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내용 모두는 한정희 외 著 《꽃과 동물로 본 세상》의 내용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중국의 봉황 기록과 도상의 형성 과정
<우인사봉(羽人飼鳳)>, 강소성 서주 출토, 한대 화상석
봉황에 대한 관념이 변화하면서 점차 봉황의 도상이 정립되었고, 봉황의 속성에서 비롯된 상징적 의미 또한
그 내용이 풍부해졌다. 봉황에 대한 기존 연구에 따르면 명대 초기에 이르러서야 궁정에서 비로소 봉황 그림
이 다른 화조화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회화 주제로 그려졌다고 밝혀놓았다. 송대 황실의 서화 목록인 《선화
화보 宣和畵譜》(1120)에서 화조화는 무수히 확인할 수 있지만 봉황도는 찾아볼 수 없는 데 반해, 용 그림은
이미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지며 독립적인 주제로 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영모화조화 연
구를 통해 송대와 원대에도 봉황도가 회화 주제로 다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송사宋史》에 기록된 봉황도에
대한 기록을 종합해보면, 봉황은 그 크기가 매우 크고 오색에 금술잔 같은 관이 있으며, 온갖 새들의 무리가 봉
황을 따르기에 이를 그림으로 그려 전하였다고 한다. 전국시대 이래로 상서의 하나로 간주된 봉황의 출현에 관
한 기록은 송, 금, 원대까지 계속되었다. 상서로운 새로서의 봉황의 이미지에서, 새 중의 오아이라는 '군조종지'
로서의 봉황, 즉 '백조조봉百鳥條鳳'으로 황제를 상징하다가, 다시 '봉명조양鳳鳴朝陽'으로 현명한 신하를 상징
하는 그림으로 이어졌다. 《송사》의 이 기록은 봉황도의 도상과 상징이 발전해나가던 과정에서 송대와 원대도
그 맥을 잇는 연속선상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회화에서 봉황은 주로 용이나 기린 등 사른 서수와 함께 등장하며 상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서수도瑞獸圖나
고사인물도故事人物圖에 자주 등장하였다. 독립적인 주제로 그려진 명대의 봉황도를 살펴보기 전에 고사인물도
속 봉황의 이미지를 먼저 살펴보자.
작자 미상, <선녀승란도>, 남송, 비단에 채색, 26.2×25.3cm, 중국 북경 고궁박물관
그림 속 난새[鸞]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대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여러 종류의 상상의 신조 중
하나였다가 한대 이후에 봉황의 범주 안에 포함된 새이다. 《설문해자》에는 난새가 길조이자 '적조赤鳥'의
오채五彩 깃털을 가진 닭을 닮은 새라고 전한다. 그림 속 난새의 머리 위에는 뾰족하고 짧은 우근 몇 개가
묘사되어 한대 이전 난鸞 타입의 신조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다. 이 그림에서 난새를 타고 가는 선녀는 계
수나무와 두꺼비가 있는 달을 돌아보고 있다. 또한 난새의 날개와 길게 늘어진 꼬리깃의 유려한 곡선이
선녀의 휘날리는 옷자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봉황선녀도>에서 봉황은 커다란 천도복숭아를 품에 안고 곧게 서서 앞을 보고 걷고 있는
선녀를 호위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 것으로 서조의 이미지를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다.
<취소인봉도吹簫引鳳圖>는 화려한 궁궐의 누대에서 농옥이 퉁소를 불자 그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봉황이 날아오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채색접시, 청, 경덕진요, 1700~1722년경, 지름 36.7cm, 영국 대영박물관.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제작된 채색접시에는 같은 주제의 고사에서 소사와 농옥이 각기 용과 봉을 타고
천상의 세계로 떠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취소인봉'의 내용을 담은 고사는 봉황을 불러올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성취와, 인간과 선인의 낭만적 사랑 이야기, 그리고 용과 봉황을 타고 선계仙界로 날아간다는 신선
사상이 더해진 이야기로 한국과 일본에서도 즐겨 그려왔다. 고대에 음악은 조화를 추구하였기에 예禮의
체득과 인격의 완성, 즉 예교禮敎로까지 연결되었다. 농옥의 연주 소리에 봉황이 날아왔다는 것은
천지가 조화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고사인물도에 묘사된 봉황은 천상의 신선 세계와
지상을 연결해주는 메신저로서 우주 만물의 지극한 조화로움을 상징한다.
작자 미상, <화조도>, 명, 비단에 채색, 174.3×116.9cm, 중국 상해박물관.
목련, 살구꽃, 모란 등 활짝 핀 꽃나무들로 가득한 정원의 파란색 바위 위에 올라선 한 쌍의 봉황이 화면의 중앙을
채우고 있다. 그중 양 날개를 펴고 꼬치 깃을 치켜세우고, 우아하면서도 위엄 있는 제왕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컷
봉황鸞은 주변의 새들에게 둘러싸여 숭배를 받는 통치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는 '백조조봉'을 주제로 한 전형적
인 명대의 봉황도이다. 봉황은 덕치하에서만 나타나는 새이므로 수많은 새들이 봉황을 숭배하는 이러한 장면은
성군을 숭배하는 '존군尊君'의 유교적 이념을 옹호하는 것이자, 황제의 자애로운 통치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봉황뿐 아니라 주변의 새들 역시 대부분 암수 한 쌍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 작
품은 기존의 <백조도百鳥圖>를 기본 도상으로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인데, 1413년에 변문진이 그린
<삼우백금도三友百鳥圖>와 비교해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변문진, <삼우백금도>, 명 1413년, 비단에 채색, 151.3×78.1cm,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삼우백금도>는 군자의 덕목을 상징하는 식물이자, 세한삼우로 불리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에 새들이
모여든 모습을 묘사하였다. 이 그림은 문인화가들이 즐기던 주제에 주로 직업화가들이 담당하던 그림
주제였던 화조화가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화조도>(상해박물관 소장)의 '백조조봉' 도상은 기존
<백조도>의 기본 도상에서 숭, 죽, 매가 주제의 중심을 이루던 것을 대신하여 봉황을 화면
중앙에 놓음으로써 새로운 주제의 회화로 참신한 변형을 가한 것이다.
좌) 작자 미상, <오륜도>, 명16세기경, 비단에 채색, 214.0×112.0cm, 미국 호놀룰루미술관.
우) 양량, <봉황도>, 명 15~16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63.0×96.0cm, 일본 교토 쇼코쿠지.
명대에 그려진 봉황도 중에 유교적인 사회윤리를 강조하는 또 다른 주제로서 <오륜도>가 있다.
청대의 도량陶樑(1722~1857)은 자신의 서화 수장 목록인 「홍두수관화기紅豆樹館書畵記」에 포함된 여기呂紀
(15세기 후반 활동)의 전칭작傳稱作 <오륜도>를 소개하며, 여기서 봉황을 비롯한 다섯마리 새들은 유교사회의
계급적 질서의 기반이 되는 오륜을 상징한다고 밝혔다. <오륜도>에서 봉황은 군신유의君臣有義, 학은 부자유친
父子有親, 원앙은 부부유별夫婦有別, 노랑 할미새는 장유유서長幼有序, 꾀꼬리는 붕우유신朋友有信을 각각 상징
한다. <오륜도>를 처음 그린 화가가 여기인지, 그리고 오륜이라는 유교적 규범을 다섯 종류의 새로 우의적으로 표
현한 것이 명대부터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늦어도 16세기 초에 이러한 <오륜도>가 유행한 것으로 보이
며, 그 이전에 성행한 명대 초기의 '백조조봉'의 도상을 참고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다섯 종류의 새는 '백조조봉'에
서도 주요하게 다루어지는 새들이기 때문에 '백조조봉'을 토대로 재해석된 것으로 보인다. 위 <오륜도>를 보면, 중앙
의 바위 위에 우아한 자태로 서 있는 봉황은 가늘고 긴 눈매와 짧고 뭉툭한 부리와 가늘고 긴 다리로 명대에 그려진
봉황의 특징을 보여주며, 그 주변에는 학과 원앙 등 오륜을 상징하는 새들이 암수 짝을 지어 다정하고 조화로운 관계
로 묘사되었다. 화면 왼쪽의 오동나무와 주변의 대나무 잎은 윤곽선 위주로 묘사되고 가벼운 담채만으로 구사되어
중앙의 세밀하게 채색된 봉황이 상대적으로 화려하고 두드러져 보이는 효과를 준다. 오륜을 주제로 한 그림은
청대에 채색된 도자기나 자수에도 보이고 있어 이 주제가 후대까지 오래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봉황의 상징적 이미지가 황제에서 현신賢臣로 변화된 봉황도의 도상이 바로 <봉명조양도>이다.
<오륜도>가 '황제 숭배'를 뜻한다면 '봉명조양鳳鳴朝陽'은 현명한 관료[賢臣]를 의미한다. '봉명조양'이 문학에 관습적
으로 사용된 것은 이미 4세기부터 였고, 당대唐代에는 '현명한 문인[賢臣 혹은 賢才]'를 칭하는 흔한 비유가 되었다.
<봉명조양도>의 도상은 한 마리, 혹은 한 쌍이 봉황이 높은 곳에 올라서서 오동나무나 대나무를 등지고 해를 바라보는
것이 전형적이다. 따라서 이때의 봉황은 제왕이 아니라 제왕에게 간언하는 신하, 즉 현신을 의미한다. 조선시대에도
실록은 물론 문집에 실린 제시, 찬문, 행장 등에 탄압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용기 있는 신하의 행동을 칭송하여
'봉명조양' 이라고 언급한 경우가 아주 흔하다. 임랑은 이 작품에서 봉황의 도상과 표현 면에서 독창적인 스타일을
창안하였다. 이전의 남송 원체화풍인 화려하게 채색된 화조 배경의 장식적인 면을 과괌히 걷어내고 연운과 검은
암벽의 강렬한 흑백 대배로 대신하였다. 이러한 몰골풍의 수묵으로 그려진 봉황도는 이전의 봉황도와 비교했을 때
질적으로 다른 미감을 추구하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구름 속에 단호히 서 있는 영웅과도 같은 봉황은 이른 하침 해를
보며 울고 있는데, 이는 《시경》에서 묘사한 현신이 청렴하고 숭고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에, 배경에 첨가된
대나무가 가진 '곧은 절개'라는 상징성은 현인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한다.
작자 미상(전칭 전선), <백조도>, 명 16세기, 비단에 채색, 152.8×185.0cm, 일본 도쿄 궁내청.
봉명조양을 주제로 한 봉황도는 기존이 도상에 태양이 추가되고 봉황이 태양을 바라보는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봉황도의 가장 전형적인 도상이 되었다. 명 초기에 성행한 <백조조봉도>와 <오륜도> 역시 태양이 추가되고 봉황의
시선이 태양을 향하면서 의미에 변화가 생겨, 오륜을 상징하는 새들에 둘러싸여 해를 향해 우는 봉황의 도상으로 변
화하였다. 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쿄 궁내청 소장의 <백조도>는 한 쌍의 봉황이 경건한 자세로 나란히
태양을 바라보고 있고, 이전 그림에서는 추켜세웠던 꼬리깃도 차분히 내린 채 태양을 향하고 있다. 이제 그림의 중심
은 봉황 자체가 아니라 '태양을 향한 봉황의 울음'으로 변화했음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봉황은 황제가 아니라 현신
을 상징하며, '태양을 향한 봉황의 울음'은 절망의 시기에 성군이 다스리는 좋은 시기를 열망하는 긍정적인 희망을 암
시한다. 또한 이 <백조도>에서 봉황과 주변의 새들이 대개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의 그림은 궁정화가들의
화본畵本에 의해 비슷한 도상의 그림들이 반복해서 제작되면서 후쿠오카미술관 소장의 <백조도>의 사례처럼
패턴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명대에 확립된 봉황도의 주제와 도상은 유형화되어 이후 18~19세기까지 조선과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중국 봉황도의 도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력은 뒤에 살펴볼 《삼재도회三才圖會》와
《고씨화보顧氏畵譜》같은 화보에 실린 그림이 큰 역할을 하였다.
좌), 작자 미상, <봉황도>, 명 15~16세기, 비단에 수묵채색, 122.0×86.5cm, 일본 도쿄 산토리미술관.
우), 작자 미상, <봉황도>, 명 16~17세기, 비단에 채색, 140.5×71.9cm, 일본 도쿄 산토리미술관.
일본 산토리미술관 소장의 <봉황도>는 15~16세기 명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한 쌍의 봉황이 오동나무를 배경으로
암석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암컷은 웅크리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고 수컷은 한쪽 다리만으로 서서 암컷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명대에 '봉명조양'의 주제로 그려진 봉황도의 경우, 주로 문인 취향의 수묵으로 묘사하고 채색은 부분적
으로만 활용하곤 했다. 이는 아마도 이 주제가 봉황이 문인관료를 상징하는 그림이며, 문인들이 선호하는 주제였기 때
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보다 약간 후대인 16~17세기에 제작된 <봉황도>는 오동나무 둥치 위에 자리를 잡은 모습으로,
앞서 살펴본 <봉황도>와 배경만 다를 뿐 도상이 매우 유사하다. 이 <봉황도>를 앞의 작품과 비교해보면, 봉황의 머리
위의 댕기깃이 더 길게 위로 솟고, 부리가 길고 뾰족해졌다. 그리고 봉황의 다리가 굵어지고, 발가락도 더 길고 각이
생겼으며, 발톱이 동그랗게 말려 매우 날카로워졌다. 이러한 특징은 명 말기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청대에는
봉황의 외형이 맹금류에 가까워진다.
왕약수, 《고씨화보顧氏畵譜》제4책.
산토리미술관의 이 두 <봉황도>는 1603년 이후에 간행된 《고씨화보顧氏畵譜》교간본(고삼빙 · 고삼석 편)
제 4책에 복제되어 실린 왕약수王若水의 봉황 그림과 매우 유사하다. 《고씨화보》 교간본에 실린 봉황 그림
역시 명 말의 맹금류에 가까워지는 변화된 봉황도의 특징이 반영되어 있다. 앞의 두 작품과 비교해보면, 화보
의 특성상 오동나무 배경이 생략된 점과 수컷 봉황이 고개를 들어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러한 도상의 쌍봉도를 실은 화보가 널리 보급되면서 중국 국내뿐 아니라 조선, 일본 등 동아시아 각국에까지
광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동나무(혹은 대나무와 암석)와 태양이 배경을 이루고 봉황이 태양을
바라보고 울부짓는 이러한 도상은 앞에서 살펴본 <봉명조양도>의 전형적인 도상이자, 19세기에 성행한
동아시아 봉황도로 가장 많이 그려진 보편적인 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봉황도의 특징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즉위년인 1418년 12월 22일에 「경연에 나아가서 묻기를,
"지금 듣건대, 봉황새가 나타났다는 말에 대해 묻다」 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글이 실려 있다.
임금이 경연에 나아가서 묻기를, "지금 듣건대, 봉황새가 중국에서 나왔다고 하니 사실인가" 하니, 탁신이 아뢰기를,
"위에 순舜 임금이나 문왕文王 같은 덕이 있어야만 봉황새가 와서 춤추는 것이온데, 지금 중국에서는 백성들이
편안히 잘 살 수 없으니, 비록 봉황새가 있더라도 상서가 될 수 없사오며, 이제 그 말을 듣잡건대, 사람의 힘으로써
묶어 잡아 날아가지 못하게 하였다 하오니, (이것이) 어찌 참 봉황새이겠습니까. 하물며 임금은 이른 아침과 깊은
밤에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마땅히 민생의 즐거움과 근심을 생각할 것이며, 상서를 염두에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고 하였다.
1418년은 명 영락永樂 16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왕조 초기에 황제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위에서 말한 봉황도의 군자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시기와 겹친다. ···· 실제로 봉황과 닮은 새를 날게 하여
봉황이 날아왔다며 퍼포먼스를 벌이게도 하였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중국의 감숙성, 섬서성 남부에 서식하던 금계나 중국 최남부에 서식하는 야생닭들의 화려한
오색 깃털과 댕기깃, 꼬리깃 등은 봉황의 조형에 영향을 미쳤다.
···· 조선에서 봉황에 대한 관념과 상징적 이미지는 중국과 유사하게 공유되고 있었다.
특히 미수 허목은 동계 정온의 「행장行狀」에서 "광해군 이래로 권력을 잡은 자가 날로 위협과 복록福祿으로써
사람을 제어하니, 사대부들이 모두 조정에 잘 보이기 위해 비위를 맞추어 사첨하는 것이 풍속이 되어 곧은 말로
감히 간하는 사람이 없었다. 공이 직언하다가 좌천되자, 사람들은 공을 봉황이 조양에서 운 것에 견주었다"라고
하였는데, 이처럼 '봉명조양'은 회화 주제뿐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를 기리는 기록에서 청렴한 삶을 대변하는
대명사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와 비슷한 기록은 조선시대 여러 문인들이 시문에서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작자 미상, 《서조도(오륜도)》, 조선 17세기 이후, 비단에 채색, 94.0×140.2cm, 국립진주박물관.
화면 중앙의 수컷 봉황은 힘찬 날개짓을 하며 태양을 보고 있다. 주변의 새들은 각기 암수 한 쌍의 다정한
모습으로 오륜을 상징하며 정해진 위계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 세상의 '조화'를 형상화 하였다.
여기서 봉황은 오륜 중에서도 '군신간의 의리'를 표상한다.
왼쪽 위는 <봉>, 아래는 <난>(출처: 왕기, 《삼재도회》, 명 1607), 오른쪽은 《서수낙원도》부분,
조선 19세기, 비단에 채색, 113.0×320.0cm, 삼성미술관 리움.
왼쪽은 앵무새의 발(상)과 명대 봉황도의 대지족(하), 오른쪽은 닭의 발(상)과
일본 봉황도의 삼전지족(하)
작자 미상, <요지연도> 부분, 19세기, 비단에 채색, 134.5×366.0cm, 경기도 박물관.
작자 미상, <봉황도>, 조선 19세기, 종이에 채색, 156.2×54.6cm,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개조 전 인정전 어좌(좌) → 1908년 개조된 어좌(중) → 1911년 이후 어좌(우).
(좌), 창덕궁 인정전의 <봉황도(쌍봉도)>, 대한제국 1911년경, 서울역사박물관.
(우), 작자 미상, <봉황도(쌍봉도)>, 조선 20세기 초, 금박에 채색, 318.6×394.9cm, 국립고궁박물관.
작자 미상, <욱일쌍봉도>, 비단에 채색, 150.0×77.0cm
창덕궁 대조전 동편, 문화재청.
오일영, 이용우, <봉황도> 부분, 부벽화, 1920년, 창덕궁 대조전.
태평성세에만 날아온다는 봉황에 대한 옛 사람들의 인식은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새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는
있으나, 이를 드러내는 것은 역으로 현세가 태평성세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므로, 늘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새처럼 위엄있고 아름다운 새로 화조화 속 다른 새들과 같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중국에서 서수로서 봉황의 관념은 한대漢代에 확립되었다 태평성세의 성군聖君 이미지에서 인조仁鳥의 관념이
파생되었으며, 점차 여러 속성이 추가되었다. 또한 초월적인 신성한 새의 이미지보다 세속의 제왕 이미지가 부각
되면서 '새들의 왕' 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다. 더 나아가 봉황은 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현명한 신하의 이미지,
풍요와 다산의 길상적 의미까지 갖게 된다. 즉 동아시아에서 봉황도는 유교사회의 이상적 이미지를 담지하는
정치적 주제이자 문화적 코드로 완성되었다. 중국 한대 봉황은 서로 기원이 다른 신화적 새들이 봉황으로 혼동
되거나 동일시되면서 다양한 도상들이 종합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보인다. 도상적으로 봉황의 우아한 조형적
이미지는 이미 당대唐代의 조형예술품에서도 확인되지만, 회화의 독립된 주제로 그려진 것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송대宋代에는 상서의 출현을 그림으로 기록하였다는 역사서의 기사를 통하여 봉황도가 회화로 제작되었
으며, 이러한 경향은 원대에도 지속되었음을 문헌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상서로움을 표상하는 봉황의 이미지는
왕조의 치세를 미화하고 장식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봉황도가 성행하게 된 것은
명대 초기 궁정화가들에 의해서였다.
<백조조봉도>, <오륜도>, <봉명조양도>는 유교적 이념을 강조하는 정치적 주제로서 황실의 주도로 그려지기
시작하여 점차 민간에까지 파급되어 근현대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이렇게 확립된 명대의 봉황도의 도상과
상징성은 조선시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의 봉황도는 기록상으로는 조선 중기부터 궁중에서 영모화의 일부로 분류되어 봉황도가 그려졌음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에는 규장각 차비대령화원 녹취재의 화재로 봉황이 여러 차례 그려졌다. 문헌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현신을 상징하는 <봉명조양도>가 활발하게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17세기
이후에 '백조조봉'의 주제에 포함되는 <오륜도>가 도상과 양식 면에서 명대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그 밖에 19세기 궁중 장식화인 <서수낙원도>, <요지연도>에 묘사된 서조로서의 봉황 이미지가 '구추봉' 주제의
봉황 도상에도 조형적 영향을 주었으며, 민간에서 그려진 민화풍의 그림에도 궁중화의 영향이 남아 있다.
특히 조선의 경우, 19세기에 한 쌍의 봉황과 아홉 마리의 새끼 봉황을 그린 '구추봉' 도상이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크게 유행한 것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는 서조로서의 봉황의 신비한 이미지나 유교적인 이념성을
강조하는 주제보다는 부부 화합과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길상성이 훨씬 중요한 가치였음을 말해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도 민간에서 제작된 봉황도는 장식성과 길상성이 강화되는 경향을 띈다.
그러면서 활달한 필치의 민화풍의 그림이 계속 그려졌다. 비극적인 국운을 맞은 20세기 초에
창덕궁 인정전에는왕을 상징하던<일월오봉도> 병풍이 치워지고 대신 <봉황도(쌍봉도)>가
그려졌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태평성세를 표방하며 유교 이념을 전파하는 '제왕'의 이미지로
왕실을 상징하는 봉황도가 그려진 예는 현재까지 없다.
왕조시대 궁중에서 '현신'을 상징하는 봉황이미지는 훌륭한 임금과 충직한 신하가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유교사회를 상징하는 코드일 수 있었지만, 국권을 상실하고 대한제국의 황제에서 이왕가의
왕으로강등된 현실에서 '현신'으로서의 봉황 이미지는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 조선'을 연상시켰다.
따라서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된 주제일 가능성을 추정해보았다.
봉황도의 상징적 의미는 역사적으로 중층적인 의미구조를 형성하여 왔고, 그 의미의 중층성은
봉황의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교묘히 활용하는 또 다른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논저자 : 김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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