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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에 더위를 씻다 <2> 이정李霆 1662년, 비단에 수묵, 119.1×57.3cm, 국립중앙박물관. 암반 위에 솟은 울창한 대나무 몇 줄기가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뻗쳐 나갔다. 길게 뻗은 유연한 줄기 위에 총총히 맺힌 대 잎들은 길쭉한 모양으로 아래로 축축 늘어져 있다. 대나무 잎은 유난히 길쭉하고 힘이 없어 보인다. 전면에 나타나는 짙은 줄기들 위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또 다른 줄기들이 있다. 좀더 높게 솟아오른 이 줄기들은 거리감을 표현하려는 듯 얼핏 보면 그림자처럼보이지만 묘한 운치를 느끼게 한다. ‘천계임술(天啓壬戌)’이라고 쓰여 있어 이정이 82세 때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대나무 그림은 대개 굵은 줄기를 가진 통죽들을 그린 것들이다. 이는 조선 초에 가는 줄기를 가진 세죽을 그리던 전통과는..
옛 그림에 더위를 씻다 <1> 심사정(沈師正), 1707~1769 |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33.5 × 41.7cm, 국립중앙박물관 근경에 보이는 큰 나무는 《개자원화전》 중에 실린 원대의 문인화가 오진의 수지법을 응용한 듯. 이 작품에서는 독필 뿐 아니라 지두화법까지 동원되었는데, 청나라 고기패가 잘 하였던 이 기법의 수용은 조선화단의 관심이 상당히 진취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조선화단에도 남종문인화가 정착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한복(李漢福), 1897∼1940, 옥당부귀도(玉堂富貴圖), 동리가경도(東籬佳景圖) 가리개 2폭병 1917년, 비단에 채색, 각 158.5 × 52.7cm, 국립고궁박물관. 두 폭 모두 기명절지도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각종 그릇류와 절지 즉, 각종 화훼류를 모은 것으로 대개는 ..
알폰스 무하 <2> '무하 스타일'로 알려진 알폰스 무하를 상징하는 고유의 디자인은 편집자와 출판사들이 잡지나 책 또는 달력의 표지디자인을 주문하면서 탄생했다. 무하는 후원자였던 쿠엔 벨라시 백작의 후원이 중단되면서 1891년부터 표지디자인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지내던 그가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하려면 작품 수수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무하의 회고록을 보면 그가 1891년부터 그다음 해까지 궁핍함으로 얼 마나 고된 시기를 보냈는지 알 수 있다. 그 후 1803년부터 1903년 사이 '무하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요 작품이 탄생한다. 당시 작품은 아르누보 스타일의 전성기와 맥락을 같이하지만, 무하는 자신의 작품 이 세기말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시대의 산물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무하는 자신이 작품이 체코의 ..
알폰스 무하 <1> 체코 출신 화가 알폰스 무하(1860~1939) 이름은 '무하 스타일'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무하는 19세기 말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무하 스타일이라고 불리게 된 장식예술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알폰스 무하는 오늘날 순수미술과 상업주의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든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무하는 양쪽을 자유로이 오가며 담배 광고 포스터의 삽화뿐만 아니라 체코 미술 역사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역사화 연작 를 창작하기도 했다. 무하의 삶을 들여다보면 세기말 파리의 상황에 대해 완벽히 탐구하고 이해할 수 있다. 성공한 예술가에겐 더할 수 없이 멋진 시기였지만, 작품을 인정받지 못한 20여 년간 파리에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다. ··· 무하는 상업용 삽화 디자인으로 성공한 까닭에 폴 세잔, 클로드 모네, ..
불교 공예품 경주 불국사 금고, 이만돌, 1769년, 지름 56.5cm, 경구 불국사 소장 금고金鼓는 청동으로 만든 징 모양의 쇠북으로 나무 봉으로 쳐서 예불의 시작을 알리는 사찰 예불의 필수품이다. 특히 금고에는 기부자의 이름과 제작 동기, 날짜가 음각으로 새겨지는 전통이 있었는데 조선 전기에는 앞 시대의 전통을 이어받는 금고가 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조선 전기에는 새 절을 창건 하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조선시대 금고로는 조선 후기의 주종장 이만돌이 1769년(영조 45)에 제작한 와, 1771년(영조 47)에 제작한 가 있다. 두 금고는 비슷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를 보면 전면에 동심원을 둘러 세 구역으로 균일하게 나누고 맨 바깥의 원 권역에 범자 아홉 개 를 둘렀다. 금고 뒷..
민묘 조각상 최명창 묘 왼쪽 동자석, 16세기 전반, 높이 86.7cm, 경기 양주시 덕계동 조선시대에는 묘제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이는 신분 사회의 위계질서를 명확히 하면서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경국대전》에는 "경성京城에서 10리 이내와 인가의 100보步 이내에는 매장하지 못한다"라고 제한하였고 분묘에 대해서는 "경내의 구역을 한정하여 밭으로 가는 것과 목축을 금한다"라며 그 규묘도 제한해 놓았다. 묘의 범위는 종친 1품은 사방 100보, 종친 2품(문무관 1품)은 사방 90보로 하고 이하 10보씩 줄여 종친 6품(문무관 5품)은 사방 50보, 문무관 6품 이하 및 생원 · 진사는 사방 40보로 한정하였다. 분묘의 조성에서는 봉분 아래를 보호하는 호석護石(왕릉의 병풍석)이나 봉분을 에워싸고 있..
조선왕릉 석조각상 조선왕릉의 석조 조각상은 통일신라시대 원성왕릉(괘릉)과 고려 공민왕릉의 전통을 이어 받으면서 송나라의 유교식 묘제를 참고하여 조선식으로 세련시킨 것이다. 이에 대한 규정은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자세히 나와 있다. 《국조오례의》는 국가에서 행하는 다섯가지 의례에 대한 준칙을 세운 것으로 그중 하나인 흉례凶禮에 관한 91개 조항 중 치장治葬조에 능침의 문신석과 무신석에 대해 자세히 규정해 놓았다. 명칭은 옛 문헌에는 문석인, 무석인으로 되어 있지만 오늘날에는 주로 문신석, 무신석으로 불리고 있다. 장조 융릉 왼쪽 문신석 뒷면, 1789년, 높이 217.7cm, 경기 화성시 안녕동 (좌), 태조 건원릉 왼쪽 문신석, 1480년, 높이 232.3cm, 경기 구리시 인창동 (우)..
인상주의 정원 2 (上), 에두아르 마네, , 1874년 (下),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 1874년. 이 그림들은 모네가 그린 마네의 초상과 더불어 인상주의의 역사에서 권위 있는 화가 셋이 아르장퇴유에 위치한 모네의 최초 정원에서 각자 작업을 했던 결정적인 순간의 기록이다. 물론 르누아르는 훗날 이 그림을 화실에서 그렸다고 말했지만, 그림의 현장감으로 보아 설득력은 떨어진다. 모네는 자신이 르누아르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네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기억했다. "저기 있는 저 친구는 재능이 전혀 없군. 자네가 친구로서 저치에게 그림을 그만두라고 주언해주게" 이런 미묘한 경계 속에서도 마네와 르누아르는 둘 다 카미유의 삼색 부채를 이용한 인상적인 (그리고 아마도 정치적인) 그림을 그렸고, 실제 모네가 정원일을 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