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정(沈師正), 1707~1769 |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33.5 × 41.7cm, 국립중앙박물관
근경에 보이는 큰 나무는 《개자원화전》 중에 실린 원대의 문인화가 오진의 수지법을 응용한 듯.
이 작품에서는 독필 뿐 아니라 지두화법까지 동원되었는데, 청나라 고기패가 잘 하였던 이 기법의
수용은 조선화단의 관심이 상당히 진취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조선화단에도
남종문인화가 정착되기에 이르른 것이다.
이한복(李漢福), 1897∼1940, 옥당부귀도(玉堂富貴圖), 동리가경도(東籬佳景圖) 가리개 2폭병
1917년, 비단에 채색, 각 158.5 × 52.7cm, 국립고궁박물관.
두 폭 모두 기명절지도에 해당한다. 말 그대로 각종 그릇류와 절지 즉, 각종 화훼류를 모은 것으로
대개는 수복강령을 기원하는 의도로 제작되었다. 우측 화폭에는 "동쪽 울타리리의 아름다운
경치(東籬佳景)"라 적어 놓았고, 붉은 감, 장미, 밤, 영지 등이고, 윗쪽으로 사발에 담긴
포도와 석류, 고동 화로 위엔 주전자, 하얀 도자분엔 괴석과 국화, 단풍등이 보인다.
왼쪽 화폭에는 "옥당의 부귀(玉堂富貴)" 라 적어 놓고 아래쪽으로부터 불감, 목단, 여의, 패랭이꽃
등이, 큰 고동기에와 도자병, 고동에 꽃힌 해당화와 백목련 등이 묘사되었다. 화려한 채색과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 장식적 표현 등이 화려하게 나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강희안(姜希顔), 1417∼1464 |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15세기, 종이에 수묵, 23.5 × 15.7cm, 국립중앙박물관.
깎아지른 물가 벼랑 아래 널찍한 바위에 엎드려 흐르는 물을 감상하는 머리 벗겨진 중년의 사내.
고요한 정적 가운데 자연에 침잠하여 세상사를 잊는다는 강한 메세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고사의 벗겨진 머리를 보자니 얼핏 중국 스타일이 떠오르지만 전체적인 경치는 현실의 반영이
아닌 초월의 세계, 즉 이상을 펼쳐놓은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리라. 바위 묘사에서 드러나는
강한 필세와 빠른 속필에서는 짐짓 서예가의 역량마저 엿보이게 한다.
전傳 이경윤(傳 李慶胤), 1545~1611, 탁족도 (濯足圖)
16세기 말 17세기 초, 비단에 담채, 27.8 × 19.1cm, 국립중앙박물관.
가슴을 풀어헤친 고사가 물속에 발을 담근채 술병을 챙겨온 동자와의 대화.
시내 위까지 가지를 펼친 것은 매화나무인 듯. 하얀 매화 송이가 듬성듬성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른 봄임을 알 수 있겠다. 이 고사 역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와 마찬가지로 머리가 한참 벗겨진 상태
로 보아 중년을 넘긴 사내일 것이다. 가슴을 풀어헤쳤다는 것은 격식을 차리는 자리는 아닐 터.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는 굴원屈原의 강직함을 닮고자 했던 조선의 선비정신이 내포된 탁족도.
자연속에 은거하며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했는 그림 속의 선비는 이제 곧 그림 밖으로 나오게 될 터이다.
하얗게 핀 매화가 그를 필요로 한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윤두서 자화상(尹斗緖) 1668~1715년 자화상自畵像
18세기 초, 국보240호, 종이에 담채, 38.5×20.5cm.
파격적인 구도와 정묘한 화법,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듯 생명감이 충만한 전신傳神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회화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윤두서 자화상은 단순한 얼굴 뿐 아니라
내면의 기세까지 강렬하게 표현되었다는 점이 세인이 이목을 끈다고 해야겠다.
7분면, 팔분면을 따르는 기존의 초상기법에서 벗어나 얼굴을 정면으로 부각시켰다.
입체감을 드러내기 위해 윤곽선과 눈 주변에 몰골沒骨의 선염渲染으로 요철감을 강조하고,
관모도 굵은 붓으로 칠하여 나타내는 등 전통 기법 위에 새로운 수법을 더한 변화가 주목된다.
문약文弱과는 거리가 먼, 마치 무인마저 떠올리게 하는 공재의 자화상.
기호남인 출신으로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사회혁신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실용적 학문에 더해지는 그의 엄청난 예술성은 시쳇말로 짱~ 그 자체이다.
공재 윤두서 <짚신삼기>
18세기 초, 비단에 수묵, 32.4×21.2cm
이른바 수하인물형樹下人物形 구도라는 '나무 아래 펼쳐진 짚신삼는 인물'을 우아하고 유연한 필선을 주로한
백묘화법白描畵法을 구사하여 선의 표현력을 드러내고, 먹의 농담과 경중의 조절로 변화감을 준 그림이다.
이것이 이른바 공재의 화론인 필법과 묵법의 균형, 음양동정과 강약농담이다.
공재는 박학博學을 추구하였던 인물로 천문, 지리, 기하, 산술 등 서양에서 유래된 학문에도
성의를 다한 진취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현실 생활을 표현한 풍속화에도 앞장섰을 것은 당연.
윤두서 <노승도 老僧圖>
18세기 초, 종이에 수묵, 58.4×37.8cm, 국립중앙박물관
구부정한 모습의 노승이 긴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는 염주를 잡은 채 거닐고 있다.
땅을 지그시 바라다보며 상념에 잠긴 듯한 노승의 얼굴은 가늘고 섬세한 필선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늙고 마른 고승의 깊은 심사가 전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노승이 입은 거친 질감의 승복은 굵고 빠른 필선으로
대범하게 그려내었다. 특히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지팡이는 거의 하나의 필선으로 굵게 그렸는데,
아랫부분에서는 먹이 마른 듯 비백(飛白)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 화가의 필력과 기량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승의 뒤쪽으로 대나무가 있고 오른쪽 지면에 약간의 잡풀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화면은 거의 여백으로 남겨져 있어 여운을 느끼게 한다.
조영석趙榮祏, <말징박기>
종이에 수묵담채, 28.7×19.9㎝,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면 밖 두 발문은 아래와 같다.
馬蹄可以霜雪 齒草飮水 翹足而陸 此馬之眞性也 及至伯樂 曰我善治馬 剔之刻之 馬之死者十二三矣. 凌園叟.
말은 발굽으로 서리와 눈을 밟고 풀을 먹고 물을 마시며 발로 뛰어다닌다.이것이 말의 본성이다.
그런데 백락(주나라 때 말의 감정을 잘 했던 인물)은 나는 말을 잘 다룬다고 큰소리치면서
털을 자르고 굽을 깎아버리니, 말 열 마리 중에서 두세 마리는 죽고 없다. 능원수.
狀物之妙 羞從絹素想承 作生活.
물체를 잘 그리려면 남이 그린 것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살아 있는 것을 그려야 한다.
조영석 <노승탁족도老僧濯足圖>
18세기, 비단에 담채, 14.7×29.8cm, 국립중앙박물관.
조영석의 <탁족도>는 이전 선비화가들의 탁족도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이 그림은 조선옷을 입고 조선인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유학자 선비가 아니고
머리를 깎은 중이다. 물가에 솟은 활엽수는 푸르른 무성한 잎을 지녔고, 시내는 물줄기가 풍성하여
이 스님이 한 여름 더위를 피해 숲 속 물가에서 노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발은 꼬고 앉아 물을 찰랑이는
것이 아니라 근육질의 다리를 물 속에 푹 담그고 있으며, 두 눈은 물을 향하고 있지만 두 손의 위치로 보면
다리를 닦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인다. 즉, 조영석은 탁족도를 조선 후기에 맞추어 패러디하고 있는 것이다.
유식한 선비화가 조영석은 오랫동안 익숙하게 그려져 온 탁족의 화제를 변화시켜 새 시대의 의식을 담은
새로운 그림으로 해석하였다. 그려지는 대상도 정통 선비가 아닌 스님을 택하여 새로운 의도를
반영하였고,탁족이라고는 하지만 유유자적하는 고사의 탁족이 아니라 더위를 피하여
망중한을 즐기는 실생활 속의 탁족으로 그려내었다.
정선鄭敾 <무송관폭도撫松觀瀑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38×60cm, 국립중앙박물관.
왼쪽 위에 “삼용추 폭포 아래에서 멀리 남산을 바라다본다. 겸재〔三龍湫瀑下 悠然見南山 謙齋〕”라고 적혀 있다.
이 시구는 중국 육조시대의 유명한 시인 도연명이 지은 오언고시 「음주(飮酒)」 중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캐고 남산을 바라다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에서 따온 것이리라. 정선은 도연명의 시구를 원천으로
하여 이 부채의 주인공을 도연명에 비긴 것이다. 이 그림은 조선의 선비가 도연명의 시를 차용하여
자신의심사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삼용추 폭포는 경상도 내연산에 있는 유명한 폭포이며,
겸재는 내연산 삼용추 그림을 여러 번 그려 현존하는 것만도 두 점이 된다.
정선 <파교설후도灞橋雪後>
18세기, 종이에 수묵, 53×36cm, 국립중앙박물관.
위태롭게 떨어질 듯 걸려있는 높은 벼랑 아래로 당나귀를 탄 한 여행객이 지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산은 하얗게 눈에 덮였고 하늘은 컴컴하여 곧 눈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깊은 겨울임을 말해준다.
이 그림의 구성과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 정선의 장기인 과감한 생략과 강조가 발휘되어 중요한 요소만을
부각시키면서 주제를 명료하게 드러내었다. 화면 왼쪽 위에는 ‘파교설후 겸재(灞橋雪後 謙齋)’라고
쓰고 ‘겸재(謙齋)’라고 읽히는 도장을 찍어 두었다.
이 그림의 주제는 당나라 때 시인 맹호연과 관계가 있다. 맹호연은 일생 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고
녹문산에 은거하였는데, 이른 봄이면 매화를 찾기 위해 당나라 수도인 장안의 파교(灞橋)를 건너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는 고사가 전해진다. 맹호연의 고사는 세상을 등지고 살면서
시서화로 자오하였던많은 문인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동안 ‘파교심매(灞橋尋梅)’라는 화제는 꾸준히 그림으로 제작되었다.
정선도 파교심매와 관련되거나 이에서 유래된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윤두서 <춘경답우도春景畓牛圖>
18세기 초, 종이에 수묵, 25.0×21cm,
공재는 관념과 명분에서 벗어나 조선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회를 변화, 발전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는 구체적인 현실과 생산현장의 모습을 표현하는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을 살펴보면 경물을 포치한 방식은 근 · 중 · 원경의 삼단 구도를 사용하였고, 화면 왼쪽
근경에 솟은 바위를 묘사한 준법에는 묵법을 중시하여 17세기까지 유행한 절파화풍의 잔영이
남아있음이 확인된다. 그러나 유연하고 우아한 필묘, 섬세하고 풍부한 묵법, 절제된 모습을 가진
경물의 형태, 남종화법에서 유래된 다양한 수지법(樹枝法)을 사용하면서 새로운 화풍을 구축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윤두서의 진경산수화는 이후 정선이 이룩한 것과는 다른 주제의식과
화풍을 보여준다. 또한 풍속화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처럼 생동감이
넘치거나 재치 있는 해학과 풍자가 담긴 것은 아니지만 선비화가다운 격조와 정취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개성을 보여 준다.
정선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1751년, 국보216호, 종이에 수묵, 79.2×138.2cm
화면을 거의 꽉 채운 구도는 정선이 즐겨 사용하던 밀밀지법(密密之法)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성은 보는 이를 화면 속에 가두어 두는 효과가 있는, 매우 강렬한 표현이다.
아래는 심환지가 쓴 <인왕제색도>의 발문이다.
華嶽春雲送雨餘 萬松蒼潤帶幽處 主翁定在深帷下 獨玩河圖及洛書
深一作垂 壬戌孟夏瀚 晩圃書
삼각산 봄 구름 비 보내 넉넉하니,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른 빛 그윽한 집을 두른다.
주인옹은 반드시 깊은 장막에 앉아
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완상하겠지.
심(深)은 수(垂)로도 쓴다.
임술 초여름 하한 만포가 쓰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바위질의 돌산을 강렬하게 표현한 점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돌산의 무거움과 강함을 누그러뜨리는 여러 장치가 존재하고 있다.
주산(主山)의 강렬함을 받쳐주는 것은 그보다 더 강한 무엇이 아니라 산등성이 아래로 자욱이 깔린 연운이다.
사실 이 부분을 정선은 붓 한 번 대지 않고 텅 빈 여백으로 남겨 두었지만 보는 사람의 눈에는 흰 연운으로 보인다.
이 텅 빈 여백이 굳세고 무거운 암봉들을 가뿐히 떠받치고 있다. 이는 결국 상극(相剋)인 음(陰)과 양(陽)이 이룬
조화의 세계이다. 그리고 음과 양 양극으로 분리될 수 있는 단순함에 소나무와 활엽수로 이루어진 수풀을 두어
다시 한 번 조화와 변화를 이끌어내었다. 붓질을 보아도 암봉 부분에 수직세가 강하다면, 연운 부분은 그야말로
무(無)임에도 유위(有爲)가 있어서 아래쪽의 수평세와 위쪽의 수직세를 자연스레 결합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화면 하단으로 내려오면 차츰 측필을 자주 사용하여 수평세를 이끌어 내면서
세(勢)의 균형과 조화를 표현하였다.
정선 <금강산정양사도 金剛山正陽寺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28×60.8cm, 국립중앙박물관.
시원하게 펼쳐진 부채 위에 왼쪽으로는 아담한 전각들이 나타나고, 전각 위로 둥긋한 산들이 솟아있다.
그 오른쪽에는 뾰족한 암봉들이 무수히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 찌를 듯이 보인다. 화면 오른쪽 위에
‘정양사 겸노(正陽寺 謙老)’라고 적힌 글씨는 이 그림이 노년기의 정선이 그린 정양사도임을 알려주며,
그 아래에는 정선의 자인 ‘원백(元伯)’이라는 내용의 주문방인이 찍혀 있다. 금강내산에 있는 유명한
절인 정양사에서 본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그린 장면이다.
이 절의 뒤쪽 언덕에 있는 헐성루는 일만 이천 봉이 한 눈에 보이는 명소로 유명하였다.
정선은 젊은 시절 금강산에 다녀온 뒤 금강산을 반복하여 그렸지만 모두 기억이나 초본을 참작하여
그렸을 뿐이다. 이 장면도 아마 정선이 수없이 그렸던 장면일 것이다.
정선은 능숙한 솜씨로 정양사가 있는 토산의 부드러운 모습을 둥긋한 산의 형태로 잡아내고, 수풀이 울창한
모습을 붓을 옆으로 뉘어 그린 미점(米點)을 빽빽하게 찍어 표현하였다. 헐성루가 있던 언덕에 경치를 감상
하는 이들이 서 있는데 이즈음 헐성루는 존재하지 않았나보다. 이에 비하여 암봉이 서려 있는 오른쪽의
경치는 강한 필세를 가진 수직선으로 그려내었으며 중향성과 혈망봉, 소향로봉, 대향로봉, 비로봉 등
봉우리의 모습도 날카롭고 각이 지게 표현하여 왼쪽의 토산과 대비된다.
이러한 표현은 금강산을 음양오행이 무궁하게 전개되는 신비한 영산으로 본 정선의 해석이 반영된 화풍이다.
구성이 잘 정리되었고 필세도 굳세며, 먹색도 잘 조절되어 노익장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정선 <장동팔경첩 중 백운동도壯洞八景帖 白雲洞圖 >
18세기, 종이에 담채, 33.1×29.5cm, 국립중앙박물관
백운동이라고 적힌 장면에는 백악산과 인왕산이 만나 계곡을 이룬 골짜기를 따라 시내가 졸졸 흐르며 내려온다.
물줄기가 S자를 이루면서 방향을 바꿀 즈음 여러 채의 기와집들이 모여 있고, 다시 그 아래로 시냇물이 모여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질 즈음 물길은 환하게 열려 큰 시내가 된다. 시냇가에는 당나귀를 탄 선비가 시동을 이끌고
길을 가고 있다. 이것은 인왕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백운동의 경관을 그린 진경산수화이다.
백운동은 장동팔경 중의 하나로 백운동과 청풍계의 이름이 합쳐진 현재 청운동의 일부에 해당한다.
백운동은 영조의 부마 김한진의 집이 있었다고 하는 한양 최고의 주거지였다.
그림에 등장하는 전각들이 김한진의 집인지 모르겠지만 승경처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세도를 꽤나 부리던
집안의 소유였으리라. 현재 ‘장동팔경(壯洞八景)’이라고 표제가 적힌 이 화첩에는 의통방 육상궁 옆에
위치했던 장동 근처의 팔경이 담겨져 있다. 정선이 각 장면에 제목을 쓰고 ‘원백(元伯)’이라는
도장을 찍어 두어 정선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정선 <장동팔경첩 중 백운동도 중 창의문도壯洞八景帖 彰義門圖>
창의문이라고 적힌 다른 장면에는 울퉁불퉁한 암반들로 이루어진 험한 산골짜기가 갈라지는 중간 지점에
한양의 성곽이 만나는 지점에 높은 문루가 보인다. 이 문루는 화제에 적힌 대로 인왕산과 백악산을 이어주는
산등성이에 설치된 창의문이다. 창의문 왼쪽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북악산인데, 그 등성이에 솟은 동그란
돌덩어리는 유명한 해태바위인 듯하다. 이 장면은 세검정 골짜기 옆 현재 상명대학교에서 내려오는 길가 쪽
에서 바라다본 자하문 뒤쪽 경관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산등성이는 구불거리는 필선으로 그려져 이어지
고 겹쳐지고 있으며, 곳곳에 서 있는 소나무도 너울거리는 듯 유연한 줄기와 옆으로 뉘인 측필로 그리면서
율동감과 변화를 자아내고 있다.
장동은 한양 인왕산의 남쪽 기슭에서 백악산의 계곡에 이르는 지역에 있었다.
이는 현재 효자동과 청운동에 속하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우대라고 불렸는데, 한양의 권문세가들이 거주하던
한양 최고 주거지였다. 장동에서도 유난히 경치가 아름답고 유서가 깊은 누정을 골라 팔경을 이루었는데,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몰리던 곳들이다. 이 화첩은 장동의 팔경을 모아 그린 것이다.
화첩에 실린 장면들은 필운대, 대은암, 청풍계, 청송당, 자하동, 독락정, 취미대, 수성동 등 여덟 곳이다.
현재 이 화첩에는 정선이 각 장면에 제목을 쓰고 ‘원백’이라는 도장을 찍어 두었다. 작품의 제작 시기는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자하문이라고 하였던 문을 화첩에는 창의문이라고 기록하여
이를 근거로 정선이 70대에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선 <세검정도洗劍亭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23×62.4cm, 국립중앙박물관.
깊은 골짜기를 가르며 흐르는 시내 아래쪽에 정자형 정자가 나타나고 있다.
정자에서는 두 사람의 갓을 쓴 선비가 대화를 나누고 있고, 바깥쪽에는 시종과 당나귀, 말이 대령하고 있다.
화면의 왼쪽 위에는 ‘세검정 겸재(洗劍亭 謙齋)’라고 쓰고 두 개의 도장을 찍어 두어 세검정을 그린 정선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시내는 탕춘대라고 불리던 곳이요, 시내 위쪽 중앙에 솟은 산은 북악산과 인왕산일 것이다.
시원스레 흐르는 탕춘대의 시내와 그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는 한양의 승경으로 손꼽혔으며, 이곳의
경관을 즐길 수 있는 세검정은 선비들의 풍류처로 이름이 높았다.
부채 위에 그려진 이 작품은 펼쳐진 부채의 모양에 맞추어 시내를 중시에 두고 좌우로 갈라진 구도가 되었다.
부드러운 모양의 산들은 간결한 윤곽선으로 형태를 잡고 곳곳에 검은 태점을 찍어 변화감이 드러난다.
이에 비하여 정자 위쪽으로 우뚝 솟은 바위와 산 위의 암봉들, 물가의 널찍한 암반은 날카로운 형태를 부각
시키고, 소부벽준을 곳곳에 찍어내려 모난 형태와 갈라진 질감을 강조하였다. 소나무는 정선 특유의 티자
형의 모습으로 그려진 채 여기저기 산재되어 시적인 정취를 자아내며, 소나무와 태점은
짙고 윤택한 먹을 사용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세검정 주변의 경치는 깊은 골짜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이곳의 물가 바위들이 유난히 색이 희고 고울 뿐 더러 시내도 수량이 풍부하여 정취가 넘치는 곳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리라.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명성을 얻은 것은 이처럼 그려지는 경관의 특징,
즉 참모습〔眞〕을 각별하게 해석하고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정선 <산수도山水圖>
18세기, 비단에 수묵, 179.7×97.3cm, 국립중앙박물관
초가집의 안채 이층은 대청과 방으로 나뉜 정자와 같은 구조인데, 대청에는 선비 한 사람이 정좌하여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선비 뒤쪽에 붉은 주칠을 한 서탁이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책이 쌓여 있다.
근경 위로 약간의 시내를 표현하여 공간적인 격차를 시사한 뒤 그 위로 중경을 그렸다.
중경에는 골짜기를 따라 양쪽으로 갈라선 봉우리들이 나타나고, 그 위로 다시 너른 시내가 나타난 뒤
하늘로 치솟을 듯 우뚝 솟은 주산의 봉우리가 나타난다.
큰 주산 봉우리 앞쪽 아래로는 너른 평야가 펼쳐지고, 전답의 건너편 쪽으로 다시
나지막한 야산이 나타나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유원한 공간 속으로 빨아 드린다.
강세황(姜世晃)의 평에 의하면 정선의 중년에 그려진 것으로 전통 화풍과 함께 그의 개성적인 필치가
담겨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꽉찬 구도는 중국 전통 산수화의 양식을 따른 것이다.
계절에 따른 경치의 표현은 남종화풍과 조선 중기에 유행한 절파풍
(浙派風: 명대 저장 지방 양식의 영향을 받았던 화가들의 화풍), 그리고 그의 특유의 필치가 혼합되어 있다.
이인상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
18세기 중엽, 종이에 담채, 23.8×63.2cm, 국립중앙박물관.
깊은 산중 한 선비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물가의 바위에 앉아 있다.
그가 앉은 널찍한 바위의 아래에는 오랜 연륜을 가진 소나무가 거의 옆으로 누운 채 공중을 향해 뻗어있다.
메마른 바위틈에서 자란 이 소나무의 가지는 꺾이고 굽어 험난한 세월을 지낸 것을 말해준다.
풍상을 이겨내고 멋진 모습으로 존재하는 이 소나무는 곧 힘든 세월을 잘 지낸 선비를 은유하는 것이리라.
선비는 세상을 등지고 홀로 폭포를 바라보며 자연을 관조하고 있는 것이다
화면의 왼쪽 위 구석에는 ‘이인상인(李麟祥印)’이라는 백문방인과 ‘취석(醉石)’이라 새겨진 주문방인이 있어
이인상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화제의 글씨는 예리하면서도 고아한 이인상 서체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짜임새 있는 구도, 예리한 선묘, 마른 갈필의 구사, 독특한 모습의 바위 등 이인상의 담백함과 깔끔함, 세련된
화법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관폭의 주제를 다룬 것이다.
비록 인물의 비중이 매우 작아 산수화라고 해야 할 정도이지만, 산 중의 고사와 폭포라고 하는
주요한 소재는 살아있다. 현실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성정을 수양하는 선비를 그린 이 <관폭도>는
은둔지사의 삶을 살았던 이인상의 내면세계를 잘 반영한 그림이다.
강세황姜世晃<송도기행첩 태종대도松都紀行帖 太宗臺圖 중 제11면>
1757년, 종이에 수묵담채, 32.8×54.0cm, 국립중앙박물관.
골짜기 시내가 바로 옆의 바위에서 갓을 벗고, 바지를 무릎까지 감아 올리거나, 웃통을 벗어젖힌 채 더위를
식히는 두 선비가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두 시동들과 대화를 나누며 즐기는 모습이다. 그런데 두 선비들이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의 바위 위에서 한 선비가 갓을 쓰고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 앞에는 두루마리 한 권이 여백인 채로 펼쳐져 있고, 선비는 붓을 든 채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다.
이 선비가 바로 화가 강세황의 모습은 아닐지 . 바로 이러한 실험정신이 이 화첩의 가치를 더해준다고
.
송도시가를 서양의 투시도법에 입각하여 그려본 것이나 영통동구의 바위를 명암법을 적용하여 해석한
것도 모두 같은 맥락이다. 강세황은 소북인 출신이지만 남인계 실학자들과도 깊은 교분을 유지하였다.
이익이 강세황에게 <도산서원도>와 <무이구곡도>를 그려 달라고 요구한 것이나 강세황이 자신의 자제들을
이익 문하에서 수학시킨 것도 강세황이 남인학자들과 사상과 학풍을 공유한 것을 시사한다.
강세황은 남인 출신의 선비화가 윤두서가 그랬듯이 서양문화와 화풍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림에
직접 적용하였다. 《송도기행첩》은 중년기의 강세황이 진취적인 의식을 통하여 진경산수화를 변화시킨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하여 조선의 실경을 객관적으로 관찰, 분석하고 인간의 시점을 통하여 관찰된 대로 그리는
서양 투시도법의 요소가 진경산수화에 접목되기 시작하였다. 강세황이 발탁하고 나중까지 후원을 아끼지
않은 김홍도가 서양화풍을 적용한 진경산수화를 그리는데 앞장 선 것도 우연이 아니다.
물론 김홍도가 18세기 말에 서양화풍을 적용한 진경산수화법으로 수원의 화성과 금강산 등을 그린 배경에는
정조의 후원도 한 몫을 하였다. 정조는 아끼는 신하 강세황의 진취적인 예술관과 실험정신을 한껏 후원하면서
화단의 변화를 모색하였던 것. 이를 위한 단초가 바로 이 《송도기행첩》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이 화첩의 가치는 참으로 크다고.
강세황姜世晃<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
18세기, 종이에 수묵, 44.2×83.3cm, 국립중앙박물관.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고, 산허리 춤에는 뿌연 연운이 띠처럼 가려 있다. 산 밑동 즈음 약간 빗기어
선 두 언덕이 솟아 있고, 언덕 사이로 난 골짜기를 따라 시내가 흘러내린다. 근경의 둔덕 위에는 한 사람이
우산을 쓰고 이제 막 다리를 건너 산 중으로 들어가려는 참이다. 이 사람은 작지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산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이 장면이 비 오는 습윤한 장면임을 설명해 주려는 화가의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른쪽 위에는 ‘표암(豹菴)’이라고 관서하였고, ‘강세황인(姜世晃印)’이라고 새겨진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근경의 둔덕 위에도, 중경의 언덕과 나무에도, 원경의 솟은 산 위에도 거의 비슷한 모양의 측필로 그려진
미점(米點)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다. 이러한 수법을 쓴 그림을 미법산수(米法山水)라고 하며
그 연원은 북송의 미불이라는 사대부화가로까지 소급된다.
이 그림이 비 오는 날인 것은 우산을 쓴 인물로 알 수 있지만, 그 계절을 여름이라고 하는 것은
미법산수가 보통 여름을 그릴 때 애용되었기 때문이다. 전통회화에는 나름대로 그림을 표현하고 감상하는
오랜 관습이 있다. 그 관습을 이해하게 되면 그림을 보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편하고 쉬워진다.
이암李巖 <모견도母犬圖>
16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73.2×42.4cm,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선생은 이암(자 정중(靜仲))을 '수묵 주조로 된 동심어린 화조·동물화에 특이한 양감과 성글고 스산한
한국회화의 특색을 드러낸 개성 짙은 작가', 안휘준 교수는'가장 품위 있는 개 그림을 그린 화가'로 지칭한 바 있다.
호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화면에 있는 솥도장[鼎印]의 '금헌(琴軒)'은 그의 당호로 생각된다. 세종의 현손으로,
그가 그림에 뛰어남은 『조선왕조실록』 인종 원년(1545년 1월 21일) 중종어용추화(中宗御容追畵) 참여 기사로도
알 수 있다. 이때 종실 이성군(利城君, 이름 관(慣), 1489∼1552), 성세창(成世昌, 1481∼1548), 이상좌(李上佐,
1485?∼1549 이후) 등도 함께 참여했다. 이암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모견도〉는 총독부 박물관에 속했던 것으로
'완산 정중 필 구도(完山靜仲筆狗圖)'라 적혀 있다. 품에 안긴 강아지들의 앙증맞은 모습과 어미 개의 푸근한
눈매에서 모정과 가족애를 엿볼 수 있는데, 동물에 기울인 정성에 비해 배경의 나무는 거칠게 표현해 대조적이다.
조선시대 동안 선비화가들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일가를 이루거나 도전적인 실험을 함으로써 화단에 기여하였다.
이암의 경우는 영모화와 잡화를 잘 그렸다고 하는데 당시대 화단의 어떠한 화가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독특한 주제와
화풍을 구사한 점이 이채롭다. 전해지는 작품이 매우 드문 화가인 그의 작품으로 <화조구자도>(삼성 리움미술관),
<화조묘구도>(평양 박물관), <견도>(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매도>(일본 개인) 등이 알려져 있는데, 모두
영모화이므로 전하는 기록에 준하는 면모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전하는 것이 많다.
일본에서 출간된 『고화비고(古畵備考)』에는 <화조묘구도> 쌍폭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그림에는 신광한의
제시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그가 일본사람들 사이에 잘 알려진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신사임당申師任堂 <초충도草蟲圖> 병풍
16세기, 종이에 채색, 각 33.2×28.3cm, 국립중앙박물관.
여덟 개의 연속된 화면에 각각 <수박과 들쥐>, <가지와 방아깨비>, <오이와 개구리>, <양귀비와 도마뱀>, <추규와
개구리>,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여뀌와 검은 잠자리>, <원추리와 매미>를 그렸다. 작은 화면 위에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식물과 곤충을 재현한 이 작품은 작은 미물에 대하여도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조선시대 사람들의
자연관과 가치관을 보여준다. 각 장면에 나타나는 대상들은 하늘을 나는 곤충, 땅에 뿌리를 내린 식물, 땅 위 또는
땅 속에서 사는 동물과 곤충들이다. 식물 한 포기를 화면 한가운데 배치하는 중앙집중식 구도를 사용하였는데, 이
러한 구도는 조선시대 회화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시대 청자에 나타난 화훼문양이나, 송나라
여경보의 <초충도> 등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어 이 그림의 구도가 오랜 연원을 가진 것임이 짐작된다.
구성의 온아함과 여성스러움으로 인하여 수본그림을 토대로 그려진 것이라고 설명되기도 한다.
이 그림에 나타난 식물들은 대개는 여름을 상징하는 것들이고, 가지와 수박, 오이 등은 모두
씨가 많고 열매도 많이 열리는 채소이기 때문에 번성과 다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맨드라미는 관운을 상징하며, 나비와 벌, 개미, 잠자리 등은 화목과 사랑 등을 상징하니 역시 길상적인
염원을 은유하는 것이리라. 이처럼 화면 위에 등장한 소박하고 일상적인 동식물들을 온아한 구성과 정감어린
형태, 부드러운 색조로 묘사함으로써 일상적으로 대하는 자연물을 통해서도 늘 상서로움을
기원하던 선조들의 지혜와 염원을 이해하게 된다.
전傳 이영윤 李英胤<사계화조도四季花鳥圖> 8폭 병풍 중.
16세기 말 17세기 초, 비단에 채색, 각 160.6×53.9cm, 국립중앙박물관.
본래 8폭 병풍이었으나 현재는 족자로 개장되었는데, 그 중 두 장면을 살펴보겠다.
사계절을 각기 두 장면으로 나누어 계절감을 대표하는 초화와 새, 나무를 묘사하였는데, 화면마다 아래쪽에
큰 새를 등장시키고, 중간에 큰 꽃과 나무를, 상단에 작은 새들을 등장시키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구성을 사용
하였다. 두 장면 모두 정교하고 우아한 필치로 대상의 특징을 세밀하게 묘사하였으며, 곱게 채색한, 장식적인
화풍을 구사하였다. 새는 새답고, 꽃은 꽃답게 전형화되어 있으면서도 생태적인 특징과 생동감을 잘 포착하였다.
이 작품 중 여름 장면은 바위절벽으로 꽉 막혀있는 구성이고, 가을 장면은 바위가 앞쪽에 있고 하늘은 확 트여 있어
서로 다른 공간감을 보여준다. 그런데 두 장면 모두 바위를 그릴 때 각이 지고 날카로운 모습으로 형용하였고,
바위의 질감은 윤곽선을 그린 뒤 그 안쪽에 잘고 예리한 붓질로 부벽준(도끼로 나무를 찍을 때 나타나는
모양의준법)을 그려 표현한 점에서 중국에서 수입된 절파화풍과 관련된 화풍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윤두서 <채과도菜果圖>
18세기 초, 종이에 담채, 30.3×24.2cm
우리 생활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를 둥근 쟁반 위에 올려 두고 관찰하여 그린 사생화(寫生畫)이다.
이것은 서양의 정물화에 비견되는 그림으로 윤두서 이전에도 화훼나 과실 등을 사생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윤두서의 사생화는 좀 더 의도적인 구성과 새로운 화법을 보여 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윤두서는 선비화가로서 기호남인의 독특한 학풍과 사상을 담은 그림을 모색하였다. 그는 특히 증조부인
윤선도 이래 가풍이 되어온 다양한 분야에 정진하는 박학(博學)의 학풍을 유지하였고, 또한 현실을 중시
하는 실학(實學)을 가미하여 18세기의 현실에 맞는 학문과 예술을 구축하는데 진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17세기까지 선비들이 중시한 관념과 의고(擬古)를 중시하는 풍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실제를 반영한
풍속화와 진경산수화, 사생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특히 사실적인 표현을 중시하여
그 방법으로서 관찰과 사생을 강조하였다.
윤두서는 사물의 형태를 묘사하는 데에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척도와 적당한 표현기법이 필요하다는 점을 중시
하였다. 그가 쓴 화론인 「화평(畵評)」에서 “척도에 따라 제작하는 것이 공이다〔規矩製作者 工也〕”라고 강조한
것도 객관적인 사실성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과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대상을 면밀하게 관찰하되 그 본래의
규모와 척도에 따라 그린다면 사실적인 표현이 될 수 밖에 없다. 윤두서가 공(工)을 규구(規矩)에 따라
제작하는 것으로 본데는 서양화가 기하학의 원리를 토대로 형성된 사실을 감안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홍세섭洪世燮 <유압도遊鴨圖> 8폭 병풍 중,
19세기, 모시에 수묵, 119.6×47.9cm, 국립중앙박물관.
두 마리의 오리가 물결을 따라 유유히 헤엄치며 노닐고 있다. 앞쪽의 오리는 고개를 돌려 뒤에 오는 오리를 보고
있고, 뒤의 오리는 앞의 오리를 따라 헤엄쳐 내려오고 있다. 오리의 모습은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은 몰골법으로
처리하였고, 물결의 표현도 넓은 붓으로 칠하면서 그 물살을 부각시켰다. 물결의 흐름은 밝고 어두운 먹의 색을
대비시키면서 표현되었고, 화면 아래쪽 물가에는 자잘한 선묘로 묘사된 무성한 수초들이 나타나며 변화감을
자아낸다. 이 그림의 제재는 간단명료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익숙한 것이다. 오래된 주제와 소재를 다루었는데도
이 작품은 매우 새롭다는 평을 듣는다. 왜 일까. 이 그림의 가장 놀라운 인상은 주제보다는 시점에서 오는 것이다.
화가는 수묵만을 가지고 화조화를 그렸다. 화조화는 조선 중기 이후 화단의 큰 관심사가 되어 왔지만
홍세섭 이외 어느 화가도 홍세섭과 같이 화면에 거의 90도 위의 시점에서 새들을 그린 적이 없다.
이러한 독창적인 해석과 표현은 홍세섭이 선비화가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그림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사회의 동요는 곧 새로운 문화의 모색으로 연결되었다.
김정희에 영향 받은 보수적인 선비화가와 여항화가들도 일정한 주제와 화풍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적
요구와 분위기를 의식한 진취적인 선비화가나 새로운 수요에 부응하고자 하는 눈치 빠른 직업화가들 모두 회화적
변화를 추구하였다. 비록 조선 왕조의 멸망으로 그 변화의 조짐이 회화적 변천으로 완결되지는 못하였지만,
홍세섭 같은 선비화가들의 그림을 보노라면 이들이 꿈꾸었던 새로운 회화는 자연스레 근대적, 현대적
회화의 토대를 이루는데 기여하였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인용: 박은순 著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 그림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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