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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2>

을사보호조약의 강행으로 한국은 일본에 의하여 외교권을 박탈당했으며,

영 · 미 · 청 · 독 · 불 · 백 등의 주한공사들은 공사관을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고

1906년(광무 10)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 초대 통감으로 이토오 히로부미가 취임했다.

이 통감부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사항을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직접 우리 나라 정부에

명령 · 집행하게 하는 힘을 가진 기관이었다.

 

 

 

 

 

1906년 3월 2일, 일본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우는 초대 통감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남산 통감부 건물 앞에 집합한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이토오 통감.

 

 

을사보호조약 체결 축하의 기념 촬영을 하는 이토오를 비롯한 일본군 장성과 일본공사관원들

(이 순간에도 전 상가는 철시하고 대한문 앞에는 국민들이 쇄도, 조약 파기를 주장했다).

 

 

 

을사조약을 완강히 거부하였고 강제 체결 후에도 헐버어트에게 전보를 쳐 미국정부에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는 등 국권을 되찾고자 애쓴 고종황제(재위 1863~1907)는 덕수궁에 감금당하고 삼엄한 감시하에

있으면서도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1907년 6월 15일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세계에 일본의 침략을 폭로케 했다.

 

 

 

 

 

고종의 옥새가 찍힌 1907년 4월 20일자의 특사 위임장.

 

 

1907년 6월 24일, 헤이그에 도착 평화회의 참석을 신청했으나 6월 29일 거절당하고

언론으로 활약한 세 분의 특사 (왼쪽부터 이준 · 이상설 · 이위종 제씨).

 

 

젊은 시절의 이준 열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1907년 7월 14일 이준(李儁, 1858~1907) 열사는 만국평화회의의 불참을

통분히 여겨 분사했다. 1896년 「독립협회」초대 평의장을 거쳐 헌정연구회를 조직하였고

1907년 4월 1일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였으나 일진회의 방해공작으로

좌절한 직후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되었다.

 

 

1907년 6월 15일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 회의장.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이준 열사의 묘.

(순국 당시의 묘에서 유골을 환국한 후 다시 세운 기념비).

 

이완용 내각은 일본의 강요에 굴복, 1907년 7월 18일의 어전회의에서 고종황제의 양위를 기정사실화했다.

전국민의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양위식을 거행했다.

 

 

 

고종황제의 퇴위를 무력으로 위협하며 서울시내를 행군하는 일본군.

 

 

고종황제의 면전에서 고함을 치며 양위를 강요한 만고역적 송병준.

 

 

 

절대왕권의 상징인 경복궁 근정전의 옥좌.

고종황제는 일본군과 역적 신하들의 강요에 지쳐 왕권을 내놓았다.

 

 

순종의 결혼 축하식.

1906년 13세로 동궁계비로 책봉,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순종효황후가 되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년, 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명성황후 민씨, 일제하에서 이왕李王으로 불리었다.

 

순종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태영이 딸로 1907년 순종이 즉위하자 동궁계비에서 황후가 되었다.

사진은 1919년에 촬영한 것이다.

 

 

1907년 8월 27일, 순종황제 즉위식은 덕수궁에서 거행되었다.

남대문 부근의 즉위 축하 퍼레이드 광경이다.

 

 

상) 1904년 8월 16일, 친일괴수 이용구李容九는 「진보회」를 조직, 12월 4일

「일진회」로 통합해 매국행위를 앞장서서 자행했다. 무장한「일진회」 회원들,

뒷줄은 일본인들이다.

 

하) 통감 이토오의 자문관으로 내한,  「일진회」고문으로 한 · 일 합방을 주도한

원흉 우찌다와 다께다, 오른쪽은 친일괴수 이용구. 

 

 

1908년 12월, 이용구의 집에서 찍은 「일진회」의 자영단 원대 주구들, 일본인들과 뒤섞여 있다.

 

 

친일파 · 민족반역자 송병준과 이용구는 「일진회」를 통하여 고종양위와 한 · 일합방에 앞장섰다.

사진은 서대문에 있었던 「일진회」 집회장.

 

 

 

「일진회」와 싸운 순국 부자

 

 

 

 

초기 의병들의 모습.

 

제1차 항일의병은 일본 낭인들이 경복궁에 난입,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 직후

위정척사파의 거두 유인석 지휘아래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제2차 항일의병은 「을사보호조약(1905)」 후 이등박문이 초대통감으로 부임하자 전 참판 민종식의

지휘하에 강원도 홍천에서 기병하여(1906. 3. 16) 일본 경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전前 중추원의원

정환적 등의 의병들이 활약한 「산남山南의 진陳」은 경주에서, 최익현 · 임병찬 등은 태인에서

기병하여 정읍 · 곡성 · 순창으로 진출했으며, 의병장 신돌석은 경북 평해에서 기병하여

2년간 일본군과 유격전을 벌였다.

 

 

의병장 유인석 선생

 

 

전국 8도에 의병궐기를 호소한 의암 유인석 선생의 친필 격문.

 

 

의병투쟁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군은 전국 각처에서 이렇게 파괴를 일삼았다.

 

 

제2차 의병투쟁 당시 의병들의 모습(F.M 메켄지 촬영) 「대한제국의 비극」에 게재된 사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민영환 선생의 자결, 전 참판 홍만식의 음독자살, 전 의정 조병세 · 전 참판 이맹재의 자결,

그리고 전 참판 송병선의 음독자살 등에 이어 전 참판 민종식 등의 홍천 의병투쟁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의병투쟁

이 전개되었다. 이것을 제2차 의병이라 한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 선생은 임병찬의 호응을 얻어 태인에서

기병 정읍 · 곡성응 거쳐 순창에 진출했으나 6월 12일 일경에 체포되어 일본 대마도로 끌려가

12월 30일 단식 투쟁 끝에 순국했다.

 

 

일경에 피체되어 대마도로 끌려가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모습.

 

 

고광훈高光薰 의병장의 불원복기不遠復旗.

태극기에다 「멀지 않아 다시 돌아온다」는 글을 남겨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일경은 전국 각처에서 기병한 의병들을 무참히 살륙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재판도 없이

현지에서 체포 즉시 이렇게 목을 매달아 죽였다.

 

 

 

 

 

의병들이 잠시 들렀던 주막들을 일본군은 이렇게 파괴하기 일쑤였다.

 

 

 

의병들을 토벌하기 위해 출발하기 직전 군용열차 앞에 완전무장한 채로 집결한 일본군들.

 

 

경부선 철도 파괴음모죄로 일본군 수비대에 둘러싸여 형장으로 끌려가는 한국인 3명의 모습.

 

 

1906년 5월, 의병장 민종식의 홍주성 점령을 기점으로 전국으로 확산된 의병투쟁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군은

전국 12개소에 「경무분견소」를 설치했다. 사진은 일본군에 체포된 평양의병들의 모습.

 

 

1905년 1월 1일,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지 이틀 후인 1월 3일, 일본군은 한국인

3명을  철도파괴음모라는 누명을 씌워 공개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불멸의 민족영웅 허위 선생.

 

경북 선산 출신으로 중추원 의관, 평리원 수석판사를 역임한 왕산旺山 허위許爲(1885~1908) 선생은

1907년 7월 24일의 「정미 7조약」(차관정치 시작 · 군대해산 밀약)과 7월 31일이 한국군 해산에 통분을

이기지 못해 의병 6, 600여 명을 경기도 양주에 결집(1907년 12월 6일), 「13도 의병대」를 조직하고

직접 군사장이 되어 서울 각 공사관에 서한을 보내어 의병이 국제법상의 교전단체임을 통보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군했으나 일본군에 쫒겨 퇴각하고 5월 24일

연천군 반석동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피체, 10월 21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동대문 밖 「왕산로」는 허위 선생의 호를 붙인 것이다.

 

 

허위 선생의 순국기념비(대구 달성공원).

 

 

인천 내리교회에 설립된 영화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1898년 「독립협회」 해산 이후 1905년 「노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일제의 한국침략이 노골화되자, 의병단체의

항일 무력투쟁과 병행, 지식인들의 「애국자주자강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독립협회」 당시의 주동세력

은 1906년 3월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해체되었으나 다시 「대한협회」로 발족)를

조직하여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계몽운동「신교육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한북흥학회」 등 여러 단체들이 발족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인재양성에 진력하며

발행한 회지會誌는 「애국자강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애국자주자강운동」의 신진세력 등장

 

고루한 사대주의에 사로잡힌 기성 정치인들은 친청親淸 · 친로親露 · 친일親日로 치달아 국운이 날로

쇠미해가는 가운데 「독립협회」가 일으킨 민족적 각성은 다시 30대와 20대의 젊은 주체세력을 형성해

나갔고, 이들은 국가 재건에 필요한 새로운 교육 새로운 인재 양성이라는 당면 과제를 위해 요원의 불길

처럼 애국자강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이러한 젊은 세대의 민족자주의식에 기초한 「자강운동」은

1910년의 한일합방을 앞둔 젊은 지식인과 민중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합방 후 이들은 대부분이 국내

를 벗어나 해외에서 방황하다가 1919년 3 · 1민족운동과 함께 다시 결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1906년도에 발행된 대한가강회의 기관지.

 

 

 

 

 

좌) <대한매일신보>의 초대 주필 박은식(1859~1926) 선생.

우) 1904년 7월 18일, 영국인 베델과 양기탁(1871~1938)선생에 의해 창간된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당시와 그 후의 제호들.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 영국인 베델 씨의 묘비.

일제 하에 일본인들이 묘비 비문을 깎아버렸는데 1964년 언론계 

유지들이 그 앞에 작은 비를 세워 비문을 다시 새겼다.

 

 

 

「국민교육회」 발족 - 문맹퇴치운동

 

1904년은 서울에 처음으로 공중변소를 설치하고 노변방뇨를 법으로 금지한 해이다.

그것보다 더욱 기억해야 할 것은 이준李儁 선생이 회장으로 취임한 「국민교육회」가 발족한 해이다.

이 해 8월(광무 8년) <전국민의 문맹퇴치>를 슬로건으로 국민교육열을 고취하는 취지서와 규칙서가

선포되었는데 당시 「자강회」 부회장 윤효정, 학부협판 민형식, 학무국장 장세기, 지방국장 유성준 등의

정부 관계자는 물론 <제국신문> 사장 이종일, 목사 전덕기 등 각계각층의 호응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각급 학교가 많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1902년 미국인 선교사 에비슨은 서울 도동에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하고 2년 후인 1904년 설립자금을

기증한 세브란스씨가 파견한 허스트 박사와 함께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첫 졸업생은 1908년에 배출되었다.

(개교 당시의 학생들(앞줄)과 병원 관계자들).

 

 

1905년 9월 5일, 이용익이 수송동에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를 설립했다.

사진은 개교 1주년 기념식 광경이다.

 

 

1906년 5월 1일, 민영휘가 휘문의숙을 설립했다. 사진은 같은 해 10 11일 개숙기념 촬영.

 

 

 

 

사립 세브란스 병원학교 제1회 졸업생들(1908년 6월 2일),

1917년에 「전문학교령」에 의해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가 되었다.

 

 

「국민교육회」의 교육열 고취로 각 지방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 숭일학교의 졸업생과 교직원 기념 사진.

 

 

원산 감리교회 신도들의 기념 촬영.

 

 

 

1906년은 「대한자강회」 조직을 효시로 서울에서 공부하는 각 지방의 청소년들을 뒷받침하는 「학회」

발족을 특기할 수 있다. 평북 · 황해 지방의 「서우학회西友學會」, 함경지방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이 두 학회는 이듬해 합쳐 「서북학회」가 됨). 영남지방의 「교남학회嶠南學會」, 호남지방의 「호남학회」

가 연이어 발족되었다. 당시 「한북흥학회」의 발족 취지는 「함경도 출신으로 나라의 기둥이 되겠다는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유학온 청소년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인재양성을 계발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름은 학회였지만 사실은 정치운동과 교육운동이 쌍태되어 있는, 국권회복을 위한 정치

단체(이준 선생전)였다 각 학회에는 정기적으로 「회보」를 발간하여 민족계몽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의 선창자 서상돈徐相暾 선생.

1907년 2월 16일 대구에서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

(일제에 대한 경제예속 거부)은 일제의 앞잡이 「일진회日進會」의

방해책동으로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1905년 「천흥협회」 기념 촬영.

 

 

1907년 7월 31일, 한국군 해산의 소칙을 발표한 이완용 내각과 이토오 통감.

 

 

장비 근대화를 위해 미군교관으로부터 신무기 훈련을 받는 친위대(시위대 전신).

 

 

1896년 「아관파천」후, 일본인 교관이 물러가자 대신 러시아 교관이 친위대 훈련을 맡았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근대식 군대로 개편, 일본인 교관의 훈련을 받는 친위대.

 

 

1907년 8월 9일, 햇한 명령에 저항한 수원 진위대 강화분견대 간부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동휘 참령(현 소령).

 

 

한국군 해산 전 훈련원에서 훈련중인 시위병(1907년)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 뒤곁의 훈련원에서 사격 훈련중인 시위보병연대 병사들.

 

 

시위보병연대의 장교정장.

 

 

 

 

 

박승환朴昇煥(1869~1907) 참령의 자결.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 충성을 하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 없다>

는 유서를 가슴에 품고 군대 해산식이 있는 8월 1일 아침 서소문 안 시위대 

제 1 대대장실에서 자결했다.

 

 

군대 해산식이 있는 날 일본군은 서울을 철통같이 지키며 시가행진 시위를 벌였다.

 

 

하세가와 주한 일본군사령관 직속부대에 의해 강점당한 한국군시위 보병연대의 병영.

 

 

서소문 안 시위대 제 1 대대와 일본군의 시가전에서 포로가 된 시위대 병사들.

 

 

 

 

 

 

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만주 하얼삔 역두에서 총성이 울렸다.

대한의군 참모 중장 겸 특파독립대장, 아령지구 군사장인 안중근(1879 ~ 1910) 의사가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오를 처형하는 정의의 총성이었다.

 

 

이토오를 처단한 직후의 장면(1909년 11월 4일자 동경 발행 <특집화보>.

 

 

이토오가 탄 기차가 이날 9시 정각에 하얼삔 역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린 이토오는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체호프와 함께 각국 영사들이 정렬한 곳을 향했다.

 

 

1910년 3월 24일, 순ㅇ국 이틀 전에 두 아우 정근定根 · 공근恭根(왼쪽)을 만나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내 뼈를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국권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라고 당부했다.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7연발 자동권총과 동지들이 소지했던 권총과 탄약.

 

 

통감시절ㄹ(1906~1909) 침략의 원흉 이토오는 한복을 입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오른쪽은 민족반역자 이지용.

 

 

의거 전 하얼삔에서 안중군 의사가 지은 장부가壯夫歌. 

한문과 한글 모두 안 의사의 친필이다.

 

 

안중근 의사가 의거직전 하얼삔에서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대동공보사> 주필 이강李剛에게 보낸 서한.

 

 

 

 

 

 

 

 

 

 

1910년 2월, 여순 법정에서 공판을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와 동지 우덕순 ·조도선 · 유동화 제씨.

 

 

만주 땅 여순에서 아침 안개 속을 마차에 실려 형장으로 향하는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길.

 

 

1910년 3월 26일 상오 10시 15분,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 형장에서 순국했다. 당년 29세.

사진은 유해를 감옥 묘지로 발인하는 장면.

 

 

안중근 의사가 자라고 정든 고향인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천계동 전경.

안 의사가 다닌 천주교회당과 안 의사에게 믿음과 세계정세에 눈을 뜨게 해준 빌헬름 신부

 

 

1879년 9월 2일 안중근 의사가 태어난 황해도 해주읍.

황해도 해주읍, 마주 보이는 산이 수양산.

 

 

1906년 3월, 안중근 의사는 가족과 함께 진남포로 옮기고 가재를 털어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문맹퇴치와 인재양성에 힘썼다.

 

 

안중근 의사와 함께 체포된 동지들.

오른쪽부터 우덕순禹德淳의사, 조도선曺道先의사와 유동하劉東夏 · 김성옥金成玉 · 김형재金衡在 제씨.

 

 

이재명 의사 - 이완용 저격

 

이재명李在明(1890~1910) 의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지도로 18세에 미국으로 이민,

노동과 학업을 병행하던 중 조국의 위기를 통분히 여겨 귀국하는 길로 동지를 규합, 매국노들의

도살을 계획중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나오는 이완용을 습격했으나 중상에 그치고

왜경에 피체, 1910년 9월, 21세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909년 매국노들을 처단하기 이해 계획을 세웠던 이재명 의사와 동지들.

왼쪽부터 오복원 · 이재명 · 김용문.

 

 

좌). 스티븐스를 총살한 장인환張仁煥 의사.

1908년 3월 23일, 미국 오클랜드에서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를 저격 살해하고 25년 형을 받았다.

 

우). 전명운田明雲의사.

미국 오클랜드에서 스티븐스를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서로 육박전을 벌이자, 뒤따라온 장인환

동지가 쏜 탄환에 스티븐스는 살해되었다.

 

 

 

이완용 저격 때의 동지 김병현金秉鉉 의사.                        이완용 저격 때의 동지 김이걸金履杰 의사.

 

 

국내에서 항쟁한 채응언蔡應彦 의병장.

1907년 숙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다

1915년 성천에서 일경에 피체, 사형집행으로 순국했다.

 

 

1908년 블라디보스톡의 망명 동지들.

황병길黃秉吉 의사는 북로군정서 소속으로 청산리전투에서 전사했고, 백규삼白奎三 읫사는 만주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 항일 투쟁중 전사했다. 이들 중 엄인섭嚴仁燮은 변절자.

 

 

 

인용: 서문당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외침과 투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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