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에 나타난 흉배제도
흉배의 착용이 시작된 것은 당대唐代부터이고, 제도적으로 정착된 것은 명대明代에 이르러서이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명나라의 흉배 제도는 1393년(홍무 26)에 제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607년에 간행된 《삼재도회三才圖繪》를 보면 흉배에 표현되는 동물이 《대명회전》과 달리 품계에 따라 분리
되거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청대에는 1690년에 간행된 《대청회전大淸會典》과 18세기의 《청회전도淸會典圖》
를 통해 흉배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데, 큰 틀은 유지한 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명 · 청대의 흉배제도를무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직후 명나라의 조정에서 제정한 관복을 입도록 하였는데, 검소를 숭상
하고 사치를 억제하기 위해 흉배의 착용을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사신이 조선에 올 때마다 각종 흉배를
갖고 들어 왔고, 조선 내에서도 흉배 착용에 대한 요구가 계속되었다. 결국 1454년(단종 20에 종친들에게 처음
흉배가 부착된 단령團領을 입게 하였고, 곧 문무 당상관도 모두 흉배를 부착하게 되었다. 흉배제도가 법전으로
기록된 것은 1484년(성종 150 12월에 편찬된 《경국대전》이다. 아래는 《경국대전》 「예전禮典」
의장조儀章條에 기록된 흉배제도를 보면 아래와 같다.
《경국대전》 이후의 법전으로는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續大典》을 들 수 있다.
《속대전》에서 '당상 3품 이상의 무신 흉배는 《(경국)대전》의 무신 당상(1 · 2품), 당하 3품 이상의 무신 흉배는
《(경국)대전》의 무신 당상(3품)과 같다' 고 명시하였다. 즉, 1~2품은 호표흉배, 3~9품은 웅비 흉배를 사용하도록
하였고, 이후 편찬된 1785년(정조 9)의 《대전통편大典通編》과 1865년(고종 2)에 편찬된《대전회통大典會通》
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무관의 흉배만을 정리하면 >표 2-3>과 같다.
조선시대 무관 초상화는 오사모烏紗帽에 단령을 입은 정장관복본이 대부분이다. 무관 초상화가
군복본 등 다양한 형식이 발달하지 못한 이유는 대부분이 공신으로 책봉되면서 궁중화원에 의해
그려졌고, 공신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형식의 초상화가 상당 기간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는 개국공신의 무관 초상화가 있지만, 초기에는 관복에흉배를 달지 않았으므로
흉배가 등장하는 15세기 후반의 무관 초상화부터 흉배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시대 초상화 중에서 흉배가 처음 나타나는 것은 현존 자료로는 <신숙주 초상>이고, 무관 초상화 중에서는
적개공신敵愾功臣인 <전傳 오자치 초상>이 가장 이르다. 적개공신은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녹훈된 공신으로 오자치(1426~?)를 포함하여 모두 45명의 공신이 녹훈되었다.
적개공신상은 현재 <전 오자치 초상> 이외에 <손소 초상>과 <장말손 초상>이 있다.
<전 오자치 초상>은 오사모에 아청색鴉靑色 단령을 입고 공수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의
전신교의좌상이다. 흉배는 황금색의 직금흉배(織金胸背)로 주인공의 상반신 대부분을 덮을 만큼 크다.
흉배에는 운문雲文과 초목문草木文을 배경으로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와 점박이무늬가 있는
표범이 마주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형태의 외곽선을 그리지 않는 몰골법을 사용했다.
(좌), 해치흉배>, 조경 묘 출토, 비단, 34.5×35.0cm, 서울역사박물관.
(우), <조경 초상>의 흉배 부분, 조선 후기, 비단채색, 전체 90.0×165.5cm, 국립중앙박물관.
학이 문관을 상징하는 동물이라면, 호랑이는 무관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호랑이 흉배가 묘사된 무관 초상화는 선무공신인 <권응수 초상>, <이운룡 초상>, 호성공신인 <고희 초상>,
정사공신인 <박유명 초상> 등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앞서 살펴본 <조경 초상>의 주인공인 조경(1541~1609)
의 무덤에서 호랑이 흉배가 아닌 해치흉배가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당시에 호랑이와 해치가 흉배
문양으로 혼용 사용되었고, <조경 초상>에 호랑이흉배가 그려진 것은 당시 해치가 공식적인 흉배로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 해치와 사자는 비록 상상 속의 동물이지만 위 도상에서 보듯 분명한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치는 산우山牛 또는 양과 비슷하고 한 개의 뿔을 갖고 있다. 사자는 뿔이 없는 대신 얼굴 주위에 갈기가 있고,
앞뒷다리에 화염문火焰文이 있다. 하지만 무관 초상화에 나타난 해치흉배와 사자흉배를 보면 사자를 해치의
변형으로 보기도 하고, 해치와 사자의 중간 형태를 띠기도 한다. 이는 초상화뿐만 아니라 출토복식과 함께
발견되는 실물 흉배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다.
해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신수神獸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사헌 같은 심판관의 상징물로 사용되었고,
실물 흉배가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전하고 있다(도 2-8, 9) 이러한 해치 흉배는 조선 중기에 무관의 흉배로
종종 묘사되었고, 그 예로 <이중로 초상>(도 2-10), <전 구인후 초상>(도 2-11), <정충신 초상>,
<유효걸 초상> 등이 있다. 해치의 변형 또는 사자의 변형으로 볼 수 있는 흉배들도 있다. <이수일 초상>의
흉배에는 뿔이 하나 달린 해치가 그려져 있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해치보다는 사자의 형상에 가까워 보인다.
반면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겸여온(1596~1665)의 <흉배>(도 2-12)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7세기 초에 제작된 조경의 <해치흉배>나 앞서 살펴본 초상화의 해치흉배들과 비교해볼 때 전체적인 자세나
표현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머리에 뿔이 없기 때문에 해치의 가장 큰 특징이 묘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흉배를 해치 또는 사자흉배로 확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신경유 초상>(도 2-13) 등에 표현된 흉배를 해치흉배의 변형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대명회전》과 《삼재도회》
같은 기록의 삽화(도 2-6, 7)와 초상화를 비교해볼 때 사자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경유 묘에서 출토된
실물 흉배(도 2-14)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사자 특유의 갈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해치흉배, 사자흉배 또는 변형된 흉배가 그려진 초상화는 모두 1623년(인조 1) 정사공신과
1624년(인조 2) 진무공신에 녹훈된 공신화상이다. 정사공신과 진무공신은 녹훈된 시기는 조금 다르지만 한 권으로
녹훈도감의궤가 만들어졌고, 공신화상도 동시에 제작되었다. 정사 진무공신 중에서 해치와 사자흉배가 그려진
무관 초상화를 정리해보면 <표 2-4)>와 같다. 이 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같은 시기의 같은 품계라 하더라도
해치와 사자흉배가 공존한다. 이와 더불어 같은 흉배라도 도상과 표현 방법이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한 가지 법전, 제도 또는 기록으로 정사 · 진무공신의 무관 초상화에 그려진 해치 또는
사자흉배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등준시무과도상첩登俊試武科圖像帖》은 반신상의 무관 초상화로 구성된 화첩으로 1774년(영조 50)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화첩에 등장하는 18명의 무관들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기록이 부족해 화첩의 초상화가
그려졌을 당시 정확한 품계와 흉배를 비교해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만으로 짐작해볼 수밖에 없는데,
흉배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표 2-5>와 같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사자흉배와 호랑이 흉배가 공존하며,
같은 사자흉배나 호랑이흉배라도 도상이나 표현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기해기사첩己亥耆社帖》의 흉배 부분(표 2-6)과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의 흉배 부분(표 2-7)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이 화첩에 그려진 초상화의 흉배는
어느 정도 일정한 패턴을 갖고 있어 몇 개의 그룹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따라서 《등준시무과도상첩》은 극 사실
주의를 표방하던 조선시대 초상화에서 과연 화원이 실제 흉배를 보고 그렸는지 또는 이 화첩의 초상화가
1774년에 모두 함께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쌍호흉배雙虎胸背와 단호흉배單虎胸背는 조선 말기의 제도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무관의 흉배이다.
명칭은 분명히 '호虎' 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유물과 초상화 등을 보면 호랑이의 줄무늬가 아니라 표범의
점박이무늬로 묘사되어 있다. 기록에서 명확히 당상관은 쌍호, 당하관은 단호로 규정괸 것은 고종대이지만,
1784년에 그려진 <이국주 초상>(도 2-15). 19세기 초의 <신흥수 초상>(도 2-16), 1870년의 <신헌초상>,
19세기 말의 <신정희 초상> 등을 볼 때, 적어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는 이 제도가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무관이 흉배는 일부 예외가 있지만, 대체로 호흉배라고 부르고, 표범의 무늬를 묘사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운룡 초상>, 178.0×146.0cm, 후대 이모본, 개인 소장.
기존에는 무관 초상화의 호랑이흉배를 민화 속 호랑이의 시원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무관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17세기 무렵의 사람들이었고, 민화에 호랑이가 주로 그려진 시기는
19세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호랑이흉배가 그려진 무관 초상화가 17세기에 그려진
원본이었을 경우에만 타당하고, 만약에 후대에 그려진 후대본이라고 한다면 완전히 반대의 상황이 된다.
호랑이흉배가 그려진 초상화 중에서 <이운룡 초상>에 묘사된 호랑이흉배는 일반회화의 '호랑이 그림'에서
도안화된 '호랑이 민화'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조선 후기 호랑이 그림은 <맹호도>에서 보듯이 극세필을 이용한 털의 생생한 묘사와 역동적이 동작이 특징이다.
이 호랑이흉배에서는 호랑이 털의 묘사는 생략되었지만 두상과 골격의 표현이 비교적 충실히 묘사되었고, 특히
배경으로 소나무가 표현되어 있어 흥미롭다. 이는 19세기에 그려진 민화풍의 <송하맹호도> 속 호랑이와 자세가
비슷하지만, 화풍은 오히려 더 회화적이다.
<권응수 초상>과 <박유명 초상>의 흉배 부분에 묘사된 호랑이는 자세가 좌우로 반전되어 있지만
전체적인 도상이 거의 같아서 19세기의 <송호도>와 견주어볼 만하다. 머리는 몸과 반대쪽으로 돌아 있는
상태에서 앞다리로만 일어서서 뒷다리는 접을 채 앉은 자세이다. 앞다리는 교차해서 내딛었고, 뒷다리는
몸통에 가려져서 일부분만 묘사되어 있다. 이마 쪽에는 점박이 무늬를 하고 있고, 그 밖의 몸통과 다리 등
에는 두개의 줄무니가 한 조를 이루면서 묘사되는 등 전체적으로 초상화의 흉배 부분 호랑이와 <송호도>는
상당히 유사하다. <조경 초상>의 흉배도 조선 후기의 <작호도>와 비교해볼 만하다. <작호도>의 호랑이는
어깨가 강조 되었지만, 그 밖에 머리와 몸통의 무늬 표현 방법이라든가 자세 등이 매우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유사성으로 인해 조선 중기에 그려진 무관 초상화 흉배의 호랑이들은 조선 후기 민화 호랑이의
시원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앞서와는 다른 실물 흉배, 같은 도상을 찾아볼 수 없는 호랑이흉배, 호랑이흉배가
그려진 초상화가 모두 조선 후기 또는 말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에서 호랑이흉배가 등장하는 것은 민화 호랑
이의 도상이 참고가 되었거나 민화를 그리던 화가들이 초상화를 제작하면서 도상이 자연스럽게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 흉배는 표현된 동물에 따라서 초상화 주인공의 신분이나 품계를 추측하는 데 중요한 단서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흉배제도는 혼란스러웠고, 특히 무관은 문관에 비해 흉배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유행이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같은 시기에 같은 품계의 무관 초상화에서도 흉배가 통일되지 않은 것을 확
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무관의 흉배제도를 초상화를 통해 유추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관 초상화의 원본, 이모본, 후대본의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흉배뿐만 아니라 작품의 약식, 도상,
화풍 등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중 권혁산의 논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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