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504) 썸네일형 리스트형 화조화가 이한복 작업중인 무호 이한복, 「매일신보」, 1929년 8월 15일자, 2면.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1897~1944)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로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敎 일본화과日本畵科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안고 등단했다. 당시는 대개 동양화가들이 스승에게 개인적으로 그림을 익혔고, 더욱이 전통적으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의식을ㄹ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한복의 일본 유학은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는 등단 초부터 엉겅퀴 같은 초화류와 학, 오리 같은 동물화를 그려 근대기 화조동물화 분야의 유행을 선도한 인물이었다. 도쿄미술학교 학생 시절에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관설 조선미술전람회의 첫 회부터 동양화부에 출품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불과 20대 후반에 '동양화단의.. 홍세섭의 영모화 19세기 후반의 화단은 여항문인閭巷文人을 비롯한 중인들이 서화 수요층으로 급부상하며 커다란 변화를 보인다. 중인들은 사대부 문화를 지향하면서 사군자화나 괴석도를 선호하였다. 동시에 일부 사대부화가들은 서화를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아닌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태도로 접근하면서 화훼나 영모를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아속공상雅俗共嘗의 새로운 화풍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 중기까지 사대부 화가들이 완물상지로 인해 수묵의 관념산수화에 갇혀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 시기에 들어 확연하게 다른 시대적 미감과 취향을 보여준다. 반면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신명연申命衍(1809~1886), 남계우南啓宇(1811~1890), 홍세섭洪世燮(1832~1884) 은 대표적 사대부화가로,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화.. 최북의 화조영모화 최북, , 1747년, 비단에 담채, 29.3×40.2cm, 국립중앙박물관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은 조선 후기 영 · 정조대 활동한 화가로 사대부 출신도 아니요, 도화서 화원 가문도 아니었기에, 그의 가계나 생애를 알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시 · 서· 화에 능했으며 문사적인 교양과 풍모를 갖춘 18세기 중엽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직업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문인화가에 버금가는 사인 의식士人意識을 지녀, 당시 '예원藝苑의 총수'라 불리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현재玄齋 심사정沈師 正(1707~1769), 연객烟客 허필許佖(1709~1761) 등의 사대부 출신 서화가들과 교유하면서 남종 문인화풍을 기반으로 한 감각 넘치는 작품을 그려냈다. 이들은 .. 까치 호랑이 '호랑이와 까치가 함께한다'고 하여 작호鵲虎 혹은 호작虎鵲이라 번역되는 '까치호랑이'는 한국에서 명명되어 사용이 확산된 용어이다. 한국 민화의 대명사로도 불리는 '까치호랑이'의 이미지는 1960년대부터 알려지기 시 작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임인년 호랑이해를 기념하여 국립박물관(현재 덕수궁) 제5실에서 개최된 《호도虎圖》 전시(1962. 2. 1~3. 17.)는 까치호랑이 그림을 알린 최초의 전시였다. 당시 전시에는 총 13건의 작품이 출품되었 는데, 동아일보 2월 9일자 지면에 전시회 소식이 실렸다. 오른쪽의 무관 흉배 속 동물 기록에 나타난 흉배제도 흉배의 착용이 시작된 것은 당대唐代부터이고,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명대明代에 이르러서이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명나라의 흉배 제도는 1393년(홍무 26)에 제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607년에 간행된 《삼재도회三才圖繪》를 보면 흉배에 표현되는 동물이 《대명회전》과 달리 품계에 따라 분리 되거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청대에는 1690년에 간행된 《대청회전大淸會典》과 18세기의 《청회전도淸會典圖》 를 통해 흉배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데, 큰 틀은 유지한 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명 · 청대의 흉배제도를무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직후 명나라의 조정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도록 .. 미술에 나타난 봉황 ※ 아래 내용 모두는 한정희 외 著 《꽃과 동물로 본 세상》의 내용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중국의 봉황 기록과 도상의 형성 과정 , 강소성 서주 출토, 한대 화상석 봉황에 대한 관념이 변화하면서 점차 봉황의 도상이 정립되었고, 봉황의 속성에서 비롯된 상징적 의미 또한 그 내용이 풍부해졌다. 봉황에 대한 기존 연구에 따르면 명대 초기에 이르러서야 궁정에서 비로소 봉황 그림 이 다른 화조화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회화 주제로 그려졌다고 밝혀놓았다. 송대 황실의 서화 목록인 《선화 화보 宣和畵譜》(1120)에서 화조화는 무수히 확인할 수 있지만 봉황도는 찾아볼 수 없는 데 반해, 용 그림은 이미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며 독립적인 주제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영모화조화 연 구를 통해 송대와 원.. 반계 유형원 반계서당 원서原序 정치가 쇠퇴한 이후로 통변通變의 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들은 사려를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필히 곤궁한 상태에서 화평한 상태로 돌리기를 도모하는데, 이 어찌 나 한 몸의 사욕과 관계가 있겠는가? 맹자는 "지금은 행하기 쉽다" 라고 말했으니, 착오와 오류의 잘못된 습관에 젖어서 능히 빼어난 업적을 이루기란 있을 수 없다. 고금에 걸쳐 치세를 말함에 누구나 적폐를 청산하고 좋은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안이한 태도로 궁지에 빠지길 먼저 밝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법은 변통을 구하지 않고 집착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백가지 아름다운 정책도 실제 일에 유익함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한번 시험 삼아 논하건.. 자연과 풍류 自然과 風流 거창 수도산 고비선원 오미자밭 사이로 바라본 단지봉 사면. 가북 고비마을 어귀에 피어난 접시꽃 경남 고령 당항포 경남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근 일 년여만에... 정성과 대화를 차려내는 두 분. 엄대장의 고향이 이곳 고령이렸다...! 당항포 야간 산책 배둔리에 세워진 3.1운동 창의탑. 경남 하동 송림 여행 동지들 섬진강 백사장 구례군 간전면 중대리 「섬진강판소리문화학교」를 찾아서 7월의 도라지꽃 백운산 자락을 타고 내려온 풍부한 청류 속으로 텀벙.... 섬진강판소리문화학교장 김소현 교장과 함께. 앞줄 중앙의 고 강도근 선생을 비롯 쟁쟁한 명창들이 함께한 모습이다. 뒷줄 맨 왼쪽은 최종민 교수. 오랜만에 보는 박정선 명창의 장원기 오랜만의 방문에 화답해주시는 김소현 명창의 소리공양. 강도근 선..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3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