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동아시아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팔대산인八大山人(1626~1705)과 석도石濤(1542~1707)는
홍인弘仁(1610~1644), 석계石溪(1612~1673)와 함께 사승화가四僧畵家로 꼽히는 청 초 유민화가遺民畵家
이자 17세기 개성화파個性畵家의 핵심 인물이다. 산수는 물론 화훼(사군자 포함) · 영모 · 소과 · 초충 · 어해
등 다양한 화목을 잘 그린 두 사람은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필묵을 구사하여 창작 주체의 독자성을 성취해낸
대가였다. 그 과감하고 감각적인 화풍은 18세기 양주화파楊州畵派, 19세기 해상화파海上畵派, 20세기 전통
화파傳統畵派로 계승된 문인화의 새로운 조류를 이끌었다.
황안평, <개산소상>, 1674년, 종이에 먹, 97.0×60.5cm, 중국 남창 팔대산인기념관.
석도(와 무명의 초상화가), <종송도> 부분, 1674년, 종이에 담채, 40.2×170.4cm,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팔대산인과 석도는 1690년대에 관계한 공통의 후원자에 의해 서로 알게 되었고, 서화가로서의 경력과 명성에서
팔대산인은 석도의 모범이 되었다. 1696년경에 팔대산인이 난초를 그리고 이듬해에 석도가 화찬을 쓴 <수선도권
水仙圖卷>, 팔대산인이 난초를, 석도가 대나무를 그린 <난죽석도蘭竹石圖>, 할대산인의 <대척초당도大滌草堂圖>
에 석도가 쓴 1698년의 제화시 등에서 그런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석도가 1697년 이전부터 팔대산인을
알았다는 것이다. 1694년에 그린 《증황율산수책贈黃律山水冊》에서 석도는 팔대산인을 존경하는 선배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았다.
석도, <탐매도권>, 1685년, 종이에 먹, 30.6×132.2cm, 미국 프린스턴대학미술관.
석도, <사람에게 인사하는 산>, 《진회억구책》, 1695년, 종이에 담채 26.7×20.2cm,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팔대산인, <하상화도> 부분, 1697년, 종이에 먹, 46.6×128.2cm, 중국 천진시예술박물관.
(좌), 석도, <부용>, 《화훼인물첩》, 1694년경, 종이에 담채, 23.2×17.8cm, 미국 프린스턴대학미술관.
(우), 석도, <하화>, 《화훼인물첩》, 1694년경, 종이에 담채, 23.2×17.8cm, 미국 프린스턴대학미술관.
석도, <죽>과 <난>, 《청상서화고》, 1696년, 종이에 담채, 25.5×4222.3cm,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석도, <애련도>, 종이에 담채, 46.0×77.8cm, 중국 광동성박물관.
(좌), 팔대산인, <하화>, 《안만첩》, 1694년경, 종이에 먹, 31.7×27.5cm, 일본 센오쿠하쿠코간
(우), 팔대산인, 《안만첩》, 1694년경, 종이에 먹, 31.7×27.5cm, 일본 센오쿠하쿠코간.
팔대산인, <낙화>, 《화과충도책》, 169*2년, 종이네 먹, 22.5×28.6cm, 미국 뉴욕 개인 소장.
(좌), 석도, 토란, 《야색화책》, 종이에 담채, 27.6×21.5cm,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우), 팔대산인, <고매도, 1682년, 종이에 먹, 96.0×55.5cm,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좌), 팔대산인, <부용>, 《개산인옥화훼책》, 1681/1683년경, 종이에 먹, 30.3×30.3cm, 미국 프린스턴대학미술관.
(우), 팔대산인, <죽>, 《개산인옥화훼책》, 1681/1683년경, 종이에 먹, 30.3×30.3cm, 미국 프린스턴대학미술관.
석도, <묵하도>, 종이에 먹, 90.2×50.4cm,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팔대산인과 석도 회화에 내포된 근대성은 명말청초 화단의 산물이다. 당시의 문헌 기록과 그들 작품 자체가
그들의 생애와 상호인식, 공통의 후원자를 확인해주고, 그들의 예술세계에 열광한 동시대 후원자와 후대의
추종자가 이어진 흐름은 17~18세기 화단의 주류로서 그들이 읽한 성취를 대변해준다. 문헌과 작품에 근거
해 두 대가의 명성과 입지가 18세기에 이미 굳건했고, 그들의 할동이 남창 · 남경 · 휘주 · 양주 등지에 사는
휘상의 후원과 불특정 도시민의 수요에 기반했음을 확인하였다. 그들 작품은 18~19세기 중국에서 널리
유통되었고, 그중 일부가 한국에도 전해져 문인 사회에서 주목받았다. 20세기가 되기 전부터 그들의
명성은 지역과 국가를 초월해 동아시아에 퍼져 있었던 것이다.
화훼화 위주로 주제의식과 화풍을 비교한 결과, 두 대가는 자필로 쓴 자제시문과 고전 및 당시 문학을 그림과
결합한 문인화 형식으로 개인화된 형상을 창출해냈음이 파악되었다. 자신의 유민의식과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매 · 부용 · 수선에 정치적 함의를 불어넣거나 이를 감각적 욕망의 대상, 낭만적인 시각적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
했다. 왕손 · 승려 · 문인으로서의 자아의식이 담긴 화훼화도 출현했는데, 각자의 삶의 궤적에 따라 그 의미는
자의적이다. 문인 · 승려의 외피에 왕손의식을 숨긴 팔대산인의 화훼화는 청에 대한 저항의식이 팽배하고, 냉소
· 풍자 · 반어 표현이 흘러넘친다. 반면 왕손 · 승려 · 문인적 자아의식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낸 석도 화훼화에
는 문화적으로 배양된 유민의식에 기반한 흥 · 욕 · 정감이 유희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표현 방식에서도 팔대
산인은 함축적 필묵의 미가, 석도는 감각적인 필묵과 색채의 미가 돋보인다. 특히 서위· 팔대산인의 화훼 표현
에 영감받은 만년의 석도가 양주에서 필묵과색채의 표현성을 강화했던 것은 18세기 양주화파로 전해져
새로운 문인화 계보를 형성했다.
전반적으로 1690년대와 17020년대에 휘상의 후원과 지지에 힘입은 팔대산인과 석도는 산수는 물론 동식물
소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유민의식, 복합적인 자아의식, 임리한 필묵 구사는 그들 화훼화의
공통된 특징이지만 석도는 바다 전문적으로 다양한 표현 기법을 개발하였다. 이는 특정 후원자의 취향이나
영향에 좌우된 결과이기보다 다수의 고객을 위해 작업한 전문 직업인의 표현영역 확장을 위한 자발적인
노력의 산물이라 여겨진다. 그 자의성,주관성, 자발성 을 펼칠 장場을 제공한 상인후원과 시장은 청 초
문인화의 진정성 내지 근대성 확보의 원천이었다.
나아가 18세기 향주화파가 화훼를 많이 그린 것은, 수요에 부합한 상품제작의 결과였던 측면 외에, 팔대산인과
석도에 의해 확장된 이 분야에 대한 강남 지식인의 지지와 공감이 더해졌기 때문일 수 있다. 양주를 비롯해 휘상
이 머물던 남경 · 남창 · 휘주 · 북경 · 천진은 명성이 유행을 낳는 도시였고, 왕손의 작품은 석도처럼 문화적으로
배양된 유민의식을 가진 18~19세기 서화가와 후원자 모두에게 의미심장한 함의를 가졌을 수 있다. 동기창의 문인
(산수)화가 청 궁정에서 정통으로 인정받은 것과 별도로, 소식· 문동에까지 소급되는 문인(화훼)화 계보를 환기한
석도는 이민족 치하 지식인 사이에 진정한 문인화가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20세기 들어 석도에게 집중된
'근대적 평가의 시선'의 이면에 17세기 후반 이래 중국 내에서 전승된 이 복잡하고 내밀한 사회 동향과 문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이제는 주목할 때다.
인용: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중 박효은 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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