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明代에는 강남 소주蘇州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종류의 꽃을 그린 화훼화가 크게 유행했다.
소주의 문예계를 선도한 심주沈周(1247~1509)가 문인풍의 화훼화를 새롭게 개척하면서 이 장르는
문인화의 주요 화목으로 부상했다. 오랫동안 문인화의 소재가 되었던 매화, 난초, 송죽뿐 아니라 각종
화훼와 초목, 과일과 채소 등의 식물 소재는 전통적으로 우위을 점해왔던 화조화를 압도하며 다른 양상
으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직업 화가들의 주요한 장르였던 화훼화가 문인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또한 다양한 작가군의 등장과 함께 그내용과 형식 및 표현이 다변화되어 화훼화의 혁신을 이룬 시기로
평가할 만하다. 특히 10여 종에서 수십여 종에 이르는 화목花木과 화초를 5~10m에 이르는
긴 두루마리에 그린 화훼장권花卉長券은 명대 강남 문인들의 문예 취향과
지적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오대五代 북송北宋 시기부터 발전한 화훼화는 화목 본래의 아름다움을 담으려는 목적과 함께
장식, 길상, 상징의 목적으로 제작 · 유통되어 왔다. 화훼와 초목에 인간의 정감과 가치관을 투영하는
것은 외진 계곡에 홀로 핀 난초를 보고 때를 만나지 못한 자신을 빗댄 공자孔子의 「의란조猗蘭䆆」와
현신賢臣을 향초香草에 비유한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서붐터 찾을 수 있는 오랜 문화적 전통이다.
북송대에는 화훼를 완상하는 문인문화가 형성되었는데,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로 대표되
듯이 화목과 화초에 성리학적 관념에 부합하는 군자의 덕목을 투영하고 자신들의 심회를 기탁했다.
원元 · 명明대에도 이러한 경향은 지속되었지만, 15세기 말부터 명 말기에 이르는 동안 일어난
화훼화의 양적 · 질적인 성장과 새로운 면모는 장식, 길상, 상징성만으로 해명되지 않는 새로운
문화적 요인에 따른 회화사의 변화로 생각된다. 원예에 대한 실제적인 관심과 탐미적인 경향을
보인 문인 그룹과, 이들과 동일한 관심사를 공유하며 시각적으로 모색한 화가들의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꽃을 가꾸고 완상하는 문화는 당 · 송대부터 시작되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소주의 문인문화가 본격화되면서
화훼 애호 풍조가 크게 일었다 16~17세기에는 항주抗주, 남경南京, 송강松江, 양주楊州 등 강남 전역으로
원예 취미가 확산되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문화현상으로 나타났다.
···· 꽃을 매개로 한 문인들의 교유도 빈번했다. 예를 들어 심주는 오원옥吳元玉이라는 인물의 초청으로 모란을
감상하고 시를 지었으며, 심주의 사돈이자 서화 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사감史鑑(1434~1496)은 국화 재배에
열을 올렸던 고여태顧汝泰의 집에서 황국 18종, 백국 11종, 홍국 12종, 자국 7종을 감상하고 「국화기菊花記」를
남겼다. 이와 같이 꽃을 감상하는 상화회賞花會는 강남 전역에서 활발하게 열렸다. 심주의 <분국도盆菊圖>는
바로 이러한 문인 교유의 정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꽃들이 만개한 시기에는 유상처幽賞處를 찾는 유람도
성행했다. 예를 들어 1월에는 남경 영곡사靈谷寺, 소주 광복光福, 항주 서호西湖 일대에 매화가 유명했으며,
3월에는 앙주의 복숭아꽃, 여름에는 소주 봉문에 있는 하화탕荷花湯의 연꽃
가을에는 항주의 계화桂畵가 최고로여겨졌다.
삼주, <분국도> 부분, 명, 종이에 채색, 전체 23.4×56.0cm, 중국 요녕성박물관.
구영, <청명상하> 부분, 16세기, 비단에 채색, 전체 30.5×987.5cm, 중국 요녕성박물관.
구영, <독락원도> 부분, 16세기, 비단에 채색, 전체 27.8×381.0cm,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
주지면, <분경십이도> 부분, 명, 종이에 수묵담채, 전체 30.5×169.3cm, 개인 소장
육치, <병화도>, 16세기, 비단에 채색, 64.0×32.5cm, 죽국 북경 문물상점.
심주, <사계화훼도>, 명, 종이에 수묵담채, 전체 27.5×504.8cm, 미국 메트로폴리탄미술관.
··· 사계절의 기화이초奇花異草를 그리는 전통은 당나라 궁원宮苑의 진금기화珍禽奇花를 그려 궁원의 화려함
을 기록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송대에는 사계절의 아름다운 화초 또는 사계절 화초에 영모가 조합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이는 성리학적 관념의 정착과 함께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질서를 전달하는 덕목으로 기능했으며, 때
로는 인륜의 화합과 축수祝壽를 의미했다. 명대 이전에 그려진 화훼도권으로는 송대 작자 미상의 <백화도百花圖>,
남송 양첩여楊婕妤의 <백화도百花圖>, 원대 전선錢選의 <팔화도八花圖>, 조충趙衷의 <묵화도墨花圖>가 대표적이다.
이러한 회화 전통이 지속되는 가운데 15세기 말경부터 17세기 전반까지 강남에서는 긴 두루마리 형식의 화훼장권이
대거 제작되었다. 이를 선도한 심주는 송 · 운대 사시화훼도四時花卉圖와 백화도의 전통을 복원하여 화훼장권의 내용
과 형식을 제시했다. 그는 송 · 원대 화훼화풍을 두루 섭렵했지만 절친한 벗인 오관吳寬(1435~1504)의 집에 소장되어
있던, 남송 목계牧谿의 작품으로 알려진 <사생소과寫生蔬果>(북경 고궁박물원 소장)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이 작품에 남아 있는 심주의 제발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목계 작품의 소재와 화풍을 바탕으로 화조, 화훼, 초충,
과일, 채소, 새와 동물을 문인화의 영역으로 끌어들였고, 수묵사의법과 설색몰골법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기록에 따르면, 심주는 화훼와 화훼잡화를 그린 두루마리를 여러차례 제작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현전하는 작품
가운데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소장 <사계화훼도>는 진작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모란에서 수선에 이르는 사계절
의 꽃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되 두 종류의 꽃들이 어울린 모습과 한 종류의 꽃이 번갈아 배치되었으며, 제화시가
쓰이지 않은 경물 사이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편이다. 이러한 화훼장권은 진순에 의해
명대 후기 화훼화의 주요한 형식으로 정착된다.
심주에 이어 화훼장권의 정립과 확산에 크게 기여한 인물은 35점 이상의 작품을 제작한 진순이다.
···· 12세 무렵부터 문징명에게서 고문, 사장詞章, 서법, 시화를 배웠으며, 당시 소주와 강남
문예계의 명사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심주와 진순의 화훼 표현
(상) 육치, <선포장춘도>, 1559년, 비단에 채색, 전체 30,4×266.9cm,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하), 육치, <선포장춘도> 부분.
···· 육치는 가학을 바탕으로 높은 학문적 명성을 쌓았으며, 출사의 뜻을 접은 1554년 이후에는 지형산에 은거
하여 고문과 서화에 매진했다. 그는 가솔과 제자들을 두루 보살펴 덕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청빈한 생활
가운데도 수백 종의 국화를 재배할 정도로 국화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 육치의 <선포장춘도仙圃長春圖>는 노치魯治의 <백화도>를 따른 것으로, 이전 작품에 비해 한결 정돈된
배치와 경물 간의 유기적인 구성이 돋보인다. 다른 작품에 비해 짧은 두루마리에는 사계절 순서에 따라 살구꽃,
난초, 전추라剪秋羅, 모란, 첩경해당貼梗海棠, 백합, 장미, 치자, 추해당, 견우화牽牛花, 산다, 수선, 녹악매
綠萼梅 등이 그려졌다. 첩경해당과 추해당, 녹악매는 정원수와 분경으로 애호되던 진귀한 화목이며,
전추라와 견우화는 육치가 유독 선호한 소재이다.
··· 서위는 진순의 수묵사의법에서 한 단계 발전한 파격적인 필묵으로 독창적인 회화세계를 열었다.
서위는 정강성 소흥紹興 출신으로 자는 문청文淸, 문장文長이며, 호는 청등거사靑藤居士, 천지산인天地山人
이다. 그는 불우했던 가정환경과 여덟 차례 과거시험의 실패, 정신분열증으로 인한 자해와 살인, 투옥에
이르기까지 좌절과 시련의 삶을 살았다. 양명학, 불교,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했고, 시와 문장, 희곡,
서화 등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 서위는 당호를 매화관梅花館이라 지을 정도로
꽃을 좋아했으며, 진수경 등의 벗들과 함께왕해목의 집에서 해당화 분재를 감상한 바 있고, 반승천의
집에서는 해당을 심고 시를 짓기도 했다.
위 <화훼잡화도花卉雜畵圖>(1575)는 서위가 조카 사반史槃에게 그려준 것으로 제작 연대가 파악되는
50대 중반의 대표작이며, 연하유압蓮下逰鴨, 석류파초, 매화, 목단, 포도, 소과, 어해魚蟹를 그렸다.
1575년 정식으로 석방이 허락되자 항주를 거쳐 남경 천목산을 유람하고 돌아온 뒤 심신의 안정을 찾고
성숙한 필묵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사물의 형태를 벗어난 파격적인 발묵은 포도 그림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는 발문에 쓴 시에서 "손가락 끝 호연한 기운은 우레 소리 같다"고 표현했다.
이는 초서 특히 광초狂草의 창작 원리와 통하는 것으로 그가 스스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했던
서법의 원리를 회화에 적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화시를 생략한 작품으로는 <사시화훼도>(북경 고궁박물원 소장)와 <잡화도>(남경박물원 소장)를 들 수 있다.
10m가 넘는 대작들로 서위가 주장했던 '희작戱墨'과 '형사를 구하지 않고 생동하는 운치를 추구한다'는 창작
정신을 잘 보여주는 파격적인 필묵이 돋보인다. 또한 경물 사이에 공간을 많이 둔 것도 특징이다.
<사시화훼도>는 화면 전반부에 발묵법을 구사하고, 후반부에는 휘갈긴 듯 거친 필치이 붓질을 가한 뒤 수묵으로
여백을 물들이는 대비적인 효과를 추구하여 전례없는 시각적인 신선함을 안겨준다.
주지면, <화훼도> 부분, 1601년, 종이에 채색, 전체 27.7×1078.9cm, 중국 상해박물관.
···· 50여 종에 이르는 꽃들을 다이내믹하게 배치한 구성적 능력과 정확한 형태 묘사, 각종 채색이 어우러져
직업화가로서의 탁월한 기량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0m가 넘는 두루마리에 다양한 자태로 묘사된 기화이초
奇花異草는 마치 백화만발한 정원을 옮겨놓은 듯하다. 국화, 모란, 장미과 식물은 서너 품종이 함께 그려졌으
며, 서위가 즐겨 그린 옥잠화와 마름, 무, 콩가지 같은 소과류도 등장한다. 대개 꽃의 윤곽을 선묘로 그린 뒤
채색을 가하고, 잎을 몰골로 그리는 구화저엽법이 사용되었으며, 부분적으로 담채몰골법도 보인다. 송대에 시
작된 구화점엽법은 심주와 진순으로 이어졌으며, 주지면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 담채와 강한 채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화려한 가운데 운치와 격조를 놓치지 않는 것은 주요 회화 구매층이던 문인의 취향을 감안한
화풍적인 모색으로 생각된다.
···· 주지면의 수묵사의법은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백화도>(1602)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제화시를 생략하고 30여 종의 꽃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도를 취했으며, 구화점엽법과
수묵몰골법을 적절히 사용했다. 수국과 백합을 그린 장면에서 보이듯이, 주지면은 화훼를 정밀하게
표현하면서도 문인적인 정취를 놓치지 않는다. 왕세정이 "도복道復(진순)은 묘妙하지만 진眞하지 않고,
숙평淑平(육치)은 진하지만 묘하지 않은데, 주지면의 두 사람의 장점을 겸비했다"고 평한 것은
이러한 면모를 정확히 지적한 것이라 생각된다.
작품 여백에는 명 말기의 저명한 문인, 화가, 수장가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화제를 남겼다.
이 중 왕치등, 장봉익, 신시행 은 주지면의 다른 작품을 감상하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주지면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미술시장뿐 아니라 강남 문사들의 감식안을
만족시키며 만력 연간 최고의 직업 화가로 활동했다.
손극홍은 산수, 화조, 난죽, 인물을 가리지 않고 두루 잘 그렸으며, 화조는 초기에 서희와 조창趙昌을, 후에는
심주와 육치를 배웠다.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백화도<는 자제시와 꽃가지가 차례로 이어지는 다소 정적인
화면에 구륵법鉤勒法과 우아한 채색으로 화훼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육치와 노치가 구사한
공필채색법을 따르면서도 두 사람에 비해 온화한 채색을 사용하고, 수묵으로 나뭇가지의 질감을 보다
부드럽게 표현한 것은 자신만의 개성적인 면모이다.
····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화훼장권과 화훼잡화군을 구성하는 화목花木의 내용이다.
화훼장권은 심주의 <사계화훼도>와 상해박물관 소장 진순의 <화훼도>(1536)에서부터 춘하추동 순서의
사계절 화훼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서위는 <화훼십육종도>(1577)에서 매화화 산다(겨울),
촉규와 국화(가을), 행화(봄), 대나무와 수선화(겨울), 훤화(가을), 석류(여름) 순으로 계절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 구성을 보인다. 손극홍도 대개 행화, 도화, 모란으로 시작해서 수선, 산다, 매화로 마무리 짓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백화도>에서 자정향紫丁香과 호접화蝴蝶花로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서위와 손극홍은
오파의 회화 관습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해석을 시도한 것이 자주 목격된다.
진순, <서화도>, 1543년, 종이에 수묵, 57.0×30.7cm, 중국 남경박물원.
또한 화훼장권의 마지막인 겨울 화목이 수선 · 매화, 수선 · 산다, 수선 · 매화 · 산다, 수선 · 매화 · 산다 · 대나무 ·
영지로 그려진 것도 주목된다. 오파 이전에 그려진 사시화훼도의 겨울 꽃이 대개 매화와 산다의 조합을 보였다면
수선과 매화가 그려진 심주의 작품에 이어 진순은 '수선을 기본'으로 매화, 산다, 대나무, 영지를 조합했으며, 육치
와 주지면도 대개 이런 구성을 따랐다. 진순은 남경박물원 소장 <서화도>에서 보듯이 수선 · 매화 · 산다를 조합한
작품을 여럿 그렸으며, 이는 손극홍, 소미邵彌, 설소소薛素素 등으로 이어져 《고씨화보》(1603)에도
수선과 매화 삽도가 수록 되었다.
인용: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중 유순영 논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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