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506) 썸네일형 리스트형 사진 속 근대 한국 <1> 黃海道 해주 부용당 해주목사 김망金望이 중수했다는 부용당. 일제는 이곳을 곡물검사소로 사용하여, 부용당 본래의 멋을 찾을길 없게 되었다. 재령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였고, 부근의 재령철산은 유명하다. 사진은 1900년대 초의 재령시가 모습이다. 平安南道 모란봉에서의 조감 노송 가지 사이로 도도히 흐르는 대동강이 보인다. 평양남문통의 번화한 모습. 평양 주작문 거리 평양의 구시가 모습으로 뒤쪽에 우뚝 솟아 있는 대동문이 보인다. 평양 대동문 거리 대동강을 굽어보는 연광정과 종각 1406년에 창건된 대동문의 위용 평양 개선교 대동교 공중에서 본 당시 평양의 새로운 얼굴 평양 연광정 밑 대동강에서 빨래하는 여인네들과 고깃배가 보인다. 대동강변에 쌓아놓은 항아리 대동강변의 청류벽으로 단애에 음각된 명필들의 서체.. 조선 말엽 생활과 풍속 <2> 양반과 장죽長竹사랑채에서 빈객과 장기를 두는 윤웅렬 군부대신(좌).담뱃대가 길수록 양반이었던 시절답게 장죽의 꼭지가 재떨이에 닿아 있다 (1890년). 좌), 창의氅衣 차림의 선비창의는 벼슬아치들이 평상시에 입는 웃옷으로 소매가 넓고 뒷솔기가 갈라져 있다.고종 21년 이후에는 폐지되었다.우), 소년 시절의 김규식임시정부의 외무총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의 6살 때 사진.그는 고아로 언더우드 집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바둑을 즐기는 부부 조선조의 관복외국인에게 한국인의 정복으로 소개된 사진으로 각기 다른 차림에호피를 앞에 깔고 도열해 있다. 이 양반네 가족 역시 호피를 깔고 사진을 찍었다. 윤웅렬가尹雄烈家윤웅렬 군부대신과 그 아들, 손자, 손녀들로 군부대신 집안답게 모두 .. 조선 말엽 생활과 풍속 <1> 아이들의 지게조혼이 성행하던 시절이라 아이들이라면 고작 열 서너살 때까지다.무렵의 아이들은 여덟 살쯤이 되면 벌써 그 크에 맞는 지게를 만들어주고 어른의 심부름으로 짐 나르는 일부터 배웠다. 걸상이 있는 서당제법 책상 같은 것이 있으나 실상은 맨 앞줄 아이들처럼 책을 바닥에 놓고 배운다.처음에는 천자문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익힌다. 암송이 첫걸음책은 모두 소리를 내어 낭독한다. 읽는 내용이 모두 다르므로 시끄러울 듯하나제 책만 소리 높여 읽으므로 과히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땅바닥에서의 글씨 연습 (1900년대)글씨 연습도 서당 공부의 하나다. 훈장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땅바닥에다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다.옛날에는 종이가 귀해 요즘처럼 노트가 따로 없고 꼬책이나 숯으로 땅바당에서 글씨 연습을 ..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4> 1910년 4월 국내 정치비밀결사 「신민회」 주동인물인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이 국내 정치투쟁의 종말을 예견하고 가족 등을 대동하여 서간도 삼원보로 망명, 자치기관으로 경학사와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한 것이 근대적 독립운동기지 마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의 「권업회」, 간도의 「중광단」, 「부민단」 등의 조직이 잇달았다. 미주에서는 박용만 선생의 주동으로 1914년 6월 10일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이라는 무력단체를 조직했다. 특기할 것은 최근에 밝혀진 것으로 1914년 3월 이상설 선생이 정통령에 취임한 최초의 망명정부 「대한광복군정부」 를 수립한 일이다. 이 망명정부는 노일전쟁 10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 보스틴의 양해하에 수립되었던 것이..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3> 호남 항일 의병투쟁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전국 의병들의 60.1%, 교전회수의 47.3%를 차지할 만큼 호남지방은 의병투쟁의 중심지역이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1908년에는 교전 회수에 있어서 전남 · 강원 · 황해 · 전북 · 충남 · 경북 등의 순이었고, 1909년에는 전남 · 전북 · 경기 · 경북 · 충남 · 강원의 순이었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간에 걸쳐 보병 2개 연대 2, 260명을 동원, 전남지역을 휩쓰는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의병 수가 17, 570명으로 집계되었다. 일본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에 끝가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의병장들. 가슴에 포로 번호를 달고 있다. ..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2> 을사보호조약의 강행으로 한국은 일본에 의하여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영 · 미 · 청 · 독 · 불 · 백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고 1906년(광무 10)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 초대 통감으로 이토오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이 통감부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사항을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직접 우리 나라 정부에 명령 · 집행하게 하는 힘을 가진 기관이었다. 1906년 3월 2일, 일본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우는 초대 통감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남산 통감부 건물 앞에 집합한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이토오 통감. 을사보호조약 체결 축하의 기념 촬영을 하는 이토오를 비롯한 일본군 장성과 일본공사관원들 (이 순간에도 전 상가는 철시하고 대한문 앞에는 국민들이 쇄도, 조약 파기를 주장했..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1> -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獨立運動 - 風雲의 王朝 1876년(고종 13년) 한일수호조약에서 1907년 고종이 '헤아밀사사건'으로 양위하기까지의 32년간은 조선조 500년을 통해 가장 격심한 국난기였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혁명(1894), 청일전쟁(1894), 민비시해(1895), 노일전쟁(1904), 을사보호조약(1905) 등은 국내외적으로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고 말았다. 이 국난기에 집권 조정은 족벌정치에다 친청 · 친로 · 친일로 분열되고 지식층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와 과격한 「개화파」로 갈라져 밀고 당기는 형국이었다. 「독립협회」(1887)를 통한 근대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애국시민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편입되고 민족국가로 재출발, .. K - 민화 <2> (좌) 삼여도 물고기 그림 중 한 폭에 세 마리 물고기를 그린 그림을 삼여도라고 하는데,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길에 올라 출세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 약리도 등용문을 통과해 입신양명하기를 축원하는 뜻으로 젊은 선비들이 주고 받았던 그림이다. 도식화된 환상적인 구름 속에서 새벽 해가 뜰 때 물속에서 해를 향해 힘차게 뛰어오르는 잉어의 모습이 장관이다. 어해도 새우, 조개, 게 갑각류와 어패류는 축하, 화합, 과거급제 등을 축원하는 뜻이 있다. 고사의 풀이로 그림을 보기 전에, 머리 위에 있는 새의 눈치를 보는 물고기들의 표정과 모습에서 작가의 심성을 읽어내는 것이 민화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어해도 어해도는 풍요, 다산, 다복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어해도가 있고, 위의 그림처럼 물속을 들여다보..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31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