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소에 대한 서문과 관리들의 명단을 새긴 현판으로 기로소의 연청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에는 기로소가 세 임금이 입소하였던 중요한 곳이므로, 청사를 수위하고 항상 경계해야 하며, 관원들끼리
서로 아끼고 태만하지 말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기사연청 좌목에는 수석 선생 등 소속 관리들의
관직과 이름, 생년 등이 새겨져 있으나, 현판의 훼손이 심하여 전체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다.
연청은 기로소 관리들의 집무 공간이며 기영관의 북쪽에 있었다.
기로소에서 근무하는 관리들의 명단을 새긴 현판이다.
현재 세 점의 현판이 남아 있는데, 각각 1891년 8월과
1892년 6월 1893년 10월에 만든 것이다.
봉상시奉常寺
봉상시는 국가의 제사를 거행하고 시호를 정하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으로 태상시라고도 한다.
제사에서 봉상시가 담당한 역할은 음식을 준비하고 제기의 제작을 비롯하여, 제사에 쓰이는 곡식들을 재배하는
적전籍田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봉상시 건물은 한성 서부 인달방仁達坊 (현 종로구 당주동)에 있었다.
1760년(영조 36) 5월 29일과 6월 초2일 태상시太常寺에 내린 영조의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5월 29일의 전교에는 영조가 관왕묘에 들렀다가 태상시에 나아가 신실을 봉심하고 재배례를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원군으로 왔다가 전사한 명나라 군사들의 신위판을 보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는 명나라 군사들의 신주를
선무사宣武祠(명나라 장수 형개와 양호를 제향하던 사당)로 옮길 것을 명하였는데, 이는 숙종이 1704년(숙종30)에
대보단을 세워 명나라 신종 황제를 기린 뜻을 계승하는 동시에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라고 밝혔다.
1771년(영조 47) 1월에 영조가 친히 쓴 각경사전 현판이다.
각경사전은 '사전私田(나라의 제사에 관한 규범)을 정성스럽고 공경히 받들다' 라는 뜻이다.
'신묘년(1771) 정월 초하루' 라는 간기가 있다.
1787년(정조 11) 12월에 태상시의 서적전西籍田에 대한 폐단을 근절키 위해 지은 절목節目을 새긴 현판이다.
적전籍田은 제사에 필요한 곡식을 마련하기 위한 땅으로 한양 동쪽의 선농단 일대에는 동적전, 개성 동쪽에는
서적전이 있었으며, 봉상시의 분원인 분봉상시分奉常寺 에서 관리하였다. 현판에는 서적전에서 나온 곡식을
운반할 때 시간이 지체되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정해진 기한 안에 한양으로 운송할 것과 이를 어길 경우 엄한
형벌로 처벌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12개의 절목이 나열되어 있다.
장무관 판관 박씨와 도제조, 제조의 수결
1797년(정조 21) 2월 9일에 정조가 태상시에 내린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태상시 소속의 하인下屬 들이 죄를 범할 경우 태상시의 도제조에게 죄를 다스리게 하고, 승지나 대감이라
하더라도 이들을 곧장 가두지 못하게 하라는 내용이다. 또한 하인을 보호하는 조치는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닌, 나라의 제사를 담당하는 태상시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임을 밝히고, 이 전교를 써서
태상시에 걸도록하였다.
승문원承文院
승문원은 외교와 관련한 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는 관청으로 괴원槐院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은 중국을 섬기고 일본과 여진은 대등한 입장으로 대하는 사대교린事大交隣 의 외교정책을 취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승문원의 청사는 한성 북부 양덕방陽德坊(현 종로구 계동의 현대빌딩 뒤)에
있었는데, 세종은 황제가 내린 조서와 칙서를 민가와 섞인 장소에 보관하는 것은 의리가 아니므로, 1433년에
경복궁 안으로 이전하게 하였다. 이후 승문원은 경희궁과 창덕궁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787년에
다시 궁궐 밖 중부 정선방貞善坊(현 익선동 일대)에 옮겨 세웠다.
<도성대지도> 부분. 18세기
청나라 건륭제가 쓴 동번승미東藩繩美 현판이다.
동번승미는 '동쪽의 번국藩國(변방의 제후국)이 아름다움을 이었다' 는 뜻으로, 현판 윗부분 중앙에
'건륭어필지보乾隆御筆之寶' 가 새겨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실록]에 심양에 문안정사問安正使로 갔던
이은李溵(1722~1781)이 황제가 조선 왕에게 하사한 '동번승미' 네 글자와 중간에 '건륭어필지보'를 찍은 누런
비단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현판은 그것을 새겨 만든 것으로 보인다.
병조兵曹
벙조는 육조 중의 하나로 의레 때 국왕을 호위하고 무신을 선발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병조에서는 역참驛站과 병기, 갑옷의 관리, 궁성문과 도성문의 개폐 및 군사 행정에 대한 전반을 맡았으며, 청사는
한성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었는데 경복궁의 광화문 앞 사헌부와 형조 사이(현 세종분화회관 인근)에 해당한다.
<도성대지도> 부분 18세기
1772년(영조 48) 2월 6일에 영조가 병조에 나아가 친히 짓고 쓴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옛날을 추억하며 들어서다' 라는 뜻의 '억석입립' 네 글자와 '임진년 2월 6일' 이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에 총관을 지냈던 도총부에 거둥하여 [소학]을 강의한 뒤 병조에 임어하였다.
그리고 '억석입립' 네 글자를 써서 내리며 현판에 새겨 걸도록 하였는데, 이는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일찍이 대사마(병조판서)를 지냈기 때문이라는 뜻을 밝혔다. 이어서 영조는 수양대군이 영의정에 올라
근무했던 의정부에 나아가 신하들을 소견하기도 했다. 즉 '억석입립' 네 글자에는 영조 자신과 세조가
왕자 시절에 근무했던 도총부와 병조, 의정부에 와서 옛날을 추억하였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1772년(영조 48) 2월 6일에 영조가 세조를 생각하며 지은 글을 새긴 현판으로 이창의가 글씨를 썼다.
영조는 과거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에 지었던 [병장도설兵將圖說]의 서문을 읽은 후, 수양대군의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던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영의정에 제수되었던 사실은 처음 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세조의 자취가 남아 있는 도총부, 병조, 의정부에 잇달아 거둥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1784년(정조 8) 5월 병조에서 올린 궁성과 문의 열쇠 및 자물쇠 관리 등에 대한 절목을 새긴 현판으로
병조판서 서유린(1738~1802)이 글씨를 썼다. 정조가 내사복內司僕의 소동문小東門이 열려 있다는 보고를
받고 병조판서를 벌줄 것과 병조에 명하여 절목을 만들도록 하교한 건말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병조에서
올린 절목이 새겨져 있는데, 각 문의 개폐는 승정원이 주관할 것, 건양문乾陽門 을 기준으로 서쪽은 병조,
동쪽은 도총부가 담당할 것 열쇠와 자물쇠를 관리하고 수리할 때의 유의사항 등에 대한 내용이다. 현재
동일한 내용의 현판이 두 점 전해지는데 병조와 도총부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훈련원訓鍊院
훈련원은 군사들의 무예 훈련과 병서兵書 학습, 군사 시험 등을 관장하였던 관아로 한성 남부 명철방明哲坊
(현 국립중앙의료원 자리)에 있었다. 훈련원은 1392년(태조 1)에 훈련관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가, 1467년
(세조 13)에 훈련원으로 개칭되었으며, 훈련원의 청사는 공간이 넓어 무과 시험 장소와 군사 훈련장으로 활용
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기간 중에 훈련도감 등의 군영이 등장하여 독립적으로 운영되면서, 훈련원의 위상은
크게 떨어졌다. 이후 19074년(융희 1) 8월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훈련원도 폐지되기에 이른다.
훈련원 20세기
1797년(정조 21) 12월에 훈련원에서 정조에게 올린 절목을 새긴 현판이다.
훈련원이 건국 초에 설립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온 내력과 영조가 청사를 중수하면서 어제御製 를 내려 훈련원의
영예가 높아진 점에 대한 칭송을 담고 있다. 또한 정조가 남영南營에 행차하여 윤음綸音을 반포하였다는 사실과
그 뜻을 받들어 훈련원 관원들이 업무에 더욱 힘쓸 것을 다짐하는 내용도 새겨져 있다. 다음으로 일곱 가지 조항
이 기재되어 있는데, 별장別將이 매달 군사를 훈련시키는 일과 훈련원 건물을 수리 · 보수하는 일을 비롯하여,
건물을 훼손하는 자를 엄히 처벌한다는 내용 등이다.
綸綸
<도성대지도> 부분, 18세기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 임진왜란으로 불탄 훈련원을 중창하면서 지은 상량문으로 1797년(정조 21)
12월에 다시 새긴 현판이다. 상량문에는 임란으로 훼손된 훈련원 터에 옛 규모를 따라 새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을 비롯, 재력과 벼슬을 막론하고 여러 신하들이 재화를 보시하여 중건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훈련원을 한나라의 평락관平樂觀과 위나라의 화림원華林園의 넓고 높은 규모에 비유하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 제작된 '훈련원 절목 현판' 에도 인용되어 있다.
훈련원 1892년(고종 29) 이전
오군영五軍營
오군영은 조선 후기 수도와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했던 다섯군영으로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이 속한다.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은 국왕 호위와 궁궐 숙위 등
수도를 방어하는 중앙군의 핵심으로 삼군영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총융청과 수어청은 수도의 외곽을 방어
하였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1593년(선조 26) 가장 먼저 설치되었으며, 어영청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직되었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에 기존의 정초군과 훈련별대
를 통합해 창설되었으며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총융청은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 때 반군이 수도 외곽의
방어망을 뚫고 한양으로 진격한 것을 계기로 경기 일대의 수비를 위해 조직되었다. 수어청은 1626년(인조 4)
서울 동남쪽에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후 1881년(고종 18)에 오군영은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의 이군영 체제로 개편되었다.
훈련도감의 북영에 있던 군자정의 현판이다.
현판 좌측에는'ㅁ유 학암사가 썼다' 라는 글자와 '대총재 상장군 대학사 집금오지인' 이란 인장이 새겨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실록]에 이조판서였던 조문명을 훈련대장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고, [승정원일기] 및
[일성록] 기사에는 북영이 세워진 지 거의 200년이 되었으며, 군자정은 조문명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인장에 새겨져 있는 글자 중에 '총재冢宰'가 이조판서의 별칭인 점과 '학암鶴巖'이 조문명의 호인 점을 미루
어 보아 훈련대장 조문명이 글씨를 쓴 현판으로 여겨진다. 군자정은 창덕궁 서쪽 공북문 밖 북영 안에 있던
정자로 지금의 창덕궁 신선원전 괘궁정 일대에 있었으며, 왕이 행차하여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 6월 20일에 북영의 군자정에서 유엽전柳葉箭(무과 시험에서 사용하던 화살)
으로 활쏘기를 하였을 때의 성적과 입직한 당상장관堂上將官 이은복의 벼슬을 외직으로 올려준다는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이와 관련하여 [일성록]과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북영의 군자정에서 활쏘기를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현판에 새겨진 것과 동일하게 "유엽전으로 제1巡순에는 4발을 맞혀 6紛분을
얻었고, 제2순에는 2발을 맞혀 3분을 얻어고, 제3순에는 4발을 맞혀 5분을 얻었다" 는 활쏘기 성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훈국訓局 대장 이경무(1728~1799)에게 상[고풍古風]으로 내사복시의 말 1필을
주고, 당상장관 이은복은 외직으로 승진시키며, 당상장관 이욱상은 임기가 거의 다 차서 영장令狀 자리
를 만들어 차출하여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철종이 1862년(철종 13) 윤8우러 21일에 북영의 군자정에서 유엽전으로 활쏘기를 하였을 때의 성적과
입직한 당상장관 조희원의 품계를 높여주었다는 내용을 새긴 현판이다. [철종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면
철종이 창덕궁 서쪽의 북영에 나아가 참청三廳 의 시사試射(활 쏘는 것을 시험하던 일)를 행하였으며,
군자정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날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군자정에서 활쏘기를 하고 지은 철종의 시에 여러 신하들이 화답한 시를 새긴 현판으로 추정된다.
일부 훼손되어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으나, 신하들의 시 중간에 '군자정'은 높고상서로운 해는 붉구나'
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국왕이 군자정에 행차했을 때 지은 시에 화답한 것으로 보인다.
1866년(고종 3) 9우러 7일 한강 하류의 양화진을 수비했던 총융진에 소속된 군사들의 명단 등을 새긴 현판이다.
병인양요 때 양화진을 지킨 주장 총융사 신관호를 포함하여 소속 인물들의 직책과 이름, 출생 연도, 본관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끝부분에 대장의 수결이 새겨져 있다. 이 현판은 수도 외곽을 방어하고 경기 일대의 군사를
관할했던 총융청 관련 건물에 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오가 1759년(영조 350 8우러 15일에 숙종의 능인 명릉을 참배하고 5일 뒤에 돈화문에 나아가 군문軍門에
유시한 내용을 기록한 현판이다. 현판에는 영조가 "30년간 나의 뜻을 이 날에 펼치니, 마땅히 체득하고 명심
하고 새겨서,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하나와 같게 하라"는 16자의 글을 써서 어가를 따르는 장사들에게 훈유했
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병조판서 조운규와 훈련대장 김성웅, 어영대장 정여직, 금위대장으로 하여
금 이 같은 영조의 글을 현판에 새겨 모든 군문에 걸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금위대장은 구선복이었
는데 그는 1786년 조카 구명겸과 함께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모반 혐으로 사형당
했기 때문에 훗날 현판에서 이름이 삭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 현판을 어느 군문에 걸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병조와 삼군부(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청사 등의 문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사 훈련과 조령操令과 군령軍令을 새긴 현판이다. 한쪽 면에는 조령의 종류를, 다른 쪽 면에는 군령 1호,
2호, 3호를 기록했다. 두 현판에 새겨진 조령의 내용은 각기 다른데, 한 점에는 동쪽 조련, 서쪽 조련, 남쪽 조련,
북쪽 조련, 네 면 모두 조련, 야조(야간 군사 훈련)와 그에 해당하는 연거(횃불을 드는 연습), 주화走火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한 점에는 여러 종류의 발방發放을 비롯하여 幸행과 陣진의 종류가 새겨져 있다.
두 현판은 군영에 걸었던 것으로 보이나 어느 군영의 훈련법인지, 어디에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1785(정조 9) 10월에 마의馬醫 가사복假司僕에 대한 절목을 새긴 현판이다.
장용위壯勇衛에서 말을 관리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마理馬(사복시에 소속된 잡직) 중에서 업무가 뛰어난
한 사람을 사복의 예에 의거하여 마의 가사복으로 임명하고 행정을 전담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 밖에도
마의 가사복이 말을 새로 들이고 점검할 때의 보고 체계, 그들에게 지급하는 쌀과 복장 등에 대한 규정,
마의사복에 빈자리가 생길 경우에 가사복과 이마 중에서 돌아가며 차출하는 등의 인원 충당 방안도 기록
되어 있다. 사복시는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을 관리하고 목장을 감독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궁궐 안
내사복시와 궁궐 밖 외사복시로 나뉘었다. 외사복시의 청사는 중부 수진방壽進坊(현 종로구청 일대)에
있었다. 소속 관원으로는 말을 관리하는 이마, 말의 질병을 치료하는 마의 등이 있으며, 이들은
용호영, 훈련도감 등 외부기관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헌종 어필의 내영 현판으로, '만기'와 '원헌(헌종의 아호)' 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내영의 정확한 설치 시기는 알 수 없다. 수렴청정과 외척의 세도 아래 왕위에 올랐던 헌종은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정조 때의 장용영을 모범으로 삼아 18546년(헌종 12) 8월 5일에 총융청을 개편한 총위영을
설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내영 현판이 초위영 설치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
어느 군영에 걸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헌종 어필의 보정헌 현판으로 '내영원융지인(내영 원수의 인장)', '원헌(헌종의 아호)', '간화독서철명분향
(향을 태우며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그림을 보다)' 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보정은 [시경]의 「천보」중
"하늘이 너를 보호하여 언정시키니, 또한 매우 공고하도다" 라는 구절에서 차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판에 내영 원수의 인장이 있으므로, 보정헌은 내영 안의 건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헌종 어필의 연화막 현판으로 '학고당', '유희한묵(글을 지으며 세월을 보내다)', '원헌' 인장이 새겨져 있다.
연화막은 [남사南史] 「위고지전」에서 남제南齊의 위장군 왕검이 막부에 유고지를 초빙하였을 때, 소면이
왕검에게 "유경행庾景行(유고지)이 푸른 물에 떠서 연꽃을 의지하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편지를
보냈으며, 당시 사람들이 왕검의 막부를 연화지라고 불렀다는 고상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연화막은
군영의 막부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연막이라고도 하였다. 이 현판 또한
군사와 관련한 건물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형조刑曹
형조는 조선시대 육조 중 하나로 재판과 법의 집행, 죄수 관리 등의 없무를 맡았으며 추관秋이라고도 불렀다.
형조의 청사는 한성 서부 적선방積善坊에 있었는데 경복궁의 광화문 앞 병조 아래(현 정부서울청사 별관)
에 해당한다.
1799년(정조 230에 낭관郎官의 주도做度와 예직例直에 관련한 날짜를 새긴 현판이다.
참상관과 참하관으로 나누어 주도와 예직 일수가 기록되어 있다. 현판의 뒷면에 '가경 4년 기미년(1799) 11월'
이라는 간기가 적혀 있다. 낭관은 육조에 소속된 하급 관청에 근무하는 실무 책임자인 정랑正郎과 그를 보좌하
는 좌랑佐郎 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주도는 새로 관직에 임명된 사람이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 입직하는 일을
말하여, 예직은 당직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하여 [추관지秋官志 ](1781) 「관사館舍」의 '낭관청사' 항목에는
"청사 서쪽 벽 위의 중앙에는 국기판을 걸고, 왼쪽에는 청헌을 걸고, 오른쪽에는 주도식을 걸었는데, 모두 검은
판에 흰 글씨를 썼으며, 단청으로 둘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주도를 기록한 현판이 형조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현판이 형조에 있던 것인지는 명확치 않으며, 육조의 낭관이 근무하는
청사 중 한 곳에 걸려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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