비석과 지석, 석각 지도와 같이 크기가 거대한 금석물의 탁본을 족자로 꾸며서 보관하였고, 왕의 글씨와 그림을 보전하기 위해 족자로 장황하였다. 왕실에 바치는 진상(進上) 족자는 신하들에게 상으로 내리는 반사(頒賜)족자에 비해 품격에 걸맞는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 정성껏 장황했다.


◐ 태조어진 ◑太祖御眞
조선朝鮮 1872(고종 9)년족자(簇子) | 나무축두 · 붉은색비단낙영 · 유소비단에 채색 | 전체 260.0×173.0cm, 전주시, 보물 제931호


1872(고종 9)년에 경기전(慶基殿)의 태조어진이 색이 흐려지고 비단 장황이 낡아져 새롭게 이모하였는데,그 기록이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模都監儀軌)』에 담겨 있다. 앞면의 회장 비단은 감색과 흰색 무늬비단으로 하였고,배접은 흰색 명주로 하였다. 상축에는 금색 비단 실로 두마리 용이 오르내리는 문양을 짠 붉은색 낙영 한 쌍을 부착하고 족자끈에는붉은 실 매듭의 유소를 달았다. 어진과 같은 귀한 족자에는 옥으로 만든 축두를 끼우는 것이 보통이지만 의궤에는 옥 대신 화리목(花利木)을 택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태조어진 상자

조선朝鮮 1872(고종 9)년

 

조선朝鮮 1872(고종 9)년

나무에 흑칠 | 25.5×186.0×22.0cm, 전주시

 

 

 

1872년 태조어진을 경복궁 태원전(泰元殿)에서 그린 후 가마에 모셔 전주 경기전으로 봉안할 때 사용하던 상자이다.

어진을 걸지 않을 때 넣어 두는 용도로 쓰인다.

 

 

 

 

■ 태조어진을 옮길 때 사용한 통

 

조선朝鮮 1872(고종 9)년

나무에 흑칠 | 지름 25.2×18.0, 길이 187cm, 전주시

 

 

 

 

전쟁과 같은 위급시에 태조어진을 옮기는 데 사용하고자 만들어 경기전에서 보관하던 통이다.

어진 족자를 말아 간편하게 옮길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들고 몸통에 둥근 고리 여러 개를 달아 어깨끈을 묶었다.

 

 

 

 

■ 족자받침

 

조선朝鮮

 나무에 주칠 | 15.0×198.5×14.5cm, 전주시

 

 

 

 

 

 

 

 

 

◐ 효장세자 묘지문 탁본 ◑

孝章世子墓誌文拓本

 

조선朝鮮

족자(簇子) | 나무축두

종이에 먹 | 전체 203.2×101.7cm, 화면 111.3×40.0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조의 첫째 아들 효장세자 진종(眞宗)의 묘지문으로 영조가 짓고 썼다.

묘를 조성할 때 만든 것을 탁본하여 족자로 꾸며 왕실에 진상한 것이다.

묘지문 탁본 좌우에 옥색 석류 덩쿨 무늬 비단을 회장하여 족자의 규모를 크게 하였다.

 

 

 

 

 

◐ 영빈전의이씨지묘 탁본 ◑

映嬪全義李氏之墓拓本

 

조선朝鮮

족자(簇子) | 나무축두

종이에 먹 | 전체 191.1×79.0cm, 화면 147.3×58.0cm, 국립문화재연구소

 

 

 

 

영빈이씨의 무덤인 의열묘(義烈墓)의 표석 탁본으로 영빈이씨는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莊祖)의 생모이다.

상 · 하회장은 연한 녹색 비단이며 탁본 둘레 회장과 세로 두 줄의 영자(纓子)는 백색 비단이다.

 

 

 

 

 

◐ 강세황 영정 ◑

조선朝鮮

 

그림 이명기(李命基)  이득신(李得新)

조선朝鮮 1783(정조 7)년

족자(簇子) | 나무축두

종이에 채색 | 전체 221.0×117.8cm, 화면 145.8×94.5cm, 개인 소장, 보물 제590호

 

 

 

강세황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정조의 명에 의하여 화원 이명기가 초상을 그리고,

 어영청의 책장(冊匠) 이득신이 장황을 맡았다. 강세황의 셋째아들 강관이 기록한 <계추기사季秋記事> 에는

앞부분 회장에 청색과 흰색 꽃 무늬 비단, 뒷부분 배접에 쪽색 명주를 사용하였다.

 

 

 

 

 

 

 

 

 

 

 

 

 

 

첩帖 · 책冊

 

첩(帖)과 책(冊)은 두루마리에 비해 편리하도록 만든 것이다.

첩(帖)에는 두루마리 폭으 일정한 간격으로 접어 휴대와 열람이 간편하도록 만든 경절장(經折裝)과 경절장의 뒷면을

두 면씩 붙여 두 쪽씩 펼쳐가며 볼 수 있는 선풍엽(旋風葉)이 있다. 본문이 긴 목록에는 경절장을, 낱장으로 된 서화 감상에는

선풍엽을 효과적으로 썼다. 목판본, 활자본 등 도서 간행이 활발해지면서 첩보다 제본이 쉽고 보다 튼튼하게 장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러 형태의 책이 고안되었다. 본문 앞 · 뒤에 두 장의 표지를 대고 실로 묶은 선장(線裝)과 놋쇠나 무쇠 편철로 고정하는 철장(鐵裝)이

있는데, 고서의 대부분이 선장이다. 조선왕실에서는 실록 · 보감 등의 사서와 족보류, 왕실행사 전반을 기록한 의궤와 등록,

왕의 저작인 어필 · 어제 등 많은 왕실 관련 자료를 책으로 남겼다. 장책(粧冊)은 교서관의 '장책제원(粧冊諸員)',

또는 '책장(冊欌)'이라 불리는 전문 장인이 담당하였으며, 책의 내용과 성격에 알맞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임금이 보는 어람본과 신하들에게 내려준 반사본 · 사고 봉안본에 각각 표지와 종이, 실 등의 재료를 달리 썼다.

그 중에서도 귀중본의 경우는 비단표지에 국화문양의 편철로 단단하게 묶은 철장(鐵裝)을 하고

보자기에 싼 후 상자에 넣어서 보관하였다.

 

 

 

◐ 효종의 글 ◑

孝宗大王御筆

 

조선朝鮮

선풍엽첩(旋風葉帖) | 붉은색구름 · 보배무늬비단표지

종이에 먹 | 33.0×19.2cm,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효종(1619-59)이 쓴 편지와 목록류의 글들을 함께 묶은 것으로

두 면씩 펼쳐 보이는 선풍엽첩 형식이다. 붉은색 무늬 비단 표지를 바르고 흰색 명주를 붙여 그 위에 제목을 썼다.

 

 

 

 

 

 

 

 

 

 

 

 

◐ 영조가 이삼에게 내린 글 ◑

 

조선朝鮮

선풍엽첩(旋風葉帖) | 남색구름 · 보배무늬비단표지

종이에 먹 | 전체 38.5×20.3cm, 화면 28.4×26.0cm, 개인 소장

 

 

 

영조대 양무공신 이삼(李森 1677-1735)을 한성판윤에 임명하면서 영조가 써서 내린 글 1매를 첩으로 꾸몄다.

어필은 황색 용무늬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 남색 구름과 보배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표지 위에 체첨은 붉은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 양무공신 이삼을 그린 첩과 상자 ◑

 

조선朝鮮 1750(영조 26)년

선풍엽첩(旋風葉帖) | 녹색비단표지

비단에 채색 | 전체 52.3×36.4cm, 화면 41.8×28.8cm

상자 비단에 흑칠 | 43.4×60.4×60.0×8.0cm, 개인 소장

 

 

 

 

 

 

 

 

 

 

 

 

 

◐ 고종이 쓴 궁궐편액 초본 ◑

 

조선朝鮮 1885(고종 22)년선풍엽첩(旋風葉帖) | 초록색보배무늬비단표지종이에 먹 | 전체 32.9×27.5cm, 화면 26.3×23.3cm,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경복궁의 곤녕합(坤寧閤), 향원정(香遠亭) 등 고종이 쓴 궁궐편액 초본이다.반으로 접은 양면에 어필을 한 장씩 붙이고 앞 · 뒤 면을 하나의 표지로 싼 선풍엽이다.어필의 가장자리는 청색 칠보무늬 비단으로 선을 댔다. 초록색 보배무늬 비단 표지에 자주색 테두리를 한 흰색 무늬 비단으로 제목을 붙여 화려한 장항을 보여준다.

 





 




◐ 경빈 김씨의 글과 첩갑  ◑順和宮帖草 · 帖匣
조선朝鮮 19세기 전반경절장첩(經折粧帖) | 색동매화모란무늬비단첩갑 · 녹색구름 · 보배무늬비단첩표지, 감색용무늬비단첩표지종이에 먹 | 전체 23.5×12.0cm,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

        

 

궁궐에서 옷 입는 법에 관한 글과 궁중 기일 및 복식에 관해서 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가 쓴 글을 첩으로 장황한 것이다.

첩갑은 색동 무늬 위에 매화와 난초 무늬를 짠 화려한 비단으로 만들었다. 전면에 따로 백지를 붙여 적은 '순화궁' 은

경빈 김씨의 궁호(宮號)이다. 색동무늬 비단은 18세기부터 교명의 표지 배접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 두 도첩은 도침을 하여 두툼하게 만든 종이를 여러 절로 접은 면에 괘선을 눌러 궁서체로 정연하게 내용을 써내려갔다.

우측의 국기복색소선은 녹색 구름 · 보배 무늬 비단 표지이며 좌측의 요람은 감색 용 무늬 비단 표지를 하고 있다.

 

 

 

 

 

 

 





◐ 선원선계록과 첩갑 ◑璿源先系錄 · 帖匣
대한제국大韓帝國 1906(광무 10)년경절장첩(經折粧帖) | 꽃무늬비단첩갑 · 석류무늬비단첩표지종이에 먹 | 전체 31.0×16.2cm첩갑 비단 | 전체 31.8×16.9×3.4cm

                    



원래 경절장 형태의 첩들은 대개가 첩갑이 있기 마련이지만 전하는 것이 많지 않은데 반하여선원선계록은 첩갑도 온전한 형태로 전하고 있다. 꽂을 수놓듯이 짠 비단으로 겉을 장식하였고내부는 붉은색 명주를 발랐다.

 

 




■ 전주 이씨의 지조 이한으로부터 마지막 황제인 순종까지 역대 왕의 계보를 길게 이어지는 경절장 형식으로 장황하였는데

왕실의 족보를 이와 같은 형태로 제작한 것은 흔치 않은 경우이다. 황제국에 걸맞게 표지는 석류무늬를 색실로 짠 황색 비단을

채택하였으나 별도로 붙어있는 제첨에는 제목이 적혀있지 않다.

 




◐ 선원록 璿源錄
조선朝鮮 1681(숙종 7)년선장책(線裝冊) | 남색능화무늬비단표지종이에 먹 | 62.0×41.5cm

태조부터 현종까지의 왕실족보로 총 51책이다.감색 능화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붉은색 끈으로 묶은 선장이다.붉은색 테두리에 흰색 비단으로 서명과 묵차 두 개의 제목을 붙였다.




 




 

◐ 어제대훈 ◑

御製大訓

 

조선 후기 朝鮮後期

선장책(線裝冊) | 감색연꽃넝쿨무늬비단표지

종이에 먹 | 36.5×23.0cm,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주동자들을 처벌하고 당쟁의 폐해를 막고자 영조가 직접 지은 글로

1741년에 처음 간행되었다. 남색 연꽃덩쿨 무늬 비단으로 표지를 싸고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붉은 실로 묶었다.

제목은 붉은색이 테두리를 두른 흰색 비단으로 만들어 붙였다.

 

 

 

 

 

 

 

 

 

 

◐ 존호를 올릴 때 의궤

 

조선朝鮮 1888(고종 25)년

철장책(鐵裝冊) | 놋쇠편철

종이에 먹 | 44.8×32.2cm,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세계기록유산

 

 

 

고종과 명성황후 등 왕실어른께 존호를 올리는 행사를 기록한 어람용(御覽用) 책이다.

녹색 명주표지에 놋쇠로 편철한 철장 형식이다.

 못이 빠지지 않도록 부착한 다섯 개의 국화동(菊花童) 중 가운데 것에 둥근 고리를 달았다.

 

 

 

 

 

 

 





◐ 명성황후 국장 때 빈전, 혼전 의궤
대한제국大韓帝國 1898(광무 2)년철장책(鐵裝冊) |놋쇠편철종이에 먹 | 44.5×31.8cm,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세계기록유산


명성황루 국장 때 빈전, 혼전도감을 설치하였던 일을 기록한 책으로 황태자께서 보도록 예람용(睿覽用) 장황을 하였다.의궤의 예람용 장황은 대한제국 시기에 등장한 것으로 표지의 색만 다를 뿐 어람용과 같다. 놋쇠로 편철하고 붉은색 명주표지로 쌌다.책제목은 청색 테두리를 두른 흰색 명주바탕에 먹으로 썼다.




 

 




◐ 선조 국조보감과 상자 宣祖國朝寶鑑 · 櫃
대한제국大韓帝國 1909(융희 3)년철장책鐵裝冊 |놋쇠편철종이에 먹 | 34.4×22.9cm상자 나무에 흑칠 | 26.6×43.4×21.0


 





1684(숙종 10)년에 처음 편찬된 선조 국조보감을 1909년 이후 다시 제작한 것이다. 대한제국 이전에는 남색 표지를 사용하였으나 대한제국 이후 새롭게 제작하면서 황제국을 상징하는 황색 표지로 바꾸어 종묘에 안하였다. 세로로 긴 놋쇠 조각을 대고 다섯 개의 구멍을 뚫어 튼튼하게 못을 박아 책을 묶었다.

 



 

 

 

 

 

◐ 정조의 홍제전서 상자

正朝大王弘齋全書

 

조선朝鮮

나무에 옻칠 | 38.7×24.8×52.8cm, 서울대학교 규자각 한국학연구원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보관하던 나무 상자로 표면에 검은 옻칠을 하였다.

상 · 하단 선반에 책을 눕혀서 여러 권씩 쌓아 보관하게 만들었다. 상자 뚜껑에 책 제목을 새기고

손잡이를 달아 위를 향해 밀어 열도록 하였다.

 





 






병풍
왕실에서는 공간을 구획하거나 장식하고 또는 찬 기운을 막는 용도로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병풍, 가리개, 장지문 등을 만들어 설치하였다. 병풍은 나무로 기본 골조를 짠 다음 그 위에 종이를 바르고 서화를 붙인 후 비단으로 회장을 두르는 순서로 제작된다.하나의 통판으로 만들어 일정 장소에 고정 시키거나 두 폭 이상을 연결하여 접었다 폈다 하는 두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병풍 폭의 연결은 마주한 두 폭의 가장자리에 종이와 비단 조각을 엇갈리게 붙이는 돌쩌귀식으로 잇는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왕실의 부귀 · 번영과 장수를 기원하는 모란도와 십장생도, 왕의 글씨와 그림,왕세자 교육을 위한 경직도 · 성적도, 다양한 궁중 행사 장면, 그리고 순수 감상용의 산수 · 화훼 등 여러 주제의 글과 그림을 큰 화면을 살려병풍으로 장황하였다. 장식 병풍은 왕실 의례의 중요한 기물이자 궁궐 건축의 일부로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정전의 어좌 뒤에 세운 병풍에서부터 여러 폭을 이어 만든 첩병(疊屛), 틀에 끼워서 세우는 삽병(揷屛) 등이 있으며, 실내 사방을 장식하는 불발기창에도 림을 붙이고 그 위에 창호를 바르는 병풍의 형식이 적용되었다.


◐ 모란 그림 牧丹圖
조선朝鮮 19세기접이식병풍屛風 | 녹색 · 감색비단회장무명에 채색 | 전체 202.0×416.0cm, 화면 각 165.8×45.4cm


모란꽃을 큼직하게 그려 8폭으로 꾸민 첩 병풍이다.나무틀을 골조로 하여 각 폭마다 감색 비단과 초록색 비단으로 사방을 두르고, 절첩처럼 접을 수 있도록 연결하였다.이렇게 장황된 모란병은 궁중행사장에서 넓게 펼쳤다가 행사가 끝나면 간단하게 접어 이동 · 보관하였다.

 




◐ 십장생도 불발기 창 十長生圖連窓門
조선朝鮮 19세기장자(障子) | 감색 · 붉은색비단회장, 비단에 채색

좌) 전체 149.0×234cm, 화면 114.4×234.0cm
십장생 그림을 궁궐 실내의 공간 분할을 위한 미닫이식의 장자나 문으로 꾸민 것이다.가운데 두 쪽의 문에는 팔각형 방기창을 내고 창호지를 붙여 방 안팎의 빛이 비치도록 하였다.



우)149.0×234cm, 화면 118.0×234.0cm



 

 

 




 




● 인용서적 :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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