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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옛 그림에 더위를 씻다 <2>

 

이정李霆<묵죽도墨竹圖>

1662년, 비단에 수묵, 119.1×57.3cm, 국립중앙박물관.

 

 

암반 위에 솟은 울창한 대나무 몇 줄기가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뻗쳐 나갔다.

길게 뻗은 유연한 줄기 위에 총총히 맺힌 대 잎들은 길쭉한 모양으로 아래로 축축 늘어져 있다.

대나무 잎은 유난히 길쭉하고 힘이 없어 보인다. 전면에 나타나는 짙은 줄기들 위쪽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또 다른 줄기들이 있다. 좀더 높게 솟아오른 이 줄기들은 거리감을 표현하려는 듯

얼핏 보면 그림자처럼보이지만 묘한 운치를 느끼게 한다.

 ‘천계임술(天啓壬戌)’이라고 쓰여 있어 이정이 82세 때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그의 대나무 그림은 대개 굵은 줄기를 가진 통죽들을 그린 것들이다.

이는 조선 초에 가는 줄기를 가진 세죽을 그리던 전통과는 다른 것으로 명나라 대나무그림의 영향을 시사

하는 면모이다. 대나무의 형세와 계절, 기후에 따른 변화감을 정교하게 묘사하면서 사실적인 표현에 힘썼다.

그러나 글씨를 잘 쓴 서예의 대가답게 굳센 필력과 변화감 있는 형세의 구사로 강인하면서도 유연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을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최립과 허균은 그의 묵죽화가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라고

칭송하였고, 이정구는 “소동파의 신기와 문동의 사실성을 모두 갖추었다”고 평하였다.

 

 

 

 

 

 

오달제吳達濟<묵매도墨梅圖>

17세기, 종이에 수묵, 104.9×56.4cm, 국립중앙박물관.

 

 

  한 그루라고는 하지만 매화 전체의 모습이 아니라 옆으로 기운 중간 둥치와 여기에서 수직으로 솟아나는

가는 마른 가지 몇 개일 뿐이다. 굵고 힘찬 필세로 윤곽선을 강조하지 않는 몰골법으로 줄기를

그렸는데, 오른쪽으로 뻗어나간 가지 중간에는 비백(飛白)의 효과까지 나타나고 있다.

하늘로 솟구칠 듯 뻗어 오른 마들가리는 긴 호흡을 가진 필선으로 완성되었다.

좌우로 뻗친 끝가지에는 섬세한 필선으로 그려낸 하얀 매화꽃이 듬성듬성 달려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오달제가 그린 매화의 노련한 모습과 이를 표현해낸 힘차고 굳센 필력, 다소 둔탁한 듯이 느껴지는

무게감 있는 조형은 화가의 기백과 지조, 변치 않는 심상을 전해주는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어몽룡이나 조속의 매화도가 보여주는 날렵한 형태와 강하면서도 예리한

필묘에 비하면 투박한 듯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여기화가의 고졸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조희룡趙熙龍<홍매도紅梅圖> 대련

19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각 145.0×42.2cm, 삼성 리움.

 

 

격렬하게 꿈틀거리듯이 보이는 매화 줄기가 화면을 꽉 메우며 시선을 사로잡는다. 굵은 둥치 끝에 새로 돋은

여린 가지들과 다닥다닥 달린 연분홍 매화꽃으로 늙은 매화나무는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는 듯하다.

매화 줄기는 화면을 뚫고 나가려는 듯 기세가 강렬하고, 이를 표현한 화가의 필치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며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아리따운 매화꽃은 눈을 어지럽게 하고, 보는 이는 형태와

필치, 색채가 이루는 화려한 향연에 흠뻑 도취한다.

 

이 작품은 선비가 그린 사군자화에 대한 우리들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군자화에서는 간결한 구성, 우아한 형태, 절제된 필묵의 구사가 중시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과장된 형태, 격렬한 필치, 화려한 장식성 등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요소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는 화가의 의도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조희룡은  “손가락 끝으로 가슴 속의 그윽한 회포를 쏟아내는 것은 여기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외롭고 쓸쓸함을 달래는 고식지계(姑息之計)”일 뿐

아니라 “고통과 불행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라고 하면서 회화에 대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밝힌 바도 있다.

이는 김정희 등 사대부화가들이 지향한, 성정(性情)을 함양하는 우의적(寓意的) 회화관과 구별되는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림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은 그가 이 <홍매도> 대련처럼

주관적이고 표현적인 회화를 그린 토대로 작용하였다.

 

조희룡은 매화가 만발해 향기 나는 눈의 바다와 같다는 의미를 가진 향설매(香雪梅)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생에서 나부산(羅浮山, 매화로 유명한 중국의 명산)의 삼십만 그루의 매화를 볼 수 없으니

매화그림으로 집을 가득 채워 향설매를 만들겠다”고 한 적도 있다.

조희룡이 <홍백매> 대련처럼 화려하고 힘찬 매화를 그린 것에는 이 같은 배경이 작용한 것이다.

 

여항화가였던 조희룡은 문인미학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사군자화를 그리면서 새로운 미학과 자신 만의 고유한

가치를 담아내었다. 이로써 김정희의 제자라고 알려졌지만 조희룡의 회화는 금욕적인 절제를 강조한 김정희와는

다른 지향점을 가진 것을 확인하게 된다. 조희룡의 회화에 나타나는 주관성, 표현성, 감정의 이입은

온유돈후(溫柔敦厚)의 미학을 중시한 보수적인 회화를 새롭게 변화시킨

여항화가의 도전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림에 있는 제시는 근대의 서화가이자 대수장가인 김용진이 쓴 것이다.

오른쪽 폭의 화제는 명나라 유기(劉基)의 ‘제화홍매(題畵紅梅)’를 쓴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정궁 속의 왕비가, 요대에서 잔치가 끝나 달빛 밟으며 돌아간다. 적성에 도달해도 새벽이 안 되어 찬 이슬이

육주의로 날아 오른다. 향석옹이 우봉의 매화를 읽고 쓰다. 1947년 중양(음력9월9일) 전날.

〔水晶宮裏正眞妃 宴罷瑤臺步月歸 行到赤城天未曉冷 露上飛六銖衣 香石翁讀又峯梅 追題 時丁亥重陽前日〕”.

그리고 왼쪽 화면에는 다음 시가 적혀 있다. “꽃의 맑은 향기가 하늘과 땅에 가득하다.

우봉의 그림을 읽고 쓰다. 구룡산인〔花端淸氣滿乾坤 讀又峯畵 追題 九龍山人〕”

 

 

 

 

 

 

이하응李昰應 <석란도石蘭圖> 대련

1892년, 비단에 수묵, 각 123.0×32.2cm, 국립중앙박물관.

 

 

괴석을 사이에 두고 난을 배치한 이 작품은 이하응 석란화(石蘭畵)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73세의 노년작임에도 불구하고 간결한 구성과 힘찬 필력이 그의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젊은 시절에 비하여 괴석의 형태와 필묵법은 더욱 간일해 지고, 난은 풍성하게 표현되었다.

난의 이파리는 가늘고 긴 곡선으로 표현하는 이하응 특유의 운필(運筆)이 보이는데, 속도감과 힘이

충만하여 그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난다. 괴석은 상대적으로 빠른 필치로 그려 비백(飛白)의 효과가

나타나며, 담묵으로그린 돌의 표면과 농묵으로 그린 윤곽선이 겹치거나 교차하면서 번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절제된 형태와 필치로 세련된 격조와 아취(雅趣)가 느껴진다.

 

 

 

 

 

 

김명국金明國<관폭도觀瀑圖>

17세기, 비단에 수묵담채, 180×101.7cm, 국립중앙박물관.

 

 

깊은 산속 잘 차려입은 두 고사(高士)가 골짜기 사이로 떨어지는 폭포줄기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앞 얼굴이 보이는 왼쪽의 고사는 반투명한 두건을 쓰고 긴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 푸른 깃이 있고

소매가 낡은 심의(深衣)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있다. 그의 눈길은 폭포도, 앞에 서 있는 동행도 아닌,

저 멀리를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

뒷모습으로 그려진 뒷짐을 진 고사는 옆의 고사를 향하여 고개를 돌린 채 말을 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모습은 고요하고 정적으로 보이는데, 그 앞에 펼쳐진 산속의 경관은 격하고 강렬하여 대비를 이룬다.

 폭포의 좌우로 나있는 칡덩굴에 휩싸인 고목들은 잎이 다 떨어진 한림(寒林)의 모습을 하고 있다.

즉, 이 그림이 보여주는 시기는 추운 겨울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폭포의 물줄기는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고, 추운 숲속의 이 두 고사는 우아하고

품격이 넘치고 있어 겨울 찬바람을 맞는 초조한 상황이 아닌 듯이 보인다.

 

 

 

 

 

 

신윤복(申潤福), 1758~1813년 이후 | 연당의 여인, 여속도첩(女俗圖帖) 중

18세기 말 19세기 초, 비단에 담채, 29.6 × 24.8cm, 국립중앙박물관

 

 

한 손에는 장죽을, 다른 손에는 생황을 들고 별당의 툇마루에 앉아 연못 속에 피어난 연꽃을 감상하는

아리따운 기생의 모습을 그렸다. 달걀형의 고운 얼굴에 흙처럼 까만 트레머리를 높이 장식하였는데,

머리끝에달린 자주 빛 댕기가 시선을 끈다. 휘휘 돌아감은 풍성한 치맛자락 아래로

하얀 속곳이 살짝 드러나 고혹적이다.

한창 시절의 아름다운 기생의 모습 만큼이나 아름다운 연꽃이 연당에 가득 차 있어

이 장면의 정취를 돋우고 있다.

 

그림을 들여다보면 신윤복은 이 여인의 외적인 아름다움뿐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하여 많은 장치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여인의 자세를 보라. 이 여인의 포즈는 매우 부자연스럽다.

긴 장죽과 생황을 이처럼 동시에 들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신윤복은 이 여인이 외모만 아름다운 기생이 아니라 당시 최고의 유행을 따르던

풍류를 아는 여인이며 음악도 잘 아는 재주 많은 예인임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연당의 연꽃을 바라보는 여인의 그윽한 시선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시심(詩心)을 전달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신윤복은 이 그림의 주인공인 한 기생을 풍류와 운치를 아는 교양인으로서 해석하였다.

그리고 각종 도구와 장치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그림을 보면서 그러한 의도를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림을 반 정도 본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누구를 위하여 그린 것일까.

그림의 주인공을 위하여?

아니면 그녀를 사랑한 어떤 후원자를 위하여?

아니면 신윤복이 연모한 한 여인을 위하여 그렸을까?

 

신윤복의 아름다운 풍속화는 김홍도의 풍속화와는 다른 지향점을 가진다.

김홍도의 교훈성과 낙관성보다는 탐미성과 본능, 또는 가식 없는 솔직함을 보여준다.

신윤복의 아버지 신한평(申漢枰, 1726~?)은 당대 최고의 궁중화원이었지만, 당시 화원 집안의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신윤복은 화원으로 봉직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

전하는 그림들을 보면 이러한 상황이 이해되기도 한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교훈성이나 감계성이 적으며

때로는 이른바 양반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담겨져 있다.

반항적인 예술정신을 가진 신윤복에게 궁중은 너무나 답답한 곳이었을 것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처럼 전혀 다른 지향점을 가진 위대한 대가들이 활동하던

정조연간의 화단이 풍성한 결실을 낳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그만큼 조선 후기의 문화수준이 높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인문(李寅文), 1745~1821 | 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1805년, 종이에 담채, 121.2 × 53.2cm, 국립중앙박물관

 

그림 상단의 제시다.

中歲頗好道 中年 나이에 자못 道를 좋아하여
晩家南山陲 늘그막에 남산의 모퉁이에 살았네.
行到水窮處 거닐다가 물이 끝진 곳에 이르면
坐看雲起時 앉아서 구름이 이는 때를 보았네.
興來每獨往 흥이 일면 언제나 혼자 가서는
勝事空自知 좋은 일을 부질없이 스스로 알았네.
偶然値林叟 우연히 숲속에서 사는 노인을 만나
談笑無還期 담소함에 돌아갈 기약이 없었네.


乙丑元月道人與丹邱 書畵于瑞龜齋中 贈六逸堂主人 時方聚五 彈李元談(?)歌

乙丑年 元月(正月)에 道人과 丹邱는 瑞龜齋 안에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六逸堂 主人에게 주다.

이때에 바야흐로 聚五(묵죽을 그린다는 뜻)하다가 李元談(?)의 노래를 타기도 하였다.

 

시 부분은 「종남별업(終南別業)」에서 따온 것이고

‘시방취오 탄이원담(?)가時方聚五 彈李元談(?)歌’ 라고 옆으로 쓴 것은 글을 쓰다가 자리가 모자라

옆에다 추가하여 쓴 것이다. 화제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이 작품이 1805년 이인문이 김홍도과 함께

서화로 즐기는 장면을 그려 육일당 주인에게 준 것임을 알게 된다. 글씨는 김홍도가 썼고 그림은 이인문이 그렸다.

친구가 만나 정담을 나누면서 멋진 글씨와 그림으로 즐긴 장면을 기록한 이 작품은 두 화가의 막역한 교분 뿐

아니라 중인화가들이 서화를 즐긴 교양인이라는 사실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이인문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화가 중 산수화와 소나무를 가장 멋지게 그린 화가로 이름이 높은데,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바위, 물, 나무, 사람을 부각시킨 간결한 구성과 강약장단과 농담원근을 자유자재로

표현한 필묵으로 정취넘치는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깊은 산속 맑고 고요한 자연을 벗하며 마음을 나누는

두 사람의 풍류가 실감나게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벼랑에서 난 굽고 틀어진 소나무는 춤을 추듯 너울거리며, 사방으로 펼쳐진 솔잎의 왕성함과 여기저기 율동적

으로 찍힌 검은 초묵(焦墨)의 점들로 생기가 넘쳐 오랜 세월을 이겨낸 강인함을 자랑하는 듯하다. 바위의 표면에

찍힌 굵고 짙은 준과 소나무 위에 찍힌 점은 손과 손톱을 이용하여 표현하는 지두화법(指頭畫法)으로 그려진 것

으로 보인다. 육십 노인이 된 대화가 이인문이 구사한 무애한 필치와 어떠한 법에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경지를 느낄 수 있다. 멋진 분위기는 김홍도의 개성이 듬뿍 배어나는 서체와 흥취넘치는

시의 내용으로 보강되어 그야말로 시서화를 겸비한 풍류넘치는 작품이 되었다.

 

 

 

 

 

 

이재관(李在寬), 1783~1837 | 송하처사도(松下處士圖)

19세기 초, 종이에 수묵담채, 139.4 × 66.7cm, 국립중앙박물관

 

소나무와 바위, 고사의 옷주름 선 등을 까칠하고 오래된 독필로 그린 듯 불규칙한 필치를 구사하여 일기(逸氣)를

느끼게 한다. 먹의 농담은 극단적으로 대비되어 소나무의 둥치 부분에서는 특히 짙고 깊은 먹색을 구사하였고,

위로 올라가면서 서서히 옅어지게 하였다. 솔잎을 그릴 때에는 붓을 불규칙하게 이리저리로 돌리고 짙고 옅은

먹의 효과를 가미하여 엉클어진 듯 하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탈속한 인상을 자아낸다.

 

이재관의 탁월한 기량은 소나무 뒤쪽에 나타나는 흐릿한 윤곽의 원산(遠山) 표현에서 드러나고 있다.

강렬하게 표현된 소나무에 대비되어 아련하게 보이는 이 원산은 다소 평면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일 수도 있었을 이 그림에 깊이와 변화,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처럼 단순한 구성과 소재이지만 강한 필력과 다채로운 묵법을

구사하면서 힘차면서도 탈속적인 분위기를 창출하였다.

 

화제에 쓰인 백안(白眼)이란 말은 유명한 죽림칠현(竹林七賢) 중 한 사람인 완적(阮籍, 210~263)의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완적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오면 흰 눈을 흘겨 뜨면서 무시하였다고 한다.

이 화제로 인해서 그림 속의 고사는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였던 완적을 연상하게 한다.

이재관은 중인 출신으로 한동안 궁중의 화원으로 봉직했지만 여항의 독립화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자신의 화실에서 그림을 제작하여 연명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름이 나자 궁중에 발탁되었던 것이다.

이재관은 여항에서 활동한 직업화가 답게 산수, 영정, 도석인물, 영모화를 두루 잘 그렸다.

<송하처사도>도 6폭으로 이루어진 인물화 병풍 중 한 폭인데, 이 병풍 중 4폭은 여인을 소재로

하였고, 나머지 2폭은 당나라 회소 등에 대한 고사를 토대로 그렸다.

이 병풍의 각 폭에는 모두 조희룡의 발문이 실려 있어, 이재관이 조희룡 등

여항화가들과도 교분이 깊었던 것을 시사한다.

 

 

 

 

 

 

 

 

이재관(李在寬), 1783~1837 | 오수도(午睡圖)

19세기 초, 종이에 담채, 122.0 × 56.0cm, 삼성미술관 리움

 

 

화면 오른쪽 위에는 “새소리 오르내리는데 낮잠이 한참이로다. 소당〔禽聲上下 午睡初足 小塘〕”이라는

화가 자신이 쓴 화제와 관서가 있어 그림의 주제와 화가를 알려주고 있다. 그 오른쪽에는 타원형의

두인(頭印)이 찍혀 있는데, 판독이 어렵고, 호 아래에는 “붓 끝에 한 점 속기가 없다〔筆下無一點塵〕”라고

판독되는 주문방인이 찍혀 있다. 화제는 「산정일장(山靜日長)」이란 시의 한 구절이다.

이 시는 중국과 조선의 그림에서 종종 인용되었으며, <오수도>가 선비의 한아한 삶을 표현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 그림의 구성과 소재는 매우 간결하고 명확하다. 한 선비의 일상을 이처럼 명쾌하게 보여줄 수 있었던 기량과

표현력은 곧 이재관이 직업화가로 살아갈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 주제가 고상하고 품격이 있으며

맺힌 데가 없이 자유자재로 조절된 능숙한 필묘, 윤택하고 풍부한 먹의 효과, 문인 취향에 맞는 잘 선별된 소재

등이 그림의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생략적이지는 않지만 웬만한 식자층이면 다 이해

하고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사의성(寫意性)을 보여준다. 꽤 잘 계산된 그림인 셈이다. 이런 정도의 주제와 소재,

화풍이었기에 김정희, 조희룡 같은 새로운 문인화를 모색하는 이들에게도 찬사를 받을 수 있었고, 동시에

보수적인 미감과 취향을 가진 인사들에게서도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한철(李漢喆) 1808~? | 방화수류도(訪華隨柳圖)

19세기, 종이에 담채, 131.5 × 53cm, 국립중앙박물관

 

 

이한철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19세기 말까지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화가로서 활동하였는데, 이즈음에는 중인

화가들이 시사(詩社)를 이루거나 여항에서 독립화실을 운명하는 등 여항화가들의 독립적인 활약이 커진 시기였다.

이한철은 유숙(, 1827~1873), 백은배(, 1820~?), 조중묵(), 허련(, 1809~1892)

당시의 대표적인 여항화가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문학활동과 서화제작활동을 함께 하였다.

 

그런데 이한철은 궁중에서 오랫동안 봉직한 때문인지 화원이 아니면서도 여항에서 활동한 여항화가들과 비교

하면 다른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 화원이 아닌 여항화가들로서는 조희룡과 전기(, 1825~1854), 유재소

(,1829~1911)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김정희의 휘하를 드나들면서 마른 먹과 마른 붓을 중시

하는 사의적인 남종문인화와 난초 및 대나무들을 즐겨 그렸다.

 

그러나 이한철은 이들과 교분을 가졌으면서도다소 보수적인 경향을 고수하였다.

<방화수류도>는 그의 이러한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고사인물화에 해당하는 보수적인 주제이고, 그림의 구성 또한 비록 근경 중심이지만 화면을 가득

채우는 웅장한 세를 강조하면서 여백을 적게 남기는 보수적인 방식을 채용하였다. 필선은 기량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듯 변화가 많고, 먹의 색깔도 물기가 많은 윤택함과 옅고 짙은 차이를 충분히 활용하여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필묘와 묵법은 김정희 계통의 여항화가들과는 다르며,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다.

 

이처럼 19세기에 새로운 사의적인 산수화나 사군자화가 유행하였을 때에도 여전히 18세기의 전통을

존중 하면서 활동한 직업화가들이 있었다는 것은 보수적인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보수적인 취향의 후원을 대표하는 존재는 바로 궁중이다. 궁중에서 화가로 활동한 이한철이었기에

그 수요에 맞는 보수적인 화풍을 고수할 수 있었고, 또한 시중에서도 동일한 취향을 가진 수요자들이

있어  그림으로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직업화가는 그림을 주문하고, 수요하는 계층을 의식하는 작업을 한다.

따라서 때로는 자신의 의사나 개성보다는 주문자의 기호와 의도를 반영하는 것을 중시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직업화가와 선비화가의 가장 큰 차이였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화첩 中 〈늦은 여름〉

전(傳) 안견, 15세기 후반, 비단에 수묵담채, 35.2×28.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안견의 유작으로 전해지는 그림 가운데 주목되는 화첩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사시팔경도》와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꼽을 수 있다. 이들 16점 모두가 한 화첩이었으나 1980년대에 두 화첩으로

고쳐 엮었다.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안휘준 교수에 의해 전자는 15세기 후반, 후자는 16세기 초로

추정한 논고가 발표되었다. 특히 전자는 〈몽유도원도〉와 친연성이 짙고 화풍에서 북송의 화원 곽희의

여운이 보여 안견의 전칭작 중에선 가장 중요시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네 계절을 각기 두 폭씩 안배해 화첩을 펼쳤을 때 대칭구도를 취한다. 계절의 변화가 잘 드러나 있고

산세나 수목, 인물표현 및 화면구도, 필치 등에서 대가의 완숙미를 감지할 수 있다.

수묵 위주이되  건물 주위에만 옅은 붉은색을 입혔다. 이 점은 15세기 문청(文淸)의 〈

누각산수(樓閣山水)〉나 양팽손(梁彭孫) 전칭의 〈산수도〉, 그리고 16세기 계회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공통점이기도 하다. 전술한 신숙주의 「비해당화기」에

팔경도란 명칭이 있어 시사케 하는 바가 있다.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中 〈늦은 겨울〉

 

 

 

 

 

 

필자미상 <어촌석조도漁村夕照圖>

16세기 초, 비단에 수묵, 35.2×30.7cm, 국립중앙박물관.

 

 

넓게 펼쳐진 공간 가운데 자연의 경관이 큰 규모로 표현된 대관산수화(大觀山水畵)이다.

자연의 경물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화가는 경물을 세 덩어리로 나누어 화면에 담았다.

가장 가까운 곳, 근경에는 자그마한 초가집과 물가에 초가 정자가 있는 마을 풍경이 나타나고 있다

그 위쪽의 너른 수면에서는 어부가 고기를 잡고 있다. 그 위로 다시 물을 두어 간격을 나타낸 다음

그 너머로 중간 단계의 경치인 중경(中景)이 나타나는데 풍성한 수풀에 쌓인 마을로 표현하였다.

이 마을 위쪽으로 희뿌연 연운이 감돌며 다시 공간적 간격을 두고 멀리 보이는 원경(遠景)이 나타난다.

뾰족한 모습을 가진 원경의 여러 봉우리들은 왼쪽으로 가면서 차츰 작고 흐려지는 모습으로

표현되다가 윤곽뿐인 산으로 변하고, 그리고 아련히 보인다.

 

이 그림은 이와 같은 삼단구성을 취하였고, 경물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확산적인 구성을 사용하여

자연의 규모를 더욱 크게 느끼게 한다. 삼단으로 흩어진 경물들은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듯하면서도

일종의 통일감을 보여주며, 공간은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안견파 특유의 공간감각과 구성을 활용하였다.

 

근경의 뾰족이 솟은 언덕과 물가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초가정자, 가지 끝이 날카롭게 삐치는 해조묘법에

가까운 수지법(樹枝法)의 구사 등에서 조선 초에 유행한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 엿보인다. 이러한 화풍의

특징을 토대로 이 작품의 제작 시기는 16세기 초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화가는 관서나 도장이 없어

알 수 없는데, 조선 초에는 화가들이 관서나 도장을 사용하지 않아 작자를 알 수 없는 작품이 많아 아쉽다.

 

 

 

 

 

 

이정(李霆), 1541~1622 | 의송망안도, 산수화첩(山水畵帖) 중

17세기 초, 종이에 수묵, 19.1 × 23.5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당시에 유행하던 절파화풍이나 안견파 화풍과는 많이 달라 보인다. 간결한 이단구도는 당시까지는

유행하지 않았던 남종화풍의 영향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강렬한 기세와 분방한 필치는 이정 특유의 개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필력과 과감한 표현은 그가 불화를 잘 그렸다는 기록들과 연결해서 볼 수 있겠다.

어릴 적부터 불화의 선묘(線描)를 습득한 그는 일반 회화의 분위기와는 다른 필치를 과감하게

구사하였고, 그것이 그의 그림을 더욱 독보적인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옛 그림을 볼 때 필치, 필묘, 필선을 자주 말하게 된다. 필묘나 필치는 필선으로 나타나는데 훈련이나 연습을

통하여 변화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고난 요소로서 개성이 많이 작용한다. 따라서 고유한 필치와

필묘를 가려낼 수 있다면 옛 그림의 맛을 한층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옛

그림을 볼 때는 서양의 유화를 감상할 때와는 달리 가까이서 하나하나의 필선을 따라 가면서

천천히, 자세히 감상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림의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정(李霆), 1541~1622 | 노안행선도, 산수화첩(山水畵帖) 중

17세기 초, 종이에 수묵, 19.1 × 23.5cm, 국립중앙박물관

 

 

 화면을 상하의 두 단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구성하는 것이나 물이나 공간 등 여백을 극대화하는 공통된 수법이

나타나고 있다. 필치는 여전히 굳세고 분방하여 단순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화면에 변화감을 불어 넣고 있다.

먹색에는 변화가 제법 많은데, 근경은 옅고 원경은 강하게 표현하여 시선을 자연스레 원경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수법을 통해 화가는 어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어부와 관련된 고사인물화는 조선 초 이후 꾸준히 선호되었다. 여기서 어부는 실제 고기 잡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혼란함을 떠나 자유자재한 삶을 사는 은자, 또는 은둔군자로서의 은유이다.

비록 허름하고 다 쓰러질듯 한 집에서 소박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자연을 대하면서 우주의 깊은 이치에 동화된

삶을 사는 것은 조선시대의 선비들이 바라던 이상이었다. 자신을 알아주는 세상을 만나면 출세하고, 자신을

알아주는 세상이 아니면 은둔, 즉 처(處)하는 것이 선비의 처세법이다. 그러나 현실의 어지러움을 경험한

많은 문사들은 비록 조정에 몸을 두고 있을 때에도 마음으로는 늘 강호자연으로의 환원을 꿈꾸면서

자기의 본심을 잃지 않고자 하였다.

 

이 그림과 같은 어부도가 자주 그려지고 감상된 것은 바로 그림을 통하여 자신의 성정을 맑게 지키려고 하였던

선비들의 심사(心思)와 관련된 현상이었다. 이렇게 그림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담는 것을 우의(寓意)라고 하는데,

우의란 선비들이 그림을 애호하는 명분이 되었다. 우의란 그림을 통하여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니 이는 곧 그림의

효용성과 관련된 요소인 것이다. 바로 이 우의라는 명분이 있었기에 선비들도 완물상지(玩物喪志)라는

비난을 물리치고 그림을 감상하고 제작할 수 있었다.

 

 

 

 

 

 

 

김홍도(金弘道), 1745~1816년 이후 | 옥순봉도, 병진년화첩(丙辰年畵帖) 중

1796년, 보물 782호, 종이에 담채, 26.7 × 31.6cm, 삼성미술관 리움

 

 

단양의 명승인 옥순봉을 그린 것이다. 옥순봉은 이황 이후 수많은 선비들이 방문하여 글과 시를 지었고,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의 유행과 함께 자주 그림으로 표현된 명승이다. 현재는 단양팔경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보통 ‘사군산수(四郡山水)’로 손꼽히던 곳이다. 사군은 단양, 제천, 청풍, 영춘 등 네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에 위치한 옥순봉, 도담 삼봉, 구담, 사인암, 삼선암, 의림지, 청풍의 금병산과 한벽루 등이 명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홍도는 1795년 이후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재직한 적도 있어 이 사군산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병진년화첩》에는 옥순봉 이외에도 여러 곳의 명승이 실려 있다.

 

김홍도의 특기인 생기와 변화있는 필묘를 구사하면서 화강암봉의 모습을 세세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암봉의 중량

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구성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김홍도의 <옥순봉도>는 진경산수화

의 대가인 정선과 달리 강한 필세와 짙고 윤택한 먹은 사용하지 않았다. 어떠한 점에서는 현장의 사실감을 구체적,

설명적으로 묘사하려는 의지가 강하며, 정선과 같은 주관적인 인상을 강렬하게 전달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인다.

 

이처럼 김홍도는 진경을 그리면서도 자신의 특기인 필묘를 주로 하고 사실적인 인상을 성실하게 전달하는

직업화가답게 객관성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이처럼 다양한 개성을 가진 화가들에 의하여 서로 다른 수법이

형성되었기에 진경산수화가 다양한 계층 및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인문(李寅文), 1745~1821 | 누각아집도(樓閣雅集圖)

1820년, 종이에 담채, 86.5 × 57.8cm, 국립중앙박물관

 

 

화면의 오른쪽 위에는 긴 화제(畵題)가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늙은 소나무가 몇몇 그루인데, 흐르는 물이 그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소나무는) 창창(蒼蒼)하고 (물은) 냉랭()하여 가득한 골짜기에 바람이 인다.

 


높직한 헌창(軒窓)에 구름과 아지랭이〔雲霞〕가 영롱한 사이에 안석에 기대어 축(軸)을 펼치고 있는 자는

도인(道人) 이인문이고, 손에 화전(畵箋, 그림을 그린 종이)을 가지고 곁에서 살펴보고 있는 자는 수월(水月)

임희지(1765~?) 이며, 거문고를 내던지고 난간에 기대어 있는 자는 주경(周卿) 김영면(18세기 활동)이고

걸상에 걸터앉아 목소리를 길게 늘여 읊고 있는 자는 영수(潁叟, 성명이 확실치 않음)이니,

곧 이 네 사람은 죽림칠현과 적수가 될 만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갑자기 이끼가 끼어있는 시내의 언덕에서 담론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또한 호걸스런 기개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도인(道人) 칠십육세옹이 그리다.

수월(水月)은 보고, 영수(潁叟)는 증언하고, 주경(周卿)은 평하다. 이때는 경진년(1820) 청화월(음력4월)이었다.

〔古松幾株 流水貫其中 蒼蒼泠泠 滿谷生風 穹然軒 雲霞玲瓏之間 倚几而展軸者道人 手把畵箋 而傍觀者水月 

抛琴倚欄者周卿 踞凳而長吟者潁叟也 卽此四人可敵七賢 然忽於苔徑溪畔 談論而 聯翩者誰歟 此亦傑氣中人 

道人七十六歲翁畵 水月觀潁叟證周卿評 時庚辰淸和月.〕”

 

화제의 내용으로 보면 네 사람이 모여 시서화로 즐기면서 옛날 죽림칠현의 고사를 본 떠 모임을 이루었고,

이 그림은그 장면을 기념하여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김영면과 임희지는 재주 있는 여항서화가들인데,

이들이 76세의 직업화가 이인문과 함께 노닐었던 것이다.

신분과 나이를 초월하여 만난 재주 넘치는 인사들의 모임인 만큼 이처럼 멋진 그림이 나온 것이리라.

 

이인문은 김홍도와 동갑내기 화원으로 18세기 말 정조연간에 김홍도는 인물화로, 이인문은 산수화로 쌍벽을

이루며 활약하였다. 이인문은 소나무를 가장 맑게 그린 것으로 이름이 높으며, 산수화에서 독보적인 기량과

개성을 발휘하였다. 이 그림에 나타나듯이 그는 굳세고 단단한 암산과 바위를 즐겨 그렸고, 특히 맑고

운치가 넘치는 모습의 소나무를 잘 그렸다.

그의 필세는 섬세하면서도 예리하여 골기(骨氣)가 살아 있다. 암벽에는 작은 도끼를 찍어 내린 듯,

소부벽준(小斧劈皴)을 반복적으로 그려 질감을 표현하고, 강인한 형세를 드러내었다.

 굳센 필치와 필력을 전제로 한 준법인 만큼 필력이 강건하기로 유명한 이인문의 개성이 한껏 발휘되었다.

소나무는 가늘고 길어 청수(淸秀)한 모습이며, 솔잎은 가늘고 예리하여 생기가 넘친다.

 

이인문은 관념적인 산수화를 즐겨 그려 김홍도가 사실적인 풍속화와 실경을 다룬 진경산수화를 즐겨 그린 것과

대비가 된다. 두 사람의 회화는 조선 후기에 서로 다른 두 가지 경향이 공존하던 상황을 대변한다. 김홍도의

현실적인 풍속화와 진경산수화가 인기가 높았던 것 이상으로 이인문의 관념적인 사의산수화(寫意山水畵)

또한 인기가 높았다. 한 시기에 활약한 두 대가들이 대조적인 주제와 화풍을 구사한 것은 그만큼 그림에

대한 수요층과 취향이 다양한 것을 의미한다.

 

<누각아집도>는 구체적인 만남을 기록한 그림이지만, 김홍도라면 인물을 더 크게 그리고 경치는 좀더 사실적으로,

조선의 실경처럼 보이도록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문은 고전적인 이상경, 즉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에서라도

있을 수 있는 경관으로 표현하였고, 등장하는 인물들도 조선인도, 중국인도 아닌 모습으로 그렸다. 경물이나 인물을

표현한 이러한 방식은 이 아름다운 모임이 영원불변할 것만 같이 느껴지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

 

 

 

 

 

 

이인문(李寅文), 1745~1821 |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1816년, 종이에 담채, 97.8 × 54.2cm, 국립중앙박물관

 

 

이인문은 궁중에서 화원으로 봉직하면서 한 시대 산수화의 일인자라고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확인되듯이 부벽준이라고 하는 북종화법(北宗畵法)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이인문이 활동하던

조선 후기는 일반적으로 사의적인 남종화가 화단의 주류를 이룬 때였다. 구태여 말하자면 이 부벽준을 사용한

북종화는 문인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수법인 것이다.

 

이인문이 사용한 부벽준은 어떤 유래를 가진 것이며, 왜 만년까지 이처럼 강한 필세를 노출한 화법을 구사한 것일까.

이 점은 늘 의문이 되어 왔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설명으로는 아마도 이인문이 궁중의 원체화풍에 익숙해 있었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즉, 오랜 기간 동안 궁중에서 봉직하면서 궁중의 원체화풍을 훈련받고

구사한 화가로서 궁중에서 중시하던 송대 화풍을 구사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화단은 다양한 층차를 가지고 형성되었다. 궁중의 원체화풍은 민간의 문인들이나 서민들이 선호하던

회화나 화풍과는 다른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궁중이 그림을 단순히 감상이나 자기 표현의 도구로서

본 것이 아니라 국가를 경영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의 주제와 화풍 등은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통제되었다. 그에 따라 궁중 또는 화원의 화풍은 민간의 문인이나 여항인들의 화풍과 다른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인문의 부벽준 사용은 그러한 배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화면의 왼쪽 위에는 ‘고송유수관도인칠십이세사(古松流水館道人七十二歲寫)’라고 관서되어 이인문이

72세 때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날카롭고 예리하기만 하던 그의 필치가 기세가

강해지고 호방한 분위기로 변화된 점이 돋보인다.

 

 

 

 

 

 

김하종(金夏鐘), 1793~1876년 이후 | 환선구지망총석도, 해산도첩(海山圖帖) 중

1815년, 비단에 담채, 29.7 × 43.3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환선정이 있던 자리에서 본 총석의 열주를 그린 것이다. 총석정은 강원도 통천에 있는 정자인데,

관동팔경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명승으로 유명하였다. 금강산에 가거나 관동지역에 가는 경우 총석정은 반드시

들르는 곳이었다. 산속의 명승인 금강산을 보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금강산의 맥이 바닷가로

이어져 생겼다고 하는 총석의 절경을 둘러보는 것은 하나의 코스였다.

 

이 작품은 현재 《해산도첩(海山圖帖)》이라고 하는 화첩 중에 실려 있다.

이 화첩은 1815년에 노론계 사대부인 이광문(李光文, 1778~1838)에 의하여 제작되었다.

이광문은 금강산과 관동지역을 여행하면서 당시 궁중에서 화원으로 봉직하던 김하종을 데리고 가서 본

장면들을 그리게 한 뒤 이를 모아 《해산도첩》을 꾸몄다. 당시 23세이던 김하종은 화가로서는 풋풋한

시절이었는데도 금강산과 관동지역의 명승을 각 장면의 특징과 분위기를 반영하며 다양한 화풍으로 묘사해 내었다.

이는 김하종이 조선 후기의 가장 큰 화원가문의 하나인 개성 김씨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화가로서의  수업을 받았고, 일찍이 화원으로 발탁된 뛰어난 화가였음을 시사한다.

 

이 장면에 쓰인 “환선정 옛 자리에서 바라다 본 총석”이란 표제는 옛사람들이 명승을 감상한 방식을 시사하는

것으로 의미가 깊다. 즉, 선조들은 명승이 있는 곳에 높다란 정자나 누각을 짓고, 누정에 올라 멀리 조망(眺望)하면서

감상하는 관습이 있었다. 누각과 정자, 즉 누정은 자연과 인간이 만나 합일(合一)하는 지점으로 인식되면서 누정에서

조망한 명승을 문학으로 기록하거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관례가 형성되었다. 그에 따라 누정문화, 누정문학, 누정산수

화라고 하는 특별한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였으니, 이 그림에 환선정 구지에서 조망하였다고 쓴 것은 화가가 임의적으

로 만들어 낸 제목이 아니라 오랜 관습을 전제로 명승을 바라다보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경물을 바라다보면서도 전통과 관습을 통해 보고자 하였던 것이 조선시대의 전통이었다.

 

그런데 그림에 표현된 장면은 마치 사진과도 같은 시점과 묘사방식을 구사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이것은 18세기 말 이후 유행한, 서양화풍의 영향을 받은 진경산수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광문은 화첩에 쓴 서문에서 사실적인 방식으로 진경으로 그리는 것에 찬성하는 의견을 밝혀놓고 있다.

화가인 김하종은 후원자인 이광문의 요청에 따라 사실적인 화풍을 구사하면서 총석정의 경관을 재현하였다.

 

가까운 것은 크고 먼 것은 작게 그리는 투시도법의 원리를 잘 이해하면서 그려 낸 이 작품을 통하여 19세기

초까지 사실적인 수법의 진경산수화가 유행하고 있던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김하종은 어둡고 밝음을

구별하는 명암법과 먼 곳을 흐리게 하는 대기원근법은 사용하지 않아서 멀리 있는 경물들이 비록 작더라고

또렷하게 보이게 표현하였다. 즉, 서양화법은 필요에 따라 부분적으로 선택적으로 참조되었는데

그것이 조선시대 사람들이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수용방식이었던 것이다.

 

 

 

 

 

 

이한철(李漢喆), 1808~? | 산수도(山水圖)1

9세기, 종이에 수묵, 38 × 104cm, 국립중앙박물관

 

 

으로 길게 펼쳐진 화면 오른쪽에는 근경의 경치가 나타나는데, 뾰족하게 솟은 토산 봉우리들이 중첩되면서

깊은 산중의 경치임을 느끼게 한다. 화면의 중앙에는 이 봉우리들로 둘러 쌓여서 이루어진 평평한 분지 위에

몇 채의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초가들의 왼쪽으로 나지막한 언덕들이 솟아 있고, 그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담소를 나누는 몇몇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인물들 위쪽으로 탁 트인 시내가 펼쳐지며, 시내 위로는 다시 나지막하고 둥긋하게 솟은 봉우리들이 이어지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멀리로 이끌어 간다. 근경의 경치는 짙은 먹으로 그렸고, 거리가 멀어질수록 먹의 색깔이 옅어지고

있으며, 경물의 형태도 그에 따라 큰 것으로부터 차차 작아지는 규모의 변화가 수반되고 있다. 이처럼 공간의 깊이와

거리, 그에 따른 경물의 형태와 대기의 변화를 잘 조절하여 표현한 것은 18세기의 남종화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수법으로 이 작품이 19세기 이후 새로운 화풍을 수용한 작품임을 말해준다.

 

이 산수화는 이한철이 활동하던 19세기 중엽 이후 조선화단에서 유행한 새로운 화풍의 양상을 대변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청과의 다양한 교류를 통하여 청대 남종화풍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심화되었다. 대체적으로 이 때에

는 사의적인 산수화에 관심이 높아졌다. 그 가운데서도 김정희와 그 주변 중인화가들 사이에서 유행한 담백한 구성,

갈필(渴筆)과 석묵(惜墨)을 중시한 절제된 화풍이 있는가 하면 이한철의 <산수도>처럼 복잡한 구성과 형태, 피마준,

반두 등을 구사한 다소 도식적인 남종화의 계열이 나타났다. 이한철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까운 산수화풍을

구사하면서 19세기 화단의 다양성을 대변하고 있다.

 

19세기의 화단은 다양한 경향과 화풍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는 18세기에 비하여 더욱 분화되고 개별화된

19세기의 사회적, 문화적, 계층적 층차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이한철은 오랫동안 궁중에서 봉직한 화원이었기

때문인지 대체적으로는 보수적인 취향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궁중은 어린 왕들이

등극하면서점차로 청조의 고증학과 금석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임금이 서화고동의 수집과 취향을 후원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한철의 산수화에 나타난 다소 과장되고 도식화된 남종화풍의 특징은 청나라에서 유입된 청 초기의

사왕화풍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러한 화풍은 청나라와 그 문화에 대한 배척으로 인하여 18세기 말까지는

거의 구사되지 않았지만, 19세기 초엽경부터는 <동궐도>에서 드러나듯이 궁중의 화원들도 적극적으로

구사하게 되었다. 이한철은 여항의 서화가들과도 교류하였기에 김정희 계통의 취향과 화풍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건필과 석묵을 주로하는 김정희계통의 화풍보다는 정통파 화풍에 가까운

화풍을 구사하면서 궁중화풍과 취향을 대변하였던 것이다.

 

 

 

 

 

 

 

 

 

허련(許鍊), 1809~1892 | 추경산수도(秋景山水圖)

19세기, 종이에 담채, 105.4 × 53.8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매우 단순하지만 강렬한 그림이다. 경물은 근경을 중심으로 표현되었고, 일체의 잡다한 요소들은

과감하게 생략되어 분방한 개성과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작품의 이러한 분위기는 그림 위에 쓰여 진

편안한 행서체의 화제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화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른쪽엔 푸른 산 왼쪽엔 맑은 강,
북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걱정이 사라진다.
신선을 만나 술 한잔 기울이고 싶은데,
친구가 한 쌍의 옥으로 된 술병을 보내 주었다.
右臨靑嶂左澄江 未覺羲皇遠北窓
要得茆君酒斟酌 幽人許致玉甁雙

 

 

이 그림의 가옥에는 사람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분명 누군가가 그 안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거나하게 취한 점잖은 고사는 고즈넉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은 그러한 관조와

자유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다. 화제의 뒤에는 ‘소치(小癡)’라는 관서와 ‘소치(小癡)’라는 주문방인,

그리고 ‘허련지인(許鍊之印)’이라는 백문방인이 찍혀 있고, 화제의 앞쪽에는 ‘한묵연(翰墨緣)’이라고

새겨진 두인(頭印)이 찍혀 있다. 이로써 이 그림이 허련의 솜씨임을 알 수 있는데, 필묵과 표현의

분방함으로 미루어 원숙기에 이르렀을 때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추경산수도>는 허련 그림이 가진 힘과 개성, 조선적인 특징을 모두 드러내고 있다. 강렬하면서도 생기가

넘치고 변화가 풍부한 필묘는 허련이 화가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근거를 보여주며, 중국의 화풍을 배우려고

평생 화보를임모한 화가였지만 결국 어느 화보에도 비견되지 않는 개성을 만들어 낸 것을 보여준다.

또한 중국 화가를 범본으로 공부하였지만 마지막으로는 중국의 어떤 화가와도 다른, 그래서

조선적일 수밖에 없는 경지에 이른 것을 보여준다.

 

 

 

 

 

 

 

 

허련(許鍊),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19세기, 종이에 채색, 53 × 27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설경산수도>는 선비의 심상을 은유적으로 표상한 그림이다. 설경이란 곧 겨울이요 사물이 모두 얼어

붙은 음의 계절이다. 이러한 시절은 곧 선비가 뜻을 펼 수 없는 시대이거나 상황임을 상징하는 것이니

초가 속의 선비는 하릴없이 독서하며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설경산수가 가지는 이러한 은유성으로

인하여 설경산수도는 조선 초부터 말까지 늘 그려졌고, 특히 선비들이 애호하는 주제가 되었다.

 

허련은 김정희, 초의선사, 권돈인 등 19세기 최고의 문사들의 후원과 평가를 받으며 활동하다가 48세때인

1856년 진도로 귀양간 이후 그곳에서 정착하여 화실인 운림산방(雲林山房)을 경영하였다. 생애의 말년까지

왕성하게 창작하였고, 그 자손들이 화업(畵業)을 이어갔으며 호남 화단의 정맥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중년 이후 진도에서 활동하면서는 화풍이 다소 고루해지고, 도식화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수많은 주문에 응하느라 도식화된 것도 있지만, 한양의 지적인 활력이 멀어진 상황에서 다소 매너리즘에

빠진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것은 장단점으로 동시에 작용하여 한편으로는 중국풍에서 벗어나

조선적, 개성적 화풍을 일구어 내는 토대가 되기도 하였다. <추경산수도>와 <설경산수도>는

이러한 상황에서 형성된 허련 특유의 화풍을 대변하는 작품이다.

 

 

 

 

 

 

안중식(安中植), 1861~1919 |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1915년, 비단에 채색, 125.9 × 51.5cm, 국립중앙박물관

 

 

 을묘년인 1915년에 안중식이 경복궁을 멀리서 조망하여 그린 것이다. 1915년은 조선총독부가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기 위하여 수많은 전각을 헐던 시기이다. 그림에는 아직 총독부 본사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그림에는 헐리기 직전의 전각들도 그려져 있어 경복궁의 웅장한 위용이 살아있다.

경복궁 뒤로 주산인 백악산과 조산인 북한산의 연이은 봉우리들이 둘러서 있고, 경복궁 안의 수풀은 무성하며,

광화문 앞의 육조거리와 궁을 수호하는 당당한 해태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역사적인 변화가 예견된

중요한 시점에 경복궁의 전모를 위풍당당하게 표현한 이 그림은 국운의 쇠망에도

나라를 지키려는 자존심을 담아낸 역작이다.

 

광화문 앞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이 작품은 서양화풍에서 유래된 투시도법을 사용하여 원근감을 강조하고

깊고 유원한 공간감과 사실감을 자아내고 있다. 조선시대 말에는 서양문물과 서양화풍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면서 투시도법을 적용한 사실적인 그림이 나타났다. 그러나 경복궁 위로 솟은 백악산은 서양적인

개념의 투시도법에 위배되고 있다. 이것은 서양적인 화법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도 우리나라에서

늘 중시되어 온 풍수적인 개념을 포기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경복궁은 백악산과 북한산의 기세를 배경으로 축조된 궁궐이다. 풍수적인 상서로움을 가진 궁으로서의 면모를

포기할 수 없었던 안중식은 서양적인 투시도법을 화면 중간 즈음까지 적용하고, 그 위로는 전통적인 사상을

담아내었다. 백악산 너머로 이어지는 북한산의 연봉들은 작고 희미하게 그려 일종의 대기원근법을

적용한 것을 보면 안중식은 서양의 투시도법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변화기에 처한 조선인들의 심정과 바람을 담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이징(李澄), 1581~1674년 이후 | 매죽희작도(梅竹喜鵲圖)

17세기, 종이에 수묵, 67.9 × 57cm,국립중앙박물관

 

 

벼랑 바위는 굵기가 변화하는 윤곽선으로 형태를 잡고 그 안쪽에 농담의 변화가 있는 먹으로 선염하였으며 그 위에

다시 크고 작은 일종의 부벽준(斧壁皴: 나무에 도끼를 찍어 내렸을 때 나는 자국과 같은 모양을 가진 준)을 그어 질감을

표현한 조선 중기 절파계 화풍의 특징이 반영된 준법을 구사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징은 당시에 유행하던 여러 분야의

화풍을 성공적으로 조합하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 것이고, 따라서 이징의 개성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종합을 통한 개성의 창출은 이징이 명성을 이룬 중요한 방식이었다.

 

1724년 남태응은 「청죽화사(聽竹畵史)」를 지으면서 이징이 “각 체를 모두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대가이다.

그러나 고법(古法)을 넓게 구사하되 웅혼한 맛이 없고, 정밀하나 오묘하지 못하며 기교에 능하되 자연스럽지

못하다”라고 평하였다. 이는 18세기가 되면서 이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시기의 평이기 때문에 흥미롭다.

<매죽희작도>는 이징의 그러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생(寫生)이 가미되어 생기가

있는 점에서 남태응의 평처럼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17세기의 일반적인 화조화에 비하여

아기자기한 묘사와 생기 있는 장면의 포착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다만 직업화가의 그림답게 수묵화조화를

그렸으면서도 사의(寫意)에 대한 추구가 부족하다는 점에서는 선비화가의 수묵 사의화조화와 다른 성격이 엿보인다.

 

 

 

 

 

 

 

김식(金埴), 1579~1662 | 우도(牛圖)

17세기, 종이에 담채, 98.7 × 57.6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작품은 구성과 소재, 기법 모든 면에서 단순하고 명료하며, 자잘한 기교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단순함 때문인지 오히려 강렬하게 각인된다. 소를 제재로 한 그림은 자주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17세기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소는 뿔이 길고 까만 물소로 우리나라의 토종소가 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소그림의 유래는 중국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김식의 소그림은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소의 모습을 통하여 군자의 마음가짐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김식은 화원 김시金禔의 손자로 가업(家業)을 이어 화원이 되었다. 김시는 본래 조선 중기의 권력가였던 김안로의

서자였기에 명문대가 출신이지만 화원이 되었다. 한 시대에 이름이 높았던 김시의 뒤를 이어 김식도 화원이 되어

소그림의 대가로 명성을 얻었다. 소를 그릴 때 윤곽선이 없는 몰골법(沒骨法)을 구사하여 소의 얼굴, 엉덩이 넓적

다리 등에는 연한 담묵을 선염하고 나머지 부분은 희게 남겨두면 형태가 저절로 드러나게 하는, 일종의 훈염법

(暈染法)을 구사하였다. 산을 그릴 때에도 윤곽이 없는 몰골기법을 구사하여 전반적으로 필법보다 묵법을

고수한 화풍이라는 점이 이채롭다. 이러한 영모화법은 조선 초 이암이 구사한 기법으로

17세기까지 이어지며 일종의 전통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두량(金斗樑), 1696∼1763 | 긁는 개(黑狗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23 × 26.3cm, 국립중앙박물관

 

 

개의 속내를 읽어 냈다고나 할까. 이러한 표현력을 옛사람들이 전신(傳神)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그림은 눈의

표정 말고도 볼 것이 많다. 긴 너울거리는 털을 가진 멋진 모습의 개를 훌륭하게 재현하여 금방이라도 잡힐 듯이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을 보라. 또한 그 많은 터럭을 한 올 한 올 짧고 고실거리는 선을 수없이 그어서

근육과 골을 드러낸 수법을 보면서 화가의 지극한 집중력과 관찰력, 정밀한 선묘에 놀라게 된다.

결국 화가는 평면적인 화면위에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개 한 마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술인가.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김두량으로 알려져 있다. 김두량은 영조연간에 활약한 화원으로 영조의 총애를 받아

으로부터 남리(南里)라는 호를 하사받았고, 영조는 종신토록 급여를 주라는 명을 내렸다고 전한다.

아버지 김효강과 김두기, 그의 아들 김덕리가 모두 화원이었고, 외조부인 함제건과 외숙인 함세휘 및

조카인 김덕성과 그의 아들 김종회가 화원이었던, 화원집안 출신의 화가이다.

 

그는 산수, 초상, 풍속, 영모화 등 여러 주제를 다 잘 그렸는데,

이 작품에서 드러나듯이 서양화풍을 수용하여 조선 후기 화단이 변화하는데 기여하기도 하였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서양화풍을 빠른 시기에 시도한 선비화가 윤두서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전하기도 한다.

 

나무 아래 앉은 개의 모습은 16세기 초 이암의 <모견도>나 이경윤의 <긁는 개> (간송미술관 소장)에서 보이듯이

이미 선례가 있던 화제이다. 그러나 김두량의 개그림에 나타나는, 신체의 구조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밝고 어두운

부분을 대비하는 수법은 그 이전에는 없었던 서양화풍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표현이다. 김두량의 조카인 김덕성이

그린 <풍우신도>에는 “필법과 채법(彩法) 모두 태서(泰西)의 묘의(妙意)를 얻었다”는 강세황의 평이 있어서

이 집안 사람들이 서양화풍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서양화풍은 18세기 초부터 중국과의 교섭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서양화풍을 그림에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들은 윤두서와 같은 진취적인 선비화가였다. 기호남인계 실학자인 윤두서는 선비로서 기예의 하나로

배척되었던 서화에 종사하면서 서화의 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궁중에서 서양화풍이

도입되기 시작하였는데, 먼저 영정과 동물화 분야에서 그 영향이 나타났다. 이 두 화목은 모두 형사(形似)를 매우

중시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서양화를 대하면서 그 사실적인 수법에 감탄하였다. 그리고 김두량과

같은 화원들은 궁중의 후원을 받으면서 사실적인 재현을 위하여 서양화풍을 시도하였다. 이 <긁는 개>는

동물화에 적용된 서양화풍을 대변하는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의미가 깊다.

 

 

 

 

 

 

유숙(劉淑), 1827~1873 | 호응간적도(豪鷹看翟圖)

19세기 중엽, 비단에 수묵, 87.4 × 30.6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장면은 하나의 사진처럼 정지된 순간을 포착하였다. 화면 속의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기세와 다급함은 시초를 다투는 것이다. 화가는 매의 순간적인 집중을 매의 예리한 시선과 다부지게 가지를

움켜잡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부각시켰고, 가지 위에 앉았다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는 꿩의 날개는

활짝 펼쳐져 푸득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하다.

 

유숙은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화원이다. 궁중화가로 활동하는 동시에 그는 전기, 김수철, 이한철, 유재소 등

여항화가들과 교류하면서 19세기 화단을 이끌어 갔다. 그의 작품에 대하여 김정희는 “필치에 속기가 없지만

적윤(積潤)의 뜻이 모자란다”는 평을 하였다. 유숙은 당대의 대표적인 여항화가들과 시사(詩社)도 운영하고

왕성하게 활동하였지만, 보수적인 궁중화풍인 원체화풍의 전통을 오랫동안 고수하였다. 이는 19세기 전반경

사의적 남종화풍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김정희의 훈도를 받은 전기, 유재소, 조희룡, 허련 등의

여항화가들과 다소 다른 면모이다.

 

이러한 특징은 이한철이나 백은배 같은,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화원출신 직업화가들에게 종종 발견되는 면모이다.

따라서 19세기 화단에서 이들 화원 출신 직업화가들의 위상과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추적, 구명해 볼 필요가 있다.

유숙은 이 그룹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보수적인 경향과 유숙 특유의 개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즉, 그림의 주제와 소재, 필묵법, 수지법, 동물의 묘사가 18세기, 특히 김홍도 계통의 화풍과 관련이

있으며, 19세기 전반경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의적 남종화와 다른 계열의 그림임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19세기 화단은 다양한 취향과 배경을 가진 수요자와 화가들에 의하여 형성되었으며 그러한 다양성은

이 시기의 화단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화면 중간에는 “날씨 찬 세밑에 누가 뛰어난 재주를 부리는가.

신묘한 모습으로 터럭을 휘날리며 영특한 생각 뼈 속에 사무치누나.

혜산〔天寒歲暮 孰爲俊才 神彩揚毛 英思入骨 蕙山〕”이라는, 화가 자신이 쓴 화제가 있어 긴박감을 더해준다.

 

 

 

 

 

 

김수철(金秀哲) | 능소화도(凌霄花圖)

19세기, 종이에 담채, 127.9 × 29.1cm, 국립중앙박물관

 

 

이처럼 군더더기 없는 그림을 그린 김수철은 생애와 행적에 관한 기록이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가 19세기 중엽경 여러 여항화가들과 모임을 가지곤 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그림들은 양이 적지 않고, 또 독특한 개성을 가진 것들이어서 19세기 화단의 새로운경향을 대변하는

그림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능소화>도 19세기에 유행한 새로운 화훼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김수철 특유의 수채화 같은 색감과 간결하고 추상화된 묘사로 다른 작가들과 차별되는 작품이 되었다.

특히 괴석을 그릴 때에는 빠르게 윤곽을 주고 그 안에 농담의 변화가 있는 옅은 선염으로 메우고, 꽃을 그릴

때에는 윤곽을 그리고 그 안에 잎맥을 그려 넣었으나, 잎을 그릴 때에는 윤곽선이 없는 몰골기법을 사용하는

등 각 소재마다 다른 수법을 활용하면서 단순함을 극복하였다. 맑고 청신한 미감은 이색화풍으로 분류되는

근거가 되었는데, 김수철과 같은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활동한 이 시기

화단의 다양성에 대하여 좀 더 주목해야 할 것이다.

 

 

 

 

 

 

 

조정규(趙廷奎), 1791~? | 어해도(魚蟹圖) 8폭 병풍 중

19세기, 비단에 담채, 각 111.9 × 40.5cm, 국립중앙박물관

 

 

어해도는 화조화와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그림이다. 물고기류의 생태와 한자어로 표기될 때 동음이의를

활용한 쌍관어(雙關語)의 상징성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적용하여 즐겁고 신기한 그림이면서 동시에 길상적인

소망을 담아내는 상징체계였다. 이는 또한 그림과 글씨는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는 습속을 전제로 형성된

관습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그림은 사실적인 세계를 똑같이 그리는 것보다 마음의

세계를 담아내는 일에 더 의미를 두었다.

 

선비그림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지만, 일상생활 속의 장식화에서도 그러한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관념과 이상, 사상과 꿈을 중시한 문화체계의 의미와 가치, 기능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인의 심상 저변에 담겨진

한국인의 무의식을 발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한 발견은 곧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 및

미래적인 비전을 구축하는 초석이 될 수 있으니, 그림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기쁨을 위한 일만이 아니고,

곧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진실을 찾아가는 방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장승업(張承業), 1843~1897 | 영모어해도(翎毛魚蟹圖) 10폭 병풍 중

19세기, 종이에 담채, 각 127.3 × 31.5cm, 국립중앙박물관

 

 

이 영모병풍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조선시대의 화조화에서 애호된, 상서로움을 대표하는 상징물들이다.

이처럼 길상적인 의미를 가진 동식물을 그리고 장식하는 습속은 조선시대동안 회화의 존재기반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직업화가들은 선비화가들과 달리 대규모 병풍 등 장식화를 주문받아 그리는 일이 많았다.

장승업이 그린 이 영모병풍도 주제 및 소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승업은 특유의

활력과 분방함, 탁월한 표현력을 더하여 신선해 보이는 것이다.

 

털북숭이 개가 오동나무를 쳐다보는 첫 폭은 그 구상이 파격적인데다가, 시원하게 뻗은 오동나무 줄기와

큼직한 붓으로 툭툭 그려 낸 나뭇잎에서 장승업의 개성과 장기가 잘 드러난 명품이다. 여섯 번째 폭의

갈대와 게는 본래는 장원급제를 의미하는 화제인데, 여기서는 여러 마리가 등장하여 그 상징성이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에는 이처럼 여러 마리의 게를 갈대와 함께 그린 작품들이 많다.

 

게를 그릴 때는특히 변화 있는 필묘와 묵법이 중요하다.

천재적인 기량을 가진 장승업은 가볍고도 생기 있는 필묘로게의 등딱지와 다리의 움직임을 잘 표현하였고,

아래쪽 근경으로부터 위쪽의 원경으로 올라가면서 여백을 이용하여 지그재그식의 공간을 창출하고

먹의 색깔도 서서히 묽게 하는 수법으로 공간적 깊이와 변화를 유도하는 세련된 표현이 돋보인다.

 

 

 

 

 

 

 

전 심사정(傳 沈師正), 1707~1769 | 호랑이

18세기, 종이에 채색, 96 × 55.1cm, 국립중앙박물관

 

 

커다란 호랑이가 몸을 살짝 튼 채 노랗고 밝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앞을 응시하고 있다. 육중한 몸체가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으로 인하여 금방이라도 뛰어 오를 듯한 강렬한 기세가 한껏 전달된다. 얼굴은 거의 정면인데

앞의 두발은 좌우로 교차하여 포개고, 뒤의 오른 발로는 땅을 굳건히 디딘 채 왼쪽 발은 살며시 앞 부분만을

대고 있다. 유연하게 넘실대는 등줄기는 이 호랑이가 탄력있는 근육과 응축된 정기를 가진

맹수 중의 맹수임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화가는 기가 막힐 정도로 정밀한 묘사를 하여 보는 이의 관심을 끈다.

호랑이의 온 몸을 뒤덮은 짧고 빛나는 털을 셀 수 없는 잔 붓질로 일일이 그어서 표현하였는데,

이 세밀하면서도 정기(精氣)가 넘치는 필묘는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최고의 기량을 가진 작가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 덕분에 그려진 호랑이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듯한 생명체로 느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은 선비화가인 심사정의 작품으로 전칭되어 왔다.

심사정은 젊은 시절에 세필(細筆)을 구사한 사실적인 초충도와 화조화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극사실적인 묘사와 정밀한 필치를 구사한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본 작품이 심사정의 작품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겠다. 어떤 화가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호랑이의 강한 생명력과 기품있는 모습을

사실감 넘치게 표현한 수작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 작품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호랑이를 그린 작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김홍도가 그린 <송하맹호도>와 임희지가 대나무를 그린 <죽하맹호도>에 등장하는 호랑이는 그 자세와 털의

무늬, 강렬한 눈매, 정밀한 터럭의 묘사 등이 거의 일치된다. 이것은 오랜 기간동안 그려지는 과정에서 호랑이

그림이 어느 정도 정형화된 방식으로 전래된 것을 시사한다. 즉, 일정한 모습과 무늬, 특징을 가진 전형화된

호랑이를 각 화가의 기량에 따라 약간씩 가감하여 표현하는 관습이 형성된 것이다.

 

 

 

 

 

김명국金明國<달마도達磨圖>

17세기, 종이에 수묵, 83×58.2cm, 국립중앙박물관.

 

 

이국적인 인상을 가진 그림의 주인공은  선종의 6대 조사인 달마대사이다.

짙고 옅은 먹선으로 빠르게 그린 특이한 수법으로 인하여 이 그림은 선종화(禪宗畵)로 분류된다.

특히 옷 부분은 가장 짙은 먹으로, 빠르게 그은 몇 개의 선으로 완성하였는데, 이같이 최소한의 필묘로

강렬한 효과를 자아내는 감필법(減筆法)은 숙달된 화가가 아니면 구사하기 어려운 고난도의 기법이다.

 감필법을 뛰어난 기량으로 소화하였고, 무엇보다도 굳세고 빠른 필력으로 달마의 강렬하고 기품있는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화면의 왼쪽에는 자신의 호인 ‘연담(蓮潭)’을 역시 빠른 필치로 관서하였고,

그 아래에 ‘취옹(醉翁)’이라는 주문방인과 ‘김명국인(金明國印)’이라 새겨진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김홍도金弘道 <군선도群仙圖>

18세기 후반, 종이에 담채, 26.1×48.0cm, 국립중앙박물관.

 

 

아무 배경도 없는 화면 위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 옷깃을 휘날리며 여러 신선들이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다.

이 장면의 중심인물은 길게 펼쳐진 두루마리 위에 붓을 들고 무엇인가를 쓰고 있는 존재인데, 문창(文昌)이라고

하는 신선이다. 두루마리 위로 다람쥐가 올라타 있고, 두 명의 동자는 이 다람쥐를 바라다보며 놀라고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다. 문창은 이름 그대로 문장의 신인데, 선비들의 출세를 상징하는 존재로 조선시대의 신선도에서

자주 등장하였다. 문창의 모습은 붓을 든 점잖은 선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문창의 주변으로 이름을 확정

짓기 어려운 네 명의 신선들이 나타난다. 오른쪽의 소라고동을 든 신선, 대나무 지팡이에 삿갓을 짊어 맨 젊은

신선, 아래쪽의 쥐를 보느라 고개를 삐죽이 내밀은 거북이를 든 신선, 등에 영지가 든 바구니를 맨 신선 등이다.

큰 바람이 부는 듯한 묘사는 보통 사람이 아닌 신선들이 가진 영험함과 능력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채택되어 신선도에서 흔히 나타나곤 한다.

 

신선들이 입은 검은 옷은 짙은 먹을 듬뿍 찍어 일종의 몰골법(沒骨法)으로 표현하였는데, 농담경중(濃淡輕重)의

변화가 풍부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다채로운 필묘와 풍부한 묵법이 신선들의 신비한 특징을 전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풍속화를 그릴 때 사실적인 묘사와 간략한 필묘를 주로 구사한 것과 달리

초월적인 존재인 신선의 특징을 드러내기 위하여 강렬한 필묵으로 과장된 표현을 동원하였다. 

인물화의 대가인 김홍도의 명성에 부합되는 뛰어난 표현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심사정沈師正 <연꽃과 갈대>

1762년, 비단에 담채, 35.0 × 28.2cm, 삼성미술관 리움

 

 

화면 가득이 한 송이의 연꽃이 크게 피어있고, 커다란 연이파리가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서

너울거리고 있다. 연꽃 아래로는 연못 표면에 널리 퍼진 수초들과 갈대 등이 나타나고, 연 줄기 위에 앉은

까만 잠자리와 허공을 나는 붉은 잠자리 한 마리가 있어 한층 정겹고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운 색채와 정교한 묘사, 자연스러운 생동감이 잘 표현되었다.  

 

 심사정과 그림으로 교유한 강세황은 그림 위에 직접 화제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연꽃을 그리는데 자연 그대로의 생동감과 꾸민 듯한 모습까지 터득하였다. 표암평

寫芙蓉能得天然生彫飾之態 豹菴評.” 

화면 왼쪽에는 심사정이 쓴 글이 실려 있는데 “1762년 6월 자연암에서 그리다.

현재〔壬午季夏寫于自然菴中 玄齋〕”라는 내용이다.

화제의 오른쪽 위에 있는 두인(頭印)은 판독이 어렵고, 관서 아래로 ‘심이숙인(沈頤叔印)’이라고

새겨진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이 작품은 심사정이 56세 때 한창 절정기에 그린 작품인데

정교하면서도 사실감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은 2폭 중 한 폭으로 다른 한 폭에는 괴석, 꽃, 여뀌 풀, 메뚜기 등이 그려져 있다.

 

 

 

 

인용: 박은순 著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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