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현판
조선시대에는 한양에 도성을 축조하고 돈의문敦義門과 혜화문惠化門 등의 출입문을 내어 도성 안팎을 오갔다.
문 밖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우고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는데, 당시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朱之蕃이 현
판의 글씨를 써 주기도 했다. 한양의 명승과 관련하여, 영조는 한강의 두무포에 있던 유하정流霞亭을 보수하고
효종이 잠저에 있던 시절 머물렀던 내력 등을 글로 짓기도 했으며 종종 인왕산 아래 세심대洗心臺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신하들과 시를 읊기도 했다. 그 밖에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永禧殿,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을 보관했던 지방의 사고史庫에도 현판을 걸어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또한 충신의 절개를 기리기 위한 사당
에도 현판을 걸고 추모의 정성을 보였는데, 부여의 의열사義烈祠에는 백제와 고려의 충신을 모신 사당 건립에 대
한 내용을, 임진왜란 때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수의 신주를 봉안한 선무사宣武祠에는 명에 대한 의리를 기록하였
다. 숭절사崇節祠 는 네 명의 중국 태학생의 신주를 모신 곳으로 성균관 옆에 있었는데, 영조가 사현사四賢祠라는
어필 현판을 하사하여 성균관 유학생들이 네 현인의 충절을 본받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왕조는 나라의
통치와 제사, 왕실 생활과 관련한 다양한 건축물에 현판을 걸었고, 후대로 하여금 선대 왕의 뜻을 계승토록 했다.
도성문都城門
조선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1396년(태조 5) 한양의 경계를 구획하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도성을
축조하였다. 성관에 네 개의 대문大門과 소문小門을 세워 도성 안과 밖을 잇는 관문 역할을 하게 했다.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숙청문肅淸門),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
(敦義門)이라는 4개의 대문을 두었다. 사대문 사이 동북쪽에는 혜화문惠化門(홍화문弘化門), 동남쪽에는 광화문
(光化門), 서남쪽에는 소의문昭義門(소덕문昭德門), 서북쪽에는 창의문彰義門이라는 4개의 소문을 세웠다. 풍수
지리에 따라 도성문을 폐쇄하거나 자리를 옮기기도 했으며, 문의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도성문은 여러 차례 보수
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흥인지문은 고종 때 새로 세워졌으며, 창의문은 영조 때 상량한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외의 도성문은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었거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현재는 서쪽에 있는 돈의문(서대문)과 소의문(서소문)을 제외하고 재건되었으며, 광화문 편액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문
<도성도> 《광여도廣輿圖》 18세기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서문에 해당하는 돈의문의 현판이다.
돈의문은 1396년(태조 5)에 건립되었는데 '의를 도탑게 하는 문' 이라는 뜻으로 오행사상에 따라
인의에지신仁義禮智信 중 '의' 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현판의 뒷면에는 '신묘년(1711) 11월 15일에 유학幼學 조윤덕曺潤德(1677~1760)이
전교를 받들어 쓰다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다.
<돈의문> 사진엽서
조선시대 한양도성의 사소문四小門 중 동북쪽에 해당하는 혜화문惠化門의 현판이다.
혜화문은 '은혜로 교화하는 문' 이라는 뜻으로, 북쪽의 숙정문과 동쪽의 흥인지문 사이에 위치했다.
본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으나 [연려실기술] 「지리전고」에 따르면, 1511년(중종 6)에 창경궁 동문의 이름도
홍화문이므로 혼동된다고 하여 혜화문으로 고쳤다. 또한 [동국여지비고] 「성곽」에는 중종이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을 때 조이趙履가 현판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어영청御營廳에 명하여
혜화문의 문루門樓 를 세우게 하고 편액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 현판은 영조 때 다시 만든 것으로 여겨지나 중
종 때 조이가 쓴 것을 그대로 따랐는지는 명확치 않다. <동아일보> 1928년 7월 12일 기사에 의하면 고적보존회에서
혜화문이 퇴락하고, 걸인들의 숙박처가 되어 문을 유지할 수 없으니 철훼하기로 결정했는데, 이후 문루를 철거하면
서 혜화문 현판을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일보> 1938년 5월 25일 기사에 의하면, 창경원에서 동소문(혜
화문)까지 도로개수 공사가 착공되어 동소문이 헐리게 되었는데, 이 때 석축까지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혜화문 사진엽서 20세기 초
모화관 慕華館
모화관은 조선시대에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던 객관이다.
1407년(태종 7) 개성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돈의문 밖에 객관을 건립하고 모화루慕華樓라고 하였는데,
1429년(세종 11) 규모를 확장하여 개수하고 모화관으로 개칭하였다. 모화관 앞에는 영은문迎恩門을 세워 사신을
영접하고 배웅하였으며, 북쪽에는 반송정盤松亭이라는 정자가, 남쪽에는 연못이 있었다, 사신이 오지 않는 평상시는
모화관에서 무과 시험이나 군사 훈련, 기우제 등을 행하기도 하였다. 모화관은 조선과 중국의 외교 관계를 상징하던
건물이었으나, 청일전쟁 이후 1896년(고종 33) 독립협회가 사무실로 사용하였고, 영은문을 헌 뒤 독립문을 세웠다.
현재 독립문 앞에는 영은문의 기둥을 세웠던 초석만이 남아 있다.
독립문과 모화관 20세기 초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했던 영은문의 현판으로, '황제의 은혜를 맞이하는 문' 이라는 뜻이다.
영은문을 사신들이 묵었던 객관인 모화관 앞에 있었으며 조선과 중국의 외교 관계를 상징하던 건물이다.
[중종실록] 1537년(중종 32) 1월 2일 기사에 따르면, 종종은 모화관 앞에 있는 홍문紅門에 기와를 덮어
개축하고, 영조문迎詔門이라는 편액을 걸어 중국 사람들이 왔을 때 영조문임을 할 수 있게 하였다. 이
긍익李肯翊(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과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저서 [임하
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1539년(중종 34) 명나라 사신 절정총이 칙사가 올 때는 조서調書뿐만 아니라
칙서勅書와 상賞도 가져오는데, 영조迎詔 라고 하는 것은 조서만 맞이한다는 편중된 뜻이라 맞지 않으므로,
영은문이라 쓴 현판으로 고쳐 걸었다. 그러나 설정총이 걸었던 현판은 훼손되어 알 수 없고, 지금은
1606년 (선조 39)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이 쓴 현판만 남아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은문 1910년
박제신 서교전별도 1526년(순조 26)
소향관 박제신이 1526년 홍양후가 연행사의 일원으로 연경에 갈 때,
영은문을 지나 무악재로 넘어가는 서교 부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유하정流霞亭
유하정은 한강의 두모포豆毛浦(현 성동구 옥수동 동호대교 부근)에 있던 정자로 본래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저택에 속한 건물이었다. 광해군 대에 비변사에서 대군방에 있는 유하정을 헐어 그 재목
과 기와로 별영別營의 정자를 지었는데, 1613년(광해군 5)에 광해군이 다시 별영의 정자를 철거하여 유하정에
돌려놓게 하였다. 이후 유하정은 효종이 잠저에 있던 시절에 정자로 사용하였으며, 효종의 즉위 후 수진궁壽進
宮에 소속되었다. 1722년(영조 48)에 영조가 유하정은 대군이 유람하던 곳이자 선대 왕이 유숙한 곳인데, 관리
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며 보수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하정에 올라 옛날을 추억하며 효종을 추모하였고, 정자 주변에 있는 남서당, 천모당, 서서당은
만회당이라고 이름 짓고 글을 써서 현판을 걸어두기도 했다.
이후 1781년(정조 5)에 정조는 규장각에 유하정을 하사하여 신하들이 독서를 하고 즐기근 명승으로
삼게 했으며, 잔치를 베푸는 규정을 만들고 규장각 신하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도성도> 《광여도》 18세기
1781년(정조 5) 9월 20일에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이 정조의 명을 받아
유하정을 봉심한 내용과 신하들이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심염조는 여러 신하들과 유하정을 봉심한 후 강변에서 배를 타며 고기를 잡고 노닐었는데
임금께서 편지를 보내어 '游유' 자를 韻운으로 하는 어언사운의 시를 짓게 하고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는
내용의 서문을 지었다. 이어서 정동준, 서정수, 정민시 등 9명의 신하들이 주상의 은혜에 감복하고
강변의 한가로운 풍광에 대해 노래한 시가 새겨져 있다.
1857년(철종 8) 4월 20일에 철종이 유하정에서 규장각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하사한 시와
검교제학檢校提學 김병기 등 20명의 신하들이 화답한 시를 새긴 현판이다.
유하정에 황봉주(임금이 내린 술)를 보낸다는 철종의 어제어필 시가 큰 글씨로 새겨져 있고, 이어서
성상의 은혜에 감복하며 술을 마시고 풍류를 즐긴다는 내용의 신하들의 시가 작게 새겨져 있다.
현판 뒷면에는 '이 해 8월 22일에 걸다' 라는 묵서가 남아 있다.
연회를 베풀고 시를 지은 4개월 뒤에 현판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하정의 서쪽에 있던 만화당 현판이다.
만회萬懷은 '일만가지 감회가 일어나다' 는 뜻이다. 현판에 간기는 없으나 '만회당서 현판을 통해
영조가 두호豆湖(두모포의 별칭)에 가서 유하정 서쪽에 있는 서서당西書堂의 이름을 만회당으로
고치고 치히 글씨를 쓴 현판임을 알 수 있다.
영조가 1772년(영조 48) 5월 5일에 유하정에 올라 서서당의 이름을 만회당으로 고친 후 지은 글을
1781년(정조 5) 5월에 조윤형의 글씨로 중각重刻한 현판이다. 영조가 두호의 유하정에 올라 남서당은
천모당, 서서당은 만회당으로 이름을 고치고 글을 써 걸었다는 사실과 손 모아 절을 하며
추모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1772년(영조 48) 5월 5일 유하정에 와서 南堂의 이름을 천모당千慕堂으로 고치고 지은 글을
1781(정조 5) 5월 조윤형의 글씨로 중각한 현판이다. 청모당서는 영조가 유하정에 올라 만회당서와
함께 지은 것으로, 어의궁(효종의 잠서인 용흥궁)의 낙선재에 현판을 걸었던 일과 옛날을 추억하며,
직접 남당과 서당에 천모와 만희라고 이름 짓고 글을 써서 걸어둔다는 내용이다.
세심대洗心臺
세심대는 인왕산 아래 선희궁宣禧宮 의 뒤에 있던 명승지로 암벽에 '세심대'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세심대는 본래 이향성(1524~1592)이 거처하던 곳으로 봄이면 살구꽃이 만발하고 맑은 샘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유명했는데, 광해군이 이곳을 빼았았다고 한다. 이후 왕실 소유로 편입시켜 세심궁을 세우고 궁인
들이 몸조리 하는 곳으로 삼았다. 영조는 1764년(영조 40) 세심궁에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신 사도묘를 건립
하기도 했으나, 곧 한성 동부 숭교방으로 옮겨 짓고 수은묘라고 하였다. 사도묘가 옮겨진 후 이 일대에 영조의
후궁으로 사도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의 사묘인 선희궁이 지어졌다. 정조는 육상궁과 선희궁을 참배한 뒤 신하
들과 세심대에 올라 꽃구경을 하며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시를 짓도록 명하기도 했다. 세심대는 현재
종로구 필운대로에 있는 국립서울농학교의 뒤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심궁도형> 1764년(영조 40) 이전
정조가 1791년(정조 15) 3월 세심대에 올라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봄날 세심대의 수풀 속에서 세속의 소란함을 씻고, 이곳에 같이 오른 연로한 신하들이 내년에도 함께 하길
바란다는 내용이다. 또한 정조는 즉석에서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보여주면서, 차를 다 끓일 때까지 갱운시를
짓도록 하였다. 이만수(1752~1820)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정조의 시를 받아쓰도록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현판의 글씨는 이만수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1792년(정조 16) 정조가 세심대에 올라 이민보(1720~1799)의 시에 운을 맞춰 지은
오언율시와 즉석에서 지은 칠언율시 두 수를 새긴 현판이다.
영희전永禧殿
영희전은 여러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진전으로 처음에는 남별전이라 불렀다.1618년(광해군 10)에
임진왜란 때 소실되지 않은 태조와 세조 어진을 봉자전(광해군의 어먼지 공빈 김씨의 사당)으로 옮겨 봉안하고 남별
전이라 칭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추존 왕 원종의 어진을 남별전에 추가로 모셨고, 전란에 대비해 강화도로 옮긴
태조 어진이 병자호란 때 훼손되면서 세조와 원종의 어진만이 남았다. 이후 숙종은 남별전을 중건하고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봉안했으며, 1690년(숙종 16) 정식으로 영희전이라는 전호를 내렸다. 영조는 영희전을 기존의 3실
에서 5실로 늘리고 1748년(영조 24)에 숙종의 어진을 봉안하였으며, 이후 1778년(정조 2)에는 영조의 어진, 1858년
(철종 9)에는 순조의 어진이 더해져 총 여섯 임금의 어진이 모셔졌다. 19세기 말 영희전 주변 한성 암부 훈도방에 외
국인의 왕래가 늘자, 고종은 장헌세자를 장ㄹ조로 추숭하고 종묘로 부묘하면서 비게 된 경모궁 자리에 영희전을 옮겼
다. 그리고 1900년(광무 4) 빈 영희전 자리에는 창의궁에 있던 의소묘와 문회묘를 옮겨왔으나, 1908년(융희 2) 반포
한 향사이정에 의해 의소세손과 문효제자의 신주가 땅에 묻히면서 또다시 비게 된 영희전 자리에는 경찰서가 들어
서게 되었다. 또한 경모궁 자리로 옮겨간 영희전의 어진은 덕수궁 내 선원전으로 또다시 옮겨졌으며,
이곳은 경성제국대학으로 바뀌게 되었다.
<영희전전도> 「춘관통고」 1788년 경
영조가 1760년(영조 36) 2월 한식에 영희전을 찾아 친제를 지내고 감회에 젖어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지난 1747년(영조 23)부터 지금까지 14년간 거듭하여 영희전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던 일을 회상했다.
특히 1748년(영조 24)에는 숙종의 어진을 영희전에 봉안하고 환궁하여 숙종 계비 인원왕후에게
뢰었으나 이제는 돌아가신 까닭에 아뢸 곳이 없음을 슬퍼하는 내용이다.
사고史庫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은 중앙의 춘추관春秋館과 종부시宗簿寺를 비롯하여, 지방의 사고史庫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실록을 춘추관의 실록각實錄閣과 충주 사고에 보관하였는데, 세종이 성주와
전주에 추가로 사고를 세워 보관하게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만 남고
나머지는 소실되었다. 1603년(선조 36)부터 실록을 다시 간행하고 사고를 새롭게 지어, 중앙의 춘추관과
태백산, 묘향산 사고에는 새로 만든 실록을, 마니산 사고에는 전주 사고본을, 오대산 사고에는 전주 사고본
의 교정본을 나누어 보관하였다. 이후 북방의 침입에 대비하여 묘향산과 마니산 사고본은 적상산과 정족산
사고로 옮겼다. 춘추관 사고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파괴되어고,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 정족산 네
사고만 남게 되었다. 선원록 역시 이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었는데, 1681년(숙종 7)에 조선왕조실록
등을 참고하여 수정 편찬하고, 종부시의 선원보각과 지방의 사고에 보관하였다. 조선 초기 지방의 사고에는
하나의 건물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함께 보관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실록각(사각)과 선원각의 건물을
따로 세웠다. 또한 주변에 수호 사찰을 두어 승려들이 사고를 지키도록 하였다.
태백산 사고의 실록각과 선원보각 유리건판, 20세기 초
봉화 태백산 사고의 선원보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선원보각(선원각)은 왕실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 초기 왕실의 족보는 부계와 모게, 서얼의
구분 없이 기록하였으나, 태종 대에 이르러 현찬 방식이 크게 변화하였다. 태종은 자신의 사후 왕위계승 분쟁을
우려하여 1412년(태종 12) 시조 이한부터 태종 자신까지 직계를 기록한 [선원록], 왕의 아들 중에서 적자의 가계
를 기록한 [종친록宗親錄], 딸과 서얼을 기록한 [유부록類附錄 ]으로 구분하여 작성하게 하였다. 이를 통해 이복
형제들을 배제하고 태종의 후손으로만 왕위를 계승하는 정통성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선원록은 임진왜란으로
유실되었으나, 족보에 수록되는 자손의 범위 등에 변화를 거치며 다시 편찬되었고, 종부시의 선원보각을 비롯하
여 지방의 태백산, 정족산, 적상산, 오대산 사고에 나누어 보관되었다. 조선 초기에 지방 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
과 선원록을 하나의 건물에 보관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각(실록각)과 선원보각(선원각)을 별도로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1696년(숙종 22) 선원록청璿源錄廳의 건의로 종부시의 선원보각에 편액을 걸었던 예를 따라
오대산, 태백산, 정족산의 [형지안形止案] 기록에 의하면, 1696년(숙종 22)에 오대산과 태백산 사고의 선원각
에, 1697년(숙종 23)에 정족산 사고의 선원각에 현판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정족산 사고의 선원보각
현판은 종부시 제조였던 낭원군 이간이 쓴 것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태백산 사고의 선원보각 유리건판, 20세기초
오대산 사고의 선원보각 유리건판, 20세기 초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봉화 태백산 사고의 실록각에 걸었던 현판이다.
조선왕조는 나라의 전반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을 중요시하며 실록을 국가적으로 영구한 보관을 위하여
중앙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지방의 사고에 한 부씩 봉안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는 등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각고의 노력과 복간을 통해, 20세기 초까지 봉화 태백산, 강화 정족산,
무주 적상산, 평창 오대산 사고본이 보존되었다. 이 현판의 뒷면에 '행 봉화군수 고영철이 썼다. 건양 2년 정유년 4월'
이라는 음각이 남아 있어, 1897년(고종 34) 당시 봉화군의 군수였던 고영철이 글씨를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당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와 왕의 사친이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세자의 신주를
모신 사묘 외에도 충신의 절개를 기리기 위한 사당과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되었던 명나라 장군을 위한
사당 등이 건립되었다. 부여 의열사義烈祠는 백제와 고려시대 충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부여현감
홍가신(1541~1615) 이 건의하여 세워졌으며, 선조가 친히 '의열사'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한 선조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신종황제가 조선에 군사를 파병해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명나라 장수의 위패를 선
무사宣武祠에 봉안 하였다. 영조는 불의에 항거하며 국난을 극복하려 했던 중국 태학생 네 명의 신주를
봉안한 숭절사崇節祠를 성균관 근처에 세워 성균관 유생들이 모범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사현사四賢祠
라는 어필 현판을 사액하기도 했다.
부여 의열사
뒷면 음각
1581년(선조 14) 4월에 서애 류성룡이 지은 부여 의열사 기문을 새긴 현판이다.
류성룡의 벗이던 홍가신이 1575년(선조 8) 부여의 현령으로 부임하여 백제 의자왕 때의 충신인
성충成忠 , 흥수興首, 階伯 과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인 이존오를 모시기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홍가신은 간사한 무리를 배척하고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네 열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사당을 세웠고, 충의를 선양한
다는 뜻에서 사당 이름을 현의사라고 하였는데, 선조가 새롭게 '의열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현판의 뒷면에 '만력 10년 임오년 2월에 걸다. 생원 한호가 썼다'라는 음각이 있어, 1582년(선조 15)에
사자관寫字官 이자 서예가로 잘 알려진 석봉 한호(1543~1605)의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 형개邢玠(1540~1612)와 양호楊鎬(?~1629)를 배향한
선무사의 현판이다. 선무사는 '무위를 베푸는 사당'이라는 뜻으로 조선을 도운 두 명나라 장수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1598년(선조 31) 창건 당시에는 형개만을 배향하였으나 1604년
에 양호를 추가로 모셨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등에 의하면, 선무사는 명나라 사신을 접
대하던 태평관 서쪽에 있으며 생사당生祠堂이라고도 칭하였다. 그리고 선조가 어필로 '재조번방
再造藩邦' 네 글자를 쓰고 금으로 칠하여 현판을 걸었다고 한다. 선조 이후에도 조선 후기 국왕들은
선무사를 찾아 친히 제사를 지내거나 관원을 보내 치제致祭하였고, 1760년(영조 36)에 영조는 조선
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병들의 위판位版을 태상시의 신실에서 선무사로 옮겨와 함께 제사를 지내며
대명의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선무사의 제사는 1896년(고종 33)에 축소되고 1908년(융희 2)에
완전히 폐지되었는데, 사당도 일제강점기에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선무사에 걸었던 수은해동垂恩海東 현판으로'해동(조선)에은혜를 드리우다' 라는 의미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군사를 파병해 주었던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나타낸 글귀이다.
현판의 좌측에 '조선국왕'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영조가 어필로 네 글자를 써서
여러 신하에게 보인 후 현판에 새겨 선무사에 걸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가 1740년(영조 16)에 선무사에 참배하고 명나라 황제의 은혜에 감개하여 지은 두 수의 시를
각각 새긴 현판이다. 두 점의 현판 중 하나는 선무사에 참배하고 형개와 양호를 떠올리며 옛날을
회상하며 지은 시이며,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황제가 원군을 파병해준 은혜에 감사
한 마음을 담은 시이다. 두 현판은 모두 흑색 바탕에 금색 글자이며, 태두리는 굴곡을 주어 조각
하고 녹색 바탕에 운보 문양을 그려 넣었다. 또한 모서리에 봉황 머리 모양을 조각한 점 등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 뒷면에 '선무'라는 글자가 있어 선무사에 걸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산대사의 고적古蹟을 새긴 현판
뒷면 음각
조선시대 승려이자 승군장이었던 서산대사(1520~1600)의 고적에 대해 기록한 현판이다.
서산대사의 법명과 호는 휴정休靜 과 청허淸虛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들을 통솔하고 전쟁터로 나아가
구국에 앞장섰다. 현판에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서산대사에게 보낸 시를 비롯하여
서산대사의 충정을 칭송하는 글과 예물을 보낸 명나라 장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묘향산 보현사에
있는 서산대사의 필적과 추사 김정희가 서산대사를 기리며 쓴 시도 새겨져 있다. 한편 현판의 뒷면에 '부서진다
면 고쳐서 끝없이 전해지도록 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후대에 이르기까지 서산대사의 행적이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현판을 어느 건물에 걸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인용: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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