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금대金代 동물 초상<소릉육준도>

현재 북경北京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소릉육준도昭陵六駿圖>는 금대金代(1115~1234)의 희소한

회화라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1220년이라는 분명한 하한 연대를 지니고 있는 회화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

니고 있는 작품이다. 이처럼 기년명 회화는 창작연대가 확실한 진작으로서의 의의뿐 아니라, 전칭 작품 및

문헌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해당 시기 회화의 성격을 신빙성 있게 규명할 수 있는 하나의 잣대가 된다는 점

에서 중요하다. 또 <소릉육준도>의 경우, 유명한 당 태종의 무덤 소릉昭陵에 있는 부조 <昭陵六駿>

(1637~649)을 토대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금대의 회화에 대한 현재까지이 연구 성과는 다른 시대에 비해 매우 미진한 편이다.

소수의 연구 성과들도 대부분 산수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인물화나 화조영모화에 대한 연구는 그간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그나마 고분벽화와 사찰벽화 등에 대한 접근을 통해 그 간극을 어느 정도 좁힐 수 있는

인물화에 비해 화조영모화의 경우 상황이 더욱 열악하여 연구 성과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림(趙霖), <소릉육준도>, 12세기, 비단에 채색, 27.5×444.2cm,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소릉육준도>는 말 여섯 마리의 자태를 긴 두루마리의 여백에 한 마리, 한 마리 마치 초상화처럼 묘사한 그림이다.

그러나 불특정이 말들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당 태종이 전장에서 활약하던 당시에 탔던 여섯 마리 준마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일종의 동물 초상화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말 여섯 마리 모두 왼편에서 해당 말의 이름과 공적이 적혀

있다. 화면을 보면 위 오른쪽 삽로자颯露紫, 권모왜拳毛騧, 백제오百蹄烏, 특륵표特勒驃, 청추靑騅, 십벌적什伐赤

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삽로자

동군을 평정할 때 탔다. 앞쪽에 화살을 한 대 맞았다. 서쪽 첫 번째로 털빛이 붉다.

기세는 삼천을 두렵게 하고 위세는 팔진을 능가하였네.

준마를 뛰어넘어 신기한 경지에 이르렀네.

 

 

 

 

권모왜

유달을 평정할 때 탔다. 서쪽 두 번째로 노란색인데, 주둥이는 검다.

앞쪽에 화살 여섯 대를 맞았고, 뒤쪽에 세 대를 맞았다. 화살을 거두고, 더러운 것들을

싹 쓸어버렸네. 잘의 정기로 고삐를 당겨 하늘을 누비네.

 

 

 

 

백제오

설인고를 평정할 때 탔다. 네 발굽이 모두 흰색이다. 서쪽 세 번째로 흑색이다.

고삐를 잡아 농서를 평정하고, 말안장 돌려 촉을 평정하였네.

하늘을 의지하여 장검을 집고 바람 따라 말 달리네.

 

 

 

 

특륵표

송금강을 평정할 때 탔다. 동쪽에서 가장 첫 번째로 황백색이고, 주둥이는 엷은 흑색이다.

채찍 소리에 응해 하늘을 오르고 공중을 가르네.

험한 곳에 들어가 적을 없애며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을 평정하였네.

 

 

 

 

청추

두건덕을 평정할 때 탔다. 동쪽 두 번째로, 푸른색과 흰핵이 섞여 있다.

화살 다섯 대를 맞았다. 번개와 같은 빠름이 놀랍네. 하늘의 조화를 일으키네.

채찍질하여 하늘을 날지만 갑옷은 움직임이 없네.

 

 

 

 

십벌적

왕세충과 두건덕을 평정할 때 탔다. 동쪽 세 번째로 붉은 색이며, 앞쪽과 중간에 화살 네 대를,

뒤쪽에 한 대를 맞았다. 진수와 간수 사이를 아직 평정하지 못하고 기월로 무위를 보일 때,

붉은 땀을 흘리며 달려 푸른 깃발로 개선하였네.

 

 

 

아래는 조병문이 쓴 제발로 작품과 관련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당 태종 육마도

구행공은 경조군 사람으로, 무덕 연간 초에 진부秦府의 장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왕세충을 토벌하는 전쟁에 종사했는데, 망산邙山에서 태종이 적군의 허실을 시험하고자 

열댓의 기마를 주어 진지에 나가 충돌하였는데, 뒤에 살상된 바가 많았다.

그리고 결국에는 긴 제방 끝모든 기마를 잃었다. 다만 구행공이 적의 기마를 쫓아 추격해왔다.

이때 날아온 화살이 태종의 말에 맞았다.

구행공이 뒤를 돌아보고 적을 향해 활을 쏘니, 빗나가는 화살이 없었으므로, 적군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드디어 말에서 내려 화살을 뽑고 자신의 말을 태종에게 드리고, 도보로 긴 칼을

잡고 크게 소리 질러 병사를 인도 하였고, 돌진하여 몇 명을 베고 돌아왔다.

정관情觀 중에 조칙으로 돌을 깎아서 인마상人馬象에 화살을 빼는 형상을 만들어서

소릉昭陵의 궐전闕前에 세워서 무공을 칭찬하였다.

 

 

··· 조병문의 제발은 그가 세종대의 '대조待詔'라는 점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대조'라는 직위는 시대에 따라 다소 상이한 면도 없지 않으나, 사실상 황제를 위한 궁정화가의

역할을 하였던 자리로, 조림이 세종 시기의 궁정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 기본적으로 <소릉육준도>는 당나라의 부조 <소릉육준>을 토대로 제작된 것이다.

실제로 <소릉육준도>와 부조 <소릉육준>을 비교해보면 안장 등의 말 장신구, 말의 자세 등 기본적인

도상에서 거의 차이가 없다. 아마도 조림은 세종의 명에 따라 <소릉육준>을 토대로

충실히 그 도상적 특징을 옮기고자 한 것 같다.

 

그러나 당과 금이나는 시대, 조각과 회화라는 표현 매체이 이질성으로 인해 세부에서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말의 갈기 표현이다. 부조 <소릉육준>의 경우 모든

말들의 갈기가 마치 뿔 같은 모양이다. 이는 '삼화三花'라고 하는 당나나의 말갈기 장식

방법으로, 당나라 초기부터 제왕, 귀족 등의 말 장식에 사용되었다.

 

 

 

 

 

 

 

한황, <오우도> 부분, 당, 종이에 채색, 20.8×139.8cm.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좌), 전 염입본, <보련도> 부분, 송대 모본, 비단에 채색, 38.5×129.6cm,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우), 전 염입본, <능연각공신도> 잔편, 1090년, 송대 모각 탁본, 중국 중앙미술학원미술관.

 

 

 

 

 

 

··· 조림은 <소릉육준도>를 표현하는 데 부조 <소릉육준>의 제작자인 염입본이 조형과 양식을 기본으로

하되, 거기에 한간의 양식을 더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릉육준도>에는 거모의 표현같은 국소적인 부분에서

금대의 회화요소가 있어 절충적 성격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당대 회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조림이 당나라 회화 양식을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송대 휘종徽宗의 컬렉션 가운데

상당수가 금으로 유입되었던 정황과 무관하지 않다.

 

금의 궁정에서 본격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것은 휘종에

비유되는 장종章宗대부터이나, 이미 '정강지변靖康之變'(1127) 때에 북송의 수도 개봉을 함락한 금의 궁정

소장품으로 귀속되었다. 《선화화보宣和畵譜》를 살펴보면 휘종의 컬렉션에는 당나라이 옛 그림이 상당량

소장되어 있었고, 그 가운데에 염입본의 그림이 36점, 한간의 그림이 52점 포함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이 모두 금의 궁정으로 유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가운데 상당수 혹은 일부는

분명 금 궁정의 소장품이 되어 조림이 <소릉육준도>를 제작하는 데 참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인용: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중  장준구 논저 <소릉육준도>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일계와 소산화보  (0) 2022.07.19
명대明代 강남 문인들 꽃에 빠지다  (0) 2022.07.18
중국 묘실의 화훼도  (0) 2022.07.17
당唐 고분벽화 속 화조화  (0) 2022.07.17
조선미전의 모란화  (0) 2022.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