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슬리 브렉 <지베르니 정원>(모네의 정원에서), 1887년경.
19세기 후반부터 지베르니의 정원에 모여들었던 여러 미국 화가, 이른바 '지베르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던
브렉은 1880년대 말에 모네의 개인 정원을 드나들 기회를 얻어 그곳의 풍요롭고 다채로운 꽃들을 묘사했다.
앙리 마르탱, <마르퀴롤의 연못., 1930년경
인상주의 양식의 정원 회화는 20세기에 들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2세대' 프랑스 인상주의 예술가인 앙리 마르탱은
1930년대에 그가 가꾸던 제라늄으로 가득한 정원을 그렸다. 이곳은 1900년대 초부터 툴루즈 근처
라바스티드 뒤 베르에 있던 그의 집 마르퀴롤에 조성한 정원이다.
에두아르 뷔아르, <보크르송 정원에서의 아침>, 1923년(1937년 재작업)
뷔야르는 보나르와 함께 인상주의를 장식적으로 발전시켰다. 보크르송에서 뷔아르는 친구인 에셀 가족이
소유한 분홍색 치장벽토를 바른 집, 클로 세잔의 한가로운 정원을 그렸다. 중앙 왼쪽의 푸른색 옷을
입은 여성은 에셀 부인으로 알려졌는데, 꽃밭 가장자리의 꽃들을 돌보는 그녀의 모습은
전경의 장미와 나뭇잎에 뒤섞이다시피 가려져 있다.
외젠 앙리 코슈아, <열차는 지나가고>, 1909년.
지나가는 열차가 내뿜은 연기를 배경으로 접시꽃이 당당하게 서 있는 이 공간은 아마도 역장이나 철도건널목지기의
정원일것이다, 파리에서 코슈아의 고향 루앙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정원으로, 에밀 졸라도 《인간야수》에서 바로
이런 정원을 묘사했다. 경고용 붉은 깃발을 든 여성은 방금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 졸라의 소설 속 인물인 폴로라
처럼 그녀가 아마 이 정원을 돌볼 것이다.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식물들은 이미 사라진 기차의 속도를 강조하
는데, 이런 철도망의 발달로 프랑스 남부에서 가꾼 꽃들이 하룻밤 사이에 파리에 도착하게 되었다.
코슈아는이처럼 니스에서 운반되어온 꽃을 인상주의 스타일의 정물화 그렸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아르장퇴유의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73년
클로드 모네, <아르장퇴유에 있는 모네의 정원 <달리아>, 1873년
모네의 아르장퇴유 정원을 그린 작품들이다. 하나는 정원을 만든 당사자인 모네가 또 하나는
이곳을 방문한 르누아르가 그렸다. 달리아 꽃을 묘사한 경쾌한 붓놀림은 질감과 색갈뿐
아니라 꽃의 향기까지 연상시키는데, 공감각에 대한 당대의 관심을 반영한다.
호아킨 소로야, <루이스 컴퍼트 티파니>, 1911년.
스페인 화가인 소로야는 뉴욕의 아츠 앤 크래프트 스타일 주택의 정원에 앉아 있는 티파니를 그리면서 꽃의
찬란함과 심리적 강렬함, 롱아일랜드의 산뜻한 공기를 매혹적으로 융합했다. 어딘지 정신이 팔린 듯한
티파니의 표정은 프루스트가 정신을 가리켜 '내면의 정원'이라 표현했던 것을 암시한다.
소로야 자신도 원예에 솜씨가 좋았고, 자신의 정원을 모티프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시몽 생 장, <정원사 - 여인>(세부), 1837년.
19세기 리옹의 꽃 화가들 중에 가장 유명한 생 장은 파리의 '살롱'에 진입하기 위해 이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
나팔꽃, 장미, 튜립, 양귀비, 달리아, 아칸서스 등의 꽃과 식물들은 그 상징적인 이미에 따라 선택되어
아름다움의 순간성과 예술의 영원성이라는 알레고리를 구성한다.
피에르 조제프 르두테, <조제핀 황후의 장미>, 19세기 초.
말메종 정원에서 조제핀 황후의 장미 컬렉션을 보고 그린 삽화다.
이처럼 정확하면서도 우아한 그림들은 1792년에 중국과 뱅골의 장미가 프랑스와 영국에 유입된 이래
개발된 놀라울 만큼 다양한 장미 품종을 보여준다. 르두테는 조재핀 황후가 키우던 다른 꽃들도
그려서는 총 1,800종의 식물에 대한 2,000점이 넘는 그림을 책으로 출간했다.
그의 삽화들은 학문적일 뿐 아니라 세브르이 도자기 디자이너들에게 도움이 되었다.
외젠 들라크루아, <공원에 엎질러진 꽃바구니>, 1848년경.
르두테의 방식과는 반대로 들라크루아는 공원 같은 정원에서 갓 꺾어온 듯한 꽃들을 늘어놓고 그 질감과 생생한
색감을 환기시켰다. 조르주상드는 1845년에 들라크루아가 처음 꽃 그림을 시도하는 것을 지켜봤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들라크루아가 이런 그림에 빼어났던 것은 어렸을 적에 식물을 공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들라크루아는 '꽃 그림'을 대부분 상로제이 있던 시골집에서 그렸다.
(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정물, 아름다운 꽃들>, 1864년.
(우), 클로드 모네, <봄꽃들>, 1864년.
뒷날 인상주의를 이루게 될 화가들이 '축제 준비'라는 전통적인 코티프를 재구성한 작품들이다.
보니의 장중한 화풍을 현실감 넘치는 소박한 장면으로 바꾼 - 르누아르의 그림에서 화분에 묻은 진흙을 보라 -
이 그림들은 봄의 두 시기를 보여준다. 르누아르의 그림에서는 들판에서 피는 크로커스 같은 꽃들이 온실
에서 꺼내왔을 라일락, 리네라리아, 칼라와 함께 놓여있다. 왼쪽의 길쭉한 화분에는 실제로 수증기의
응결을 막기 위해 온실에서 사용하는 풀들이 모여 있다. 모네의 그림에서는 모란, 가막살나무, 수국,
라일락과 꽃무 가지 등 주로 늦봄에 피는 꽃들이 담겼는데, 그가 '루앙 전시회'에 출품했을 때
초라하다고 느꼈던 작품 중 하나인 것 같다.
장 프랑수아 보니, <봄>, 1804년
'축제 준비'라는 모티프를 다룬 초창기 작품으로, 리옹의 실크 디자이너들이 본보기로 삼았다.
이탈리아식 정원에서 갓 따와서 골동품 석관의 물속에 임시로 담아놓은 꽃들은 곧 화병에 보기 좋게
꽂이거나 화관을 만드는 데 쓰였을 것이다. 리옹의 다른 꽃 그림 화가들처럼 보니도
살롱을 위한 거창한 작품을 만들면서 직물과 자수 디자인을 계속했다.
에드가르 드가, <화병 옆에 앉아 있는 여인>(세부), 1865년
부르주아와 귀족 계급의 여성은 힘든 정원일을 하지 않았다. 쿠르베와 생 장의 그림에 나오는
'정원사 - 여인'처럼 꽃을 가꾸고 돌보는 여성은 신분이 낮았다. 쿠르베가 생통주에서 그린 그림에는 꽃을 따는
여성이 등장하고, 드가의 그림에서는 테이블 왼쪽에 놓인 원예용 장갑이 모델이 앞서 했던 작업을 암시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국화, 수레국화, 마리골드 등을 모델이 막 모아온 것이다. 쿠르베이 그림에서 격자울타리
위로 자라는 꽃들처럼, 드가의 그림 속 꽃들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꽃말'로 그림을 '읽으면'
여성의 수심 어린 태도를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트레데리크 바지유, <모란을 든 아프리카 여인>, 1870년
트레데리크 바지유, <모란을 든 아프리카 여인>, 1870년.
'정원사-여인'을 그린 이 두 작품이 서로 짝을 이루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또 마네이 <올랭피아>에 꽃다발을 들고 등장하는 흑인 하녀를 오마주한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바지유의 이 두 작품에서 꽃들의 힘찬 색채는 당시에 마네 주변의 예술가들이 존경하던 보들레르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보들레르가 미술을 '환기력 있는 마법'이라고 일컬었던 것을 연상시키듯이 '꽃말'이 매력이나
주술인 나도싸리 가지를 들고 있다. 한편의 여성은 전통적으로 위험한 주술의 효력을 없애준다고 믿었던 모란을
들고 있다. 이처럼 길항하는 의미는 미술이 화가의 외부세계와 화가 자신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보들레르의 주장과 통한다.
프레데리크 바지유, <분홍색드레스>, 1864년.
바지유의 사촌 테레즈 데 주르가 몽펠리에 근처 가족 저택 부지의 경계벽에 앉아 주변 풍경으로 확장된
자연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 저 너머로는 여름 저녘빛에 물들어 있는 마을 카스텔노 르 레즈가 보인다.
이 작품은 외광 효과를 포착하려는 바지유의 초창기 시도 중 하나로, 관람자는 저물녘 프랑스 남부의
정원을 식히는 산들바람을 맞는 바지유와 테레즈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게 된다.
(좌), 펠라르고늄 조날레 인퀴난스, 알팡의 《파리 산책》에 수록, 1867~1873년.
(우), 사랑가(릴리스) 프레짇장 마사르, 《릴뤼스트라 시옹 오르타콜》에 수록, 1863년.
당대에 개발된 꽃 품종-일종의 레라늄과 라일락-을 그린 삽화로, 이 품종들은
19세기 중반에 유입되어 프랑스의 정원에서 인기를 끌었다.
귀스타브 쿠르베, <P.-J. 프르동의 초상>
프루동이 프랑스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정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쿠르베도 이 무정부주의 철학자가
그의 파리 집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서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여준다. 프루동의 딸들 역시
창조적인 놀이에 골몰하고 있다.
알퐁스 알팡, 《파리 산책》의 속표지, 1867~1873년.
파리시의 기술책임자 알퐁스 알팡은 오스만 남작의 지시로 공원, 정원, 가로수길을 개조하고 조성한 기록을
두 권짜리 호화로운 삽화의 앨범으로 만들었다. 이 책이 속표지에는 장식적인 정원 분수 위에 파리시의 문장
이 자리 잡고, 그 뒤로 합성된 '정원'을 이루는 랜드마크와 몇몇 공원과 광장이 보인다. 한복판에는 언덕 위에
사랑의 신전이 있는 뷔트 쇼몽 공원, 오른편에는 아르 에 메티에 광장의 날개 달린 승리의 여신,
중앙 왼편에는 생 자크 광장의 탑이 보인다.
에두아르 마네, <튀일리 정원의 음악회>, 1862년
'인상주의 이전'의 대표작으로, 유서 깊은 튀일리 정원에서 음악을 들으며 대화를 나누는 마네의 주변 사람들과
몇몇 유명인을 보여준다. 실크해트를 쓴 보들레르는 그림 왼편의 주요 나무 바로 앞에 있다. 마네의 동생 외젠
은 한복판의 약간 오른편에 앉은 숙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작곡가 오펜바흐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도록
외알 안경을 끼고 바로 그 오른편에 있다. 마네는 에두앙의 풍경에서 두드러지는 정원의 기하학적인
산책길들을 피하고, 암시적으로 초목과 인물들의 더 광범위한 조화를 빚어냈다.
이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3년.
마네는 <튀일리 정원의 음악회.에 이어 자연 속의 인물이라는 테마를 다시 한번 다루었다.
이번에는 자연 정원, 즉 정원으로서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았다. 모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이 그림에 대한 오마주다.
모네의 그림에 비해 이 그림에서는 모델들이 더 전형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모티프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이 보기에는 지나치게 도발적이었던 나체의 여인은
모네의 대담한 외광주의 접근법 못지 않게 급진적이었고, 개인 정원으로서의
자연이라는 테마를 은근히 부각시켰다.
클로드 모네, <풀밭 위의 점심>(최종작의 중앙 부분), 1865~1866년.
모네가 1866년 살롱전에 출품하려고 그렸던(그러나 결국 제때 끝마치지 못했던) 작품의 일부다.
모네는 왼편에 쿠르베를 그려 넣어 찬사를 표했지만, 쿠르베와 달리 물감을 두껍게 칠했다.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6~1567년.
뒷날 인상주의로 묶이게 될 화가가 정원을 그린 중요한 초기작이다. 여성과 장미를 연관 짓던 전통적인
관념을 담았고, 당시 모네의 애인이었고 뒤에 부인이 된 카미유가 왼편 세 여성의 모델이 되었다.
오른편의 여성도 카미유를 그린 게 아닐까 짐작되는데, 이 여성은 모네의 <풀밭 위의 점심>에도 등장한다.
이 정원은 모네가 1866년에 집을 빌렸던, 파리 근교의 빌 다브레에 있었다.
프란츠 빈터할터, <외제니 황후와 하녀들>, 1855년
사교계의 유명 화가였던 빈터할터는 외제니 황후와 측근들을 안개 낀 상상 속의 풍경에 배치했다.
밝은 햇살이 비치는 정원을 그린 모네의 <정원의 여인들>은 이런 인위적인 풍경화에 대한
암묵적인 반발이었다.
클로드 모네, <정원에서 신문을 읽는 아돌프 모네>, 1866년.
모네의 아버지가 르 코토의 정원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클로드 모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1867년.
이곳은 모네의 친척이 소유했던 또 다른 정원이다. 바다의 청록색이 붉은 오렌지색의 글라디올러스, 제라늄,
한련화를 돋보이게 하고, 19세기의 원예잡지에 소개된 대로 왼편의 그늘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한련화가 눈에 띈다.
그러나 정원의 이러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점 때문에 거리감이 생기는데, 모네는 은연중에
자신과 카미유의 관계 때문에 생긴 아버지(오른편에 파나마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인물)와의 불화를 암시한다.
프레데리크 바지유, <가족 모임>, 1867년.
바지유가 몽펠리에 근처 가족 정원의 밤나무 그늘 아래 자리 잡은 자신의 대가족을 그린 그림이다.
전경에 놓인 달리아 꽃다발은 바지유가 이 시기의 모네와는 달리 아버지와의 관계가 좋았다는 걸
암시한다. 달리아의 '꽃말'은 '감사'였기 때문이다. 또 바지유는 에로 지방에서 중요한 농업 전시회를
주최하는 아버지의 일을 도왔는데, 그림에서 왼편에 앉아 있는 그의 아버지는
이름 높은 농업 전문가였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약혼한 커플(알프레드 시슬레와 그의 약혼녀>, 1868년.
뒷날 파블로 피카소는 이 그림을 오마주하면서 정원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만 강조했다.
그러나 르누아르의 이 그림에서 붉은 오렌지색 꽃 화단과, 탄력적인 필치로 희부연 꽂을 그린 정원은
시슬레와 젊은 여성-뒷날 시슬레의 아내가 된 외제니 레스쿠제크로 추정된다.-의 관계를
미묘하게 보완한다. 이 그림에서 꽃의 색깔이 구성된 방식은 외제니가 입은 의상의
오렌지색. 금색, 흰색과 직접적으로 대응한다.
프레데리크 바지유, <어린 정원사> 1866~1867년
프레데리크 바지유, <협죽도> , 1867년.
이 두 작품은 메리크에 있는 바지유 가족의 소유지를 보여준다. 이곳에 핀 분홍색 협죽도는
원래 남부에서 자라는 꽃이지만, 바지유의 아버지가 고안한 병충해 퇴치법으로 더잘 자라게 되었다.
미완성으로 남은 이 그림들은 바지유가 윤곽만 그린 인물들보다 정원에 더 관심이 많았다는 걸 보여준다.
카미유 피사로, <대화, 루브시엔>, 1870년.
피사로가 이 그림을 야외에서 작업한 것은 거의 틀림없다. 그림 속 왼편의 집과 맞닿아 있는
낮은 건물이 그의 화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가 1860년대 후반에 살았던 루브시엔의 집
정원을 화실로 삼았다. 아담하게 꽃을 가꾼 공간에서 피사로의 연인은 딸을 곁에 두고는 어느
하녀와 이야기를 나눈다. 울타리가 낮아서 길과 저 너머 자연 정원, 즉 루브시에
전원지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클로드 모네, <공주의 정원>(세부), 1867년.
모네가 1867년 초여름에 루브르 미술관의 발코니에서 완성했던 풍경화 3점 중 하나다.
아르망 기요맹, <생 루이섬의 창문에서 바라본 팡테옹의 모습>, 1881년경.
가유보트의 <위에서 내려다본 대로>처럼, 이 그림도 자연이 무엇보다 우선임을 주장한다.
전경의 과일은 이요맹이 다미에트에서 그린 과수원을 상기케 하지만 과꽃, 백일초, 제라늄으로
가득한 창가의 화단은 주변의 도시를 가리고, 높은 굴뚝과 굴뚝 꼭대기의 통풍관, 멀리
보이는 팡테옹은 줄기와 꽃의 모양을 되풀이 한다.
에두아르 마네, <1867년 만국박람회>, 1867년.
마네는 오스만이 강 너머의 만국박람회를 보완하기 위해 파리의 트로카데로 언덕에 조성한 새로운 공공정원을 그렸다.
시당국의 정원관리자가 원예용 살수기로 형형색색의 꽃이 핀 화단에 물을 주고 있지만, 산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은 1867년에 몽골히에 형제의 선구적 비행을 기념하기 위해 상공으로 띄운, 줄에 매여 있는 열기구다.
파리 중심부의 당대 지도. 1870년대.
이 지도에는 오스만이 선호하던 직선 도로, 대로와 마찬가지로 파리의 많은 정원이 명확히 눈에 띈다.
왼쪽 끝에는 불로뉴 숲이 있고, 튀일리 궁전은 중앙에서 루브르 미술관과 접해 있으며 모네, 르누아르,
바지유가 1860년대 초에 산책하던 뤽상부르 공원은 센강 남쪽에 다이아몬드 형태로 표시되었다.
짇상의 점들은 거리에 늘어선 나무들을 나타낸다.
클로드 모네, ,생 제르맹 록세루아 성당>, 1867년.
모네가 루브르 미술관에서 그린 풍경화로, 마로니에나무가 심어진 인접한 정원 '광장'을 가로질러 본 풍경이다.
오스만은 그늘이 많아서 마로니에를 좋아했지만, 모네는 이 그늘을 건물에서 산란하여 암시적으로 교회의
장미창과 나란히 배치된 촛불 같은 밤나무들을 돋보이게 하는 눈부신 햇빛과 대조시켰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트리니테 광장>, 1892년경.
모파상은 소설 《벨아미》에서 트리니테 성당 앞의 연못을 '나뭇잎과 허접쓰레기 종이들로 뒤덮여 있다. ····
탁하고 녹색빛이 돈다' 라고 묘사했지만, 르누아르는 연못이 있는 정원을 여름꽃과 햇빛에 찬란한 광경으로 그렸다.
르누아르가 친구인 모파상에 대해 '그는 항상 어두운 면을 본다'라고 말하고 모파상이 루누아르에 대해 '그는 항상
밝은 면을 본다'라고 말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불로뉴 숲에서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 1868년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이 그리는 엇갈린 궤적은,
훗날 자신의 예술적 신조로 삼게 될 '비정형성'의 원칙을 예고한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1867년 만국박람회 때의 상젤리제, 1867년.
그림 속의 정원들은 오스만의 상젤리제 '정형화' 사업의 결과물이었지만, 르누아르는 그 정원들을 '자연적이고'
심지어 '비정형적으로' 보이게 그리고 있다. 마네의 <1867년 만국박람회>처럼 여기서도 전경에 정원사가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원에서 유명하던 이국적인 식물들은 거의 무시하고, 정원의 분수대와
야외 음악당 역시 그림에서 생략했다.
베르토 모리조, <여름날>, 1879년.
모리조는 종종 파시에 있던 자신의 집 근처의 불로뉴 숲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에서 모리조는 완숙하고 성긴 붓질을 통해 호수의 여름 산들바람을 생생히 묘사했다.
이 호수는 르누아르가 얼음으로 뒤덮인 모습을 그렸던 바로 그곳이다.
메리 커샛, <커샛 양의 초상(가을)>, 1881년 전시
심한 병을 앓은 후에 파리 공원의 맑은 공기 속에서 원기를 되찾는 언니 리디아를 그렸다.
리디아가 두른 캐시미어 숄의 부드러운 색감이 가을 나무들의 색감을 보완한다.
(좌), 클로드 모네, <몽소 공원>, 1878년.
18세기에 처음 조성되어 부유층이 즐겨찾던 이 공원을 그린 일련의 그림 중 하나다.
(우),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에 있는 정원>, 1877년.
공공 정원을 조성하는 일에 대한 관심은 파리에서 다른 도시로 퍼져 나갔다.
또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저택에 만든 작은 공원에서 장식적인 화단과 휴식용 벤치, 구불구불한 길을 멋지게
배치하는 파리식 정원 스타일을 모방했다. 피사로의 이 그림은 파리 북서쪽에 있던 그의 친구 마리아 드렘의 집,
레 마튀랭의 작은 공원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꽃의 조화, 다양한 질감, 햇빛과 그림자의 효과는
피사로의 순수한 색감과 수많은 붓질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다.
페데리코 찬도메네기, <앙베르 광장>, 1880년.
드가의 친구인 이탈리아 화가 찬도메네기는 커셋의 <커셋 양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1881년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이 그림을 공개했다. 그는 정형적인 나무, 그림자, 여러 아이와 보모를
다소 장식적으로 표현하여 '후기인상주의'를 예견하는 듯하다. 몽마르트르 근처의 앙베르 광장은
반 고흐의 미술을 좋아했던 스코틀랜드 미술상 알렉산더 레이드가
1880년대 후반에 화랑을 연 장소다.
외젠 앗제, <뤽상부르 공원의 풍경>, 1923년경.
이 사진은 피사로가 1900년경에 그린 튀알리 정원의 환기력 있는 그림들보다 다소 시기적으로 늦지만,
앗제의 파리 정원과 베르사유 정원의 인상주의의 관심사와 유사한 점이 많았다.
벨트 모리조, <접시꽃>, 1884년.
버려진 바구니처럼 약간 비스듬히 놓인 의자는 누군가가 잠시 자리를 비웠음을 암시한다.
아마도 모리조의 어린 딸 쥘리가 맑은 여름 공기를 마심 노는 동안 모리조 자신이나 그녀의 남편,
혹은 하녀가 함께 앉아 있었을 것이다. 힘차게 소용돌이치는 필치로 표현된, 하늘을 찌를 듯한
접시꽃만이 부지밭에 있던 모리조의 여름 별장에서 이 친밀한 구석 자리의 비밀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에두아르 마네, <정원에서>, 1870년.
그림을 공부했던 모리조의 언니 에드나는 마네를 위해 이 그림에서 잔이라는 딸과 남동생 튀뷔르스와 함께
모델을 섰다. 이 정원은 파시의 프랭클린가에 있던 부모님 집의 정원이었고,
이 그림은 인상주의 '가족 정원'의 시발점이었다.
귀스타브 카유보트, <시골에서의 초상>, 1876년.
파리 근교 이에르에 있던 가족 부지의 그늘에서 카유보트의 어머니와 사촌들이 책을 읽거나 파리에 있던
카유보트의 이복형제를 위한 것인듯한 사제복의 장식을 만들고 있다. 이 모티프는 1870년에 루부르 미술관
에 입수된 페르메이르의 <레이스를 뜨는 여인>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지만, 가족간의 고요한 조화는
인상주의자 화가들이 그린 '가족 정원'의 특징이었다.
베르트 모리조, <로슈 플라트의 정원에서>, 1894년.
십 대가 된 모리조의 딸 쥘리가 사촌과 함께 브르타뉴에 위치한 여름 별장의 정원에서
배를 먹고 있는 모습을 리드미컬한 붓놀림으로 묘사했다.
클로드 모네, <정원에 있는 화가의 가족>, 1875년.
햇빛이 나무들 사이로 새어들면서 카미유와 그녀의 친구, 어린 장이 있는 파비용 플라망의 풀밭에
얼룩을 만들었다. 제라늄 화단이 안식처에 모인 인물들을 보호하듯이 원호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클로드 모네, <정원의 점심>('장식 패널화로 전시'), 1873년.
모네가 아르장퇴유 정원을 그린 것 중에서 가장 야심 찬 작품으로, 1876년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부지발의 정원에 있는 외젠 마네, 벨르트 모리조, 쥘리 마네의 사진.
베르트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튀일리 정원의 음악회>에서 과부와 이야기 하는 남성으로
등장했다-와 1874년 결혼했다. 걸음마를 하는 사랑스러운 딸과 함께 찍은 다소 전형적인 이 사진에는
이들 부부가 부지말에 소유했던 여름 별장의 정원이 담겨 있다.
(좌), 메르트 모리조 <부지발에 있는 외젠 마네와 딸>, 1881년
외젠 마네와 그의 무릎 위에 있는 장난감 기차를 갖고 노는 딸 쥘리의 모습을 친근한 분위기로 그린 작품이다.
모리조는 활달한 필치로 꽃들, 비치고 반사되는 햇빛을 포착했다.
(우), 귀스타브 카유보트, <오렌지나무>, 1878년.
이에르의 정원을 그린 또 다른 풍경으로, 카유보트의 동생 마르살과 그의 사촌이 더운 여름날에 보라색
그늘에 잠겨 책을 읽고, 카유보트가 키우던 개는 햇빛이 비치는 길에서 졸고 있다.
메리 커셋, <마를리의 정원에서 코바늘 뜨개질을 하는 리디아>, 1880년.
결혼을 하지 않았던 커샛은 언니의 모습을 자주 그렸다. 이 그림은 가을 공원에 있는 리디아의 초상과 함께
1881년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공개되었다. 소설가 조리 카를 위스망스는 이 전시회에서 커셋의 작품이
'여성적 감수성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칭찬했다.
마리 브라크몽, <세브르의 테라스에서>, 1880년.
마리 브라크몽의 여동생 루이즈는 언니네 부부와 함께 살았고, 이 그림 속의 두 여성은 루이즈를 않은
남성의 어두운색 양복과 대조되는 여성들의 얇은 밝은색 드레스에 비친 정원 햇살의 움직임을 가까이서
관찰하여 표현했다. 인물들은 바짝 다가앉아 있으면서도 저마다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으로 침묵을 상징하는 흰색 장미가 전경에 있는 여성의 드레스에 자리를 잡고는
이 그림의 분위기를 집약한다.
클로드 모네, ,정원 벤치에 앉은 카미유 모네>, 1873년.
부친상을 당하고 팔에 상장을 두른 카미유는 화가 쪽을 쳐다보고는 있지만 슬픔 때문에 화가의 존재를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벤치에 몸을 기댄 방문객-모네는 뒷날 이 방문객이 이웃이었다고 밝혔다- 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햇빛으로 가득한 뒤편에는 (어쩌면 방문객의 아내일지도 모르는) 한 여성이 눈부신 제라늄 화단을
감상하고 있는데 이 순간 카미유와는 다른 세상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클로드 모네, <글라디올러스>, 1876년경.
카미유가 파비용 플라망의 화사한 글라디올러스 옆을 거닐고 있다.
글라디올러서는 모네의 고향인 르 아브르의 특산물이었다.
나비가 사방을 맴돌고, 모네의 서명까지도 꽃의 색과 조화를 이룬다.
클로드 모네, <창가의 카미유>, 1873년.
카미유 또한 창문 앞의 다양한 꽃들 사이에 있는 하나의 꽃이다.
꽃들 중에는 모네의 푸른색과 흰색 도자기 화분에 담긴 화려한 푸크시아종이 눈에 띈다.
당대의 '꽃말'에서 (오른편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넝쿨은 '애착'을 의미했고, 다양한 종류의
푸크시아는 사랑과 관련된 의미를 지녔다.
<푸크시아 베리타테스 호르텐시스(푸크시아 정원),
《릴뤼스트라시옹 오르티콜》에 수록, 1855년.
푸크시아는 글라디올러스처럼 프랑스에서 19세기 중반부터 대대적으로 개발되었고,
둘 다 원예잡지에는 '전적으로 프랑스적인 문화의 식물'이라고 소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꽃들이 모네의 정원에 등장하는 것은 '국가주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인용: 클레어 A. P. 월스든 著 / 이시은 편저 《인상주의 예술이 가득한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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