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항일 의병투쟁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전국 의병들의 60.1%, 교전회수의 47.3%를 차지할 만큼 호남지방은
의병투쟁의 중심지역이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1908년에는 교전
회수에 있어서 전남 · 강원 · 황해 · 전북 · 충남 · 경북 등의 순이었고, 1909년에는 전남 · 전북 ·
경기 · 경북 · 충남 · 강원의 순이었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간에
걸쳐 보병 2개 연대 2, 260명을 동원, 전남지역을 휩쓰는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의병 수가 17, 570명으로 집계되었다.
일본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에 끝가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의병장들.
가슴에 포로 번호를 달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송병운宋丙雲 · 오성술吳性述 ·이강산李江山 · 모천년牟千秊 ·
강무경姜武京 · 이영준李永俊, 뒷줄 왼쪽부터 황장일黃壯一 · 김원국金元局 · 양진녀梁鎭汝 · 심남일沈南一 ·
조규문曺圭文 · 안계홍安桂洪 · 김병철金丙喆 · 강사문姜士文 · 나성화羅聖化 의병장.
항일의병장 임병찬林炳贊 선생.
전북 옥구 출신으로 동학혁명 때 관직을 사퇴하고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 면암 최익현 선생과 함께 의병 200명을 이끌고 순창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피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그후 돌아와 1910년 한일합방 당시 다시 전남 독립의군부
순무대장이 되어 무장 투쟁을 하다가 1916년 거문도에서 단식 순국했다.
전남 장흥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된 의병장 권택權澤.
의병투쟁 무명용사와 의병들이 사용한 각종 무기류.
1910년 8월 29일부터 일본은 경복궁 근정전에 일장기를 걸어놓고 국권찬탈을 철저히 상징화했다.
1910년 7월 23일, 일본정부의 현직 육군 대신 자격으로 통감에 부임하는 데라우찌의 행렬.
데라우찌는 당시 일본군벌의 총수 야마가다 수상 가쓰라와 같은 야마구찌 현
하기성 출신이며 이 3인은 이른바 일본제국주의의 본산이기도했다.
데라우찌는 조선총독부 초대 총독이 되어 무단통치의 장본인이 된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의 종말을 고하는 순종의 칙유.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찌 통감이 사인한 한 · 일합방조약 조인서 원본.
남산 왜성대에 있었던 통감 관사.
역대 통감이 이 집에서 살았고,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찌가 조인한 합방조약도
이 집에서 이루어졌다.
데라우찌의 통감부임 20여 일 만인 8월 16일, 통감 관사에서 있은 테라우찌 · 이완용 · 조중응 3자회담
자리에서 합방조약과 합방각서가 수교되었다. 이틀 후인 8월 18일 각의에 합방조약이 상정되고 4일 후인
8월 22일에 조인, 1주일 후인 8월 29일에는 나라를 잃도록 만든 장본인들이었다.
왼쪽으로부터 데라우찌 마사다께 · 이완용 · 조중응.
1910년 8월 22일, 한 · 일합방조약이 조인된 통감 관사의 응접실 테이블.
합방 직후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촬영한 고종, 순종과 총독부 간부들,
중앙이 고종, 왼쪽은 영친왕, 그 옆이 데라우찌 총독.
덕수궁 인정전 앞에서 찍은 왕족과 친일 역적들의 사진. 데라우찌 총독과 총독부 관리.
황태자 영친왕을 만나기 위한 일본 황태자의 내한 기념 사진.
경복궁 안에 새 청사를 짓기 전까지 사용한 남산 총독부 청사.
초대총독 데라우찌 마사다께(왼쪽)와 초대 헌병사령관 겸 경무총감 아까이시.
총독정치하의 대심원과 경성 항소원.
1907년 고종 양위 직후 「정미7조약」으로, 국치 3년 전에 벌써 사법권을 빼았겼다.
헌병통지치의 복마전 경무국 건물.
일제는 헌병사령관이 총독부 경무총감을 겸임하는 헌병경찰제도를 채택,
1918년 한 해만도 항일 인사 14만 명을 검거하는 악랄한 무단통치를 강행했다.
총독부 경무총감 산하의 한국인 경관들.
육군대장인 데라우찌는 통감에서 초대 총독으로 눌러앉아 악랄한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1911년 9우러, 「신민회」 주동인물을 포함, 서북지방 민족주의자 700명을 소위 데라우찌 총독
암살음모라는 혐의로 검거하여 1차 공판에서 105인에게만 언도를 내린 완전한 날조극.
「105인 사건」 때 일본인 변호사 등 20여 명이 사건 조작을 통박했으나 법정에서 통할리 없었다.
「105인 사건」 때 변론을 편 가인 김병로 선생(맨앞), 세번째가 정구영 선생.
1911년 9월, 소위 「105인 사건」 피의자들이 공판정으로 끌려가는 모습.
1912년 9월 28일의 제 1 심 언도에서 양기탁 선생 등 6명은 징역 10년, 차이석 선생 등 17명은
징역 7년, 양전백 등 38명은 징역 6년, 편강렬 등 41명은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총독부는 소위 「공진회」(박람회)를 열어 일본 상품의 선전과 판매에 열을 올렸다.
총독부는「토산물 품평회」를 자주 열어 한국의 토산품을 헐값으로 사서 일본으로 가져갔다.
상), 총독부 토지조사국 제도과의 면적 계산.
하), 지형 측량 광경.
일제 경제 수탈의 아성 동양척식주식회사.
1908년 12월, 일제가 자본금 1천만 원으로 설립한 식민지 경제 수탈의 본거지.
이 「동척」건물은 경술국치 이후에 건립한 것으로 을지로 2가에 있었다.
19165년 6월에 기공하여 10년 만인 1926년에 완공된 총독부 청사 공사현장.
이태조가 조선왕조를 개국하면서 세운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전소, 폐허화된 것을 대원군이 왕권의 상징으로
1869년에 새롭게 중건, 궁궐로 사용하다가 1895년 민비가 여기서 살해되고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에
계속 머물자 점차 퇴락해 갔다. 한일합방이 된 1910년에 총독부는 경복궁 안의 건물 4,000여간을 헐어
불하했고 1926년에는 근정전 앞마당에 총독부청사를 지어 식민지통치를 상징했다.
「토지조사사업」당시 일본인 측량사와 기술자를 동원, 각 지방마다 개황도에 의거, 토지의 현상과
면적을 측정하여 지적도를 만들었다. 측량용 기구를 지게에 지고 출발하는 한국인 옆에 일본인
기술자들이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일본인 토목기사들의 전남 무안군 토지 세부 측량 현장.
경부선 철도공사 완공(1904년 11월 10일)을 앞두고 일본정부의 체신대신이 공사를 직접 독려했다.
이 해 2월에 노일전쟁이 터졌고 철도 개통이 긴박했던 것이다.
이듬해 정월 초하루에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철문 사이로 보이는 조선군 사령부 관사(1906년 6월 준공)
조선군사령부 오꾸보 사령관과 그 부하들.
용산에 주둔한 조선군 제20사단 병영 전경(1907년 9월)
한 · 만국경지대를 순찰하는 일군 경비대.
두만강 근처 국경경비초소에서 한국인의 휴대품을 검색하는 일본군 국경 경비대.
한국인 월경자를 철저하게 검문 검색하는 일본군 국경 경비대.
압록강 만포진 부근에서 한국인을 총칼로 검문하는 일본군 경비대.
항일무장투쟁이 격화된 1910년대의 평북 창성군 산하 경찰 패트롤 대.
두만강 국경지대인 경흥경찰서 산하 주재소에서의 한국인 검색.
두만강을 건너면 넓은 만주벌판 한 모퉁이에 간도間島가 있다. 이곳은 고구려, 발해시대 이래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깊은 인연이 있다. 현대사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견디지 못한 수많은
동포들이 이주해 온 곳. 한일합방 이후에는 독립투사들의 본거지가 된 곳. 이곳 간도는 어두웠던 우리
과거의 쓰라린 기억과 함께 제2의 고향이 되었던 곳이다. 초기에는 간도墾島라 했는데 개간하고 농사
짓는 것을 주로 한 데서 생긴 이름이리라.
두만강 건너 간도 용정은 한국인의 제2의 고향.
이상설 선생의 「서전의숙」도 이 용정에 있었다.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 첫 귀착지가 이 용정이었다.
합방 직후 한때는 중국으로 망명하는 이주집단도 있었다.
두만강 건너 만주 땅 간도가 바라보이는 철교.
간도의 한국인은 늘 가난과 감시 속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1909년, 간도 벌판에 모인 백의白衣의 모습.
대한제국 광무 7년(1903년) 해외 여행자에게 발급된 여권.
인용: 서문당 著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외침과 투쟁」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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