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인상주의 정원 2

 

(上), 에두아르 마네, <정원에 있는 모네 가족>, 1874년

(下),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아르장퇴유의 정원에 있는 카미유 모네와 아들 장>, 1874년.

 

이 그림들은 모네가 그린 마네의 초상과 더불어 인상주의의 역사에서 권위 있는 화가 셋이 아르장퇴유에

위치한 모네의 최초 정원에서 각자 작업을 했던 결정적인 순간의 기록이다. 물론 르누아르는 훗날 이

그림을 화실에서 그렸다고 말했지만, 그림의 현장감으로 보아 설득력은 떨어진다. 모네는 자신이

르누아르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안 마네가 이렇게 속삭였다고 기억했다.

"저기 있는 저 친구는 재능이 전혀 없군. 자네가 친구로서 저치에게 그림을 그만두라고 주언해주게"

이런 미묘한 경계 속에서도 마네와 르누아르는 둘 다 카미유의 삼색 부채를 이용한 인상적인

(그리고 아마도 정치적인) 그림을 그렸고, 실제 모네가 정원일을 하는 모습을 담은 것은

마네의 이 그림이 유일하다고 알려졌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뿌리개를 든 소녀>, 1876년.

 

아이의 키 높이에서 바라보고 그린 르누아르의 이 그림은 순진무구함의 정수를 보여준다.

르누아르는 최초의 인상주의 전시회 이후에 심각한 재정난을 겪었던 터라 이런 그림이 쏠쏠한 수입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아마 이런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특기도 발견했을 것이다.

환기력 있는 그림에 단순한 감상주의를 넘어서는 생명력을 부여한다.

 

 

 

 

 

에두아르 마네, <꽃 속의 소년>, 1876년.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였던 에른스트 오슈데의 아들이다.

마네가 의도적으로 장식성을 강조한 이 작품은 파리 근교의 몽주롱에 있던 오슈데의 대저택 문 위에 걸기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오슈데가 파산하기 전에 구상했던, 땅과 정원의 아름다움을 실내로 옮겨와서

조화로운 환경을 조성하려고 했던 인상주의 기획의 일환이었다.

 

 

 

 

클로드 모네, <하얀 칠면조들>, 1876~1877년.

 

오슈데가 의뢰한 몽주롱에 있는 로탕부르 저택 부지 풍경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패널이다.

일본 판화의 장식적인 효과에서 명백히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은 마네가 그린 몽주롱의

장미 정원과 연못 그림, 총을 쏘는 사냥꾼들 그림과 함께

식당을 꾸밀 목적으로 그려졌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바르주몽의 장미 정원>, 1879년.

 

모네와 마네, 어쩌면 시슬레가 몽주롱의 오슈데에게 후원을 받았듯이, 르누아르도 은행가 폴

베르나르에게서 노르망디의 바르주몽에 있는 그의 집에 패널화를 그리고, 또 이

그림의 주제인 화려한 장미 정원을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뒤랑 튀엘의 딸들>(마리 테레즈와 잔)>, 1882년.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상이었던 뒤랑 뤼엘은 르누아르에게 디에프 근처에 있던 자신의 휴일 별장에서

아이들을 그려달라고 했다. 기 그림에서는 친밀한 가족 관계라는 주제가 어릉거리는 햇빛의

움직임으로 형성된 전체적인 통합성과 잘 들어 맞는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

 

몽마르트르의 이 오래된 카페 정원에서는 아카시아나무의 가느다란 잎을 통과해 어른거리는 햇빛이

여기저기 얼룩덜룩한 빛 웅덩이를 만들며 장식적인 통일성을 이루어, 춤추고 수다 떠는 사람들의

사교적인 조화, 즉 예술가(르누아르의 화가 친구들)와 수공업자(현지 몽마르트르의 재봉사들)의

상징적인 파트너 관계를 은근히 보완해준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그네>, 1876년.

 

전통적으로 미술에서 그네는 여성의 변덕을 상징하고, 로코코 미술에서 그네는 역동적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그네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르누아르는 몽라르트르의 자기 집 정원에서 친구들

을 그리면서 어릴 적의 순수함과 수줍은 교태를 동시에 찬양하고 즉흥성의 효과가 있는 리드미컬한

구성과 어울리는 균형 잡힌 조화의 세계를 제시한다.

 

 

 

 

에두아르 마네, <라튀유 영감의 레스토랑>, 1879년.

 

'리튀유 영감'은 오래전무터 파리 바티놀 지구에 있던 식당의 이름이다. 

마네는 이곳의 정원 테라스를 배경으로 대조적인 사회적 신분 유형, 즉 젊은 남성-식당 주인의 아들이 

모델이었으나 화가의 덧옷을 입혀 보헤미안으로 그렸다-과 점잖은 부르주아 여성-오펜바흐의 사촌인

주디스 프렌치가 모델이다-을 보여준다. 웨이터는 오른편 뒤쪽에서 서성인다. 정원의 식물들이 식당

손님 자리까지 서성인다. 정원의 식물들이 식당 손님들의 자리까지 침범하는 것처럼, 그림 속의

'화가'는 나뭇잎을 닮은 손가락과 끝이 뾰족한 크라바트로 여성의 프라이버시를 침범한다.

 

 

 

 

베르트 모리조, <무도회를 위해 차려입은 젊은 여인>, 1879년.

 

인상주의 화가들과 '사실주의' 작가 및 비평가-롤라, 도레, 에드몽 드 공쿠르, 모파상, 폴로베르 등-의

유대관계는 1870년대와 1880년대에 유명한 출판인의 아내였던 샤르팡티에 부인의 '살롱'에서 형성

되었다. 이 살롱에는 강벹나와 클레망스 같은 공화주의 정치인도 자주 드나들었다. 샤르팡티에가

출판하여 가장 성공을 거둔 책인 졸라의 《목로주점》에 실린 르누아르의 삽화는 전형적으로 개인

적인, 나나와 그녀의 친구들이 거닐던 파리의 가로수길을 끝없이 이어진 정원처럼 표현했다.

모리조의 그림과 비슷하게 유행에 민감한 여성과 당대에 온실에서 인기 있던 진달래의

연관성을 암시하면서 심리적 깊이를 표현한 이미지는 졸라와 모파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묘사하기에 적절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몽마르트르, 코르토 거리의 정원>, 1876년.

 

르누아르가 1875년에 몽마르트르 코르토 거리 12번지에 집을 빌린 것은 거기에 딸린 널찍하고

반쯤 야생적인 정원 때문이었다. 이 집에서 1년 반 동안, 적어도 여름철에는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다.

일본 판화의 파격적인 구도에서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을, 아마도 르누아르는 위층 창문에서

내려다보며 그렸을 것이다. 그림 속의 달리아는 아르장퇴유에 있는 모네의 정원에서

가져온 덩이줄기에서 자란 것으로 짐작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습작(햇빛 속의 누드)>, 1876년.

 

크르토 거리의 정원에서 그린 이 유명한 작품은 1876년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가장 혹독한 평을

받았다. 비평가 볼프는 주변의 나뭇잎이나 풀과 구별되지 않은 피부에 대해 '녹색과 보라색 반점

으로 뒤덮여 썩어가는 살덩어리' 라고 썼다. 졸라가 소설에서 르 파라두 정원에 있는 일반을

묘사한 것처럼, 르누아르의 이 그림에서도 인물과 정원은 하나가 되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정원의 니니>, 1875~1876년.

 

르누아르는 대개 현지의 여성을 모델로 택했다. 이 그림에서는 몽마르트르 소녀인 니니 로페즈가

모델이었다. 그녀는 르누아르의 <어머니와 아이들>에서도 모델을 섰는데, 르누아르는 공원을

배경으로 유행에 빈감한 인물들을 그린 이 작품을 판매하여 코르토 거리에 있던 집세를 낼 수

있었다. <정원의 니니>에서는 니니가 좀 더 시골 사람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배경은

르누아르가 코르토 거리의 정원에 꾸몄던 채소밭으로 추정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공사 중인 사크레 쾨르 대성당이 보이는 몽마르트르의 정원들>, 1896년경.

 

몇몇 인상주의 회화는 당대의 상황을 묘사한 흥미로운 역사적 기록이다. 르누아르가 브뤼야성의 정원에서

당시 공사중이던 사크레 쾨르 대성당을 바라보고 그린 이 그림이 좋은 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도 나무들로

이루어진 프레임 때문에 파리가 전원 지대처럼 보이고, 1870~1871년의 패전으로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할 목적으로 건설된 이 비잔틴 양식의 대성당도 전원 풍경의 일부로 흡수된다.

 

 

 

 

마르샬 카유보트, 공사 중인 사크레 쾨르 대성당이 뒤로 보이는 몽마르트르에 있던

르누아르의 집 정원에서 겨울에 그를 찍은 사진, 1891~1822년경.

르누아르가 사크레 쾨르 대성당을 그리기 몇 해 전에 화가 카유보트의 동생이

부뤼야르 성에서 찍은 것으로, 카유보트와 르누아르의 친분을 짐작할 수 있다.

카유보트는 1894년에 갑자기 사망했는데, 르누아르를 자신의 유언 집행자로 지정했다.

 

 

 

 

 

에두아르 마네, <온실 안에서>, 1879년.

 

개인 온실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신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네가 동료 화가인 로젠이 소유한

온실 겸 화실에서, 친구인 쥘 길메와 그의 미국인 아내-파리에 최신 유행하는 의상점을 소유했다.-를

그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 부부는 정신이 딴 데 팔린 것처럼 보인다.

무성하게 자란 온실 식물들은 잎들이 벤치의 장식이나 옷 주름과 장식적으로 연계되면서

살아 있는 듯 보이는데, 이는 졸라가 《쟁탈전》에서 묘사했던 온실을 상기시킨다.

 

 

 

 

에두아르 마네, <온실에 있는 마네 부인>, 1879년.

 

온실에서 그렸지만, 스케치러럼 분방한 필치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네가 믿음직스러운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에게 느끼던 애정이 배경의 아기판투스 꽃을 통해

암시되는데, 이 식물은 보통 실내에서 자라고 '아가페'(관능적이기보다 공감적인 사랑)에서 이름을 따왔다.

 

 

 

 

에두아르 마네, <잔: 봄>, 1881년.

 

사계절 연작으로 기획된 이 그림이 모델은 여배우인 잔 드 마르시다. 유행하는 의상과 유행하는 원예가

짝을 이룬 작품이다. 여성이 머리에 꽂은 진달래는 손에 든 양산의 아치 형태로 반복되고, 드레스에도

꽃무늬가 담겨 있다. 진달래는 모리조의 <무도회를 위해 차려 입은 젊은 여인>에도 나왔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장미꽃 사이에서(클라피송 부인의 초상)>, 1882년.

 

증권 중개인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레옹 클라피송의 아내를 그린 첫 번째 초상인데,

꽃이 만발한 배경은 클라피송 부부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들은 르누아르에게 더

점잖은 그림을 요구했고, 르누아르는 차분하면서도 다채로운 색상을 배경으로

크라피송 부인을 다시 그렸다.

 

 

 

 

앙리 제르벡스, <발테스 드 라 비뉴 부인>, 1889년.

 

사교계에서 인기를 끌었던 화가 제르벡스는 르누아르의 친구였고,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에서 춤추는 화가로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파리에서 유명했던 창녀(졸라의 소설에 등장하는

'나나'의 여러 모델중 한 사람)를 그린 이 그림은 정원이라는 모티프와 인상주의 회화에서

햇빛을 묘사하는 수법이 1880년대 후반에 이미 '아카데미' 미술로

흡수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르망 기요맹, <다미에트, 오래된 집들 뒤의 정원>(세부), 1882년경.

 

1870년대에 기요맹은 풍투아즈에서 피사로를 중심으로 모인 비슷한 생각의 화가 및 사상가 집단에

속해 있었다. 피에트, 세잔, 벨리아르, 그리고 동종요법(질병의 원인과 같은 종류의 약을 환자에게

소량 투여하는 19세기식 치료 방법)의 의사이자 훗날 반 고흐의 친구가 된 가세 박사 같은 이들이었다.

그러나 1882년 무렵부터 기요맹은 이베트 계곡의 오르세 근처 다미에트에서 그림을 그려 농촌모티

프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켰다. 밝은 색조가 특징인 이 그림은 봄철의 다미에트 정원 풍경을 보여준다.

 

 

 

 

장 프랑수아 밀레, <정원에서>, 1860년경.

 

가족 정원 소재를 그린 작품 중 하나로, 시골 생활의 미덕을 찬양했던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색채가 강하게 배어 있다. 어머니가 바느질을 하는 동안, 아이는 채소밭에 접근하려는 암탉을 쫓고,

오른쪽에는 전통적으로 생산적인 노동의 상징인 벌통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에두아르 마네, <세탁일(세탁부)>, 1875년.

 

마네의 절친한 친구인 말라르메는 세탁부와 눈을 크게 뜬 아이가 있는 이 여름 정원에 대해 '공기가

분위기를 장악하고 사실적이다'라고 평했다. 또 그림 속 두 인물은 인상주의자들이 새로운 공화정의

'활력 넘치는 현대의 노동자들' 이고 인상주이 미술이 '가장 단순한 완벽성을 회복한 시각'이라는

말라메르의 정의를 상기시킨다. 이 그리은 뒷날 모리조의 소유가 되었다. 모리조는 파시에 있던

자신의 살롱 겸 화실에, 벨뷔의 정원을 그린 마네의 그림과 함께 걸어두었다.

 

 

 

 

베르트 모리조, <빨래를 너는 세탁부>, 1875년.

 

젠빌리에의 들판에서 펼쳐지는 소규모의 시장 원예와 노동으로서의 세탁을 묘사한 모리조의 분방한 붓질은

이곳에 부는 미풍마저 느껴지게 한다. 센강의 하수를 이용한 관개 계획은 논란 끝에 

 1878년에 프랑스 원예협회의 승인을 얻었지만, 이 그림에는 그런 사정을

알려주는 장치가 전혀 없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이에르, 채소밭에서, 묘목에 물을 주는 정원사들>, 1879년 이전.

 

동료가 물을 더 길어오는 동안, 한 정원사가 맨발로 굳건히 땅을 밟은 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 채소밭이 있던 이에르의 브리 지역은 5월까지도 서리가 내렸기 때문에 포플러나무를 배경으로

높이 둘러싸고 있는 벽은 카유보트 가족의 농작물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정원사>, 1877년.

 

카유보트으 이에르 저택 부지에 있던 채소밭을(그의 그림에서 흔히 보는) 극적인 시점에서

그린 또 다른 작품이다. 왼쪽 가장자리의 꽃을 꺾어 저택에 필요한 꽃다발을 조달했을 것이다.

 

 

 

 

카미유 피사로, <루브시엔, 꽃이 핀 과수원>, 1872년.

 

피사로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피해 1870~1871년에 런던으로 '망명'했다가 다시 감깐 루브시엔으로 돌아갔다.

전쟁 중에 프로이센군이 그의 집을 약탈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봄철 과수원을 배경으로 부활을 노래한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에르미타주의 채소밭>, 1874년.

 

피사로는 1860년대 중반에 살았던 우아즈의 작은 마을 퐁투아즈로 1872년에 이사했다.

이 그림에서는 여러 과일과 채소를 동시에 재배하는 현지의 특징적인 농촌 정원을 보여준다.

여분의 농산물을 지역 시장에 내다팔 때에는 바구니에 지고 가거나 당나귀에 실어 날랐다.

작은 붓질과 색깔 있는 그림자 등, 피사로의 완숙해진 인상주의 양식이 뚜렷이 드러난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에르미타주의 언덕>, 1873년.

 

풍투아즈에서 피사로는 에르미타주라는 오래된 지구에 살았다. 여러 농촌 정원을 가로지르는 이 풍경의

오른쪽 상단에;는 마리아 드렘의 저택도 보인다. 정원과 건물, 농민의 굽은 등과 저 너머 둥근 언덕

등의 형태가 상호작용하며 인간과 자연이 긴밀하게 이루는 조화를 표현했다.

 

 

 

 

(좌), 알프레드 시슬레, <안개 자욱한 아침>, 1874년.

국화와 채소가 줄지어 심어진 전통적인 시골의 '다종 재배' 정원에서 과실수 한 그루가 이른 아침 안개 속에

어려풋이 드러난다. 그러나 시슬레가 1870년 초에 살았던 이곳 파리 근교이 부아쟁 루브시엔 지역에서는

이런 소규모 농촌 정원이 상업용 대규모 농장에 급격히 밀려나고 있었다.

(우), 로베르 앙투안 팽숑, <시판용 원예농원>, 1921년에 전시.

피사로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루앙의 산업화된 부둣가를 그렸지만, 도시 주변에서 종 모양

덮개를 줄지어 씌워 재배하는 집약적인 형태의 현대식 원예농원은 그리지 않았다. 이 작품은 루앙의

화가 팽숑이 그런 시판용 농원을 그린 것으로, 팽숑은 색채가 풍성한 특유의 화풍을 발전시켰다.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의 에르미타주>, 1867년.

 

다소 음울한 색조이 물감을 두텁게 칠하고 팔레트 나이프로 바른 이 작품은 피사로가 퐁투아즈의

전통식 정원을 그린 초기작으로 그림이라는 것도 화가의 '노동'임을 명확히 각인 시킨다.

 

 

 

 

카미유 파사로, <퐁투아즈, 봄, 채소밭과 꽃피는 나무들>, 1877년.

 

 

 

 

카미유 피사로, <풍투아즈 근처 에르미타주의의 황소 언덕>, 1877년.

 

피사로는 봄과 가을처럼 과도적인 계절을 자주 그렸고, 농촌 정원이 자연 정원과 만나는 마을의 경계 부분이나

전경과 배경을 연결하는 나무들의 열린 '장막' 등을 즐겨 그렸다. 두 작품에는 이런 세 가지 관심사가 모두 담겼다.

<퐁투아즈 근처 에르미타주의 황소 언덕>은 퐁투아즈 에르미타주 뒤편의 가파른 언덕을 담았는데, 전경의 과수

원 저편에서 조그맣게 보이는 두 인물이 이쪽을 바라본다. 1877년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르누아르의 <물랭 드 갈레트>의 '도시 정원'에 비견할만한 '시골 정원' 대작이라 할 수 있다.

 

 

 

 

카미유 피사로, <사과 수확>, 1866년.

 

피사로는 수년에 걸쳐 손질한 이 그림을 1886년의 마지막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했다.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집 혹은 헛간이 드리운 선명한 보라색 그림자가 햇빛과 함께 빚어낸

풍요롭고 장식적인 효과는 일하고 쉬는 여성들을 감싼다. 전경의 중앙 왼편에는, 고목

에서 '어린가지'가 자라고 있어 앞서 살펴본 인상주의에 대한 비유를 상기시켰다.

 

 

 

 

카미유 피사로, <에라니 창문 밖 풍경>, 1888년.

 

피사로는 1884년에 에라니 쉬르 엡트로 이사했다. 그가 당시 쇠라의 영향을 받아 점묘법으로 그린 이 작품에서

신중하게 배치된 양계장과 정원이 비쟁쿠르의 광활한 목초지 풍경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종합과 연결에 대한 피사르의 관심을드러내는 작품이다.

 

 

 

아르망 기요맹, <다미에트, 오래된 집들 뒤의 정원>, 1882년경.

 

 

 

 

카미유 피사로, <설거지 하는 여인>, 1882.

 

피사로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정원에서 일하는 인물들의 여러 모습을 그림에

담았으며,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무정부주의적 비전에 동조했던

자신의 입장을 반영했다.

 

 

 

 

샤를 앙그랑, <크리크토 쉬르 우빌에 있는 원예가의 정원>, 1885년.

 

루앙 출신인 앙그랑은 피사로의 영향을 받았다. 왼편에 쌓인 통나무들, 거친 땅, 가깝고 먼 곳의

나뭇잎, 배경의 집을 함께 배치한 이 그림에서 질감을 다채롭게 묘사한 앙그랑이 이 뒤로

점묘법을 구사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클로드 모네, <레몬나무 아래서>, 1884년.

 

'그림을 그리면서 당신을 생각했소' 모네는 이탈리아 리비에라 해안의 보르디게라 있던

유명한 모레노 정원에서 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알리스 오슈데게게 편지를 썼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장미, 프티 젤빌리에의 정원>, 1889년경.

 

카유보트의 애인인 사를로트 베르티에가 애완견이 지켜보는 가운데

카유보트의 잘 가꿔진 화단에서 스텐더드 장미를 꺾고 있다.

 

 

 

 

클로드 모네, <보르디게라의 빌라>, 1884년

 

모네는 보르디게라의 로마니 길 옆의 정원에서 용설란이 꽃피는 광경을 그렸다.

용설란은 줄기가 길어 향기로운 꽃이 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유로 영어로는 '세기의 식물'이라고 한다.

파리 오페라극장의 설계자인 사를 가르니가 비효프스하임 남작을 위해 지은 빌라가 오른편에 보인다.

 

 

 

 

클로드 모네, <등나무>, 1919~1920년경.

 

모네는 지베르니의 '일본식' 다리에 보라색과 흰색의 등나무를 길렀고, 전통적으로 '우정'을 상징하는 이 꽃을 그린

여러 패널화를 작업하기 시작했다. 그가 고인이 된 친구 로댕의 집인 비롱 저택의 별관을 위해 기힉한 수련 벽화의

위에 얹어놓을 장식용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고, 대신 오랑주리 미술관의

<대장식화> 구상의 원형이 되었다.

 

 

 

 

(좌), 귀스타브 카유보트, <프티 젠빌이에 정원의 하얀색과 노란색 국화, 1893년.

(우), 클로드 모네, <국화 화단>, 1897년.

 

국화는 본래 중국과 일본에서 유래했으나 유럽에서 19세기에 대대적으로 개발되었고, 모네와 카유보트도

여러가지 신품종을 재배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그들은 일본 판화에서 일부 영감을 받아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꽃을 가까이서 바라보는 시점을 택했다. 

 

 

 

 

클로드 모네,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1895년.

 

모네의 정원 그림 중에서 인물이 마지막으로 등장하며, 정원에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여겼던 전통을 암시한다.

국화와 달리아 옆에 선 의붓 딸 쉬잔은 이 무렵 앓던 병으로 결국 1899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한 이 그림은

모네의 초기작인 <정원의 여딘들>에서 꽃을 따고 있던 여성을 떠올리게 한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이에르 연못에서 수련>, 1879년 이전.

 

모네는 아마 카유보트가 그의 가족 정원의 야생 수련을 그린 이 작품을 알았을 것이다.

모네 자신은 연못을 주변 풍경과 함께 그리느라 이런 식으로 구성하지는 않았지만, 카유보트가

사망한 뒤 1890년대 후반부터 이와 비슷한 구도를 거듭 활용했다.

 

 

 

 

클로드 모네, <수련 연못>, 1899년.

 

모네는 1900년에 디랑 뤼엘의 갤러리에 다리가 걸쳐진 수련 연못을 그린 연작을 전시했고, 이 때의 연작은

다시 1899년과 1900년의 작품으로 나뉘었다. 1899년 작품들은 녹색의 색조를 강조하고, 1900년 작품들은

라투르 마를라이크가 개발한 강한 향기의 교배종 수련에서 흔하던 붉은 나뭇잎 뒷면이 두드러진다.

모네는 이런 품종의 꽃을 다양하게 길렀다.

 

 

 

 

클로드 모네, <수련 일몰 효과>, 1907년.

 

모네가 1909년에 뒤랑 뤼엘 갤러리에서 공개했던 '수상 풍경' 연작 중 하나다.

확장된 연못에 수련이 더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고, 해질녘 하늘이 연못에 반사되어 화면을 지배한다.

 

 

 

 

존 싱어 사전트,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세부), 1885~1885년.

 

사전트는 신영국 미술클럽의 중요한 일원이던 미국 화가로, 1876년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를 만났다.

유행가에서 제목을 따온 이 작품을 사전트는 영국 코츠월드에 있는 브로드웨이의 정원에서 그렸다.

사전트가 지베르니 근처에서 모네와 어울리며 그린 후속작과 더불어, 이 작품은 영국에서

인상주의를 확산시키는 촉매 역할을 했다.

 

 

 

 

에두라르 뷔아르, <보크르송 정원>, 1924년.(1937년 재작업)

 

<보크르송 정원에서의 아침>과 함께 클로 세잔의 정원을 그린 또 다른 그림이다.

두 작품 모두 조스 에셀이 구입하여 1939년 뉴욕 세계박람회에 전시되었다. 오래된 포도나무가 보호 하듯이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뤼시 에셀과 말프레드 나탕송, (유명한 문예지 《르뷔 블랑슈》 편집자

타데 나탕송의 남동생)이다.

 

 

 

 

피에르 보나르, <베르농의 장식(베르농의 테라스)>, 1920년과 1939년.

 

보나르가 강 너머로 지베르니가 보이던 베르농 저택의 테라스와 정원을 그린 장식적인 대작 3점 중 하나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화실에 두었다. 사과를 들고 있는 여성은 당대의 이브인 동시에 현대판 포모나라고

할 수 있는데, 보나르의 아내 마르트가 모델이다. 맨 오른쪽의 여성은 그의 연인이었던

르네 몽사티로 추정된다.

 

 

 

 

앙리 미르탱, <내 아들의 초상>, 1913년경.

역광을 받은 자크 마르탱이 햇빛과 그늘 사이에 서 있다. 실내에 있는 아버지를 쳐다보면서도 저 너머

햇살이 가득한 가족 저원-툴루즈 근처 마르퀴롤에 있었다-의 광휘 속으로 빨려 들어 간다.

배경에 보이는 연못은 <마르퀴롤의 연못에 그려진 곳이다.

 

앙리 르 시다네르, <수국>, 1938년.

마르탱의 절친한 친구인 르 시다네르가 제르베루아에 있던 자신의 정원에서 황혼녘의 모습을 그린

여러 점의 그림 중 하나다. 이 그림 속의 테라스에도 나온다. 르 시다네르가 재배하던 당시 갓 개발된

품종인 하이드레인저 카네이션이 피어 있는 '흰색 정원'이 보인다.

 

 

 

 

에밀 클라우스, <과꽃>, 1906년.

 

앙리 마르탱의 친구였고 벨기에 인상주의 그룹 '삶과 빛'의 리더였던 클라우스가 가꾼 '자연식' 정원이다.

앞서 마르탱의 그림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원에서 실내로 빛이 은은하게 비쳐들고, 왼편에는 프랑스식

창문이 정원을 향해 열려 있다.집과 정원의 관계라는 테마는 세기가 바뀔 무렵에 인기를 끌었다.

 

 

 

 

프레더릭 차일드 해섬, <시카고 만국박람회 원예관>, 1893년.

 

미국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인 해섬은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기념하는 박람회의 배경을 이룬 호화로운 대정원을 보여준다.

 

 

 

 

메리 페어차일드 맥모니스, <장미와 백합>, 1897년.

 

남편 프레더릭과 함께 지베르니에 처음 얻은 집인 베슈의 정원에서 완성한 작품이다.

유모차를 타고 있는 화가의 딸을 보여주며 눈부신 여름 햇살을 환기시킨다.

어린 시절과(성모 마리아의 꽃으로 전통적으로 순수함을 상징하는) 백합을 연관시킨

방식은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와도 맥을 같이 한다.

 

 

 

 

프레드릭 칼 프리스크, <정원의 여인>, 1912년경.

 

지베르니즘의의 후기 단계에 속하는 미국인 화가 프리스크는 20세기 초에 지베르니에 거주하며

독특하게 장식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그의 아내는 솜씨 좋은 정원사로, 모네와

좋은 친구가 되어 원예에 관해 의논하곤 했다.

 

 

 

 

프리트 쉬데르, <중국 탑>, 1873년경.

 

18세기 후반부터 독일에서는 '영국식 정원' 즉 '풍경식 정원'이 크게 유행했다.

독일 화가 쉬데르는 마네의 초기작과 비슷한 스타일을 구사했는데, 이 그림에서 사교 모임의 배경이 된 곳은

중국 탑이 있었던 뮌휀의 유명한 '영국 정원'이다. 아이들은 햇빛 아래 풀밭에서 놀고, 야외에서 음악가가

연주하는 하프는 쏟아지는 햇빛 앞에서 실루엣으로 드러나 있다.

 

 

 

 

막스 슬레포크트, <노이카스텔의 햇빛 비치는 정원 모퉁이>, 1921년.

 

자기 집 정원 모퉁이를 그린 이 작품은 마치 보호벽처럼 피어 있는 접시꽃을 그렸던

모리조의 그림 을 연상시킨다. 이 그림의 붓놀림은 표현주의적인 스타일에 가깝다.

 

 

 

 

이코프 에밀 쉰들러, <고이제른의 농촌 정원>, 1883년.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은 가족 정원과 채소밭을 그렸다. 오스트리아 화가 쉰들러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아내인 알마 말러의 자라나는 채소들의 생명력을 보여 준다.

 

 

 

 

주세페 데 니티스, <상젤리제의 벤치에서>, 1874년경.

 

드가의 친구였던 이탈리아 화가 니티스는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이 작품에는 파리 상젤리제 근처 정원 단지의 일부를 담았다. 르누아르가 1867년에

상젤리제를 그린 그림은 콩코르드 광장에 더 가까운 쪽을 담았다.

 

 

 

 

페더 세베린 크뢰이어, <장미, 스카젠의 정원>, 1883년.

 

그뢰이어는 매년 외광주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덴마크 해안 스카겐에 모였던

스칸디나비아 화가들 '콜로니'의 멤버였다.

여기서는 정원에 있는 장미나무의 섬세한 꽃잎을 반쯤 투명하게 만드는 북유럽의 맑은 한 여름 빛을 포착했다.

화면 전체에 가지를 뻗은 이 손질되지 않은 장미 덤불은 '자연의' 레이스 커튼 구실을 한다.

 

 

 

인용: 클레어 A. P.  윌스든 著 / 이시은 옮김 《인상주의 예술이 가득한 정원》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묘 조각상  (0) 2022.07.23
조선왕릉 석조각상  (0) 2022.07.22
인상주의 정원 1  (1) 2022.07.20
청 왕조 초기 문인화  (0) 2022.07.19
추일계와 소산화보  (0) 2022.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