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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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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 진솔한 삶의 표현 (1) 1929년 3월 일본 교토에서 열린 민예품전람회에서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 (1889-1961)가 '민속적 회화'라는 의미에서 '민화'라는 명칭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 1937년 2월, 일본의 월간 지에 기고한 '공예적 회화'라는 글에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에 의해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 유통되는 그림을 민화" 라 규정했다.야나기가 민화라 지칭한데는 일본 민속화의 일종인 오오쓰에를 지칭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서 에서 민화의 범주를 규정하길, 창의성 보다 실용성이 강조되고, 몇 장 씩 되풀이 하여 그리는 그림이며 생활공간의 장식을 주목적으로 하는 민속적인 미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그림이라 정의한 바 있다. 그러나 야나기가 '민화'라는 용어를 쓰기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민화..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사진 컬렉션 2 헬무트 뉴튼 作▲ 폴로리안 팬션의 제니 카피텐, 베를린, 1977년      ▲ 그들이 오고 있다, 1981년     ▲ 그들이 오고 있다, 1981년.     ▲ 무제, 파리, 1973년     ▲ 로저린, 1975년 8월     ▲ 비올레타 드 뱅, 1979년                          좌)노먼 파킨슨 作                                       우) 고든 파크스 作▲ 패션 사진,1965년경                                      ▲ 글로리아 벤더빌트, 1960년     어빙 펜 作▲ 마를레네 디트리히, 1950년     ▲ 장미를 든 리사, 1950년     ▲ 리사 폰사그리브스, 1950년     ▲ 1910년대, 1949년 ..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 사진 컬렉션 1 - 사진 예술 - 마르크 셰프스 Marc Scheps  19세기 과학의 발명품인 사진은 해당 시대의 기술 혁신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한 인류의 지각과 경험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고,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비물질적인 매체인 빛을 통해 시간의 제약을 받는 현실을 복제하는 사진은 시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장면을 '동결'하는 기적 같은 일로 여겨졌다. 특히 사진이 발명된 초창기에는 현실 세계 같은 가상 세계를 만들고자했던 인류의 오랜 바람이 실현된 것으로 보였다. 화학적으로 종이에 기록된, 현실 세계를 비추는 거울 이미지가 마법 상자 안에서만들어졌고 그 결과물인 사진은 시공간에 대한 기억의 시각적인 자료 저장고가 되었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지나간 과거나 문자나 그림이 아닌 다른 수단으로 기록..
화암수록花菴隨錄 화암수록花菴隨錄  기이한 화훼가 있다면 천금을 주고라도 사겠소   조선 초 강희안의 《양화소록》이후 근 300년 만에 등장한 유박의《화암수록》 이 두 책은 조선 시대 2대 원예전문서다. 엮은이는 《화암수록》을 접하게 된 계기부터 지은이가 강희안姜希顔이나 송타宋柁 같은 이의 저작으로 잘못 알려진 연구 과정 등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었다.   유박柳璞(1730~1787)의 본관은 황해도 文化, 자는 화서和瑞, 호는 백화암百花菴. 《화암수록》과 연시조 의 저자로, 몰락한 소북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은 채 황해도 배천白川  금곡포金谷浦 바닷가에 거처를 마련하여 백화암이라 이름 짓고, 온갖 화초를 가꾸며  달빛을 벗 삼아 거문고를 뜯고 책을 읽으며 대숲 그림자와 솔바람 소리에 낮잠을 청하는 처사..
일본의 미학, 우키요에 19세기 말, 유럽에 자포니즘(Japonism)의 열병을 불러 일으킨 일본산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되었던 우키요에.그 미적 우수성을 알아본 이는 고흐, 모네, 드가 로트레크 등 이른바 인상파 화가들. 강렬한 색감, 과감한 시점 처리, 빼어난 소묘력에다 현대적인 화면 구성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회화 창조에 목말라 있던 유럽의 화가들은 단박에 매료될 수 밖에 없었다는데...  에도 시대(1603~1867)에 서민 계층을 기반으로 발달한 풍속화. 우키요에의 '우키요' 는 덧없는 세상, 속세를 뜻하는 말로 미인, 기녀, 광대 등 풍속을 중심 제재로 한다. 목판화를 주된 형식으로 대량 생산하여 서민의 수요를 충당하였다. 근대 풍속화의 시작이라고 할 17세기 후반, 히시카와 모로노부는 출판 문화의 흥행에 따라 소설..
고문서에 담긴 생활과 문화 (3) 난정수회첩 蘭亭修會帖1592(선조 25), 帖, 목판본, 39.5×39cm, 晋州鄭氏 소장.왕희지 등 41인이 회계산 양란저에 모여 유상곡수를 즐기는 수계(修禊) 장면과 송 · 원대 문인들의 글 15편을 석판에 새겨 인출한 탁본첩으로 그림과 글씨가 새겨진 석면 위에 종이를 덮어 담묵과 짙은 먹으로 정교하게 찍어내었다. 수록된 도상은 이공린의 그림으로 전해진다. 이 판화첩은 우복 정경세의 종택에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1609년(광해군 1) 정경세가 중국에 동지사로 갔을 때 구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섬사편 剡社編1754(영조 31), 첩, 지본묵서, 27×19cm, 여주이씨 소장.1754년과 1755년 두 차례에 걸쳐 이철환 · 이광휴 · 이광한 · 이창환 · 이현환 · 이경환· 이영환..
고문서에 담긴 생활과 문화 (2) 이경검부처별급문기 李景儉夫妻別給文記1596(선조29), 지본묵서, 36.5×26.5cm, 한산이씨 소장.순령군(順寧君) 이경검 부처가 딸 효숙에게 가사(家舍) 1좌(坐)를 별급하는 문서이다.별급은 자녀 및 사마시나 문과에 합격하였거나 득남 등 특별한 경우 별도의 재삱을 분재해 주는 것을 지칭한다.그녀는 1669년 81세로 졸 하기까지 한산이씨 집안이 가통을 유지시킴과 동시에 가세를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송병하혼서 宋炳夏婚書1660, 지본묵서, 59.6×87.2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송병하1646-1697)와 안정나씨의 혼례 시 신랑측에서 신부측으로 보낸 납폐문서이다.이 혼서 외에 안정나씨 집안에서 보내온 혼서가 또한 존재하는데, 한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는문서 중 동일 혼인사..
고문서에 담긴 생활과 문화 (1) 손소적개공신도상 孫昭敵愾功臣圖像1476(세조13), 絹本彩色, 170×100cm, 寶物 제1216號, 慶州孫氏 書百堂 所藏      부분도 조선초기의 문신 손소(1433-1484)의 공신도상은 왕명으로 공신호(功臣號)와 함께 하사 받은 초상화이다.청색 단령에 오사모를 썼으며, 소매 안에 두 손을 공수한 전신교의좌상이다. 좌안칠분면의 시점을 적용하였다.갈색의 선묘로 윤곽을 그린 후 채색하였는데 수염 하나하나에 이르는 섬세한 묘사와 뚜렷한 이목구비는 손소의 강직한 기개와 풍모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손조적개공신교서 孫昭敵愾功臣敎書 지본묵서, 30.6×167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우고 공신에 책훈되어 받은 교서이다.공신으로 봉해진 손소는 사후 영세토록 신위를 옮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