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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조선 왕실의 현판 6 -1

궐외각사 현판 闕外各司 懸板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 부분, 18세기

 

 

 

 

 

 

 

 

 

 

종친을 우대하기 위한 관청인 종친부宗親府에 걸었던 현판이다.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1865년(고종 20 2월 20일 기사를 보면, 황폐해진 종친부 건물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수리되어 예전보다 더욱 웅장해졌으며, 고종이 자손과 나라의 번창을 기원하며 종친부 편액을 친히 써서 내렸

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종친부 현판은 두 점 전하는데, 모두 어필이라는 표기는 없으며 간기나 인장도 새겨져

있지 않아 언제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다. 한필교(1807~1878)가 근무했던 관아의 모습을 그린 화첩 《숙천제아

宿踐諸衙圖》 중, ,종친부. 그림을 보면, 정문인 외삼문에 종친부 현판이 걸려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종친부의 하급 관리인 서리書吏가 근무하는 서리청書吏廳에 걸었던 집희당集禧堂현판이다.

《종친부조례 宗親府條例》(1870)에 서리청은 사성문 안 남쪽에 있는 33칸의 건물로 편액은 집희당이라는 기록이

있다. 집희는 '기쁜일이 모인다' 는 뜻이며, 현판에 새겨진 '이남식인李南軾印' 이라는 인장을 통해 이남식(1803~

1878)이 글씨를 쓴 현판임을 알 수 있다. 이남식은 1824년(순조 24)에 무과에 급제하여 종친부 소속의

관리인 종정경宗正卿을 지냈던 인물이다.

 

 

 

 

 

 

 

 

종친부에 걸었던 종정아문正衙門 현판으로, 종실의 사무를 보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현재 두 점의 종정아문 현판이 남아 있는데, 칠보 문양의 테두리를 갖춘 현판(上)에는 '상 즉위 원년 갑자년

9월' 이라는 간기와 '대원군장' 의 인장이 새겨져 있어, 1864년(고종 1) 9월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글씨를

썼음을 알 수 있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종친부의 권한을 확대하려는 노력이 꾸준히

이어졌는데, 그 일환으로 1864년(고종 1) 종친의 잘못을 규찰하는 종부시를 없애고

종친부에 통합하였다.

 

 

 

이왕가박물관 유물 전시 모습. 유리건판, 20세기 초

창경궁 안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을 촬영한 것으로 가마 뒷 배경

건물에 종정아문 현판이 걸린 모습을 볼 수 있다.

 

 

 

 

1691년(숙종 17) 숙종이 종친들을 접견하고 지은 어제시와 낭선군朗善君이우(1637~1693)의 후기를

새긴 현판이다. 숙종은 경희궁 흥정당에서 여러 종친들을 불러 술을 하사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칠언

율시를 지었으며, 종친들에게 화답시를 올리도록 명하였다. 낭선군은 신하들이 임금의 예우에 감격

하며, 숙종의 어제시를 현판에 금자金字로 새기고 푸른 비단으로 싸서 종친부 대들보 위에 걸었다는

후기를 기록했다. 현판의 글씨는 후기를 기록한 낭선군이 썼으며, 꽃과 당초 문양이 그려진 테두리를 

둘러 장식했다.

 

 

 

 

 

1727년(영조 3) 1월 15일 영조가 종친들과 가진 모임에서 친히 짓고 쓴 시와 서평군西平君 이요(1687~

1756)의 후기를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는 창덕궁 영화당에서 종친들에게 술을 내리고 친목을 다졌는데

이 날의 화목한 분위기를 칠언절구의 시로 읊었다. 서평군은 영조의 은혜에 감격하며 종친들이 화답시

를 지었던 사실을 기록하고, 밤새 술과 음식을 먹고 흥겨웠던 분위기를 묘사하였다. 또한 지난 신미년

(1691)에 경희궁 흥정당에서 신하들을 접견하고 지은 숙종의 여제시를 종친부에 현판으로 걸어두었

던 관례를 따라 이 시를 새겨 걸어 명감銘感의 정성을 보이고자 한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1750년(영조 35) 11월 6일 영조가 육상궁毓祥宮,종부시의 선원각璿源閣에 들렀다가 종친부에 온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현판에는 영조가 잠저 시절의 기묘년(1699)에 종친부 유사당상有司堂上 을 지냈는데

다시 기묘년(1759)을 맞아 종친부에 방문하고 지난날을 회상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또한 영조가 지난 

8월에는 아버지 숙종의 탄신일에 능을 참배하였고, 오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에서

생신례를 행한 후 옛 관청(종친부)을 찾아왔다면서, 물색은 옛날과 같으나 부모님이 살아 계시지 않아

의지할 곳 없는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이 날의 종친부 행차를 기록한 [계경등록]에 의하

면, 11우러 20일에 도승지 체재공이 이 현판을 본부(종친부)에 봉안했다. 또한 1~2첩에 이 글을 쓰고

3~4첩에 친림본부도, 5~6첩에 어제봉안도를 그렸으며, 7첩에 좌목과 8첩에 발문을 넣어 병풍으로 만들었다.

 

 

 

 

 

종친부조방의 현판으로 조방朝房은 관원들이 조회를 기다리는 대기실과 같은 곳이다.

[종친부조례]에 종친부의 조방은 창덕궁 돈화문 서쪽에 있으며 1864년(고종 1)에 중수하였는데, 새로 지은

 25칸을 합하여 54칸의 규모라고 기록되어 있다. 돈화문 인근에는 각 관청의 관리들이 조회를 기다리며 대기하던 

조방이 있었는데, 종친부조방도 그 중 하나였다. 현판 좌측에 '경술조하' 라는 간기와 '이하응인' 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어, 1850년(철종 1) 초여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이하응은 1874년

(현종 13)에 종친부의 유사당상에 제수되었으므로 종친부에 근무할 때 현판의 글씨를 쓴 것으로 보인다.

 

 

 

 

 

 

 

 

 

종정부宗正府

종정부는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고 의복을 관리하며 종친을 통솔하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이다.

1894년(고종 31) 종친부가 폐지되고 1차 내정개혁(1차 갑오개혁) 때 궁내부 관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종정부가 만들어졌다. 종정부는 폐지된 종친부의 건물을 사용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4월 종정사로

개칭되어 기존의 종실 업무 외에 어보를 수정하는 일을 추가적으로 맡았다. 또한 부마에 관한 일을 다당

하는 의빈부儀府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왕의 친척과 외척을 담당하는 돈령부敦寧府를 종정부로

흡수하였다. 종정부는 같은 해 11우러 종정원宗正院으로 개칭되었다가 1605년(광무 9)에 다시 종부사

 宗簿司로 고쳐졌으며, 1907년(융희 1)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인수궁 · 기호학교, 호위본영 평면도> 청사진, 20세기 초

 

 

 

 

 

조선 말기 종실의 업무를 관장하던 종정부에 걸었던 현판이다.

이 현판은 1894(고종 31) 7월 이후에 제작되어 1895년(고종 32) 4월까지 걸려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두 점의 현판이 전해지는데 칠보 문양의 테두리를 부착한 점이 특징이다. 어러한 제작 방식은

경복궁 근정전과 덕수궁 중화전 등 위계가 높은 건물의 현판에서 확인된다.

 

 

금속으로 된 글자를 작은 못으로ㅓ 고정한 모습.

 

 

 

 

 

 

 

 

 

 

종부시宗簿

종부시는 종친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잘못을 규찰하던 관청으로 종정시宗正寺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종부시에서는 10년마다 왕실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편찬하고, 3년마다 가계를 조사하여 [종실보첩宗室譜牒]

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했다. 종부시에서 제작한 선원록은 종부시 내의 선원보각에 보관되었으며, 사본을 네 곳의

외사고에 나누어 보관하였다. 종부시는 한성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있다가 관광방觀光坊(현 국립현대미술관 부근)

으로 옮겨졌으며, 1864년(고종 10 종친의 역할을 강화하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종친부에 흡수되었다.

 

 

<도성대지도> 부분, 185세기

 

 

 

 

 

 

 

 

 

 

 

 

돈령부 敦寧府

돈령부는 종친부, 의정부, 충훈부, 의빈부와 함께 오상사五上司로 불리었으며, 한성 중부

선방貞善坊(현 종로구 익선동의 돈화문로 좌측)에 위치하였다.

<도성대지도> 부분, 18세기

 

 

 

 

돈령부에 걸었던 현판으로 1769년(영조 45) 영조가 76세에 친히 썼다.

'돈령부에서 보각을 봉심한 감회와 돈령부 현판을 제작한 내력을 기록한 현판'을 보면 숙종의 명으로 신임申

이 기로소의 '영수각 현판'을 써서 걸었으니, 대신 영조는 돈령부의 현판을 써서 걸게 하였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1769년(영조 45) 5월 영조가 돈령부에서 보각譜閣을 봉심한 감회와 돈령부 현판을 제작한 내력을 기록한 현판으로,

영돈령부사領敦寧事 김한구金漢耉(1723~1769)가 글씨를 썼다. 영조가 지난해 돈령부 보각을 봉심하고 선대왕들의

후손 이름과 자신의 휘諱(임금이 되기 전에 쓰던 이름) 가 적힌 보첩譜牒을 보았던 사실과 51세의 나이에 기로소에 입소

하였던 것을 추억하는 내용이다. 또한 하루 전날 기로소의 여수각에 전배하였는데, 어두운 눈으로도 현판에 새겨진 '영

수각' 세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고 말하며, 금빛이 환하게 빛나서 마치 방금 건 듯하다고 묘사하였다. '영수각 현판'에는

'81세의 신임이 성상(숙종)의 하교를 받들어 썼다' 는 기록이 있으니, 영조 자신이 감히 다시 쓸 수 없다면서 대신 '돈령부'

라는 세 글자를 써서 걸게 하였다는 '돈령부 현판' 에 대한 제작 내력도 살펴볼 수 있다. 끝으로 다음날 이와 같은 감회를 

적어 국구國舅(왕의 장인) 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고 우방右方에 걸어 애모의 뜻을 펼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김한구는 정순왕후의 아버지로 딸이 왕비 자리에 오르자 돈령부 도정正에 봉해졌다가, 이내 영돈령부사는 왕비의

아버지가 맡는다는 규례에 따라 영돈령부사에 봉해졌다.

 

 

 

 

 

 

 

 

 

 

돈령부의 후신인 돈령원의 현판이다. 현판의 뒷면에 '광무 5년 3월' 이라는 묵서가 있어 1901년

(광무 5) 3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테두리에는 칠보, 꽂, 영지 문양을 그려 장식했다.

 

 

 

 

 

1656년(효종 7) 6월에 왕실의 후손 중에서 노비가 된 사람을 면천하고 양민이 되게 하는 법식을 새긴 현판이다.

대왕종파大王宗派의 6대 이내로 선원보璿源譜에 기록된 왕손 중 노비가 된 자들을 양인이 되게 하며, 7대 이하

의 왕손 중 노비가 된 자들은 다른 노비를 바치고 양인이 되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면천된 사람을

족친위族親衛에 소속시켜 일하게 할 것과 대왕의 외손, 종실의 사위와 며느리에대한 면천 규정 등도 새겨져

있다. 이 현판은 1655년(효종 6)~1657년(효종 8) 조정에서 실시한 노비 추쇄推刷(도망간 노비를 잡아 주인

에게 돌려주는 일) 와 관련하여, 노비 면천 방안을 기록한 것이다. 태조부터 명종 대까지는 공노비를 추쇄

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후 오랜 시간 이뤄지지 않다가 약 100년 만인 효종 대에 노비 추쇄가 이뤄졌다.

 

 

 

 

의정부議政府

의정부는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으로 정부政府, 묘당廟堂, 도당都堂 등으로 불렸다.

의정부 청사는 한성 북부 관광방에 있었으며 경복궁 남동쪽(현 종로구 세종대로 우측)에 해당한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의정부는 관원을 통솔하고(총백관百官), 여러 정사를 바로잡으며(평서정平庶政), 음양을

다스리고(이음양陰陽), 나라를 경영하는(경방국經邦國) 역할을 했다. 의정부는 종친부, 충훈부, 의빈부, 돈령부와

더불어 오상사로 칭해지며, 최상급 관청으로 우대받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군사의결 기구였던 비변사備邊司가

국정 운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의정부의 권한이 축소되었다. 이후 1865년(고종 2)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세도가문

의 근거지인 비변사를 혁파하고 그 기능을 의정부로 이관하면서 의정부는 다시 국정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의정부 정본당 20세기 초

 

 

 

 

 

의정부의 정본당에 걸었던 고종의 어필 현판이다.

현판 좌측에 '을축년 5월' 이라는 간기가 있어 1865년(고종 2) 5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본당은 의정부의 본청 건물로 삼정승의 근무처였다.

 

 

 

 

의정부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 어필의 묘당 현판이다.

현판 좌측에 '을축년(1865) 5월' 이라는 간기가 있어 의정부 청사를 중건하면서 정본당 현판과 같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1865년(고종 2) 3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대왕대비(익종비 신정왕후)가

의정부는 백관을 통솔하고 정사를 규찰하는 곳으로 다른 관서에 비할 수 없이 매우 중요한데, 언제부터인지 모르

겠으나 사무를 비변사에 위임한 것을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의정부의 청사가 새로 건축된

이상, 종친부를 합친 전례에 따라 의정부와 비변사를 하나의 관청으로 합치게 하였다. 이때 비변사의 청사를

의정부의 조방朝房으로 삼고 문의 처마에 현판을 새겨 걸도록 했으며, 비변사의 묘당 편액은 대청으로 옮겨

걸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비변사에도 묘당 현판을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의정부에 걸었던 현판으로 '백관을 통솔하고 온갖 정사를 바로잡으며, 음양을 다스리고 나라를 경영하니,

국정과 관계됨이 가장 긴요하다' 는 내용이다. [경국대전]의 「이전吏典」 의정부 항목에 있는 구절 중 일부이며,

의정부의 역할과 중요성, 재상의 직분을 규정한 것이다. 본래 [경국대전]의 구절은 <송사宋史> 「직관지職官志

의 "재상의 직분은 천자를 보좌하고 백관을 통솔하며 서정庶政을 고르게 하여 정사가 통합되지 않음이

없게 한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호조戶曹

호조는六曹 중의 하나로 나라의 경제 운영을 총괄하는 관청이다. 지방 특산물인 공물貢物과 조세를

징수하였으며, 호구戶口 관리 및 부역의 부과, 회계 관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호조의 청사는 중부

징청방澄淸坊에 있었으며 경복궁 광화문의 남동쪽에 해당한다.

 

 

 

 

 

 

 

 

 

 

 

 

1744년(영조 20)에 호조에 걸었던 영조의 어제어필 현판이다.

'공부貢賦를 고르게 하여 백성을 사랑하고 절약하며 힘을 비축하라' 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현판 뒷면에는 '갑자년(1744) 11월' 이라는 묵서가 있다.

영조가 1734년(영조 10)에 호조에 내린 현판의 내용과 구절의 순서만 다르다.

 

 

 

 

 

1872년(고종 9) 10월에 호조에 걸었던 고종의 어제어필 현판이다.

'각 궁방宮房에서 사들인 전답에 대해서는 면세를 허락하지 않는다' 는 내용과

'즉위 9년 10월 동치 11년 임신년(1872)' 이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다.

현판의 테두리에 칠보와 '복' 자 문양을 그렸으며 용과 봉황 머리를 조각하여 장식했다.

 

 

 

 

 

현판 유리건판, 20세기 초

왼쪽부터 '호조에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 과 '궁방에서 사들인 전답의 면세 금지를 규정한 내용을 새긴 현판

그리고 '호조에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 이다. 구름 문양이 있는 사롱이 현판에 덮여 있는 것이 확인되나, 현재

세 현판에 사롱은 남아 있지 않으며, 테두리도 보수된 상태다.

 

 

 

 

 

기로소耆老所

기로소는 연로한 관료들은 예우하기 위한 기구로 한성 중부 징청방에 있었으며 경복궁의 광화문 남동쪽에

해당한다. 70세 이상의 문신 중에서 정2품의 실직을 역임한 관리들이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들 중

해당자가 없을 경우 종2품의 실직을 역임한 관리 중에서 왕의 허락을 받아 입소하게 하였다. 기로소는 노인

을 우대하고 학문을 숭상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왕은 삼짇날과 중양절에 기로연 또는 기영회라는 잔치를

열고, 나이가 많은 신하들에게 음식과 술을 하사하였다. 신하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4명의 왕이 기로소에

들어갔다. 태조는 60세가 되던 해에 왕 중에서 처음으로 입소하였고, 숙종은 59세, 영조와 고종은 51세의

나이로 입소하였다. 또한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잔치 장면과 참가한 기로소 당상의 초상을 그려

화첩으로 만들고 나누어 갖기도 하였다. 아래의 <영수각친림도靈壽閣親臨圖>  《기사경회첩耆社慶帖》은

1744년(영조 20) 9월 9일 영조가 기로소에 입소한 것을 기념한그림으로 영수각靈壽閣과 기영관耆英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영수각은 1719년 숙종이 기로소에 입소 하면서 임금의 어첩을 보관하기 위해 새롭게

지은 건물이며, 기영관은 선생안先生案 , 어제어필御製御筆, 갱진시賡進詩 등을 보관했던 곳이다.

 

 

 

 

 

 

 

1719년(숙종 45) 5월에 기로소의 영수각에 걸었던 현판으로 81세의 신임申銋(1639~1725)이 쓴글씨다.

영수壽는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나무인데, 이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영수장靈壽杖이라고 하며,

영수장을 하사하는 것은 원로를 최고로 예우하는 의미를 가진다. 숙종은 59세가 되던 해에 세자와 신하

들의 청으로 기로소에 입소하였는데, 1394년(태조 30) 태조가 기로소에 들어 서쪽 누각에 휘호徽號를

남겼다는 고사를 따라, 영수각이라는 누각을 새로 짓고 휘호를 봉안하게 하였다.

 

 

 

 

 

 

 

 

 

 

 

 

 

 

 

 

 

 

1758년(영조 340 동짓날 상순에 영조가 창경궁 공묵합에서 기로소 당상들을 만나

[대학]을 강의한 일과 입시한 신하들의 이름을 기록한 현판이다.

 

 

 

 

 

 

1760년(영조 36) 1월 20일에 영조가 창경궁 명정전 월대에서 기로소 당상과

훈신들에게 하사한 시를 새긴 현판이다.

 

 

 

 

1760년(영조 36) 10월 18일에 영조가 경희궁 경현당에 기로소 당상과

충훈부의 신하, 공신의 자제들을 불러 잔치를 베푼 감회를 새긴 현판이다.

 

 

 

 

1769년(영조 45) 영조가 76세가 되던 해에 기로소에 내린 시를 새긴 현판으로 이익정이 글씨를 썼다.

기로소 신하들을 향산구로에 비유하고 새롭게 두 명이 기로소에 든 것을 축하하고 선온 (신하에게

내려주는 술)을 내렸다는 내용의 어제시이다.

 

 

 

1769년(영조 45) 5월 24일 영조가 기로소의 영수각을 전배하고 쓴 시를 새긴 현판이다.

 

 

 

 

1793년(정조 17) 12월 정조가 기로소 신하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베풀면서 남긴 서문과 시를 새긴 현판이다.

 

 

 

 

 

인용: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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