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도(平壤圖) ·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 풍류도(風流圖)
평양도(平壤圖) 10폭
연대미상, 지본채색, 각 131×39cm, 10폭 병풍, 서울대학교박물관
평양도는 이미 조선중기부터 병풍 형식으로 그려졌음이 조선왕조실록이나 기타 기록에 나타나 있다. 평양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중요한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거점으로서, 또 기자조선(箕子朝鮮) 정전법(井田法)의 유적이 남아있는 곳으로 중시되었다. 그래서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위로는 정조(正朝) 같은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들까지 많은 수요가 있었다. 현재 전하는 평양도 중에는 김홍도의 원화(原畵)
에 의한 목판본(木版本) 평양도 병풍들이 여러 점 있는 것도 이런 당시의 수요를 잘 보여준다. 즉 그림으로 그리기에는 벅차 목판으로 찍어낼
만큼 많이 요구 되었던 것이다.
서울대박물관 소장의 이 10폭 병풍은 김홍도가 그린 목판본보다 후대, 즉 19세기의 필사본 작품이다. 이 평양도에는 다른 작품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는데, 평양감사 부임 행렬도와 아마도 석전(石戰)으로 보이는 민속놀이 장면이 자세하게 그려진 점이다. 또 대동강에 있는 능라도(綾羅島)에서 벌어지는 명창 뫃으갑의 판소리 장면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밖에도 이 병풍에는 평양의 많은 명소와 지역에 일일이 지명을 써 놓았는데, 이 점은 평양도를 비롯한 진양성(진주)도, 남해안도 등 회화식 지도에서 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이다.
세부도 : 판소리
판소리 장면에 나오는 모흥갑은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순조(1800-1834), 헌종(1834-1849), 철종(1849-1863) 때의 명창이다.
평양의 연광정(練光亭)에서 판소리를 부를 때 덜미소리를 질러내어 그 소리가 1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모흥갑은 헌종 때 동지(同知)의
직계를 받았는데, 신재효는 광대가에서 그의 소리를 '설상(雪上)에 진저리치듯' 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세부도 : 악대
평양감사의 부임행렬로 보이는 대행렬도에는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대각 혹은 나발과 비슷한 악기와 나각을 불면서 앞서가고
운라, 북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는데, 이들은 황색 답호를 걸쳤다.
평양도(平壤圖) <좌측면>
필자미사, 19세기, 견본채색, 90×180cm, 신묘정사(神妙精舍) 공인박물관
이 평양도는 위의 서울대박물관 소장 평양도 10폭 병풍을 한 폭으로 표현한 듯한 구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좌우가 축약되고
세부 표현도 약간씩 생략된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쪽 끝에서 평양성 쪽으로 들어오는 대동강의 모습과 왼쪽 끝에서 서해쪽으로 나가는
강줄기의 모습이 약간씩 생략되었다. 그러나 아래 왼쪽 평양감사의 행렬과 아래 오른쪽 능라도에서의 공연장면은 공통되며, 왼쪽 상단의
민속놀이의 모습도 유사하다. 이밖에도 대동문, 보통문, 연광정, 을밀대, 부벽루, 관아 등 평양도에 항상 등장하는 중요 소재들은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서울대박물관 병풍에서는 그림에 지명이 세세히 쓰여 있는데 비해 이 작품에서는 생략되었다. 18세기에는 김홍도가 밑그림을
그린 목판본 평양도 병풍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서울대학교 본과 같은 도상(圖像)의 평양도가 19세기에 많이 그려졌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평양도(平壤圖) <우측면>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평양도》가 북 반주가 따르는 판소리 공연을 그린 것에 반하여 이 《평양도》에서는 남자 2명이 장단에 맞추어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데, 왼쪽의 남자와 마주서서 팔을 벌리고 있는 사람은 광대와 비슷하게 보인다. 또한 하단의 대행렬도 역시 운라와
같은 악기가 없고 나발 · 해금 · 장구 · 북 · 대금 등이 등장하여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의 것과는 약간 다르다.
세부도 : 판소리
세부도 : 악대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 8폭
필자미상, 18세기 후반, 견본채색, 각 113.69×49.1cm, 8폭 병풍, 국립중앙박물관
이 장대한 도시 풍속화 8폭 병풍은 조선후기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신자료이다. 우선 큰 화면에 수많은 장면들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에서 지금까지 한국회화를 중국이나 일본회화에 비해 기교나 화려한 면에서 뒤진다는 인식을 제고하게 한다. 이런 대작의 발굴은 조선
후기 문화의 풍성한 성취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로 접근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 풍속화 병풍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의문점이 드러난다.
즉 벽돌로 높이 쌓은 성벽이나 가옥의 형태, 패루(牌樓), 말이 끄는 수레, 코끼리와 낙타 같은 이국적 동물 등에서 중국적인 면모를 강하게
가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좌식생활, 디딜방아, 개다리소반, 인물이나 수목 묘사에 보이는 김홍도를 비롯한 조선식 화풍 등에서 한국적인
면모도 동시에 보여준다. 따라서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던 중국의 대표적 도시풍속화인 <청명상하도(淸明上下圖)나 기타 중국의 풍속화
작품이 조선 화가들에 의해 수입되어 절반쯤 한국화 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일단 이해되고 있다. 또 이 작품은 정조대
(正祖代) 궁정에서 그려지고 시(詩)로 읊어졌던 <성시전도(城市全圖)>의 모습을 짐작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아무튼 앞으로
이 작품은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소재들의 의미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들 것이다.
세부도 : 춤과 음악
쪽 그림 정자 안에서 기녀가 검무를 추고 있는데 악대는 장구 · 북 · 피리2 · 대금 · 해금 · 생황으로 구성된다.
북은 매달고 2개의 채로 친다.
- 풍류(風流) -
후원유연(後園遊宴)
김홍도, 18세기 후반, 견본채색, 52.8×33.1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낙관이 없으나 화풍상 김홍도의 작품이 틀림없다. 바위 그늘이 시원한 후원에서 간단한 음악연을 베풀고 있는 모습인데,
인물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날카롭고 정확한 선묘는 30대 김홍도의 특징적인 면모이다. 특히 축대 아래에서 소반에다 음식을 들고 오는
두 시비(侍婢)의 모습은, 김홍도의 풍속도 병풍 중 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기메 국립동양미술관 소장의 8폭 병풍 중 한 폭에서도
똑 같이 등장한다. 또 화면 위쪽에는 아래와 같은 멋들어진 제시(題詩)가 적혀 있다.
아석(雅石)으로 영산(靈山)의 음악을 청하고, 벽화(碧花)로서 백구타령을 맞추니, 태평세월 즐거운 잔치가 심히 아름답도다.
새로 내린 금주령이 지엄한데 이를 탐내어 구했으니 장차 어찌할꼬?
멍석 위에서 한 남자가 거문고 연주를 하는데, 사방관(四方冠)을 쓴 유생과, 의녀(醫女) 혹은 기녀로 보이는 차액(遮額)을 쓴 여자가 앉아
이를 듣고 있다. 주소백(周少伯)이라는 인물의 제시(題詩) 중에 영산오성(靈山五聲)은 거문고 연주 장면에 비추어
거문고 중심의 기악곡인 영산회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풍속도(風俗圖)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지본담채, 94.7×35.4cm, 8폭 병풍,호암미술관
긍재(兢齊) 김득신은 김홍도 보다 9세 연하의 후배로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김득신과 김홍도의 이런 관계는 김득신의 백부
김응환(金應煥)이 김홍도의 선배로서 절친한 관계였던 데서도 연유한ㄷ가. 김득신은 산수, 인물, 화조 등 여러 방면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풍속화에서도 소재나 화면구성 등에서 그런 면이 보인다. 그러나 김득신의 풍속화는 특유의 명확하고 강한 선묘로 소재들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화면에 건강한 생기와 발랄함을 부여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김득신의 풍속화 중 대표작
으로, 김홍도의 풍속도 병풍 이후 가장 완성된 형식미와 세부 묘사의 정교함을 갖고 있다. 이 병풍 중 제1폭인 야연(野宴)의 모습에서도
인물들의 자연스러운 자태와 묘사의 정확성, 배경의 소나무나 바위 묘사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이 짙게 나타나 있다.
세부도 : 음악
봄나들이 나온 듯한 인물들이 노송 아래서 풍류를 즐긴다.
당시 중인계층에 널리 퍼져있던 시회(詩會)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한 남자가 거문고를 타고 있다. 거문고는 조선후기 정악(正樂) 발달에 중심적인 악기였다.
후원유연(後園遊宴)
傳 이명기(李命基), 18세기), 견본담채, 79.5×31.5cm, 국립중앙박물관
화산관(華山館, 18세기), 이명기는 본인은 물론 부친 이종수(李宗秀)와 장인 깅은환도 화원이었다. 그는 특히 초상화에 뛰어나서
정조어진(正祖御眞)을 그리는데 두 번이나 주관화사(主管畵師0였으며, 당시 명인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 지금도 꽤 남아 있다.
그런데 이명기는 초상화 이외의 산수인물화나 도석화에서는 단원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작품은 김홍도의 후원유연과 유사한 성격으로 그의 작품 중에서는 드문 풍속도이다.
세부도
인용서적 / 국립국악원 발행 <한국음악자료총서 37>『조선시대 음악풍속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