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정수회첩 蘭亭修會帖
1592(선조 25), 帖, 목판본, 39.5×39cm, 晋州鄭氏 소장.
왕희지 등 41인이 회계산 양란저에 모여 유상곡수를 즐기는 수계(修禊) 장면과
송 · 원대 문인들의 글 15편을 석판에 새겨 인출한 탁본첩으로 그림과 글씨가 새겨진 석면 위에 종이를 덮어
담묵과 짙은 먹으로 정교하게 찍어내었다. 수록된 도상은 이공린의 그림으로 전해진다. 이 판화첩은 우복 정경세의 종택에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1609년(광해군 1) 정경세가 중국에 동지사로 갔을 때 구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시회 장면>
섬사편 剡社編
1754(영조 31), 첩, 지본묵서, 27×19cm, 여주이씨 소장.
1754년과 1755년 두 차례에 걸쳐 이철환 · 이광휴 · 이광한 · 이창환 · 이현환 · 이경환· 이영환 등 여주이씨
성호일문의 인사들이탁천장에서 강세황 · 이헌길 등과 시회를 열고 남긴 시문 66편을 수록한 책자이다.
시문을 필사하여 성편한 사람은 이철환이며, 그림 역시 이철환이 그렸다.말미의 일부는 이광환의 글씨이다.
탁천장은 덕산현 고산면 장천리의 연당 중앙의 섬메 있던 여주이씨의
별장으로 당시는 이철환이 부친 이광휴를 시종하고 있었다.
<이철환의 시고>
<이정구(李廷龜)의 시고>
연행증언 燕行證言
1609(광해군 1), 첩, 지본묵서, 55×35cm, 진주정씨 소장.
우복 정경세가 동지사로 명나라에 파견될 당시 벗과 문인 30여명이 증여한 송별 시첩이다.
우복은 이후 이듬해 돌아오기까지 명나라에 머물면서 명의 병부에 글을 올려 화약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교섭하여 그 수입에 진력하였고, 이로 인해 귀국 후 특지(特旨)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심희수(沈喜壽)의 시고>
1. 사우에게 보낸 서간
창계공수필사우왕복첩 滄溪公師友往復帖
肅宗年間, 帖, 지본묵서, 42.3×28.2cm, 羅州朴氏 문중소장.
창계 임영(林泳, 1649-1696)이 생전에 사우들과 주고 받았던 간찰 30편을 모아 엮은 간찰첩으로,
그는 경전과 역사서에 두루 정통하고 제자백가의 글에도 밝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에게서 수학하였으며 사후 나주 창계서원과 함평 수산사에 봉향되었고 저서로 『창계집』27권이 있다.
2. 사우에게 보낸 서간
창계공훈지상화첩 滄溪公塤篪相和帖肅宗年間, 帖, 지본묵서, 42.3×28.2cm, 나주박씨 문중 소장.임영이 생전에 사우들과 주고 받았던 간찰 20여 편을 모아 엮은 간찰첩으로, 병세에 관한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창계가 신병에 시달리던 말년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고송산계도 孤松山溪圖
1788(정조 12), 지본채색, 66.6×45.3cm, 여주이씨 문중 소장.
조선후기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이 막역한 교유관계에 있던 이삼환(李森煥, 1729-1813)의 부탁으로
그려준 산수화이다. 정수영의 40대 화풍으로 발문을 쓴 소미산인은 성호 이익을 수학한 제자로서 경학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시삼환의 도량과 의태(意態)를 산수의 경물(景物)에 비유하여 한 장의 산수화로 그려내었다. 이러한 의취는 제화시에 드러난다.
인물의 도량과 의태를 자연물에 투영시킨 그림에서 외양 보다도 내면의 성정(性情)을 중요시한 그의 회화관이 돋보인다.
<이삼환이 제발 부분>
선우추 鮮于樞· 김생서법첩 金生書法帖
1525(중종 20), 첩, 夕刻拓本, 42.5×27.5cm,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1525년 중종이 사헌부 대사헌 손중돈에게 하사한 선우추 · 김생의 법첩이다.
이상의(李尙毅)의 초상화
이상의간찰첩[소릉간첩] 李尙毅간찰첩
1736(영조 12), 첩, 지본묵서, 27.8×42.1cm, 여주이씨 문중 소장.
이관휴가 성첩한 이상의의 간찰첩으로 이관휴는 이상의의 현손으로 경사에 통달하였고, 성호를 종유하여 학문의 깊이가 있었다.
이상의는 여주이씨 성호가문의 중흥한 기가조(起家祖)로서 후손들의 절대적 추앙을 받았으며, 조선후기 기호남인의 핵심을 이루며
실학사상을 배태기킨 성호일문의 학인들이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이 간첩 역시 소릉을 향한 영모의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익, 이중환, 이관휴 등의 명사들의 화상찬과 제발을 붙이게 된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서우(李瑞雨) 의 화상찬
이익(李瀷)의 발문
이중환(李重煥)의 발문
이하진서첩[천금물전] 肅宗年間, 10帖, 지본묵서, 28.1×43.7cm, 여주이씨 문중 소장.매산(梅山) 이하진(李夏鎭)의 서첩으로, 천금물전(千金勿傳)이란 첩의 명칭은 위부인(衛夫人)이 왕희지에게 써 준 「필진도」말미의 '千金勿傳 非其人'에서 유래된 것으로 매산의 다양한 필치를 살필 수 있다. 여주이씨 일문은 이상의, 이지정,이지천 이래 필법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이하진을 거쳐 아들 이서 대에는 동국진체가 탄생함으로서 한국서예사에 획을 긋기도 했다.
현금명(玄琴銘) 서안명(書案銘)
옥동행서 玉洞行書
1712(肅宗38), 지본묵서, 117×78cm, 여주이씨 문중 소장.
옥동(玉洞) 이서(1622-1723)의 행서로 아들 원휴(元休)에게 주기 위해 『논어』「요왕(要曰」편의 첫 장을 쓴 것이다.
조식신도비명[남명비첩]
1920, 첩, 목판본, 진양하씨 문중 소장.
남명 조식(曹植, 1501-1572)의 신도비문을 목판에 새겨 간행한 책.
남명의 묘역에 세워지게 된 비문에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음이 세상에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이 비는 조선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 추앙되는 간재(艮齋, 1841-1922)가 1900년대 초반에 글씨 쓴 것을 새긴 것이다.
정치적 격량에 따라 훼철과 재건의 역사를 담고 있는 남명비를 판각한 이 책은 특히 경상우도 지역의
정치적 변화와 그 추이를 살필 수 있는 귀한 자료이다.
임영내간첩 [임창계선생묵보국자내간] 林泳內簡帖 [林滄溪先生墨寶國子內簡]肅宗年間, 帖, 지본묵서, 45.2×33.5cm, 여주박씨 문중 소장.창계 임영이 생전에 어머니, 부인 등의 여성들과 주고 받았던 한글간찰 15편을 모아 엮은 간찰첩.
임영서첩[창계수묵] 林泳書帖 [滄溪手墨]
1688(肅宗14), 첩, 지본묵서, 45.2×33.5cm, 여주박씨 문중 소장.
창계 임영이 그의 숙부에게 보낸 간찰.
선적 先跡
年代未詳, 첩, 지본묵서, 33.0×18.8cnm 여주박씨 문중 소장.
7언율시를 해서로 쓴 후 첩해 둔 것이다.
2 1
이만부전서[식산당전법] 李萬敷篆書
1723(경종3), 첩, 42.8×27.5cm, 연안이씨 문중 소장.
석산 이만부의 고전첩(古篆帖)으로 모두 2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이만부의 고전(古篆)은 아버지와 같은 시기에 활약했던 미수 허목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만부는 바로 이 고전을 한 세대 뒤에 계승하여 새롭게 창조하였다.
4 3
6 5
8 7
이만부고문 李萬敷古文18세기, 첩, 지본묵서 · 紙本白書, 51.5×25.5cm, 연안이씨 문중 소장.발문이 없어 쓴 시기를 알 수 없다. 모두 3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첫 번째 글은 6면, 두 번째 글은 4면,세 번째 글은 7면으로 되어 있다. 이 첩 역시 미수 허목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식산당전법』에 실린 글씨보다는더 작은 글씨이다. 미수는 자신이 연구하고 써 온 篆書를 고문(古文)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고문은 소전(小篆) 이전의 모든 글자를 말한다.이후 남인의 서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서인들이 진나라의 이사(李斯)를 거쳐 당나라의 이양빙(李陽氷)으로 전수되는 옥저체(玉箸體)를 숭상하였던 것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이 첩의 제목을 고문(古文)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허목의 서풍(書風)을 이만부가 계승하였다는 자부심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풍양조씨가숙편액글씨[조씨가숙]풍양조씨 문중 소장으로 풍양조씨 검간가문에서 운영한 가숙의 편액 글씨로 '조씨가숙(趙氏家塾)' 네 글자를 전서 대자(大字)로 썼다. 필자는 미상인데 미수 허목의 글씨일 가능성도 있다.
이충무공명량대첩비
1685(肅宗 11), 첩, 탁본, 28.2×22.3cm, 해남윤씨 윤재충 소장.
명량대첩비이 탁본첩으로 이순쉰이 명량에서 왜선을 대파한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1688년(숙종14)에 세워진 비로,
높이는 2.67m, 폭은 1.14m나 된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복궁 근정전 뒷뜰에 묻혔다가,
해방 후 발견되어 1950년 비를 다시 세웠다.
우곡잡영(愚谷雜詠) 중 「오봉당(五峯塘)」
송준길필첩 [동춘필첩]17세기, 帖, 지본묵서, 54.2×34.5cm, 晋州鄭氏 문중 소장.동춘당(同春堂) 송준길(1606-1672)의 행서와 초서를 수록한 서첩으로 앞 부분은 행서로 주자의 학고재명을 쓰고, 뒷 부분은 초서로여러 편의 시를 필사하였다. 각 시의 제목은 초서로 여러 편의 시를 필사하였다. 이 첩은 송준길이 나 아니면 우복집안의 어느 누구에게써 준 것이 오늘날가지 전해오는 내력으로 보인다. 실제로 위에 든 제목의 시들이 『우복집』권1에 실려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확인해 준다.
우곡잡영 중 「계정(溪鼎)」
송준길간찰첩 [동춘간첩]17세기, 지본묵서, 40×27cm, 대전 선비박물관
송준길유묵첩[문정공유묵]17세기, 첩, 지본묵서, 35×22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동춘당 송준길의 초고를 모아놓은 유묵첩으로 모두 27장으로 되어 있다.초고본의 성격 그대로 모두 초서로 필사하였다. 맨 앞에 나오는 혜릉지(惠陵誌)는 거의 개서한 흔적이 없지만,그 뒤의 글은 모두 고친 흔척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송준길해서첩[동춘필적]17세기, 첩, 지본묵서, 42.3×26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모두 8장으로 성첩되어 있고, 한 면에 3자씩 해서로 남색지에 묵서로 필사하였다.
동춘당이 손자 병하에게 보낸 서간
은진송씨 간찰첩[전세휘필]
지본묵서, 39.3×29.7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
수록된 간찰의 수는 모두 36점으로 송준길부터 송종오까지 무려 9대이 간찰을 수록하여 성첩하였다.
송준길 해서첩[선조유필]
1670, 첩, 41.7×21.6cm, 대전 선비박물관.
경술년 3월에 송준길이 손자 송병하에게 송화(松花)가루로 써서 주었다.
내용은 수신에 관한 잠언의 성격으로 송준길 해서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3 2 1
<민유중의 서간>
은진송씨가장간찰첩[고간]
朝鮮後期, 첩, 지본묵서, 44×28cm, 대전 선비박물관.
건 · 곤(乾坤) 2책으로 성첩되어 있다.
<김만기의 서간>
송준길초서[욕구첩欲驅帖]
1669(顯宗10), 176.5×77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
칠언절구를 초서로 써서 기유년(1669) 봄에 손자인 송병하에게 준 것이다.
첫 구의 두 글자를 따서 욕구첩이라고 하였다.
송준길행서[원림첩園林帖] 송준길행서[종고첩鐘鼓帖]
顯宗年間, 87×28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
동춘당의 해서
송준길필첩[동춘필첩]顯宗年間, 첩, 지본묵서, 44.5×31cm, 대전 선비박물관.동춘당 송준길의 해서, 행서, 초서 글씨를 수록한 필첩으로 모두 58면이다. 해서는 대자로 한 면에 한짜씩 20면, 행서는 중자로 한 면에 두자씩 24면, 초서는 소자로 3행 10면으로 성첩되어 있다.
<동춘당의 초서>
<동춘당의 행서>
<동춘당이 손자 며느리(안정나씨)에게 보낸 안부편지>
은진송씨가장언간첩[선세언독先世諺牘]조선후기, 첩, 지본묵서, 35.1×25.3cm, 대전 선비박물관 소장.오숙재 송익흠이 은진송씨 가문의 선조들이 주고 받았던 한글 간찰들을 모아 엮은 한글 간찰첩.동춘당으로부터 4대 백여 년에 걸친 선조들의 편지를 한 책으로 엮은 것으로 여기에는 편집자 송익흠 자신이 쓴 편지와고조모나 어머니의 친정에서 온 편지들도 포함되어 있다. 총 37점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동춘당이 아내 진주정씨에게 보낸 답서>
● 인용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25주년 기념 고문서특별전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암수록花菴隨錄 (0) | 2019.05.03 |
---|---|
일본의 미학, 우키요에 (0) | 2019.04.25 |
고문서에 담긴 생활과 문화 (2) (0) | 2019.04.22 |
고문서에 담긴 생활과 문화 (1) (0) | 2019.04.18 |
의식음악도(儀式音樂圖) (0) | 2019.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