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4월 국내 정치비밀결사 「신민회」 주동인물인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이 국내 정치투쟁의 종말을 예견하고 가족 등을 대동하여 서간도 삼원보로 망명, 자치기관으로
경학사와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한 것이 근대적 독립운동기지 마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의 「권업회」, 간도의 「중광단」, 「부민단」 등의 조직이 잇달았다. 미주에서는 박용만
선생의 주동으로 1914년 6월 10일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이라는 무력단체를 조직했다. 특기할 것은
최근에 밝혀진 것으로 1914년 3월 이상설 선생이 정통령에 취임한 최초의 망명정부 「대한광복군정부」
를 수립한 일이다. 이 망명정부는 노일전쟁 10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 보스틴의 양해하에
수립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망명정부 「대한광복군정부」
이상설李相卨은 마침내 1914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에 국치 후 최초의 망명정부를 세웠고, 그를
영도할 정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정부는 광복군을 주축으로 만들어졌으며, 일제에 의한 민족수난기
에 세워진 최초의 망명정부가 된다. 이상설의 나이 45세 때의 일이고 1910년 경술국치로부터 4년,
그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1904년으로부터 10년째의 일이다. (윤병석 저 이상설전, p. 155).
이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릷 사실은 뒤바보 저 <아령실기>와 관설제 저 ,한국지사조전> 이상설편에
짤박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만 1914년은 마침 노일전쟁이 임박했다는 충설이 팽배했었고, 이러한
때 이상설 선생은 이동휘 · 이동녕 · 정재관 등과 중국 · 러시아 등지에서 규합한 동지들을 단합시켜
군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좌), 이상설(1871~1917) 선생은 1907년 6우러 네델란드 헤이그에 파견된 고종의 정사正使로서 사실상
국제 무대에 등장한 첫 국가대표였다. 일본의 사주로 국내에서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귀국을
단념하고 1909년 미국에서 「국민회」, 1910년 연해주에서 「성명회」, 1911년 블라디보스톡에서 「권업회」
등 민족단체를 조직하고 1914년의 「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는 등 3 · 1운동 전까지 해외에서 가장
포괄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1917년 3월 오랜 지병으로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4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우), 1907년 6우러 27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한 3특사(이상설 · 이준 · 이이종) 의 공고사.
이 「공고사」 는 한국의 입장과 요구를 밝힌 한말외교의 역사적 문서이다.
1906년 8월, 이상설 선생이 간도 용정 부처골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熟」.
근대적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 일본의 박해로 문을 닫았으나 김약연 선생은
「서전서숙의」 후신으로 1908년 「명동서숙明東書熟」을 설립했다.
1909년 4월 22일, 미국에서 「국민회」제1차이사회때 찍은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부터 정재관鄭在冠 총회장, 이상설 선생, 허재정 선생 등이다.
노동하며 훈련받는 신흥강습소 학생들.
신흥무관학교로 승격되어 폐교될때까지 2, 100명의 독립군 사관을 배출했다.
통의부 산하 무관학교의 훈련요세지인 만주 흥경원 이도구의 깊은 산속.
신팔균 장군 지휘하의 독립군 훈련장.
1916년, 태극기를 가슴에 안고 조국의 광복을 기원하는 재 하와이 여성교포들의 애틋한 모습.
상해임시정부 수립이후 대한민국 1년 9월 1일자 발행 「대한민국집정관총재」 이승만과
「특파주차구미 위원장」 김규식 공동 명의의 「대한민국공채」, 상은 영문 50달러 공채,
하는 국한문 10달러 공채.
미주 네브래스카 주 헤스팅스대학의 후원으로 대학구내에서 훈련중인 「한인소년병학교」 생도들.
미국 소재 한국 공사관.
「국민군단」 본부 건물.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간부들과 「국민군단」 간부들의 1914년 기념 촬영.
둘째줄 중앙의 흰 양복을 입은 분이 하와이 지방총회 대표겸 「국민군단」 단장인 박용만 선생.
박용만 선생의 초빙으로 교육, 출판 담당이 된 이승만 박사의 분열책동으로
박용만 선생은 1915년 하와이를 떠나고 「국민군단」 도 해산되었다.
「국민군단」 의 군사훈련 광경.
「국민군단」의 열병식.
1913년 안창호 선생은 미국에서 「흥사단」 을 조직했다.
사진은 191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흥사단」 대회 기념 사진.
왼쪽에서 5번째가 안창호 선생.
하와이 호놀루루의 태극기를 흔드는 한국인 교포들.
1921년 10우러 27일, 세계 YMCA회의에 초청된 한국인들의 기념 촬영.
동경 2 · 8 독립선언
1919년 1월 6일, 동경유학생학우회는 2월 8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결정,
1월 하순 송계백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현상윤에게 전달했고, 2월 8일 오후 2시 600여
명의 도쿄 유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백관수가 등단, 엄숙하고도 비장한 음성으로 「독립선언문」 을 낭독했다.
결의문 채택도 끝나고 노도의 절규, 감격적인 통곡이 장내를 메웠다. 이른바 「2 · 8 독립선언」 이었다.
곧 일본경찰에 의해 최팔용 등 시위학생 60여 명이 검거되었다.
「2 · 8 독립선언」이 있었던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의 정문.
「2 · 8 독립선언」을 주도한유학생들.
앞줄 왼쪽부터 최원순, 두 사람 건너 장영규, 가운데 줄 왼쪽부터 최팔용 · 윤창석 · 김철수 · 백관수 · 서춘 ·
김도연 · 송계백, 뒷줄 왼쪽부터 한 사람 건너 변희용 · 강종섭 · 이봉수 제씨.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이 있었다는 소식은 서울시민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았다.
종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민들의 모습.
3 · 1 獨立運動
1919년 3월 1일, 이 날은 일제 「헌병통치」 10년 동안 바라볼 수 없었던, 합방 다음 날 아침의 태양을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처음 바라본 날이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며 ......,
<3 · 1 운동은 물론 독립을 「즉각」 쟁취하는 목적에서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기초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3 · 1 운동은 그
이전의 국권회복운동이나, 그 이후의 독립운동과는 달리 이 운동을 처음 기획하고 조직화한
지도자들의 목적과 예상보다는 훨씬 크게 성공한 운동이었다.> (신용하)
3 · 1 운동으로 일제의 극악무도한 「헌병통치」와 그들의 한민족 말살정책을 붕괴시키고 소위
「문화정치」라는 슬로건이 말해주듯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의 최소한의 자유를 쟁취했고,
민족을 보존하기 위한 민족문화운동과 민족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할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사상 최대의 평화적 항쟁 3 · 1 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고종高宗의 인산因山을 애도코자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파고다공원의
「독립선언서」 소식에 순간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데모군중으로 변했다.
고종황제의 붕어 소식이 전해지던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와
통곡했다. 일제 당국이 독립의사의 포기를 강요한 '탄원서' 서명을 끝까지 거절한 고종황제는 온 국민
의 흠모를 받고 있었다. 고종황제의 국장은 3월 3일에 거행되었다.
아래는 상복 입은 순종의 모습이다.
전국 218개 군에서 200여 만명이 궐기
서울시청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백의의 군중들.
광화문 기념비각에 몰려든 시민들이 시위행진 군중에 호응하고 있다.
3 · 1 독립선언서
이종일 선생이 인쇄하여 전국에 배포한 2, 600여 자에 이르는 민족최대의 문서인 「독립선언서」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 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하야 민족자존(民族自尊)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
반만년(半萬年) 역사(歷史)의 권위(權威)를 장(仗)하야 차(此)를 선언(宣言)함이며
이천만(二千萬) 민중(民衆)의 성충(誠忠)을 합(合)하야 차(此)를 포명(佈明)함이며
민족(民族)의 항구여일(恒久如一)한 자유발전(自由發展)을 위(爲)하야 차(此)를 주장(主張)함이며
인류적(人類的) 양심(良心)의 발로(發露)에 기인(基因)한 세계개조(世界改造)에의 대기운(大機運)에
순응병진(順應幷進)하기 위(爲)하야 차(此)를 제기(提起)함이니, 시천(是天)의 명명(明命)하며
시대(時代)의대세(大勢)이며, 전(全) 인류(人類) 공존(共存) 동생권(同生權)의
정당(正當)한 발동(發動)이라,
천하(天下) 하물(何物)이던지 차(此)를 저지(沮止) 억제(抑制)치 못할지니라.
구시대(舊時代)의 유물(遺物)인 침략주의(侵掠主義), 강권주의(强勸主義)의 희생(牲)을 작(作)하야
유사이래(有史以來) 누천(累千)년에 처음으로 이민족(異民族) 겸제(箝制)의 통고(通告)를
상(嘗)한 지금(今)에 십년(十年)을 과(過)한지라.
아(我) 생존권(生存權)의 박상(剝喪)됨이 무릇 기하(幾何)며,
심령상(心靈上) 발전(發展)의 장애(障碍)됨이 무릇 기하(幾何)며, 민족적(民族的)
존영(尊影)의 훼손(毁損)됨이 무릇 기하(幾何)며,
신예(新銳)와 독창(獨創)으로써 세계문화(世界文化)의 대조류(對照流)에
기여(寄與) 보비(補裨)할 기연(奇緣)을 유실(遺失)함이 무릇 기하(幾何)뇨.
희(噫)라, 구래(舊來)의 억울(抑鬱)을 선창(宣暢)하려 하면,
장래(將來)의 협위(脅威)를 삼제(芟除)하려 하면,
민족적(民族的) 양심(良心)과 국가적(國家的)염의(廉義)의 압축소잔(壓縮銷殘)을
흥분(興奮) 신장(伸張)하려 하면,
각개(各個) 인격(人格)의 정당(正當)한 발달(發達)을 수(遂)하려 하면,
가련(可憐)한 자제(子弟)에게 고치적(苦恥的) 재산(財産)을 유여(遺與)치 안이하려 하면,
자자손손(孜孜孫孫)의 영구완전(永久完全)한 경복(慶福)을 도영(導迎)하려 하면,
최대급무(最大急務)가 민족적(民族的) 독립(獨立)을 확실(確實)케 함이니,
각개(各個)가 인(人)마다 방촌(方寸)의 인(刃)을 회(懷)하고,
인류통성(人類通性)과 시대양심(時代良心)이 정의(正義)의 군(軍)과 인도(人道)의 간과(干戈)로써
호원(護援)하는 금일(今日), 오인(吾人)은 진(進)하야 취(取)하매 하강(何强)을 좌(挫)치 못하랴.
퇴(退)하야 작(作)하매 하지(何志)를 전(展)치 못하랴.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 이래(以來) 시시종종(時時種種)의 김석맹약(金石盟約)을
식(食)하얏다 하야 일본(日本)의 무신(無信)을 죄(罪)하려 안이 하노라.
학자(學者)는 강단(講壇)에서, 정치가(政治家)는 실제(實際)에서,
조종세업(祖宗世業)을 식민지시(植民地視)하고, 아(我) 문화민족(文化民族)을
토매인우(土昧人遇) 하야, 정복자(征服者)의 쾌(快)를 탐(貪)할 뿐이오,
아(我)의 구원(久遠)한 사회기초(社會基礎)와 탁락(卓樂)한 민족심리(民族心理)를
무시(無視)한다 하야 일본(日本)의 소의(少義)함을 책(責)하려 안이 하노라.
자기(自己)를 책려(策勵)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타(他)의 원우(원尤)를 가(暇)치 못하노라.
현재(現在)를 주무(綢繆)하기에 급(急)한 오인(吾人)은 숙석(宿昔)의 징변(懲辨)을 가(暇)치 못하노라.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소임(所任)은 다만 자기(自己)의 건설(建設)이 유(有)할 뿐이오,
결(決)코 타(他)의 파괴(破壞)에 재(在)치 안이하도다.
엄숙(嚴肅)한 양심(良心)의 명령(命令)으로써 자가(自家)의 신운명(新運命)을 개척(開拓)함이오,
결코 구원(舊怨)과 일시적(一時的) 감정(感情)으로써 타(他)를 질축배척(嫉逐排斥)함이 안이로다.
구사상(舊思想), 구세력(舊勢力)에 기(羈)미된 일본(日本) 위정가(爲政家)의 공명적(功名的)
희생(犧牲)이 된 부자연(不自然), 우(又) 불합리(不合理)한 착오상태(錯誤狀態)를 개선광정(改善匡正)하야,
자연(自然), 우(又) 합리(합理)한 정경대원(正經大原)으로 귀환(歸還)케 함이로다.
당초(當初)에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로서 출(出)치 안이한 양국병합(兩國倂合)의 결과(結果)가,
필경(畢竟) 고식적(姑息的) 위압(威壓)과 차별적(差別的) 불평(不平)과
통계수자상(統計數字上) 허식(虛飾)의 하(下)에서 이해상반(利害相反)한 양(兩) 민족간(民族間)에
영원(永遠)히 화동(和同)할 수 업는 원구(怨溝)를 거익심조(去益深造)하는 금래실적(今來實績)을 관(觀)하라.
용명과감(勇明果敢)으로써 구오(舊誤)를 확정(廓正)하고, 진정(眞正)한
이해(理解)와 동정(同情)에 기본(基本)한 우호적(友好的) 신국면(新局面)을 타개(打開)함이
피차간(彼此間) 원화소복(遠禍召福)하는 첩경(捷徑)임을 명지(明知)할 것 안인가.
또, 이천만(二千萬) 함분축원(含憤蓄怨)의 민(民)을 위력(威力)으로써 구속(拘束)함은
다만 동양(東洋)의 영구(永久)한 평화(平和)를 보장(保障)하는 소이(所以)가 안일 뿐 안이라,
차(此)로 인(因)하야 동양안위(東洋安危)의 주축(主軸)인 사억만(四億萬)
지나인(支那人)의 일본(日本)에 대(對)한 위구(危懼)와 시의(猜疑)를 갈수록 농후(濃厚)케 하야,
그 결과(結果)로 동양(東洋) 전국(全局)의 공도동망(共倒同亡)의 비운(悲運)을
초치(招致)할 것이 명(明)하니,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조선독립(朝鮮獨立)은 조선인(朝鮮人)으로 하야금
정당(正當)한 생영(生榮)을 수(遂)케 하는 동시(同時)에, 일본(日本)으로 하야금 사로(邪路)로서 출(出)하야
동양(東洋) 지지자(支持者)인 중책(重責)을 전(全)케 하는 것이며,
지나(支那)로 하야금 몽매(夢寐)에도 면(免)하지 못하는 불안(不安), 공포(恐怖)로서
탈출(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동양평화(東洋平和)로 중요(重要)한 일부(一部)를 삼는
세계평화(世界平和), 인류행복(人類幸福)에 필요(必要)한 계단(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구구(區區)한 감정상(感情上) 문제(問題)리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展開)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도의(道義)의 시대(時代)가 내(來)하도다.
과거(過去) 전세기(全世紀)에 연마장양(鍊磨長養)된 인도적(人道的) 정신(精神)이
바야흐로 신문명(新文明)의 서광(曙光)을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
신춘(新春)이 세계(世界)에 내(來)하야 만물(萬物)의 회소(回蘇)를 최촉(催促)하는도다.
동빙한설(凍氷寒雪)에 호흡(呼吸)을 폐칩(閉蟄)한 것이 피일시(彼一時)의 세(勢) 라
하면 화풍난양(和風暖陽)에 기맥(氣脈)을 진서(振舒)함은 차일시(此一時)에
세(勢)이니, 천지(天地)의 복운(復運)에 제(際)하고 세계(世界)의 변조(變潮)를
승(乘)한 오인(吾人)은 아모 주저(躊躇)할 것 업으며, 아모 기탄(忌憚)할 것 업도다.
아(我)의 고유(固有)한 자유권(自由權)을 호전(護全)하야 생왕(生旺)의 낙(樂)을 포향(飽享)할 것이며,
아(我)의 자족(自足)한 독창력(獨創力)을 발휘(發揮)하야
춘만(春滿)한 대계(大界)에 민족적(民族的) 정화(精華)를 결뉴(結紐)할지로다.
오등(吾等)이 자(玆)에 분기(奮起)하도다. 양심(良心)이 아(我)와 동존(同存)하며
진리(眞理)가 아(我)와 병진(幷進)하는도다.
남녀로소(男女老少) 업시 음울(陰鬱)한 고소(古巢)로서 활발(活潑)히 기래(起來)하야
만휘(萬彙) 군상(群象)으로 더부러 흔쾌(欣快)한 부활(復活)을 성수(成遂)하게 되도다.
천백세(千百世) 조령(祖靈)이 오등(吾等)을 음우(陰佑)하며 전세계(全世界)
기운(氣運)이 오등(吾等)을 외호(外護)하나니, 착수(着手)가 곳 성공(成功)아라.
다만, 전두(前頭)의 광명(光明)으로 맥진(驀進)할 따를인뎌.
공약삼장(公約三章)
일(一).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생존(生存), 존영(尊榮)을 위(爲)하는
민족적(民族的) 요구(要求)하니, 오즉 자유적(自由的) 정신(精神)을 발휘(發揮)할 것이오,
결(決)코 배타적(排他的) 감정(感情)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일(一).
최후(最後)의 일인(一人)까지, 최후(最後)의 일각(一刻)까지 민족(民族)의
정당(正當)한 의사(意思)를 쾌(快)히 발표(發表)하라.
일(一).
일체(一切)의 행동(行動)은 가장 질서(秩序)를 존중(尊重)하야,
오인(吾人)의 주장(主張)과 태도(態度)로 하야금 어대까지던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하게 하라
- 조선 민족 대표 -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양전백 양한묵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이승훈 이종훈 이종일 임예환 박준승 박희도
박동완 신홍식 신석구 오세창 오화영 정춘수 최성모 최 린 한용운 홍병기 홍기조
<해설>
'3 · 1 독립선언서' 는 천도교 측의 부탁을 받은 최남선이 작성한 초안을 검토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고,
종교 지도자들 33명이 민족을 대표해 서명했다. 민족 대표 33명은 천도교 지도자 15명, 기독교 지도자 16명, 불교
지도자 2명이다. 선언서에는 천도교 대표 손병희,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주, 불교 대표 백용성 순으로
먼저 각 종교 대표 이름이 들어갔다. 이후 이름은 '김'이 '권'보다 앞서거나 '량', '류', '리'로 발음하는 등 순서와 표기가
지금과는 조금 다르지만 가나다순으로 적었다. 최종적으로 민족 대표 33명이 확정된 날은 1919년 2월 27일이다.
'3 · 1 독립선언서'는 그날 저녁 무렵부터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만일천 장에서 삼만오천 장쯤 인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인 2월 28일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
지도자들이 전국에 배포했다. 3월 1일, 7개 도시에서 열린 시위에서는 모두 3 · 1 독립선언서는 인쇄 기계가 있는 학교나
교회에서 수백 장, 수천 장씩 찍어 냈고 전국 곳곳에서 매일같이 열리던 만세 시위 현장에 뿌려졌다.
'3 · 1 독립선언서'에는 자유와 평등, 인권 등 근대적인 사상이 반영되어 있으며 조선의 독립이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인류 행복에 기여할 것이라는 국제주의 시각도 녹아 있다. 특히 비폭력을 내세우면서도 "마지막 한 사람까지, 마지막 한
순간까지" 독립을 향한 민족의 뜻을 외치자는 결연함이 강조되어 있다.
3월 1일 하오 2시, 민족대표 29인933인 중 길선주 · 김병조 ·유여대 · 정춘수 불참)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태화관 건물.
대한문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
동대문을 메운 시위 군중.
미국영사관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는 민중들.
거리마다 일본경찰이 줄지어 서서 시민들을 위협했다.
상), 용산 조선군사령부 앞에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일본군.
하), 시민들의 가두 진출을 저지하는 일본군 기마병.
부녀자들의 만세 행진.
3 · 1운동 당시 국권회복을 노래한 「조국가」 와 「격검가」.
일본 관헌이 입수하여 일본어로 번역해 놓았다.
1919년 3월, 함북 경성군 천도교 대표들이 배포한 「조선독립선언서」 사본.
유구한 민족의 역사를 강조하고 국치 통한을 되씹으며 자유권복을 요구하고 있다.
일제의 무차별 검거와 비인도적 학살
분화噴火 뒤의 정적이랄가, 일제의 무차별 검거와 학살의 피냄새가 거리의 정적에 감돌고 있다.
법정으로 끌려가는 민중들.
1919년 10우러 말까지 18, 000명이 구속되었고, 그 중 기소된 사람은 보안법 위반 6, 472명,
소요죄 2, 289명, 내란죄 296명, 기타 범죄 232명으로 모두 9, 289명이었다.
법정으로 끌려가는 젊은이들.
상), 법정으로 끌려가는 부녀자들.
중), 제암리학살의 희생자 유족들.
하), 1919년 4우러 15일, 수원군 제암리에서는 일본군경이 기독교도, 천도교도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로 집합시키고는 집중사격으로 학살하고 교회와 민가를 불태운 천인공노할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선교사 스코필드가 현지 답사하는 광경.
독립만세를 외치며 죽어간 애국지사들.
전국 곳곳에서 자행된 애국지사들의 순국 현장.
서울 동대문 밖 만세시위 처형자의 유기 장소에 유족들이 시체를 찾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3 · 1운동 당시에 재미 교포 신문에 보도된 시위 광경.
3 · 1운동 직후 악랄한 왜병들에 에워싸여 현장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
독립군 양성과 우재 이시영 선생
우재 이시영 선생은 성재 이시영 선생과는 동명이인으로, 1914년 북경에 가서 국제정세를 살피며
동지들과 연락, 수차에 걸쳐 국내에 잠입 「애국단사건」과 「광복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루었다.
3 · 1운동 때는 영남 유림 2백여 명을 상경시켜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밀송케 하는 등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 유하현 삼원보의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다가 병으로 38세에
별세했다. 선생은 바람같이 나타나 바람같이 사라지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만큼 종횡무진한 투사였다.
우람한 체구에 의리와 정열에 넘쳤고, 포용력이 컸으며 서화에도 능했다고.
3 · 1운동 당시의 각 지방 만세시위 속보.
3 · 1운동 당시 일본군에게 어린 딸을 학살당한 어머니의 처절한 모습.
(F. A 메켄지 촬영).
법정으로 끌려가는 항일 애국투사들.
3 · 1운동과 재미교포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자 미국의 윌슨대통령은 14개조의 강화 조건을 발표하였는데 이 속에
「민족자결주의」 주창이 들어 있었다. 누구보다도 먼전 미주의 한국교포들은 윌슨의 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
되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코자 이승만 · 민찬호 · 정한경 3인을 한국민족대표로 파견키로 하고 독립
운동 자금으로 30만 원의 거액을 모금했다. 이 소식이 일본 도쿄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 <재펜 애드버타이서>
(1918년 12월 1일)와 <아사히신문> (1918년 12월 15일)에 보도됨으로써 일본 한국유학생들은 일대 충격을 받아
1919년 2월 8일의 「독립선언」 에 까지 파급되었고 국내에까지 알려져 마침내 3 · 1운동이 터졌다.
1919년 4월 14일, 미국 본토, 하와이, 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미국독립기념관에서 「한인대회」를 열고 임시대통령에 이승만 박사를 추대했다.
1921년 11월 7일에 발행된 「대한독립운동비 제1차 의연금증서」
인용: 서문당 著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외침과 투쟁」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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