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중인 무호 이한복, 「매일신보」, 1929년 8월 15일자, 2면.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1897~1944)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로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敎 일본화과日本畵科
출신이라는 프리미엄을 안고 등단했다. 당시는 대개 동양화가들이 스승에게 개인적으로 그림을 익혔고, 더욱이 전통적
으로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의식을ㄹ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한복의 일본 유학은 매우 이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등단 초부터 엉겅퀴 같은 초화류와 학, 오리 같은 동물화를 그려 근대기 화조동물화 분야의 유행을 선도한
인물이었다. 도쿄미술학교 학생 시절에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관설 조선미술전람회의 첫 회부터 동양화부에
출품하여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불과 20대 후반에 '동양화단의 거두據頭'로
주목받았던 젊은 화가가 한편으로는 '일본화 베끼기' 화가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던 점이다.
그의 20여 년간의 화단 활동은 근대 화단의 변모 과정에서 흥미로운 점을 갖고 있다.
이한복은 화가로서, 서예가로서 그리고 미술품 감식에 뛰어났던 인물로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지만
그의 사후에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그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완숙기로 보기에는 이른 감이 있는 47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한복의 화조화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상반된 평가를 살펴봄으로써 일제강점기 특수한 시대 상황을 이해하고자 한다.
이한복은 본관이 전의全義이고, 초호는 수재壽齋였다.
충남 연기군 전의면에서 태어났지만 줄곧 서울 궁정동에서 살았으며 가정은 유복했다.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14세쯤으로, 1911년 경성서화미술원이 개설된 첫 해에 입학하면서부터였다.
경성서화미술원은 옥경玉磬 윤영기尹永基(1833~1927 이후)가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으로,
독립된 학교 건물을 가지고 이왕직李王職의 재정 후원을 받았으며, 교육뿐 아니라 당시 문인묵객들의 교류의 중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이후 한동안은 서화미술원과 서화미술회가 함께 운영되었다. 안중식, 조석진, 정대유, 강진희,
김응원, 강필주가 서화를 담당했으며, 교육 기간은 3년이었으나 1920년에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서화미술회는 화과畵科와 서과書科가 있었고, · · ·
서화미술회를 졸업한 김은호가 이상범과 화과와 서과를 모두 졸업했던 것을 볼 때, 이한복도 화과와 서과 과정을 모두
이수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그는 다른 동창들보다 서예를 특히 잘했으며, 서화미술회의 회장이었던
이완용에게서 서예를 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 서화미술회에서 서과 담당 교수였던 정대유, 강진희 역시 서
예에 뛰어났으므로 이한복도 그림과 함께 서예를 배웠을 것이라 생각된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전서篆書가 중국 근대
서화가인 오창석吳昌碩(1844~19270의 서체이고, 이를 도쿄미술학교 때 스승인 다구치 베이호에게서 배웠다고 했다.
안중식 · 이한복 外, <서화미술회 합작도> 10폭 병풍, 1917년, 비단에 수묵채색, 각 163.5×36.8cm,
아모레퍼시픽미술관.
현재 남아 있는 이한복의 작품들은 주로 화훼, 화조동물화이다.
초기작인 <참새>는 병진년91916)에 그려진 것으로, 이한복의 초기 호인 '수재壽齋'라 쓰여 있고, 주문, 백문망인이
각각 찍혀 있다. 벌레를 잡아먹으려고 시선을 뚫어져라 고정하고 있는 참새 두 마리가 들풀과 함께 그려졌다. 같은
해에 그린 <화조도>(인천시립송암미술관 소장)가 있는데, '춘절'에 그렸고, 무호無號라는 호가 처음 등장하고 있지만
이 시기에 이한복의 화풍과 서체와 인장을 고려할 때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한복의 초기작으로 가장 주목된는 작품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이 <어해노안도魚蟹蘆雁圖>와 <기명절지도>
병풍이다. 이 두 작품은 비단에 그려진 것으로 모두 2폭 병풍이라는 비슷한 형태이며, 제작 연도도 1917년 12월
로 같다.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 작품과 비슷한 유형의 강필주 필 <蘆雁圖>(1917)가 있는데, 같은 크기의 동일한
크기의 동일한 비단에 그렸다는 점, 1917년 말에 제작한 것까지 모두 동일하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의 박승무 필
<산수도山水圖> 2폭 병풍 역시 157.0×52.4cm로 이한복, 강필주의 작품들과 거의 유사한 크기의 비단에 그려졌다.
따라서 이 5점의 2폭 병풍은 모두 1917년 말에 제작되어 궁중에 헌상된 것으로 보인다.
이한복의 <어해노안도>는 오른쪽 어해도 부분에 "복숭아꽃 흐르는 물에 쏘가리가 살졌다. 남전초의 필의를 방하다"
라고 적혀 있는데 중국 청대 화가인 남전 운수평의 필의를 방해서 그렸음을 밝히고 있다. 운수평은 윤곽선을 쓰지 않고
색을 넓게 펴바르며 그런 화훼화로 유명한데, 이한복은 게와 복숭아꽃에서 그 필의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왼쪽 노안
도에는 "만리 강호에 낙엽 신세, 오며 눈맞고 가며 봄이라, 천지 사방을 헤매는 나그네니, 갈대꽃만이 친구로다.
무승 정사년(1917) 납월(12월0 상한에 이한복 "이라 쓰여 있다.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화미술회 출신 화가들이 그린 기명절지도들과 달리, 이한복의 작품은 선명한
색채와 특히 호분胡粉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시각적 청신함과 장식성이 강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효과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안중식ㄷ 필 <기명절지도>(1914)와 비교되는데, 기물의 배치나
채색법이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이한복이 스승인 안중식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운수평의 화의를 따르는 등 수묵과 채색을
겸비한 그림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려준다. 가평월嘉平月 음력 12우러에 그린 작품인데, 이 밖에 최근 공개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한복의 <기명절지도>(1917) 한 폭이 더 있다. 2018년에 기증된 이 작품은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보다 세로가 123.3cm로 좀 작은 편이지만, 청동 예기禮器인 고觚에 해당화와 목련을 꽂고, 그 옆에 작爵
을 배치한 것이 국립고궁박물관본 <기명절지도>와 유사하다. 그 외에도 모란, 불수감佛手柑이 등장하며
다음과 같은 화제시畵題詩가 적혀 있다.
선녀 마고는 전설상의 과일인 안기조安期조를 잘 길렀고,
신선 태을은 서왕모가 먹는 복숭아를 심었다네.
깊은 애정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의 잔을 올리면서
옥당부귀도를 다시 그린다네.
- 1917년 초가을 무호 이한복
작품에 사용된 화려하고 고운 색채와 명암 표현 등에서 이한복이 유학 이전에도
상당한 묘사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도 창덕궁 소장품이었다가 구 궁중유물전시관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된 작품들 중에는 비슷한 크기의 비단 혹은 종이에 그려진 것들이 있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는 '신臣', '경사敬寫', '근화謹畵'라고 하여 국왕에게 헌상할 목적으로 제작된 것들이 여러 점
확인된다. 화가들은 추가로 양기훈, 김은호, 노수현, 김창환이었다. 1917년 말부터 1920년까지 제작된 이 작품들은
모두 20대의 서화미술회 졸업생들의 초기작에 해당한다. 이 작품들은 1917년 11월에 일어난 창덕궁 화재 때
궁궐 소장의 서화작품들이 대부분 소실된 이후에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주문 받은 것으로 보이며,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제작하여 헌상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20년 창덕궁이 재건된 후에는 희정당熙政堂, 대조전大組展
좌우 방으로 들어가는 문 위의 벽면(상인방 부분)에 벽화를 장식하는 사업도 전개되었으니 대한제국이 주도했던
가장 큰 규모의 미술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한복은 1918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 또한 서화미술회 동료화가였던 김은호, 이상범, 박승무와 함께
청년 화가로서 입지를 굳여나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좌), 이한복, <하일장>,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 제1회 3등상.
(우), 이한복 <엉겅퀴>,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 제3회 2등상.
이한복은 유학 시절에 한국에서 처음 열린 총독부 주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 출품하기 시작해서
귀국 후에도 1929년까지 총 여덟 번을 참가했다. 같은 시기에 열렸던 서화협회전에도 참가해서 주목받는
'청년 작가'가 되었으며 곧 중진 화가의 대열에 올랐다. 그는 이 때부터 초화, 화조, 영모를 소재로 한 그림을
본격적으로 그렸다. 마지막 두 차례이 조선미전에는 풍경화를 출품하기도 했지만 일생 동안 자신의 특기를
산수가 아닌 화조영모화에 두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전에 참여해 화단에 정식으로 이름을 알린 이한복의 출품작은 <하일장夏日長>이었다.
이 작품은 1부 동양화부에서 3등상을 받았는데, 이때 3부 서부書部에서도 <석고전문石鼓全文>으로 4등상을
받았다. 당시 허백련이 <추경, 춘경산수도>로 1등 없는 2등상을 수상하고 다른 서화미술회 화가들이 전통적인
수묵산수화를 출품 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그의 그림은 무척 이색적이었을 것이다. <하일장>은 당나라 시인인
고병高騈(821~887)의 유명한 「산정하일山亭夏日」이란 시에서 "푸른 나무 녹음이 짙어가고 여름날은 길기만 하네"
라는 구절에서 빌려 온 제목이다. ··· 그의 수상에는 도쿄미술학교 교수 가와이 교쿠도의 배려가 있었던 듯하다.
그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전에 <엉겅퀴>(2등상)와 <전문쌍련篆文雙聯>을 출품하여 동양화부와 서부에서 각각
2등상을 수상했는데, 모두 1등 없는 최고상이었다. <엉겅퀴>는 "신묘한 필법은 산 풀을 눈앞에 보는 듯" 하였다.
고 평가 받았다. 점차 수위의 수상을 거듭하면서 자신감에 넘친 이한복은 수상 소감에서 "무어 변변치 않습니다.
나는 제1회 전람회에서는 글씨로 4등을 하였고, 2회에는 3등을 하였으며 동양화로는 제1회에 3등을 하였습니다.
글씨는 생각은 오래하던 것인데, 2폭 4줄을 대략 반일 동안 쓴 것입니다. 동양화는 대략 1년 동안을 생각하여
3주일 동안 그린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겸손한 말로 시작하긴 했지만 자신의 수상 경력을 나열함으로써,
과시하려는 마음을 드러냈다. 게다가 글씨는 2폭 4줄을 반일 동안, 동양화는 1년 동안 생각하여
3주에 완성했다는 말 속에서 정확하고 꼼꼼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
이러한 그의 성격은 초기에 초화류나 정물 등 작은 소재를 즐겨 그리고, 그릴 때도
시선을 대상에 근접해 그리면서 여백 없이 꽉찬 구도를 좋아했던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한복, <엉겅퀴>, 미상, 재학 중 평상성적 과제물, 비단에 채색, 도쿄예술대학.
··· 청색과 녹색을 주조로 한 사생 작품으로 유학 이전에 그렸던 원색에 가까운 채색화에서 탈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동일한 모본에 의해 그려진 것이 거의 확실한 이 두 작품은 가지와 잎, 꽃이 그려진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가운데 가장 긴 가지와 그 왼쪽에서 나란히 올라가는 작은 가지는 거의 일치한다.
도쿄예대본 보다 조선미전본이 가지를 더 추가해서 그린 것이 다를 뿐이다. 도쿄예대본과 동일한 모본을
약간 변형해 출품한 것이라 생각된다. 됴쿄예대본을 볼 때, 소재가 된 엉겅퀴는 꽃이 붉은 일반적인 엉겅
퀴가 아니라 꽃이 흰 토종 엉겅퀴인 '흰고려 엉겅퀴' 계통을 그린 듯하다. 그러나 엉겅퀴는 색도 다양하고
종류도 많아 도쿄예대본을 국내에서 사생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한복의 성정으로 미루어보아도
조국의 풀을 생각하며 그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도쿄미술학교는 서화미술회에서의 교육방식과 달리
사생을 강조한 실기교육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한복은 이 시기에 대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을 통해
회화적 기본기를 숙련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한복 <화훼도., 1918년, 종이에 채색, 각 45.0×34.0cm, 국립중앙박물관.
이한복이 유학 첫 해(1918)에 그린 사생 화훼도가 2019년 개최된 국립중앙박물관의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
특별전을 통해 공개되었다. 식물사생을 익히던 도쿄미술학교 입학 초 수업기의 작품으로, 채색 기법에서 큰 변화를
보여준다. ··· 이한복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에는 화훼류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엉겅퀴>는 그의 대
표적인 작품이 되었다. 그는 서화협회전에도 비슷한 엉겅퀴 작품을 출품했는데, 결국 같은 소재를 반복해서 출품하자
비난을 받기에 이르렀다. 특정 소재에 집착하는 습성은 결국 공모전에서나 비평가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들은 전람회장에서 관람자들의 인기를 끌었고, 이왕직, 궁내성, 총독부 등에 팔렸으나
비평적 관점과 관람자들의 취향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예는 이한복뿐 아니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김은호, 이영일, 김기창 등 조선미전의 스타 작가들에게 공통된 상황이었다.
이한복, <수>,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 제5회.
··· 1926년 제5회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수睡>는 더욱 심한 평을 들어야 했다.
독설가였던 김복진은 "오리 눈깔을 그리지 않았으며 잠자는 기분이 나왔을 터인데,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흰 오리를 앞에 놓고 색色 오리를 뒤에 놓았는지 모른다. 물도 그려볼 생각을 하기 바란다. 고 했다.
배경의 자연을 생략한 채 단일한 색조로 된 바탕에, 하얀 호분을 사용하여 졸고 있는 오리 무리를 그렸는데
이러한 단순한 구도는 일본화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다. 이 작품 역시 소재가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의
단조로운 동작이 일정하게 반복되고, 색도 몇 가지 특정 색만을 사용하는 이한복의 습성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한복, <야학., 1923년, 조선미술전람회 제2회.
··· <수> 이전에 그린 영모화로 1923년 도쿄미술학교 졸업 작품으로 출품했던 <야학野鶴>을
그해 조선미전에도 출품하여 입선했다. 한 점만을 제작했다면, 조선미전이 봄에 열렸음으로 도쿄미술학교를
3월에 졸업한 후 졸업작품을 국내에 가져와 조선미전에 출품했을 것이다. ··· <야학>도 학의 꼬리 끝이 잘려
답답할 정도로 화면을 여분 없이 처리하여 대상이 화면 가득 채우고 있다. ··· 이한복은 도쿄미술학교에 유학
하면서 자신이 익혀왔던 전통 화풍을 크게 변화시켰지만, 귀국 후 20대의 신진 화가로서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창작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신묘한 필법을 구사하는 화백의 정점에서 사생력에도 문제가 있는 미숙한
화가로 전락한 것이다. 이상범과 김은호가 각각 실경수묵산수화와 채색화 분야의 양대 산맥을
확고히 구축할수록 이한복의 창작 역량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이한복, <어떤 날의 정원>, 1927년, 조선미술전람회 제6회.
그는 제6회 조선미전에 <어떤 날의 정원>을 출품했는데, 동양화에서 서양화의 정물화를 접목했지만
'뜰의 기분'이 나지 않고 초화가 무기력해 보인다는 지적을 받았다. 1924년 작인 <엉겅퀴>가 '산 풀을 눈 앞에
보는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과 비교하면, 그가 사생력마저 퇴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그는 1929년 제8회 조선미전을 끝으로 더 이상 참여하지 않았다. 이 즈음부터 서화고동품 수집과
동호회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했으며, 「매일신보」 등에 꾸준히 시필詩筆 화조화 및
산수화를 게재했지만 실제 화단에서의 입지를 넓히지는 못했다.
··· 이보다 이한복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서화 수장과 전각, 감식 활동을 통해서였다.
대표적인 수장가였던 수정水晶 박병래朴秉來(1903~19740는 이한복을 "서화와 골동품의 감상에 선구자"로
기억했으며, 그를 따를 만한 이가 없어 그의 눈길을 거쳐야만 서화건 골동품이건 제 빛을 낸다고 했다.
서화 감식에 뛰어났던 오세창조차도 이한복의 감식안에는 절대적인 신뢰를 했을 정도라고 하니, 그의 위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토쿄미술학교 교장인 마사키 나오히코는 한국 미술품을 수집할 때마다 이한복을
찾아와 감정을 의뢰했을 정도로 그의 감식안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사 김정희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던 이한복은 일본일 추사 연구자로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츠카 지카시의 서화 수장에도
관여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지츠카 지카시는 패망 후 일본으로 돌아갈 때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가져갔으나, 손재형의 간곡한 부탁으로 조건 없이 무상으로 돌려준 사람으로 유명하다.
··· 이 시기에 이한복은 회화 작품도 채색화 보다는 수묵을 위주로 한 산수화나 오창석류의 화훼화를 즐겨
그렸다. <세한삼우도>는 1928년 오세창에게 그려준 것인데, 같은 해 「매일신보」신년 축하 시필화로 계재
된 작품과 거의 동일하다. 1940년 조선미술관 창립 10주년을 기념해서 열린 《10대가산수풍경화전》은 이
한복이 화단의 10대가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계기가 된 전람회였다. 그렇지만 이한복은 4년 뒤에 고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해방 후 10대가, 6대가 등으로 근현대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은 선정하는 과정에서 점차
잊혔다. 산수풍경화가로서는 더욱이 후대에 미친 영향이 미미한 정도에 불과하다. 오히려 그는 일제강점기
에 활동했던 화조화가로서 그리고 서화 수장가이자 감식가로서 더 기억되고 있다.
출처: <꽂과 동물로 본 세상> 중 논저 강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