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行宮 현판懸板
도성 안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과 이궁離宮인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등 정사를 펼치기
위한 궁궐이 있었다. 왕은 때때로 궁궐을 벗어나 지방에 행차하였는데, 이때 임시로 거처하던 곳을 행궁이라 한다.
조선시대 국왕의 도성 밖 행차는 주로 한양 근방에 분포되어 있는 왕릉 참배를 목적으로 하였으며, 능행陵幸과
관련한 행궁으로는 과천, 시흥, 수원의 화성행궁 등이 있다. 그 밖에도 왕은 정사에서 벗어나 휴양과 심신의 치료
를 위해 온천을 찾기도 했는데, 온천 일대의 행궁에는 대표적으로 온양행궁이 있다. 또한 전쟁과 같은 국난에
대비 하고자 전국의 요충지역에 행궁을 건립하였는데, 강화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등이 그 예이다.
조선시대 행궁은 평상시에는 해당 지역의 관청 건물이었으며, 왕이 행차할 경우 행궁으로 활용되었다.
행궁은 국왕의 행차 경로에 따라 운영을 달리하였고, 시대적 변화와 더불어 존립되거나 폐지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여러 행궁 중에서 북한산성의 행궁과 화성행궁에 걸었던 현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북한산성과 관련한 현판으로는 숙종이 산성을 고쳐 쌓은 후 방문하여 지은 시와 영조가 행궁을 찾아
옛일을 추억하며 지은 시를 새긴 것이 남아 있다.
또한 수원화성 및 화성행궁과 관련한 현판이 다수 전해지는데
대부분이 정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장남헌壯南軒, 봉수당奉壽堂 등의 건물 이름을 새긴 대형 현판을 비롯
하여,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 때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지은 시, 신하들에게 내린 전교를 새긴 것
등이 있다. 현판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당시의 행궁의 모습과 내력을 살펴볼 수 있다.
북한산성 행궁
북한산성은 삼국시대 산성으로 고려를 거쳐 조선 건국 이후에도 증축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을 겪은 후 도성의 방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숙종은 1711년(숙종37)에 산성을 축성하기로 결정하고 대대적으로
고쳐 쌓았다. 이듬해인 1712년(숙종 38) 전쟁 등의 유사시 왕의 피난처로 활용하고자 산성 내에 행궁을 건립 하였다.
숙종과 영조는 이따금 이곳에 방문한 뒤 감회를 글로 남겼다. 숙종은 도총부 총관을 맡고 있던 아들 연잉군(영조)과
행궁을 찾아 북한산성의 험준함을 노래하고 한양도성을 지키는 관문으로써의 역할을 기대하는 시를 지었다.
영조 또한 즉위 후 종종 북한산성 행궁에 와서 숙종을 모시고 왔던 지난날을 회고하는 글을 짓고 현판에 새겨 걸었다.
북한산성 축조에 참여했던 승려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1745년)를 보면, 북한산성 행궁은 내전內殿이
54칸, 외전外殿이 61칸, 총 115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종 대에 홍수로 훼손된 산성과 행궁을 재건하였으나,
1915년 홍수 때 행궁이 붕괴되면서 폐허처럼 남게 되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정비 사업이 이루어지면서
행궁의 복원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北漢圖」 [北漢誌] , 1745년(영조 21)
1711년(숙종 37) 2월 5일에 숙종이 북한산성의 축조를 결단한 뒤 그 소감에 대해 지은 시로, 1721년(경종 1)
7월에 이건명(1663~1722)의 글씨로 새긴 현판이다. 현판에는 숙종이 해창위 오태주(1668~1716)에게 내린
시 한 수와 북한산성을 중국 진나라의 요충지였던 효산과 촉나라 땅의 험준함에 견주고,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지켜나갈 것을 다짐하였다는 내용이다. 숙종이 오태주에게 하사한 시는 [북한지]에, 칠언절구의
시 여섯 수는 [열성어제]에도 실려 있다.
영조가 1760년(영조 36) 8월에 북한산의 행궁에 거둥하여 지난날을 회상하는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연잉군 시절 숙종과의 동행 이후 49년 만에 다시 행궁에 와서 임진년(1712)에 숙종이 앉았던
깔개등의 물건들과 숙종의 어제시 여섯 수를 보며 어버지를 그리워한다는 내용이다.
화성행궁 華城行宮
수원화성은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화산 부근에
있던 수원의 읍치邑治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쌓은 성이다. 1974년(정조 18)에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정조 20)
에 완공되었다. 수원화성은 네 개의 대문과 수문, 장대將臺, 누각 등의 방어시설을 갖춘 성곽으로, 내부에는 화성행궁
을 비롯한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수원부 유수留守가 공무를 보는 관청이었으며, 왕이 현륭
원을 행차할 때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되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할 때마다 화성행궁에서 지방관을 소견하였고,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열기도 했다. 또한 낙남헌에서 노인들에게 양로 잔치를 베풀었으며,
득중정에서는 활쏘기를 실시하였다. 순조는 1801년(순조 1)에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한 뒤 아버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이후 국왕이 현류ㅗㅇ원과 건릉을 참배할 때 이곳에서 유숙하고 작헌례를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수원화성의 성곽과 성문 등은 도시발전의 명목으로 허물어졌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었다. 화성행궁에는
자혜의원, 경찰서, 수원군청, 세무서 등이 들어서는 등 낙남헌을 제외하고 대부분 본래의 모습을 잃고 훼철되었다.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은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발현과 강력한 왕권의 실현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수원화성
의 축성 계획에서부터 투입된 인력과 예산, 재료, 거중기나 녹로와 같은 기계까지 종합적으로 기록된 [화성성역위궤]
(1801년)가 남아 있다. 수원화성은 역사적, 건축적으로 가치가 높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팔달문, 화서문 등은 보물로도 지정되어 있다.
《화성전도華城全圖》 병풍 중 수원화성 부분
《화성전도華城全圖》 병풍 중 화성행궁 부분, 19세기
화성행궁 현판
1793년(정조 10에 정조가 친히 쓴 화성행궁 현판으로 장남헌(봉수당)에 걸려 있었다.
현판에는 '즉위한 지 18년이 되는 계축년(1793) 1월' 이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으며, '홍재弘齋(정조의 호)와
'규장지보奎章之寶' 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정조의 필력이 잘 드러난 큰 글씨의 현판이다.
눌재집에 찍힌 규장지보. 이 보인은 정조의 명으로 만들었으며, 처음에는 어제에만 찍었으나, 1781년(정조 5)부터는
주자소에서 인쇄한 책들을 하사할 때의 내사인으로도 사용하였으며, 1864년 (고종 1)까지 계속되었다.
이 보인은 규장각의 각신이 관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남헌 현판
정조 어필, 1790년(정조 14) 추정
봉수당 현판
조윤형 글씨, 1795년(정조 19) 추정
1789년(정조 13)에 수원 신읍치 관아와 동헌이 완공되었는데, 정조는 이듬해 장남헌이라 이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친히 썼다. 장남은 '남쪽 지방을 장엄하게 하라' 는 뜻으로, 한양 남쪽에 있던 수원 지방을
중흥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담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장남헌에서 열었는데,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을 담아 봉수당으로 이름을 고쳤다.
1790년(정조 14) 11월에 종조가 순영巡營과 장용영壯勇營에 내린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중사 重司 중초관中哨官의 자리에 수원부사 조심태의 조카인 전前 초관哨官 조두를 임명한다는 내용이다.
조심태가 수원부사로서 공로가 있으므로 그에 해당하는 은택을 내리고, 이 전령을 현판에 새겨
장남헌에 걸도록 하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1792년(종조 16) 정월에 정조가 원행園幸의정례定例를 바로잡을 것을 지시한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수원이 도성으로부터 100리 떨어져 있는데, 원행을 위한 물건을 실어 나를 때 발생하는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원행의 정례를 바로 잡고자 했다. 원행에 사용하는 그릇의 수와 크기에도 차이가 있으니 일정한 규식이
필요하며, 물품을 정해진 지역이 아닌 곳에서 동원하는 일이 없도록 강조하였다. 또한 작은 물건 하나라도
사사로이 바치면 정례를 어긴 것이니 엄격히 다스리겠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전교를 본부의
장남헌 등에 크게 써서 걸어두도록 명하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1796년(정조 20) 11월 이병모(1742~1806)가 지은 봉수당을 새긴 현판이다.
봉수당은 본래 이름이 장남헌으로 1789년(정조 13)에 화성행궁의 정당으로 건립되었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0 윤2월 13일에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진찬進饌을
행하였을 때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이 날 칠언사운七言四韻의 율시를 내리고
여러 신하들 에게 화답시를 짓도록 했다.
어제御製
화성에서 진찬하는 날에 즉석에서 시를 지어 함께 연회하는
여러 신하들에게 보여 만년을 축복하는 정성을 부치다
크나큰 복록 풍성하여 새로운 명을 맞이하니 생황과 퉁소 불어 청춘을 머물게 하네.
땅에는 관화곡觀華曲 울리고 三祝 소리 올라오며 해는 유홍절流虹節에 이르러 육순이 되었도다.
내외빈은 향기로운 나무에 모였고 동 · 서반은 꽃보도 더 아름다운 사람일세.
해마다 오늘처럼 즐겁기만을 바라노니 장락당 안에는 몇 순배의 술이 돌았는가?
내가(정조) 즉위한 지 19년(1795) 을묘 윤2월 13일
정조가 1795년(정조 19) 윤 2우러 13일에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악장樂章을 새긴 현판이다. 화성행궁의 봄날 풍경을 비롯하여, 어머니의 인자한 덕과 복록에 대한 칭송,
회갑연의 즐거움에 대한 노래이다. '궁상각치우宮商角徵羽'의 다섯 음에 따라 가사를 지었으며,
선창船艙과 후창後唱으로 악장이 구분된다. 현판의 글씨는 화성부유수 체재공이 썼다.
1798년(정조 22) 12우러 3일에 정조가 자신의 호를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정하고 그 서문을
새긴 현판이다. 정조가 직제학 이만수에게 자신이 직접 지은 호의 의미를 설명하였는데, "달은 하나이지만
물의 종류는 만 가지나 되고, 물은 세상의 사람들이요, 달은 태극인데, 태극은 바로 나 자신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신하들 여러 명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현판에 새긴 후, 연침燕寢(임금이 평상시 거처하는 전각)의
여러 곳에 걸어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만천명월주인옹은 '온 시냇물에 비친 밝은달의 주인'을 뜻하며
어느 물에서도 달이 비추듯 강력한 왕권이 신하들에게 미쳐 이상적인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
정조가 1797(정조 210 정월을 맞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바라며, 자식들은 노인을 봉양하고
농사에 힘쓰라는 윤음을 새긴 현판이다. 어머니가 회갑을 맞았던 17495년에 노인을 공경하고 효자의 덕행
을 널리 알리는 전레를 마련하고자 했지만 실현하지 못하였다. 이후 정사년(1797)에 이르러 [소학] [오륜행
실도], [향음의식], [향악조례]를 반포하니, 이를 통해 풍속을 바로잡아 백성이 교화되면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그 밖에도 이 윤음을 여러 신하와 유생들에게 따르도록 하였으며, 서적으로 여러 본本
을 인쇄하여 임금께 바치고 경외京外에 선사宣賜하도록 전교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두 점의 현판이
남아 있는데 수원유수 겸 장용외사였던 조심태와 홍문관 부수찬 김근순이 각각 글씨를 썼다.
두 점 다 화성행궁에 걸려 있던 현판으로 추정된다.
화성행궁의 장락당에 걸었던 정조의 어필 현판이다.
장락은 '오랫동안 즐거움을 누린다; 는 뜻으로 중국 한나라의 태후가 거처하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화성역의궤] 「행궁」을 보면, 갑인년(1794) 8월에 봉수당 남쪽에 장락당을 지었으며,
왕이 쓴 편액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이 장락당에서 축수祝壽의 잔을 올렸다.
현판의 좌측에는 '규장지보奎章之寶'가 새겨져 있다.
1798년(정조 22) 10월 19일에 정조가 장용외사 서유린(1738~18020에게 장용영의 운영에 대해 지시한 전령을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한양에는 정용영의 내영을 두어 왕도를 보호하고, 수원화성에는 외영을 두어 전침(현륭원)을 호위
하게 했다. 또한 장용영의 군제개편과 화성에서 부담하는 쌀의 감면 등에 대한 전령을 장락궁(장락당)의 외헌에
새겨 걸어, 신하들이 항상 바라보며 명을 따르게 하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수원부유수 겸 장용외사 서유린이 명을 받아 현판의 글씨를 썼다
화성행궁의 낙남헌 현판으로 조윤형이 글씨를 썼다.
[홍재전서] 「일득록」에 따르면, 낙남헌의 이름은 중국 한나라 고조가 낙양의 남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던 것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또한 후한의 광무제 때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것에 빗대어 수원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화성행궁을 통치 공간으로 삼고자 한 정조의 뜻이 담겨있다. 조윤형이 쓴 것으로 추정한다는데,
그는 당시 이름난 명필로 낙남헌 외에도 화성행궁의 장안문, 방화수류정, 신풍루 현판을 썼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 윤2월 14일에 낙남헌에 노인들을 초청하여 양로연을 베풀고 지은 글을 새긴 현판으로
영의정 홍낙성(1718~1798)이 글씨를 썼다. 정조가 잔치에 참석한 61세와 70세의 노인들에게 술잔을 돌리며,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시를 읊고 화답을 구한다는 내용이다.
화성행궁의 득중헌에 걸었던 어필 현판이다.
[정조실록] [일성록] 1790년(정조 14) 2월 9일 기사에는, 정조가 화성행궁 안에 있던 동헌과 내사, 사정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 중 사정을 득중정이라 하면서 임금의 글씨로 현판을 만들어 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홍재전서]
의 「일득록」을 살펴보면, 정조가 수원부에서 화살을 다섯 발 맞히고 하교하면서, "매사 적중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
데, 나는 우연하게 연이어 적중하였다. 이 정자의 편액을 득중이라 할 것이니, 내가 매사를 적중하는 데에 뜻이 있
음을 붙이고, 이로써 표적을 사아라" 라고 하여 그 의미를 밝혔다. 또한 정조는 1795년(정조 19) 윤2월 14일 수원
행차의 마지막 날, 득중정에서 야간에 활쏘기와 매화포(불꽃놀이) 구경을 하기도 하였다.
득중정 상량문 현판
1791년(정조 15) 2월 화성행궁의 득중정 상량문을 새긴 현판이다.
득중정의 높고 화려한 모습과 활쏘기를 하는 정자라는 이름의 유래를 비롯하여, 정조가 쓴 득중정의 현판이
태양처럼 빛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홍양호(1724~1802)가 정조의 명을 받아 상량문을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썼다.
[일성록] 1796년(정조 20) 9울 10일 기사에 득중정 상량문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1794년(정조 18) 겨울에 정조가 화성행궁에 채제공의 시에 화답하여 지은 시를 새긴 현판으로
채제공이 글씨를 썼다. 1794년(정조 18)에 채제공이 수원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을 소재로 '장안문루'라는
시를 지었는데, 정조가 이 시에 화답하여 화성의 높고 장엄한 모습을 노래하였다.
[홍재전서]에 의하면, 채재공이 화성에서 돌아올 때마다, 시를 지어 축軸으로 만들었는데, 이 현판에 새겨진
정조이 시는 갑인년(1794) 시축詩軸에서 뽑아 차운次韻한 것이다. 한편, 채제공의의 문집 [번암집]을 보면
정사년(1797) 2월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화성행궁의 장남헌에 들어 채제공을
접견한 다음, 채제공의 문집에 자신이 화운한 어제시를 넣었으면 좋겠다는 분부를 내린 바 있다.
이에 채제공이 명을 받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796년(정조 20) 2월에 정조가 화성행궁에서 채제공의 시에 화답하여 지은 시를 새긴 현판으로 채제공이
글씨를 썼다. 1796년(정조 20) 정월 21일 채제공이 '임금이 홍범洪範과 봉조鳳鳥 등 여러 산을 순행하고,
밤에 화성으로 돌아오셨다'는 제목의 시를 지었는데, 정조가 이 시에 화답하여 방어시설이 튼튼한 화성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홍재전서]를 보면 채제공이 화성에서 돌아올 때마다 시를 짓고 軸축으로 만들었는데
이 현판에 새겨진 정조의 시는 병진년(1796) 시축에서 뽑아 차운한 것이다. 채제공은 수원화성 축성의
책임자였는데,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할 때마다 나이가 많은 그를 배려하여 항상 먼저 갔다가
나중에 돌아오게 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에 화성장대(서장대)에 올라 성 안의 군사 훈련을 살펴보고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화성장대의 처마 위에 걸었던 것으로 화성의 높은 장대와 호방한 군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제
화성장대에서 친히 군사 훈련을 사열하시고 시를 지어 처마 위에 적다
나라 지켜 호위함이 이토록 중요하니 경영함에 수고로움을 헛되이 하지 않았네.
城성은 평지로부터 멀고 장대將臺는 먼 하늘에 기대어 높다랗네.
만 개의 성가퀴는 규모가 장대하고 삼군은 의기가 호방하도다.
대풍가를 한 번 연주하니 붉은 해가 인포鱗抱에 빛나누나.
1870년(고종 7) 3월 고종이 화성행궁에 행차하여 정조의 어제시 현판에 차운하여 지은 시와 신하들이 갱운한 시를
새긴 현판이다. 고종은 선왕의 공덕을 칭송하며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며 시를 지었는데,
정조의 어떤 시를 보고 화답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수원의 태평성대한 모습을 비롯하여 정조의 효심과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 행궁 순행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유원(1814~1888), 김병학1821~1879),
이최웅(1815~1882) 등 27명의 신하들이 '新신, 春춘, 人인, 巡순' 운자에 맞춰 화답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홍선대원군의 장남이자 고종의 형인 이재면(1845~1912) 썼다.
화성행궁에 걸려 있었던 현판으로 전해지나 정확한 게시 건물은 알 수 없다.
인용: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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