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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반계 유형원

반계서당

 

 

 

 

 

원서原序

 

 

정치가 쇠퇴한 이후로 통변通變의 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그러므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들은 사려를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필히 곤궁한 상태에서 화평한

상태로 돌리기를 도모하는데, 이 어찌 나 한 몸의 사욕과 관계가 있겠는가?

 

맹자는 "지금은 행하기 쉽다" 라고 말했으니, 착오와 오류의 잘못된 습관에 젖어서 능히 빼어난 업적을

이루기란 있을 수 없다. 고금에 걸쳐 치세를 말함에 누구나 적폐를 청산하고 좋은 데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안이한 태도로 궁지에 빠지길 먼저 밝혀 개혁하지 않을 수 없으며, 법은 변통을

구하지 않고 집착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렇지 않으면 백가지 아름다운 정책도

실제 일에 유익함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한번 시험 삼아 논하건대,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것은 남의 집을 빌려서 세 들어 사는 데 비유할 수 있다.

혹 집이 오래되고 낡아서 기둥은 기울어지고 들보가 썩고 서까래나 창이며 벽, 어느 것 하나 온전한 곳이 없다.

세 들어 사는 자는 우선 무너지지 않도록 수리 · 보수하고 지탱하여 얼마 동안이나마 우선 유지할 수 있도록 할

뿐이다. 이윽고 집주인이 오면 무너지고ㅗ 기울어진 것을 온통 바꾸고 고쳐서 마음의 수고를 다하고, 허다한 

재물을 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는 왜 그런가? 저 세 들어 사는 자는 자기의 소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집이 무너질 위험은 오직 집주인만 심각하게 느끼는 것이다. 심각하게 느끼기에 우려하게 되고, 우려하게 되니

대책을 강구한다. 마침내 완전히 뜯어 고치는데로 돌아갈 것이다. 신하가 되어 나라를 생각함에 있어서 필시

구한 계책을 도모해야 할 일이다. 어찌 낡은 관습에 젖어 구차하게 지내면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면서

접 감당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랴?

 

옛날 이문정文靖과 왕문정王文正은 안정과 무사만을 주장하여, 무릇 건명建明이 있으면 일을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당시는 창업한 지 오래되지 않아 백가지 제도가 해이해지지 않아서 그래도 이처럼 넘길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폐단스러운 일이 극도로 많아졌다. 논하는 자들은 이 · 왕 두분에게 책임을 돌렸다. 왕안석王安石이 변법

의 정책을 펴다가 결국 낭패를 보았으나 그의 죄는 지나치게 고집을 부리는 데 있었지 처음부터 구법을 변통하려

는 데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사마광司馬光 또한 한편에 치우쳤다는 평을 면할 수 없다.

 

앞의 말은 모두 내가 들은 바 있으니 다름 아니고 주부자朱夫子로부터 온 것이다.

앞서 이 · 왕 두분이 결점을 그런대로 막아내고, 또 왕안석이 방안대로 잘 변통을 했다면 어찌 다시 그런 우환이

있었겠는가? 이 이후로 사람들이 모두 뜨거운 국물에 덴 것을 경계하듯 말이 조금이라도 시폐와 관련이 되면

크게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기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거의 무서운 짐승이나 마귀처럼 몹쓸 것으로 여겼다.

이에 늘 해왔던 제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바뀔 수 없는 진리로 여겨 다시는 감히 입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기왕의 큰 도량이 도리어 허물을 감추는 묘술이 되었고, 왕안석의 한때의 착오가 개혁을 회피하는 구실이 되었다.

그래서 천하에 다시는 좋은 정치가 없게 된 것이 송나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근세에 반계 유선생이 지은 《수록》 1편이 있는데, 우리 동방에서 경세經世의 임무를 아는 데 가장 중요한

책이다. 그럼에도 또한 현 시대에 팔리지 못하고 사가의 책상자 속에 사장되어 있었다. 뒤에 차츰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국가에 올려지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겉으로는 좋아하면서도 속으로 좋아하지 않고, 말로는 칭찬

하면서도 국사에 적용하려 하지 않았으니, 어떻게 한발자국이라도 실천으로 향해서 나아갈 수 있었겠는가?

이 또한 바삐 지나가는 사람이 길가의 무너지는 집을 얼핏 보고 고쳐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부터 진정한 뜻이 있었던 것이 아니니,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과

무슨 다름이 있으랴?

 

슬프다. 저 《수록》의 원고는 바위 속에 박힌 옥, 모래에 파묻힌 진주와 마찬가지이다.

가 같이 세상에 쓰임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단지 이 《수록》이 있는 줄은 알지만, 다시

《군현제(郡縣制)》 《여지지輿地志》 같은 저술이 가지가지 시무에 필요한 줄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밖에 해타咳唾의 나머지를 수습한 것으로 '반계집' 6권이 있다. 이는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서부터

인민仁民 · 애물愛物에 이르기까지 굽이굽이 곡진한 내용이다. 요컨대 《수록》과 더불어 우익羽翼을 이루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잘 갈마두고 안목 있는 사람을 기다린다.

 

- 임형택 편역 《반계유고》 중에서 -

 

 

 

 

 

 

 

 

 

고 처사 유형원에게 내린 하교

- 정조正祖 -

 

 

증贈 집의겸진선執義兼進善 고故 처사 유형원은 그가 찬한 《반계수록隨錄》의 보유편

에서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에 광주廣州의 하도下道인 일용면一用面 등을 더해주고 치소治所를

북평北坪으로 옮겨 내를 끼고 지세를 따르게 하면 읍성邑城을 지을 수 있다" 라고 하였다. 또 거듭하여

"읍치의 규모와 평야의 큰 경관이라면 참으로 대번진大藩鎭의 기상이 있어 그 땅 안팎으로 1만호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성을 쌓는 노동력은 향군鄕軍이 정번停番하면서

내는 재물로 충당하면 된다" 라고 하였다.

 

대개 그 사람은 유용한 학문으로써 경제經濟에 관한 글을 저술한 것이다.

기이하도다! 그가 수원의 형편을 논하면서 읍치를 옮기자고 한 계획과 성을 쌓자고 한 방책은 그 자신

100년 전에 살았으면서도 오늘의 일을 환히 알았던 것이다. 면面들을 합치고 정번의 재물을 쓰자고

하는 등의 세세한 규칙과 자잘한 사무도 모두 부절符節처럼 딱 들어 맞았다. 그의 책을 보고 그의 말을

쓴다 하더라도 아쉬움이 있었을 것인데, 그의 글을 보지 못했는데도 본 것 같이 되었고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미 활용했으니, 그 사람의 포부가 실로 넉넉했기 때문이다. 곧 이 화성華城 한가지 일은

에게 있어서는 바로 간밤이나 오늘 아침에 만난 것 같다고 할 만하다.

 

기억하건대 전에 그 집안의 후손에게 추은推恩할 적에 의례적으로 호조참판을 증직하려 하자

상신相臣이 "관례로 증직하는 직함이 특별한 증직에는 도리어 손색이 있으니, 이 유신에게 대해서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라고 힘써 말하여, 일찍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더구나 지금 그에 대한

감회가 일어나는데 어찌 격려하고 면려하는 은전을 빠뜨릴 수 있겠느냐? 성균관 제주를 더 증직하고

그 사손嗣孫을 찾아 보고하도록 하라고 하교 하였다.

 

이미 찬선贊善과 참판參判을 증직했기 때문에 이조참판吏參判 겸

제주찬선祭酒贊善을 증직하는 것으로 시행하였다.

 

 

 

 

반계 유형원

 

 

 

사잠四箴 / 임오년(1642)

 

도道에 뜻을 두고도 확고히 서지 못하는 까닭은 뜻이 기질氣質로 인해서 게으르게 된 잘못이다.

숙흥야매夙興夜寐를 능히 하지 못하고, 의관을 바로하고 시선을 정중하게 하지를 못하며, 어버이를

섬김에 안색을 화和하게 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생활할 적에 서로 공경히 대하지 못하는 이 네가지

문제점은 외적으로 나태한 데다 심중에서 가다듬지 못한 때문이니 응당 깊이 반성해야만 가능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네가지 잠箴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노라.

 

 

사람의 마음은 본디 비어 있는데 기질로 인해서 맑게도 되고 탁하게도 되느니라.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밤이 깊어 잠자리에 들라.

 

의연하고 강강强剛하여 아무쪼록 힘써 게을리 말라.

 

나태한 태도를 없애고 보면 도道로부터 멀지 않으리라.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존엄히 하라.

 

반드시 모범이 되고 단정히 함에 하나를 위주로 하고 두 마음을 품지 말라.

 

겉모습이 발라야 속마음이 절로 본받게 된다.

 

온순하고 부드러우니 얼굴빛이 화평하네.

 

'네' 하고 대답하고 공경히 대하며 뜻을 좇아 행할 것이로다.

 

누가 강양剛陽의 도를 펴서 갑자기 바로잡으려 하는가.

 

부모의 은혜를 상하게 함이 크니 천리가 혹 끊어질 것이로다.

 

네 방에 있을 때 경계하여 반드시 삼가 위의威儀를 갖추라.

 

매사를 바르게 하며 평안하여 고마움을 느끼게 하라.

 

훌륭하도다, 문왕文王이시여, 아내에게도 모범이 되었도다.

 

분별도 의리도 없다면 금수禽獸라 할 것이다.

 

 

 

 

반계서당에서의 조망으로 멀리는 곰소만이다.

 

 

 

 

선생의 주저는 공인하는 바와 같이 《반계수록磻隨錄》이다.

《반계수록》은 한마디로 선생 자신이 당면한 시대를 '문명적 위기'로 각성하면서 추구한 학문의 결산이다.

당시를 '문명적 위기'로 생각하게 된 데에는 서세동점이란 세계적 조류가 배경을 이루었던 한편 명 · 청

교체라는 동아시아 상황과 직접 연계되어 있다. 선생은 《반계수록》에 붙여서 "적폐를 그대로 두고 바꾸지

못한 것이 많았던 데다가, 쇠약함이 누적되어 드디어 큰 치욕을 입게 되었다" 라고 술회하였다. '큰 치욕'

이란 만청滿淸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사태를 가리킨다. 선생은 만청의 비배하에 놓인 동아시아

의 상황을 '문명적 위기'로 진단하고, 적폐를 전면적으로 청산하는 근본적인 개혁의 과제를 급선무로 사고

것이다. 그런 사고를 학문 작업으로 수행한 결과물이 다름 아닌 《반계수록》이다.

《반계수록》은 한국 실학의 발단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실학은 지난 1930년대에 국학운동이 제기되면서 국학의 뿌리로 인식 되었다.

국학운동의 선도자였던 위당 정인보는 반계를 '실학 1조祖'로 호명한다.

그리고 '실학 2조'로 성호星湖 이익李瀷을, '실학 3조'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호명했다.

반계를 실학의 출발선에 세우고 성호를 반계학문의 적전嫡傳으로 설정한 것이다.

성호는 《반계수록》의 정신이 근본적 · 전면적 개혁에 있는 바, 거기에는 '적폐의 청산'이 전제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깊이 공감한 터였다. 《반계수록》은 오직 정치적 실천에 의미가 있음에도 그 길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실제 상황을 절감하였다. 이에 성호는 적폐가 중대되어가는 국정을 병이 침중한 환자로

비유하고 《반계수록》을 신효한 약초에 견주어 "결국 병자는 여기서 죽어가고 약초는 저기서 썩어가

마침내 이도 저도 다 못쓰게 되고 마니 이것이 가장 한스런 노릇이다" 라고 통탄을 금치 못한 것이다.

 

20세기 초 망국으로 빠져든 상황에서 시인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반계는 일어나지 않고 다산도 죽었으니

열번이나 먼지 쌓인 책들을 앞에 놓고 머리가 다 희어지오[磻溪不作茶山死 十對塵編鬢欲絲]” 라고 비분의

심경을 노래하였다. 성호가 추단하였듯 '이도 저도 다 못 쓰게 된' 꼴이 된 것이다. 성호도 다산도 《반계수록

이 쓸모없이 되어가는 데 좌절하지 않고 제도를 개혁하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한 경세학經世學 을

심화 · 발전 시켰다. 그리하여 실학의 풍부화를 이룩했는데, 그럼에도 그 저술들은 사장되고

실학은 공언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 임형택 편역  《반계유고》 서문 중에서 -

 

 

 

 

우반동 선계폭포

폭포 윗쪽으로는 분지 형태로 허균이 은거했던 '정사암지'가 있는 곳이다.

 

 

 

 

『반계수록』유형원, 18세기,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유형원 편지〉 『근묵』, 1638, 해행서, 25.3×32.5㎝, 성균관대학교박물관. 

 진위 현령(振威縣令)에게 자기 비부(婢夫)를 위해 말을 되찾는 입안(立案)을

발급해줄 것을 청하는 내용으로 보낸 편지.

 

 

 

 

 

반계 유형원의 학문과 사상

 

신발굴 자료를 통해서 / 임형택

 

 

1. 반계의 저술

 

1930년대 조선학(=국학)운동이 일어나면서 그 뿌리로 실학을 인식하게 되었다.

반계磻溪 유형원馨遠(1622~73)이란 존재는 이 과정에서 '조선학의 창시자' (안재홍安在鴻 ) 혹은 실학의

1조祖(정인보鄭寅普)로 일컬음을 받았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반계는 '실학의 비조'로서 공인 받고 있는

학자이다. 그가 이처럼 부각되기에 이른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반계수록》 이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반계수록》은 원래 책 이름이 《수록隨錄》으로 되어 있다. 《전제수록田制隨錄》「부안읍지」이란 지칭도

보이는데 언제부터인가 《반계수록》으로 통칭된 것이다. 이 저술이 '경제經濟 대문자'로 국왕 영조의 상찬

받아 드디어 경상도 감영에서 공간公刊이 된다. 반계의 손에서 그것이 완성된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간행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여러 실학의 저술들이 20세기로 들어오기 이전에 발간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에 비추어 《반계수록》의 경우는 오히려 특별한 은전을 입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계의 저작물로서 《반계수록》 이 외에 따로 간행된 것은 없다. 다만 《군현제郡縣制》란 제목의 책이

《반계수록》에 보유로 들어간 바 있다. 《군현제》는 지방지적인 성격의 저술로서 행정 구역을 부분적으로

개편하려는 의도를 담은 내용이었다. 이것은 미완의 저술이었던 까닭에 《반계수록》과 함께 간행되지 못했다.

한데 "《수록》의 주에 《군현제》를 언급한 곳이 많아 《수록》만 보고 《군현제》를 보지 못하면 격화소양隔靴

搔癢 에 다름없다" 하여, 《반계수록》이 공간되고 10여년이 지난 1783년에 《반계수록》의 보유로 편입하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문인 학자라면 자신의 시문을 정리한 문집 형태의 저술이 없을 수 없다.

반계 또한 예외가 아님이 물론이다. 그의 학적 계승자인 성호湖 이익瀷의 글로 《반계유집서磻溪遺集序

가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저술로서 《이기총론理氣總論》1권, 《논학물리論學物理》2권, 《경설經說》1권.

《문답서問答書》1권, 《기행일록紀行日錄》1권 및 편저로서 《동국문 東國文》《도정절집陶靖節集》 등의 제목이

확인된다. 반게의 우반동 시절 제자인 김서경金瑞慶(1648~81)은 "선생의 덕행은 《문집》에 드러나고 사업은

《수록隨錄》에 밝여져 있다" 라고 하였다. 전형적인 '수기치인修己治人 '의 구도이다. 실학자라면 으레 그렇듯,

반계의 학문세계 역시 수기치인의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문집과 다른 여러 저술들을 접할 수

없었던 까닭에 반계의 학문과 사상을 인지하는 데 제한이 없을 수 없었다.

 

 

- 중략 -

 

 

2. 시 작품에 투영된 학자의 일상, 전환기의 자아각성

 

《반계일고》는 모두 필사본 46장으로 잠명箴銘 7편, 시 169제題에다 산문은 3편에 불과한 소책자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시부의 편차를 살펴보면 작자의 청년기로부터 몰년 가까이에 이르기까지 대략 시대순

으로 열거되어 있다. 요컨대 《반계일고》는 문집으로서 온전한 체제를 구비하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어도 앞의 잠명류箴銘類와 함께 시부는 흐트러지지 않고 원래 정리 · 편찬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듯하다. 거기에 산문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화귀거래사和歸去來辭」

「서수록후錄後」 「동국문후서東文後序」의 3편을 붙여놓은 형태이다.

 

 

- 중략 -

 

 

반계의 시 작품들은 경세적인 내용이라거나 무슨 도道를 실은 문자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족적을 따라서 생활의 실상을 엿볼 수 있고 자아의 독백을 듣는 귀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 중략 -

 

 

 

 

성리설

 

지금 전하는 반계의 이기문제에 관해 논한 글들은 모두 문답서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정동직鄭東稷(자 문옹文翁, 1623~58)과 배상유裵尙瑜(자 공근公瑾, 1610~86), 양섬梁暹(자 퇴숙退叔, 1643~?)

문답의 상대인데, 정동직과 배상유는 반계와 사돈간이며, 양섬은 반계의 생질이자 제자이다. 세 사람 또한

기호학계에서 활동한 학자였다. 정동직과 논한 서간이 「논이기서論理氣書」와 「논인심도심서論人心道心書」라고

제목을 달아놓은 데다가 분량상으로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반계는 주로 정동직이란 친구와의 토론을 통해서

성리설을 전개했다고 보아도 좋은 것이다. 반계가 남긴 철학적 텍스트에서 실리實理, 혹은 실리와 직결된

진술을 허다히 접하게 된다. 그래서 '실리' 두 글자가 주목을 받아 반계철학의 핵심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필자는 이 '실리'가 하나의 학술개념으로 성립할 수 있느냐는 점에 대한 견해를 간단히 개진한 바 있다.

 

실리는 고경古經에 나오는 말이 아니며, 《중용》에서 성誠을 주해하는 자리에 쓰이고 있다.

"성이란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니 성이 아니면 물이 있을 수 없다." (25장) 주자는 이 경문을 "천하의 만물은 모두

실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 이라고 풀이했다. 성誠은 곧 이理인데 그것이 성실하기에 만물을 생육한다는 사유이다.

실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어디까지나 이理의 작용을 형용하기 이해 동원된 수식어다. 반계는 주자의 이 실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리하여 "이理는 저절로 실리이지 기氣로 인해서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이의 자주을 강조하는데, 그렇기에 이의 작용방식은 성실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리고 정자程子의 "이 이는 매우 실하다" 는 구절을 들어서

"이는 확실히 실리이니 이렇게 보아야 맞다" 라고 하며, "이제 이는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실함을 깨닫다"

라고 부연해 말했다. 요컨대 굳이 실리라고 표현한 것은 이理 자체의 성실성을 고도로 강조한 어법에 다름 아니다.

 

《중용》에 "성誠은 천도天道요 성하고자 하는 것은 인도人道라"(20장)는 구절이 나온다.

천지간에 만물이 생육하는 것은  천도의 영역임에 대해서 인간은 실천적 노력이 요망된다는 취지다.

즉 선을 행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긴장의 과정, 그것이 인간적 성이다. 인간의 도리로서 실리는 도덕수양이

당위이자 필수이다. "이理는 본디 실리實理이기 때문에 도심道心이 당연희 원칙이 된다" 라는 것이 반계의 주장이다.

다시 말해서 이理와 별개로 실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반계가 이理 앞에 실實을 붙여서 쓴 것(實理)은 위에서

거듭 밝혔듯 이의 지극히 성실한 성격을 역설하는 어법이다. 이의 고유한 성실성을 고도로 강조하여 주체의 도덕적

확립을 의도한 것이다. 요컨대 실리는 존재론적 개념이 아니며 수양론으로서의 고도의 실천적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

 

이러한 반계의 성리학 담론은 주자학 · 퇴계학에 접근하는 자세요, 논리이다.

성리설을 주리와 주기로 구분지어 보자면 지금 이 반계의 학설은 주리에 속하는 것이다.

당초에 이우성 선생이 지적했듯 반계가 젊은 시절에 세웠던 관점은 "유기론論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철학에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공부가 성숙되면서 주리적主理的 입장으로 경도되" 기에 이른다. 

리의 고유한 성실성을 고강도로 역설하여 주체의 도덕적 확립을 기하려는 데 반계의 깊은 뜻이 있었다.

 

반계 이후로 실리란 말을 중요하게 쓴 사례를 필자는 양즉중梁得中(1665~1742)의 글에서 발견했다.

양득중은 명재明齋 윤중尹拯의 첫 손가락에 꼽히는 제자인데 《반계수록》을 국왕 영조에게 직접 읽어보기를 권하고

나아가서 조정의 문신들이 함께 그 내용을 공부하여 국정을 바로잡는 방법론을 세울 것을 진언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양득중은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은 오직 하나 실리일 뿐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갈파하고 있다.

 

"이는 즉 실리요, 마음은 즉 실심實心이요, 학문은 즉 실학實學이요, 일은 즉 실사實事이니 털끝만큼도 그 사이에

사심과 허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렇게 되면 실심은 맑고 밝아지며 실리도 청결하고 정밀하게 될 것이다.

 

이 자체가 실리이듯, 우리의 마음은 실심이 되어야 하며, 우리의 학문은 실학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하는 일은

실사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인 주장이다. 실리 - 실심 - 실학 - 실사로 긴절하게 연계된 논리구조는

철저히 실천적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위 맥락에서 '실사'는 우리가 수행하는 일은 진실하지 않으면 안 됨을 뜻하듯, '실학' 역시 학문의 진실성을 뜻한다.

허학虛學과 위학僞學을 배제하고 실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취지다. 여기서 실학은 역사적 개념의 실학과 꼭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으나, 무관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요는 허학과 위학을 배격하는 학문의식으로서

역사적 의미의 실학이 형성되어가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양득중의 이런 사고의 논리는 반계와 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반계가 제기한 실리는 존재론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주체확립을 의도한 실천론이었다.

반계 자신 주기에서 주리로 철학적인 입장 전환이 일어난 것은 그가 온몸으로 겪었던 시대상황, 거기에 처했던

자아의 각성을 아울러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물론 반계가 실리를 강조한 뜻은 십분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실리와 실학이 실이란 글자를 공유하고 있다 해서 바로 실학을 실리에 붙여서 추구하는 태도는 성급해 보인다.

그의 성리설에서 실리는 철학적 사유의 차원이다. 주기에서 주리로 철학적인 입장전환이 일어난 것은

그 자신 온몸으로 겪었던 시대상황, 거기에 처했던 자아까지 함께 고찰해야 할 문제이다.

 

- 하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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