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창 묘 왼쪽 동자석, 16세기 전반, 높이 86.7cm, 경기 양주시 덕계동
조선시대에는 묘제에 대하여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이는 신분 사회의 위계질서를 명확히 하면서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경국대전》에는 "경성京城에서 10리 이내와 인가의 100보步 이내에는
매장하지 못한다"라고 제한하였고 분묘에 대해서는 "경내의 구역을 한정하여 밭으로 가는 것과
목축을 금한다"라며 그 규묘도 제한해 놓았다.
묘의 범위는 종친 1품은 사방 100보, 종친 2품(문무관 1품)은 사방 90보로 하고 이하 10보씩 줄여
종친 6품(문무관 5품)은 사방 50보, 문무관 6품 이하 및 생원 · 진사는 사방 40보로 한정하였다.
분묘의 조성에서는 봉분 아래를 보호하는 호석護石(왕릉의 병풍석)이나 봉분을 에워싸고 있는
사대석莎隊石(왕릉의 곡장)을 금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지켜지지 않아 조정에서
문제로 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나온다.
장명등도 종1품 이상 묘에만 한정하였으나 이내 유명무실해져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묘에 설치되어 있다.
사대부 묘역의 구성은 대체로 봉분을 중심으로 2단으로 되어 있다.
왕릉이 상계 · 중계 · 하계 3단으로 된 것에 비해 한 단 축소된 것이지만 서민들의
묘에 비해서는 한 단이 더 있는 셈이어서 신분적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석물의 배치는 상단에 봉분을 중심으로 앞에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床石이 놓이며
그 앞에는 향로석香爐石이 붙어 있다. 상석의 받침돌은 북 모양으로 귀면이나 문고리 문양이
양각으로새겨져 있다. 상석 바로 뒤에는 작고 네모난 혼유석魂遊石이 있다.
이는 왕릉의 경우 상석, 향로석이 없이 커다란 혼유석만이 놓이는 것과 다른 구조다.
상석 좌우로는 장대석으로 단을 조성하고 있는데 이 단을 계체석階砌石이라 부른다.
체砌는 가지런히 쌓인 섬돌이라는 뜻이다. 이 계체석을 기존으로 하여
묘역은 상하로 구분되는데 상단은 계절階節, 하단은 배계절拜階節이라고 한다.
배계절 중앙에는 장명등이 있고 좌우로 망주석과 석인이 한 쌍 배치되어 있다.
(좌), 김상헌 묘표, 1669년, 높이 173cm, 경기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우), 이소 묘갈, 1499년, 높이 199.5cm, 경기 광주시 초월읍 신월리
묘비墓碑의 형태도 신분에 따라 달랐다. 이에 대한 국가의 명확한 규정은 확인되지 않고
문헌마다 차이가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상태와 비교할 때 숙종 때 문신인
이유태李惟泰(1607~1684)의 증언에 신빙성이 있다.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이상은 신도비神道碑를, 정3품 이하는 갈석碣石(묘갈)을 묘 아래
산에 세우고, 표석表石(묘표)은 관직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 묘 앞에 세운다.
묘표墓表는 묘주의 이름만 밝힌 것이고, 묘갈墓碣은 이름, 자, 호와 함께 행적 등을 새긴 것이다.
갈碣은 비석의 머리가 둥글게 된 것을 말한다. 존경의 뜻을 담아 묘갈에 새길 명문銘文은 묘갈명墓碣銘
이라고 부른다. 신도비神道碑는 비신에 전액篆額, 서序, 비문碑文, 명銘을 두루 새기고 네모난 방형대석에
개석蓋石(덮개 지붕돌)을 얹거나 또는 귀부龜趺(돌거북)에 이수螭首(용머리 조각)를 얹어 세우는데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신도神道 앞에 세운다고 해서 신도비라고 한다.
그런 중 사대부 묘의 신도비로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예로는
전남 구례의 윤효손尹孝孫(1431~1503)의 묘를 들 수 있다.
윤효손은 성종 때 문신으로 좌참찬(정2품)을 지냈고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방산서원
方山書院에 배향되어 있다. 윤효손 묘의 신도비는 보물 584호로 지정되어 있고
장명등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37호이다.
윤효손 묘, 1503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이평리
유홍 묘, 1613년, 경기 하남시 하산곡동
사대부 묘 석인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은 문인석 한 쌍을 배치하는 것이다.
(왕릉의 사대부 문신석과 구별하여 문인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대부 묘 앞에 문인석을 배설한 이유와
논리적 근거는 아직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려 말의 묘제를 따른 것이라고 하나 사대부 묘를 지키는
석상으로 문인석을 세운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시대에 따라 또는 가문과 망자의
위상에 따라 여러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때로는 무인석과 쌍이 되기도 하고 무인석만 배설되는 경우도 있으며
시자석侍者石이나 동자석童子石이 곁들여 지기고 하였고 석수石獸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이를 유형별로 보면 크게 일곱 가지로 나누어진다.
1. 문인석 한 쌍만 있는 경우: 사대부 묘에서 가장 많은 형식
2. 문인석만 두 쌍 있는 경우: 성여완 묘 등
3. 문인석: 무인석이 마주 보고 있는 경우: 박세영 묘와 박세무 묘
4. 무인석만 있는 경우: 오명항 묘 등
5. 시자석을 함께 배설한 경우: 강귀손 묘 등
6. 동자석을 함께 배설한 경우: 유홍兪泓(1524~1594) 묘 등
7. 석수石獸를 배설한 경우: 이주국 묘 등
··· 사대부 묘의 석물은 왕릉의 그것에 비할 때 조각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런 가운데 왕릉의 경우와 달리 조형적인 변형이 비교적 자유로워 조각적으로 독특한 멋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없지 않다. 특히 무인석, 그리고 왕릉에는 없는 사자석과 동자석에 파격적이고 개성적인 조각이 많이 보인다.
사대부 묘의 석물은 일제강점기 정원을 장식하는 조각품으로 반출되어 엄청난 양의 문인석, 무인석, 동자석 등이
제자리를 잃고 오늘날 국공사립 박물관의 옥외 전시장을 장식하고 있다.
성여완 묘 왼쪽 문인석 앞면과 뒷면, 14세기 말, 높이 144cm, 경기 포천시 신북면 고일2리
(좌), 윤보 묘 왼쪽 문인석, 15세기 말, 높이 221cm, 경기 파주시 당하동
(우), 파림군 이주 묘 왼쪽 문인석, 16세기 중엽, 높이 233.8cm, 경기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좌) 정창연 묘 왼쪽 문인석, 17세기 중엽, 높이 222.3cm, 서울 동작구 사당동
(우), 김성응 묘 왼쪽 문인석, 18세기 중엽, 높이 184cm, 경기 남양주시 삼패동
(좌), 김한구 묘 왼쪽 문인석 앞면과 뒷면, 18세기 후반, 높이 180.5cm, 경기 남양주시 이패동
(좌), 임원준 묘 왼쪽 무인석, 16세기, 높이 265.cm, 경기 여주시 능현동
(우), 정승조 묘 왼쪽 무인석, 16세기 초, 높이 188.2cm, 경기도 시흥시 광석동
(좌), 조현명 묘 왼쪽 무인석, 18세기 중엽, 높이 210cm, 충남 부여군 장암면 점상리
(우), 오명항 묘 오른쪽 무인석, 18세기 초, 226.4cm, 경기 용인시 처인구 묘현읍 오산리
(좌), 박세무 묘 문인석, 16세기 중엽, 높이 199.8cm, 경기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우), 박세무 묘 무인석, 16세기 중엽, 높이 193.6cm, 경기 고양시 덕양구 오금동
성임 묘 오른쪽 시자석 앞면과 측면, 15세기 후반, 높이 140cm, 경기 파주시 문산읍 내포리
(좌), 강귀손 묘 오른쪽 시자석, 16세기 초, 높이 151cm, 경기 시흥시 하상동
(우), 강태수 묘 왼쪽 시자석, 16세기 전반, 높이 133cm, 경기 시흥시 하상동
(좌)류순정 묘 왼쪽 동자석, 16세기 초, 높이 115.3cm, 서울 구로구 오류동
(우), 최명창 묘 오른쪽 동자석, 1537년, 높이 80.5cm, 경기 양주시 덕계동
(좌), 의창군 이광 묘, 오른쪽 동자석, 17세기 중엽, 높이 104cm,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우), 양녕군 이경 묘 왼쪽 동자석, 17세기 중엽, 높이 85cm, 남양주시 진전읍 송농리
동자석, 19세기, 높이 65cm, 개인 소장
(좌), 윤종진 묘 왼쪽 동자석, 19세기 말, 높이 75cm,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우), 동자석, 19세기, 높이 70cm, 우리옛돌박물관 소장
(좌), 제주도 동자석, 19세기, 높이 73cm, 우리옛돌박물관 소장
(우), 제주도 동자석, 19세기, 높이 55cm, 개인 소장
제주도 동자석, 19세기, 높이 68.5cm, 국립제주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 일가 묘역 석호, 20세기 초, 높이 57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석호, 19세기, 높이 49cm, 개인 소장
인용: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