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獨立運動 -
風雲의 王朝
1876년(고종 13년) 한일수호조약에서 1907년 고종이 '헤아밀사사건'으로
양위하기까지의 32년간은 조선조 500년을 통해 가장 격심한 국난기였다.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혁명(1894), 청일전쟁(1894), 민비시해(1895),
노일전쟁(1904), 을사보호조약(1905) 등은 국내외적으로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고 말았다.
이 국난기에 집권 조정은 족벌정치에다 친청 · 친로 · 친일로 분열되고 지식층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와 과격한 「개화파」로 갈라져 밀고 당기는 형국이었다.
「독립협회」(1887)를 통한 근대민족국가를 지향하는 애국시민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민족이 세계사에 편입되고 민족국가로 재출발, 민족적 자주와 번영을
이룩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 민족 스스로가 놓쳐 버리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조선조 이왕가李王家 일가.
왼쪽부터 황태자 영친왕, 순종, 고종, 순종비, 덕혜옹주 (나라를 빼앗긴 1915년 경).
신미양요, 미 군함 강화도에 침범
셔먼호 사건 이후 1871년 4월 14일, 북경주재 미국공사 로우는 미국정부의 훈령을 받고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와 상의, 군함 5척에 군사 1, 200명을 태워 남양南陽 앞바다에 도착 통상문제를 놓고 조선조 조정과의
교섭을 벌였으나 여의치 않자 강화도 초지진과 덕진을 점령하고 사디 북진, 치열한 광성진의 공방전을 전개
한 후 그해 5월 16일(양력 7월 3일) 에야 「외국사신을 배척함은 불미한 일이라」는 말을 남기고 미군은
물러갔다. 이 결과로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양이洋夷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쇄국정책으로...
1871. 4.14, 남양 앞바다에 모습을 냐타낸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제독의 기함 콜로라도호
(길이 79cm, 배수량 3,425톤, 대포 44문, 스트류 프리키트 증기선).
아시아함대사령관 로저스 제독 휘하의 전함 모나카시호.
통상문제 협의차 로저스제독의 기함 콜로라도호에 승선한 조선조 문정관問情官.
광성진 공방전 때 미군의 포로가 된 조선조 군인들.
광성진 공방전에서 전사한 아군 병사들.
미군 선상의 포로 인수작업.
아군이 초지진을 야습하여 미군 선박을 물리친 후
공격의 무모함을 깨달은 미군은 포로를 인도하고 물러났다.
조선조 문정관과 연락원.
미국군함 5척이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해면과 수로를 측량하면서 홀유도 부근에 정박하자
충돌사태에 대비하는 한편 교섭을 진행시키기 위해 문정관을 파견했다. 그러나 미군은
파견된 문정관의 품계가 낫다는 이유로 협상을 거절했다.
기함 콜로라도 선상에서 강화도 초지진 상륙을 위한 작전회의(4. 21)를 주재하는 조저스제독(앉은이 우측)
강화도 덕진을 점령하고 돈대 위에 늘어선 미군들
노획한 아군의 수자기帥字旗를 군함 위에 걸어 놓고 부동 자세를 취한 미군들.
흥선대원군의 양이쇄국정책. 1863년 고종즉위로 섭정의 대권을 장악한 대원군은 유교적 절대왕권의 재확립을
서두르는 한편, 1866년 프랑스함대의 내습(병인양요), 같은 해의 대동강 셔먼호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굳어진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그해 6월 12일, 서울종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잉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오만년자손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란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배외사상을 고취했으나 불과 2년 후인
1873년 집권 10년 만에 민씨척족에 밀려나 실각했고, 1876년의 한일수호조약 이후 조선조는 개방정책으로
나가게 되었다.
개항으로의 대외정책 대전환을 전후한 당시의 광화문 육조거리
(좌) 쇄국정책 등의 실정으로 1873년에 실각한 흥선 대원군.
(우) 1871년, 대원군이 세운 쇄국정책의 상징인 척화비.
1875년 9월 20일, 함재포로 강화도 초지진 · 영종진에 맹포격을 가하고
육전대를 상륙시켜 약탈을 자행한 일본군함 운양호.
1876년 1월, 수호조약 강요차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 무력시위에 나선 일본의
고웅 · 일진 · 맹춘 등 8척의 군함들
전권대사 쿠로다, 부사 이노우에를 태우고 강화도 앞바다에 정박중인 일본군함 고웅호.
강화도수호조약 체결 장소인 당시의 강화성
1876년, 2. 11, 진무영에서 양국대표 회담이 시작되자 일본측은 강화도 서문안
열무당閱武堂에 대포를 배치하고 조약체결을 강요하는 무력시위를 벌였다.
좌) 우리측 대표 접견대관 신헌申櫶.
우) 1876, 2. 11부터 2. 26까지 양측 회담이 계속된 강화부 서문안의 진무영.
조약체결 당시의 강화부 정문
일본측 전권대사 쿠로다
회담 당시 우리측 수비병이 강화부 갑곶리의 수문과 성벽을 지키는 모습.
개항후 최초의 일본파견 수신사 김기수.
한일수호 조약체결 2개월 후인 1876. 4. 23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 1832~?)를 대표로
수신사 일행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후 1880년에 다시 김홍집(金弘集, 1842~1896) 일행이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고, 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을 파견했다.
최초의 미국파견 전권대신 민영익, 한미수호 조약체결(1882. 5. 22)을 계기로 1년 후인 1883. 7. 8.
전권대신 믹영익 일행을 도미사절로 파견했다. 앞줄 왼쪽부터 통역관 로우엘 · 홍영식 · 민영익 ·
서광범, 이들은 최초로 서양문명을 견문하고 돌아왔다.
뉴욕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뉴스 페이퍼> (1883. 9. 29일자)에 게재된
전권대신 민영익 일행이 미국 아더 대통령을 공식 접견하는 사진그림.
1882년 6월 9일(양력 7월 23일), 구식군대에 대한 봉급 미지급 불만으로 군졸들이 일본공사관과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습격하는 난을 일으키자 민비의 피신, 대원군 재집권, 일본공사관원들의 탈출 등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진은 일본기를 들고 인천으로 도주하는 일본공사관원들과 발사 위협에 쫓기는 우리 나라 군인들.
남산 녹천정 일본공사관 원경.
1906년 이또오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할 때까지의 공사관 건물이다.
임오군란 때 인천으로 도주, 영국선을 타고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한 하나부사 공사와 공사관원 일행.
(7. 29) 하나부사공사는 8월 12일, 군함 4척, 호위병 1개 대대를 이끌고 다시 인천에 도착했다.
하나부사 재임 1877~1882 다께소에 재임 1883~1885 오오또리 재임 1893~1894 이노우에 재임 1894~1895
미우라 재임 1895~1895 고무라 재임 1895~1896 하라 재임 1896~ 1897 하야시 재임 1899~1905
좌) 서광범(徐光範1859~1897). 갑신정변후 일본을 거쳐 미국에 망명했다가
10년 만인 청일전쟁 후 귀국, 제2차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법무대신이 되기도 했다.
중) 박영효(朴泳孝, 1861~1939). 13세 때 철종의 딸과 결혼했고 금륭위로서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에 망명했으나 10년 만에 귀국, 제1차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되었다.
우) 홍영식(洪英植, 1855~1884). 우정국총판으로 「우정국사건」의 핵심역할을 맡아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실패하자 끝까지 국왕을 호위하다가 수구파에 잡혀 처형 당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사건」을 일으키기 직전에 찍은 개화당 동지들.
망명 10년에 일본정부의 처사에 실망, 창국 이홍장의 정치적 도량에 기대하고 상해에
도착 했으나(1894. 3. 28) 본국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피살, 시체는 본국으로
옮겨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열강의 각국 공사들. (1905년 미국공사관에서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 두 번째부터 폰 사르테르 독일공사, 코린 데 브란시 프랑스공사, 알렌 미국공사,
주(周) 청국공사, 조르덴 영국공사, 빈카르트 벨지움공사 등.
동학혁명의 불길
동학 창도자 수운 최제우(1824~1864).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로 대구에서 처형. 1907년 신원伸寃되었다.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
1898년 원주에서 피체 처형되었다.
전봉준(1854~1895)
주모자를 가려내지 못하도록 원 둘레에 각자 서명한 사발통문.
전봉준의 효수
1894년 6월 12일. 10수척의 군함 호위를 받으며 38척의 선단을 이용, 오오시마 소장이 인솔하는
일본군 홍성여단(보병 3, 000명, 기마병 300명)이 예고없이 인천에 불법상륙했다.
1894년 6월 25일 일군 혼성여단은 서울로 진군, 만리창과 아현동 일대에 주둔했다.
뒷줄 왼쪽부터 두 번째가 오오시마 여단장.
1894년 7월 29일. 성환 전투 직전의 일본군 전투 대비 사진.
이 전투에서 일군은 80여 명, 청군은 1, 000여 명이 전사했다.
1894년 7월 29일의 성환전투 승리를 기념하여 서울 용산에
개선문을 세우고, 만리창에서는 성대한 열병식을 가졌다.
평양전투에서 파괴된 선교사의 민가. 평양전투에서 일군병력는12, 000명 이었다.
청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일본은 우리 군졸들을 강제 차출했다.
9월 16일. 평양에 진출한 일본군은 우리의 평양행정청 선화당을 강제 점거,
일군 5사단 사령부로 사용했다.
1895년 3월 20일. 일본 하관에서 시작된 청 · 일 강화회담은 4월 17일 조인.
내용은 조선의 독립승인, 만주 요동반도· 대만 · 팽호열도의 일본할양 및 배상금 2억냥.
그러나 열강의 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포기했다.
좌) 1898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한국소개 출판물 표지.
소개된 고종 · 대원군 · 명성황후의 사진.
우) 1895년 8월 20일, 일본공사 미우라의 흉계로 일본 낭인들에게 무참히 시해된 명성황후.
명성황후 국장 장례식(아라베크 촬영)
프랑스 신부 아레베크가 찍은 명성황후 국장 장례식.
시해 후 폐위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가 10월에 복호復號되고
1897년(광무 1) 1월 명성이라 시호가 내려지고, 11월 22일 국장을 거행했다.
명성황후 국장 장례식(아라베크 촬영)
1896년 2월 11부터 약 1년간 고종과 황태자는 러시아공관에서 거처했다.
민비시해로 일어난 1차 의병들을 진압차 지방으로 내려간 친위대의 부재를 이용,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과 황태자를 러시아공관으로 옮겼으며, 친로파 내각이 성립되었다.
러시아공관에서 무력으로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군대의 알현을 받는 고종(사복을 입었다).
아관파천 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거처하던 방.
1897년 2월 20일 덕수궁으로 옮길 때까지 이곳을 침전 겸 집무실로 사용했다.
러시아공관 문전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며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일본군대.
아관파천 직후, 당시의 친일내각은 거의 일본으로 망명했다.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정장.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청국의 제후국과 같은 형식을 탈피, 완전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황제로는 고종이 계속 즉위하고
1807년 8월 29일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막을 내렸다.
1897년 <대한제국> 국호개정 1년 전의 서울 전경.
대안문에 모인 백의의 인파(지금의 대한문).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명예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이어하여 옛 이름인
경운궁으로 부르게 하고 대안문도 이 때 대한문으로 개칭했다.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
이 환구단의 자리는 조선조 태종 이래 왕족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유서깊은 곳으로 고종 원년
(1864년)에 환구단이 건립되었다. 그 뒤 1914년 일제는 이를 헐어버리고 조선호텔을 세웠다.
상) 고종의 행차.
하) 고종과 대신들(1897년).
왼쪽부터 이정노 · 심상한 · 김윤식 · 김성근 · 이용원 · 김병익 · 민종묵 · 서정순 · 이주영 · 김영전.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독립협회가 주관하여 세운 독립문 (1897년 11월 20일, 준공 직후에 촬영)
1905년 서울 남산에서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대포를 배치, 위혐시위을 하고 있는 일본군.
日帝의 侵略
소위 「명치유신」으로 천황중심의 통일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자기들이 경험한 불평등 조약을 조선조에
강요하는 것(한일수호조약 1876)을 시발로 한반도에 진출, 정치 경제 침략을 계속하다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
1895)으로 잠시 주춤했으나 노일전쟁(1904)의 승리로 열강들의 묵인 아래 조선조에 「을사보호조약」
(통감정치 실시 · 외교권 박탈 · 보호국화)을 강압조인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초대통감 이토오는 노일 전생 이후 계속 주둔한 일본군사령부를 힘의 배경으로 삼아, 바다의 외딴섬처럼
고독한 고종을 상대로 왕권을 침식하는 한편 친일반역자들(「일진회」· 1904)을 꼬드겨 희대의 국권침탈극을
자행했다. 안중근 의병장은 이 오토오를 하얼삔 역두에서 총살했던 것이다(1909).
1904년 2월 8일, 인천에 상륙한 일본군 기고시 여단의 시가행진.
한국의 중립선언을 무시하고 일군은 인천에 상륙을 개시했고, 2월 9일 서울에 진주했다.
인군 포병대가 독립문을 통과하며 탄약을 수송하고 있다.
노일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한 조정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전 양해 없이 상륙한
일군의 시가행진을 보고 당황한 시민들의 표정.
일군의 군수물자 운반에 강제동원된 한국인
서울 남산 아래에서 일군의 군수물자 수송에 강제 동원된 한국인.
평북 의주 부근에서 압록강을 도하하는 일군.
1907년 3월 25일, 5적을 암살하기로 뜻을 같이한 나철 지사와 동지들.
왼쪽부처 이절 · 나철 · 홍필주 · 오기호 의사들.
유서 내용
대한 2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
슬프다! 국치와 민욕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 속에서 모두 멸망하게 되었다.
무릇 삶을 요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죽음을 기하는 자는 반드시 삶을 얻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어찌 모르겠는가.
영환은 다만 한 번 죽음으로써 우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에게 사죄하노라.
영환은 죽었다 하더라도 죽은 것이 아니다. 여러분을 구천지하에서 반드시 도울 것이다.
부디 우리 동포 형제들은 천만으로 분려를 배가하여 자기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고 결심육력하여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면 죽은 자가 마땅히 땅속에서 기뻐 웃을 것이다.
슬프다. 그러나 조금도 실망하지 말라.
을사보호조약에 항거 자결한 민영환(1861~1905) 선생.
선생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백관을 인솔하고 대한문 앞에 나가 이를 강력히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해산으로 실패,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에 소청을 열고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 이완식의 집에 가서 유서 2통을 남기고 1905년 11월 30일 새벽 6시
평소 소지했던 칼로 자결했다. 의정대신에 추증되고 고정의 묘정에 배향, 시호는 충정忠正,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인용: 서문당 著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외침과 투쟁 편.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3> (0) | 2022.09.03 |
---|---|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2> (0) | 2022.09.03 |
K - 민화 <2> (0) | 2022.08.30 |
K - 민화 <1> (0) | 2022.08.29 |
옛 그림에 더위를 씻다 <2> (4) | 2022.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