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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조선미전의 모란화

 

허련, <묵모란> 6폭 병풍, 조선 19세기, 종이에 수묵, 각 79.0×34.0cm, 홍익대학교박물관

 

 

수묵의 남종문인화풍으로 제작되었지만, 제시에는

 '꽃의 왕',  '미인', '부귀' 등의 의미가 함께 농축되어 있다.

 

 

공자는 홀려서 가져와 등불 아래서 보고,

미인은 머리에 꽂고 거울 속에서 보네.

동군東君이 모든 꽃의 왕에 봉하고,

다시 보배를 하사하여 상방尙方에 내보냈네.

금화 주고 다 사면 온 궁중이 웃고,

다투어 말 달려 열흘이나 먼지가 나네.

말을 알앗다면 나라가 기울었을 것,

바로 이 무정함이 사람을 움직이네.

한수漢水 오리의 머리색을 변하게 하고,

농산山 앵무새는 사람을 부르지 않네.

하늘의 향 나라의 미인 뭇꽃의 으뜸,

모두 서울 부귀한 집에 속하네.

 

 

이처럼 조선시대까지 모란화는 복합적인 의미체계를 지니며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 · · · 조선총독부는 문화식민화정책의 일환으로, 1922년부터 공모전의 형태로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그동안 시서화 일치의 풍토 속에서 다양한 상징성과 표현 방식으로 제작되던 모란화는

조선미술전람회 개최 이후 사군자 · 동양화 · 서양화로 분화된다. 이는 일제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조선의 미술을 제도적으로 규정함으로써 생긴 결과이다. 조선미술전람회는 1922년 창설 당시 1부 동양화,

2부 서양화 · 조각, 3부서로 분류되어 운영되었는데, 이는 일제가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시서화 일치의

전통적 서화 관념을 글[書]과 회화[畵]로 분리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회화를 동양화와 서양화로

양분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더욱이 제1회(1922) 동양화부에 포함되었던 사군자는 제3회(1924)부터 서 및

사군자부가 개설되면서 제10회(1931)까지 서와 함께 공모되었다. 따라서 기존 서화가들은 조선미술전람회

의 규정에 따라 자신이 서가書家인지 화가畵家이지 선택해야 했으며, 화가들도 자신의 작품을

동양화 · 서양화 중 한 영역에 편입해야 했다.

 

이와 같이 전통적 조형 이념과 새로운 조형 이념이 혼재하는 상황에서 전통적 그림 소재였던 모란은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 서양화부 뿐만 아니라 서 · 사군자부에도 등장하였다. 더불어 같은 작가의

모란화가 동양화부와 서 · 사군자부에 모두 출품되기도 하였다. 

 

 

 

(좌), 황용하, <묵모란>,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 제5회 서 ·사군자부 출품.

(우), 이도영, <정물>,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 제1회 동양화부 출품.

 

 

 

 

(좌), 김규진, <묵모란>, 1929년, 비단에 수묵, 150.0×85.0cm, 조선미술전람회 제8회 동양화부 출품, 개인 소장.

(중), 김규진, <모란>,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 제10회 동양화부 출품.

(우) 김유탁, <모란>, 1930년, 조선미술전람회 제9회 동양화부 출품.

 

 

 

정찬영, <모란> 밑그림, 1930년, 종이에 채색, 94.0×109.7cm, 국립현대미술관.

 

 

 

(좌), 정해준, <모란>,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 제14회 동양화부 출품.

(우), 가네시마 게이카, <모란>, 1928년, 제국미술전람회 제9회 무감사 특선.

 

 

 

 

 

 

 

이제창, <모란>,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 제19회 서양화부 출품.

 

 

 

윤희순, 《조풍연 결혼기념화첩》 7폭 중 5폭, 23.0×34.0cm, 1941년, 종이에 채색, 개인 소장.

 

 

 

(좌), 허백련, <묵화이곡병>, 종이에 담채, 각 125.5×32.5cm, 개인 소장.

(우0, 박행보, <묵모란>, 1976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제25회 서예부 출품.

 

 

 

김용진, <화조도>, 1960년, 종이에 담채, 68.5×132.0cm, 서강대학교박물관.

 

 

 

김은호, <백모란>, 1968년, 비단에 수묵담채, 52.0×67.5cm, 개인 소장

김기창, <새벽 종소리>, 1975년, 비단에 수묵채색, 55.0×51.0cm, 개인 소장.

 

 

 

박생광, <모란>, 1984년, 종이에 수묵채색, 69.6×68.4cm,  개인 소장.

 

 

 

길진섭, <모란>, 1948년, 종이에 채색, 125.0×315.0cm, 개인 소장.

 

 

 

김환기, <정원>, 1957년, 유채, 145.5×97.0cm, 개인 소장.

 

 

항아리 · 달 · 매화 등 한국의 자연과 기물을 통해 한국적 서정을 표현하였던 김환기金煥基(1913~1974)는

모란을 한국의 상징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3년 부산에서 열린 제3회 《신사실파전》에

김환기와 함께 출품했던 백영수(1922~2018)는 김환기의 작품에 대해 "서양화를 하는데, 학을 그리고,

아리 안에 모란을 크게 그리고" 라고 기술한다. 이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몇 년 뒤 제작된

1956년 작 <백자와 여인>과 1957년 작 <정원>에서도 도자기 안에 김환기가 한국적

모티프로 활용 하였던 · 달 · 학과 함께 모란이 그려져 있다.

<정원>에는 학 한 마리가 날고 달항아리와 매병이 놓여 있는데, 매병에 큼지막한

모란이 장식되어 있다. 따라서 김환기는 모란을 · 항아리 · 매화 등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소재로 활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인용: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중 강은아 논저 「모란화와 조선미술전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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