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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최북의 화조영모화

최북, <산수도>, 1747년, 비단에 담채, 29.3×40.2cm, 국립중앙박물관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은 조선 후기 영 · 정조대 활동한 화가로 사대부 출신도 아니요, 도화서 화원 가문도

아니었기에, 그의 가계나 생애를 알 수 있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시 · 서· 화에 능했으며 문사적인 교양과

풍모를 갖춘 18세기 중엽에 등장한 새로운 유형의 직업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는 문인화가에 버금가는 사인

의식士人意識을 지녀, 당시 '예원藝苑의 총수'라 불리던 표암豹강세황姜晃(1713~1791)과 현재玄齋 심사정沈師

(1707~1769), 연객烟客 허필許佖(1709~1761) 등의 사대부 출신 서화가들과 교유하면서 남종 문인화풍을 기반으로

감각 넘치는 작품을 그려냈다. 이들은 모두 경기도 안산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최북이 스스로 지은 호인 '삼기재三奇齋'는 '시와 글씨, 그림에 모두 능하다는 뜻이고, '호생관'은

'붓으로 먹고 산다'는 뜻으로, 그의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최산수' '최메추라기'라 불릴 정도로

화조영모화에도 뒤어나 다양한 화목火目을 능히 구사했다.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화조영모화가 많은 비중을 차지

하고 있는데, 상당수 작품에서 가까이 교유하였던 심사정과 강세황의 영향관계가 드러나 주목된다. 두 사람 역시

최북과 마찬가지로 안산의 여주 이씨 가문 인물들과 어울리며 이 지역 문인과 중인 출신 여항화가閭巷畵家들과

교유하였다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화목이 바로 화조영모화이다. 그들이 동일한 화재畵材를

서로 공유 하였음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 · 최북과 또래로 각별히 지냈다고 알려진 섬와蟾窩 이현환李玄煥(1713~1772)이 지은 문집 《섬와잡저蟾窩雜著》

에는 최북에 대한 기록이 두 편 전하는데, 일본 통신사행을 떠나는 최북을 송별하는 시 「송최북칠칠지일본서送崔北

七七之日本序」에서는 일본에서 이름을 떨치고 돌아오리라는 최북의 포부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최북화설崔北畵設」

은 최북의 회화세계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그가 통신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인

1749년, 더욱 높아진 유명세 덕에 그림에 염증을 내면서도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찾던 내면이 잘 드러나

있다. 도한 이현환은 최북에게 8첩으로 된 영모도를 선물받아 감상하며 최북을 중국 북송대 영모화로 유명했던

최백摧白(1050~1080년경 활동)에 비견할 정도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칠칠七七(최북)은 그림을 잘 그리기로 세상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병풍과 족자를 들고 와서 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칠칠은 처음에는 기뻐하고 바람처럼 소매를 휘둘러 금세 그림을 완성하니 그 모습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

웠다. · · ·  내가 보니 아무 거리낌 없이 붓 가는 대로 빠르게 휘두르니 곁에 그 누구도 없는 듯하다. 대외로 말하자면

옛것을 본떠서 새로운 뜻을 드러낸 것이다. 내가 칠칠에게 말하길, "그대의 그림은 성성이가 술을 좋아하여 꾸짓어도

또한 마시는 것에 가깝지 아니한가.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시에서 두보杜甫, 문에서 한유韓愈, 글씨에 있어서는 안진경

顔眞卿, 그림에 있어서는 오도자吳道子에 이르러 고금의 변화가 이루어졌으니, 천하의 잘하는 것이 다 갖추어졌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대의 그림 또한 잘하는 것이 다 갖추어졌다고 평가하였으니 그대는 주저하지 말라. 사람을 기쁘게 하고

겁게 하는 것 가운데 그림만 한 것이 없다. 중국 진나라 장수 환현桓玄이 전쟁 중에도 서화를 지키려고 빠른 배에 실어

놓은 것이나, 당나라 재상 왕애王涯가 서화를 이중으로 된 벽에 보관하였던 일은 결국 나라에 해를 끼치고 자기 몸을 망

게 하였다. 옛사람의 고질적인 버릇이 쉽게 고쳐지지 않음이 이와 같다. 가만히 조화옹의 뜻을 헤아려보니 그대에게

묘한 재주가 있어ㅓ 사람들이 그대의 그림을 보배로 여길 것이니, 영월주明月珠 · 야광벽夜光壁과 같은 보배를 어찌

가볍게 여기겠는가. 훗날 그대의 그림을 덛는 사람은 보배로 간직할 것이니 주저하지 말라" 라고 하였다.

칠칠이 말하길, "그림은 내 뜻에 따른 것일 뿐! 세상엔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드무네.

참으로 그대 말처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그림을 알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싶네" 라고 하였다.

마침 영모화를 그려 여덟 첩으로 내게 전해주니 나는 최백崔白의 영모라고 일컫고 이를 글로 남긴다.

(밑줄은 인용자)

 

 

최북의 1747년 작 <산수도>는 최북과 안산의 지식인들과의 교유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면 좌측 상단에 "정묘년(1741) 겨울 길보 형에게 그려주다" 라는 글에 등장하는 길보는 당시 안산의 유생이었던

최인우崔仁祐(1711~1761)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인우는 31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아지 않고 안산에

은거하며 학문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이용휴 · 강세황 · 허필 · 신광수 등과 함께 이른바 '안산 15학사'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북과 긴밀히 교유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북 <산수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29.0×53.5cm, 국립중앙박물관.

 

 

· · · 최북보다 한 살 아래였던 강세황과의 교유는 현재 남아 있는 여러 회화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최북의 선면扇面으로 된 <산수도>는 가운데 우뚝 솟은 주산을 중심으로 강을 끼고 있는 언덕 위의 마을을 그린 것이다.

가옥들을 사이에 두고 전체적으로 원경의 나지막한 산들은 푸른빛으로, 그 아래 마을과 바위, 강가의 포구 등은 먹으로

처리하고 엷은 담갈색으로 채색하였다. 화면 왼쪽 아래에 적힌 제시는 중국 명대 시인

이동양李東陽(1447~1516)의 이다. 

· · ·  앞서 본 <산수도>의 예와 같이 최북의 작품이 포함된 화첩류 중에는 심사정과 강세황의 작품이 함께

수록된 예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앞선 시기 최고의 화가였던 겸재 정선의 작품과 함께 엮은 화첩도

전한다. 최북의 작품이 그들과 나란히 할 만큼 명작으로 꼽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동시대를 살았던

심사정과 강세세황과 최북이 서로의 화풍 정립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최북, <영지와 난초>, 《와유첩臥遊帖》 중, 조선 18세기, 종이에 담채, 23.5×17.3cm, 개인 소장.

 

 

· · ·  한편 《와유첩臥遊帖》 은 최북이 강세황 등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지인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를 명확히

보여주는 화첩이다. 모두 4족으로 이루어진 이 화첩에는 강세황, 최북, 허필의 회화 작품과 함께 강세황의 묵서가

실려 있다. 화첩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이 함께 와유를 즐긴 뒤 기념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북이 남긴 <영지와 난초> 그림에서 바위 사이에 붉은 영지버섯과 난초는

'지란지교芝蘭之交', 즉 군자들의 사귐과 교제를뜻하는바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또한 유연하게 뻗은 난초는 강세황의 난초 그림과 유사한 화풍을 보인다.

이 화첩은 본래 그들과 교유하였던 정란이 간직하고 감상하다가 역시 안산의 문인이자

이들과 가까운 벗이었던 신광수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 작은 서화첩에서도 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들의 교유관계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라 하겠다.

 

 

 

최북, <메추라기>, 18세기, 비단에 채색, 24.0×18.3cm, 고려대학교박물관.

 

 

· · ·  메추라기는 겸손하고 청렴한 선비를 상징하는 동물로, 얼룩진 깃털은 누더기처럼 보이고, 일정한

거처 없이 어디서든 만족하며 살지만 정한 짝과 함께하는 특성이 있다. 즉 메추라기는 가난하지만

어디서든만족한 삶을 사는 안빈자족安貧自足을 상징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화조화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최북의 <메추라기>는 메추라기 산 쌍이 조를 쪼아 먹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풍요로움을 의미하는 조는

추수철 인 가을에 먹을 수 있는 곡식이며, 메추라기 뒤편의 푸른 들국화에서 역시 가을이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메추라기의 암컷의 한자어인 '암鵪'은 발음이 '편할 안安'과 비슷하여 편안함을 상징하며, 국화를 뜻하는

'국菊''자의 중국어 발음이 '머물 거居'와 같은 점에서 편안히 '안거安居'하라는 축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 · 한 마리는 영근 이삭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있고 한 마리는 떨어진 조 알갱이를 먹고 있는

모습이 특징이다. 이삭 역시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모양새는 겸손의 미덕을 상징한다.

이렇듯 조를 쪼는 메추라기의 모습은 이상적인 인간상이기도 하다. 

· · · 화면 우측에 "방징명필倣徵明筆" 이라는 묵서는 중국 명대의 서화가 문징명 文徵明(1470~1559)의

메추라기 그림의 방작倣作이라는 의미라기보다 문징명으로 대표되는 남종문인화적인 필치

격조를 따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최북, <호취응토도>, 18세기, 종이에 담채, 41.7×35.4cm, 국립중앙박물관.

 

 

매가 토끼를 사냥하는 도상은 새해를 맞이하여 세화歲畵로 많이 그려졌던 그림이다.

최북뿐 아니라 심사정 역시 즐겨 다루었으며 후대의 김홍도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그렸던 친근한 소재이다.

최북의 <호취응토도豪鷲凝圖>는 매가 매서운 눈으로 바위 위 나뭇가지에 앉아 토끼를 노리는 긴장된

순간을 그리고 있는데, 간송미술관에도 이와 비슷한 작품이 남아 있다. 토끼를 간략히 묘사한 것을 제외하고는

두 작품의 매와 토끼의 위치나 경물의 포치가 비슷하여 최북이 이러한 구도에 익숙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매는 노란 눈과 붉은 혀 등을 선명히 표현하여 매서운 매의 느낌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매의 무게 중심도 앞쪽으로 쏠려 있어 도망가고 있는 토끼에게 당장이라도 날아가려는 듯한

긴박함을 살리는 사질적인 표현에 주력하였다.

 

 

 

 

심사정, <호취박토도>, 1768년, 종이에 담채, 115.1×53.6cm, 국립중앙박물관.

 

 

최북과 교유했던 심사정 역시 매의 토끼 사냥 그림을 많이 남긴 바 있다.

1768년 작 <호취박토도豪鷲搏圖>는 최북의 도상보다 조금 더 복잡한데, 이미 매가 토끼를 사냥하여

발아래 토끼를 움켜쥔 채 바라보고 있고 화면 위아래에 각각 꿩과 작은 새 한 쌍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최북, <쌍치도>, 1751년, 종이에 채색, 105.2×56.2cm, 국립중앙박물관.

 

 

최북과 심사정 모두 즐겨 그렸던 또 다른 화조화의 소재는 꿩이다.

1751년 작 <쌍치도>는 화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매화나무를 상단에 배치하고 그 아래 노닐고 있는 한 쌍의

꿩을 묘사하였다. 꿩은 선비의 절개와 청렴을 상징하며, 이처럼 장끼와 까투리가 함께 등장하는 도상은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화면 우측 상단에는 김씨와 이씨 성을 가진 친구들에게 주는 그림이라는 최북의 묵서가 남아 있어

가까운 지인에게 선물하고자 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나뭇가지에는 연노랑과 흰색의 매화와 붉은빛의 동백이

어우러져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게다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꿩 중에 상단의 수컷이 매우 화려하게 묘사되어

장식성을 더하였다. 특히 꽁지깃이 몸 길이의 두 배가 넘고 위를 향해 유려한 곡선으로 뻗어 있는 꿩의 모습은

역시 같은 소재를 그린 심사정의 <호취도>와는 다른 분위기의 최북만의 개성을 보여준다.

 

 

 

 

(좌), 최북, <토끼> 부분, 18세기, 종이에 채색, 33.5×30.2cm, 호림박물관.

(우), 최북, <게>, 《제가화첩》중, 18세기, 종이에 수묵, 24.2×32.3cm, 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동물의 세밀한 묘사는 <토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토끼가 열매가 영글어 고개를 숙인 수수를 올려다보는 모습을 그렸는데, 알리 둥글고 꽉 차게 영근 수수는

풍요로움을 뜻한다. 특히 이 작품은 가는 세필로 흑갈색의 토끼털을 묘사하여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력과 기량을 지닌 최북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임신의 상징인 '게'는 예로부터 문인들 사이에서 '어해화漁蟹畵' 중에서도 애호되던 소재였다.

심사정과 김홍도가 게 그림으로 유명하며, 최북 역시 여러 작품을 남겼다. 최북은 갈대밭에 한 마리는 등을,

또 다른 한 마리는 배를 드러내고 있는 한 쌍의 게가 등장하는 구도를 즐겨 그렸다.

집게발에 털이 수북한 것으로 보아 참게인 것으로 보인다.

두 마리 게가 등장하는 것은 '이갑二甲', 두 번의 으뜸, 즉 과거시험의 소과小科와 대과大科에

모두 급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갈대를 집게다리로 집고 있는 게의 모습은 장원급제자가 임금에게

으식을 하사받는 '전려傳臚'의 발음이 갈대를 전한다는 '전로傳蘆' 와 비슷하여 역시 입신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최북, <매죽도>, 18세기, 종이에 수묵, 101.0×59.2cm, 삼성미술관 리움.

 

 

한편 사군자의 경우 최북은 보수적일 정도로 전통을 반영한 작품을 남기고 있어 다른 화목들과

차이를 보인다. <매죽도梅竹圖>는 화면을 급격히 가로지르는 매화 줄기와 지그재그로 뻗은 마른 잔가지

등에서 17세기 매화도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당시화보唐詩畵譜》 같은 화보의 영향도 함께 보여준다.

 

 

 

 

 

 

 

또한 최북이 일본 통신사행 때 남긴 <월매도月梅圖>(일본 후쿠오카시립박물관 소장)는 이전 시기 어몽룡魚夢龍 

(1566~?)의 월매도를 연상케 할 만큼 매우 흡사하다. 이는 최북이 참여했던 통신사행의 수행화원이었던 이성린

李聖麟(1718~1777)의 작품에서도 간취되는 특징이어서, 당시 직업화가들의 사군자에 대한 보수적인 경향을 잘 보여준다.

최북이 일본에서 남긴 <화접도花蝶圖>는 일본 오사카에서 편찬한 화보 《화사회요畵史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최북이 잘 그렸다고 하는 나비 그림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보통 국화와 대나무를 조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최북은 국화와 난초를 조합하고 있어 이채롭다.

 

 

 

 

최북, <게>, 18세기, 종이에 수묵, 26.0×36.7cm, 선문대학교박물관.

 

 

· · · · 최북은 말년에 지두화법畵法을 구사하였다고 알려졌는데, <게>가 그 예이다.

손가락으로 자유롭게 구사하는 지두화법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사의적인 표현을 용이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지두화법은 최북뿐 아니라 심사정, 강세황, 허필 등 18세기 문인화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기법으로, 이들과 함께

어울렸던 최북 역시 일찍이 이 기술을 습득할 기회를 가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임에도

먹의 농담을 조절하여 게와 갈대를 다채롭게 표현하였고, 손가락의 힘을 조절하여 강약과 생동감을 주었다.

 

 

 

 

 

 

최북의 <화조도>는 이채롭게 새 한 마리가 수직으로 아래로 뻗은 매화나무에 내려앉은 모습을 묘사하였다.

매화의 꽃망울이 터질무렵이니 계절은 초봄이고, 가느다란 가지를 움켜쥔 작은 새는 삼광조三光鳥로 추정된다.

수직으로 뻗은 가는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몸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두 발을 힘주어 움켜쥔 과감한

구도의 극적인 장면은 심사정의 작품에서도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도상은 《개자원화보》에서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지만, 수직으로 뻗은 나뭇가지는 흔히 볼 수 없는 구도여서 최북의 표현력을 짐작케 한다.

 

 

 

 

 

 

· · · 《제가화첩》에는 심사정의 <모란>과 <석류>를 비롯하여, 최북의 <모란>과 <동백> 등 선홍빛이 화사한

화훼화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붉은 모란이라는 동일한 소제를 묘사한 최북과 심사정은 담채몰골법으로

꽃술에서부터 꽃잎 하나하나, 잎맥까지도 자세히 묘사하였고, 줄기에 비치는 붉은 줄까지도 생생히 표현한

점이 흡사하다. 강세황이 '중국의 고법古法을 따랐다'라고 발문을 적은 것에서 중국의 화보류를 참고하여

완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 화첩 속 두 화가의 유사한 화훼화풍을 통해서

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 강세황, <무>, 《표암첩》중, 18세기 비단에 다채, 24.5×16.3cm, 국립중앙박물관.

 

 

특히 그들이 가지, 무, 무청, 오이 같은 채소들을 소재로 즐겨 삼은 것은 이전 시기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없는 경향이다. 이들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배추, 오이, 가지 같은 채소들을 이전이 영모화처럼 치밀한

세필로 사질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배경 없이 담채몰골법으로 대상을 담백하게 그려냈다. 이처럼 최북, 강세황,

심사정의 화조영모화에서 보이는 사실적 표현은 직접적인 사생에서 얻은 것이라기보다 처음부터 어느 정도의 사

생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화보를 참고하여 연마하고, 대가들의 작품을 모방하면서 나온 것이다. 연객 허필이

강세황의 <절지여지도>를 평하면서 "화가들은 대개 눈으로 보지 못한 것도 잘 그리니, 용을 그리는 것이 그러하며

지금 이 타래꽃 또한 그러하다" 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런 지점을 지적한 것이다. 실제로 심사정과 강세황의 화훼

영모화는 《십죽재서화보》나 《개자원화전》같은 화보, 그리고 당시 적지 않게 전래되며 열람되었던 명나라 임량

이나 심주 계열의 화조화를 따라 그리거나 그 형식과 기법을 응용하여 부분적으로 변형했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유입된 당대 최신의 화보들을 숙지하고 실생활에서 꾸준한 관찰을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나갔다.

 

 

 

인용: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중 권혜은 논저 「호생관 최북의 화조영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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