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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현판 6 -1 궐외각사 현판 闕外各司 懸板 부분, 18세기 종친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인 종친부宗親府에 걸었던 현판이다.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1865년(고종 20 2월 20일 기사를 보면, 황폐해진 종친부 건물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수리되어 예전보다 더욱 웅장해졌으며, 고종이 자손과 나라의 번창을 기원하며 종친부 편액을 친히 써서 내렸 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종친부 현판은 두 점 전하는데, 모두 어필이라는 표기는 없으며 간기나 인장도 새겨져 있지 않아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한필교(1807~1878)가 근무했던 관아의 모습을 그린 화첩 《숙천제아 도宿踐諸衙圖》 중, ,종친부. 그림을 보면, 정문인 외삼문에 종친부 현판이 걸려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종친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근무하는 서리청書..
조선 왕실의 현판 5 행궁行宮 현판懸板 도성 안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과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정사를 펼치기 위한 궁궐이 있었다. 왕은 때때로 궁궐을 벗어나 지방에 행차하였는데, 이때 임시로 거처하던 곳을 행궁이라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도성 밖 행차는 주로 한양 근방에 분포되어 있는 왕릉 참배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능행陵幸과 관련한 행궁으로는 과천, 시흥, 수원의 화성행궁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왕은 정사에서 벗어나 휴양과 심신의 치료 를 위해 온천을 찾기도 했는데, 온천 일대의 행궁에는 대표적으로 온양행궁이 있다. 또한 전쟁과 같은 국난에 대비 하고자 전국의 요충지역에 행궁을 건립하였는데, 강화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등이 그 예이다. 조선시대 행궁은 평상시에는 해당 지역의 ..
조선 왕실의 현판 4 별궁 현판 조선 시대에는 정궁에 해당하는 궁궐 뿐 아니라 도성 곳곳에 왕실 가족들의 생활이나 의례와 관련한 별궁이 있었다. 별궁은 궁궐 밖에 독립된 건물로 존재했는데 왕자나 공주가 궁궐을 나와 살던 집인 궁을 포함하여, 왕이 돌아가신 후 후궁들이 기거하던 궁이나 방이 있다. 별궁은 재산을 관리하고 물품을 조달하는 내탕內帑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이곳에 살던 인물이 세상을 떠나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용도 가 전환되기도 했다. 왕세자가 아닌 왕자는 혼례를 치르고 궁궐 밖의 별궁에서 생활하였는데, 본래 왕위 계승 자는 아니었으나 특별한 연유로 왕이 된 왕자의 옛 집을 잠저潛邸라고 칭했다. 그 밖에도 왕실 혼레와 관련 한 의식을 안국동별궁과 같은 궁궐 밖의 공간에서 치르기도 했다. 비록 지..
조선 왕실의 현판 3-2 영회원 永懷園 영회원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빈嬪인 민회빈 강씨(1611~1646)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1627년(인조 50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에 한양에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급서急逝하였고, 1646년(인조 24) 에 민회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폐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나 소현세자 묘에 합장되지 못하고, 친정인 강씨 집안의 산에 일반 사묘로 장사를 지냈다. 이후 1718년(숙종 44) 세자빈에 복위되면서 묘가 새롭게 조성되어 민회묘로 추승되었고, 1870년(고종 7)에는 세자빈의 묘를 원으로 격상하면서 영회원이 되었다. 현재 서오릉 능역 안에..
조선 왕실의 현판 3 -1 능원묘 현판 陵園墓 懸板 조선 왕릉은 조선 시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였던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왕릉은 왕과 왕비가 사후에 묻히게 되는 영혼의 안식처로 생전에 기거했던 궁궐에 버금가는 명당에 조성하였다. 왕릉의 위치 선정 뿐만 아니라 건설과 의례의 전반적인 과정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에 규정된 예법에 따라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을 선례로 삼아 능침과 재실 및 정자각 등의 부속 시설, 설물의 규모를 정하였다. 국왕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왕릉에 참배하여 유교적 의례를 거행하고 선왕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왕의 능행陵行은 왕권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는 공식적인 행사이자 궁궐 밖에 있는 백성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이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영조는..
조선 왕실의 현판 2 사묘 현판 私廟 懸版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는 종묘에 봉안하였으나, 왕을 낳은 후궁을 비롯하여 왕위 승계 상 자신은 왕이 되지 못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생부, 요절한 세자와 세손 등의 신위는 별도로 사당[私廟]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1753년(영조 29)에 영조가 사친私親의 사당과 무덤을 궁원宮圓으로 높이는 궁원제宮圓制를 확립하고 국가 의례로 제도화하였다. 숙빈 최씨의 소생인 영조가 자신의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고 어머니에 대한 효孝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사친의 사당은 한양 곳곳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경복궁 서북쪽에 일곱 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만이 남아 있다. 1870년(고종 7) 고종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후궁들의 사당을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 권역에 합사 하였다. 이내 대빈궁과 ..
조선 왕실의 현판 1 종묘 현판 宗廟 懸板 임진왜란으로 종묘가 모두 소실된 후 광해군 대 가장 먼저 종묘를 재건할 만큼 종묘는 조선왕실의 상징이자 500년 유교문화 정치사를 모두 담고 있는 상징이라 하겠다. 종묘의 중심 건물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을 비롯, 왕이 종묘 제레 때 목욕재계를 하고 머무는 재전과 망묘루, 황대청, 전사청 등이 그려져 있다.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하여 조천된 왕, 추존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영녕전의 모습이다. 제기와 제물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 전사청 등의 건물도 살펴볼 수 있다. 신주가 모셔진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평소에는 종묘의 관리들이 숙직하는 곳이었으며, 왕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게하고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망묘루..
고창 바닷가 3개월 15일을 함께한 사람들 고창 바닷가 송림 곰소만 너머로 보이는 변산반도 매혹적인 해당화 香 동호해수욕장 구시포항 방파제 너머로 영광원전의 둥근 돔이 보이고... 구시포 해수욕장 함께하신 모든 분들께 고맙고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 茶泉 배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