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조선 왕실의 현판 3-2

영회원 永懷園

영회원은 인조의 첫째 아들 소현세자의 빈嬪인 민회빈 강씨(1611~1646)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1627년(인조 50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병자호란 뒤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에 한양에 돌아왔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두 달 만에 급서急逝하였고, 1646년(인조 24)

에 민회빈 강씨는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폐출되어 사사되었다. 폐세자빈으로 세상을 떠나 소현세자 묘에

합장되지 못하고, 친정인 강씨 집안의 산에 일반 사묘로 장사를 지냈다. 이후 1718년(숙종 44) 세자빈에 복위되면서 

묘가 새롭게 조성되어 민회묘로 추승되었고, 1870년(고종 7)에는 세자빈의 묘를 원으로 격상하면서 영회원이 되었다.

현재 서오릉 능역 안에 위치해 있다.

 

 

 

정조가 1797년(정조 21) 8월 15일에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무덤인 민회묘(현재 영회원)에 친제한 사실을

새긴 현판이다. 정조가 묘의 수위관守衛官인 조영석과 유종섭에게 민회빈 강씨와 부친 강석기(1580~1643)의

묘에 대해 하문하고, 강씨 집ㅁ안의 후손들을 관리로 등용할 것을 명하였다는 내용이다. 

 

 

 

숭릉崇陵

숭릉은 조선의 18대 왕 현종顯宗(1641~1674년)과 현종비 명성왕후(1642~1683)의 능이다.

1674년(현종 15)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재의 자리(동구릉 능역 안)에 능을 조성하였으며, 1683년(숙종 9)에

명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현종 옆에 쌍릉으로 능을 마련하였다.

 

 

 

영조가 1761년(영조 370 2월 4일에 현종과 현종비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을 참배하고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가 연잉군이었던 1713년(숙종 39) 가을에 20살의 나이로 숭릉의 향대청에서 숙종 대신

기신제忌晨祭를 행하였고, 49년 뒤의 봄에 현종의 탄신일을 맞아 다시 숭릉을 방문하여 술잔을 올리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추모의 감회를 적어 향대청에 게시한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명릉明陵

명릉은 조선 19대 왕인 숙종肅宗(1661~1720년, 재위 1674~1720년)과 숙종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1687~1757)년)의 능이다. 1701년(숙종 27)에 인현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가장

먼저 명릉을 조성하였고, 1720년(숙종 460에 숙종이 서거하면서 인현왕후의 능 옆에 숙종의 능을 조성

하여 쌍릉 형식을 이루었다.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우측

언덕에 단릉으로 부장되면서 세 분을 모신 명릉이 되었다. 현재 서오릉 안에 있다.

 

 

 

영조가 1744년(영조 20) 8월 초7일에 숙종과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의 개수 공사를 친히 살펴보고

회포를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가 비로 인해 명릉의 사초莎草가 무너지고 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은 뒤, 직접

명릉에 나아가 사초를 고치고 석물을 후릉厚陵(정종과 정종비 정안왕후의 능)의 예에 따라 검소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는 내용이다. 

 

 

 

영조가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1754년(영조 30) 8월 15일에 숙종과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을 참배하고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가 10년 전인 갑자년(1744)에 명릉을 찾아 재실에 묵었는데, 환갑이 된 올해 숙종

의 탄신일을 맞아 다시 명릉을 방문했다는 내용이다. 비록 말머리를 돌려 환궁하지만 마음만은 명릉에 있다는

심정의 글을 청廳(향대청)에 걸게 하였다고 새겨져 있다. [승정원일기] 1754년(영조 30) 8월 15일 기사에 영조

가 명릉 난간석 아래에서 한참동안 엎드려 아버지인 숙종을 추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영조의 심정과

효심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영조가 1756년(영조 320 8월 1일에 숙종과 숙종 계비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을 참배한 뒤, 회포를 적어

향대청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 여러 차레 명릉을 참배한 일을 회상하면서 왕위에

오른 후에도 종종 명릉을 찾았음을 술회하였다. 그리고 근래 장마가 염려되었지만 행행行幸하는 날에

날씨가 맑게 개서 다행이며, 좋은 날씨에 예를 마치고 돌아온 일은 선조들의 도움이었노라 감회를 읊었다.

영조는 환궁하면서 이와 같은 선조를 추모하는 글을 서명응(1716~1787)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현판으로

만들어 향대청에 걸도록 명하였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영조가 1758년(영조 34) 1월에 숙종 계비 인원왕후(1687~1757)의 능 자리를 살펴보고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는 왕세자였던 신축년(1721)에 인원왕후가 돌아가시면 마련할 능 자리를 미리 살폅몬 적이 있다. 그리고

재작년(1756)에 인원왕후의 가르침을 받아 능 자리의 방향을 바꾸었는데, 명릉에 와보니 과연 처음의 자리보다

바꾼 자리가 더 좋은 곳임을 알고 감탄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나아가 이러한 내용의 글을 영의정 이천보

(1698~1761)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재실에 걸도록 하였다.

 

 

 

 

영조가 1759년(영조 35) 3월 26일에 숙종 계비 인원왕후의 혼전인 효소전孝昭殿(창경궁 문정전에 설치)에서

삼년상이 끝남을 알리는 대상제를 거행한 후, 명릉으로 나아가 봉안제奉安祭를 행하였다는 내용을 새긴 어제

어필 현판이다. 또한 영조는 명릉에서 봉안제를 행한 후 재실에 묵으면서, 어머니 인원왕후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친히 글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이를 향대청에 걸도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가 1760년(영조 36)6월 8일 숙종의 기일을 맞아 명릉에 제사를 지내고, 재실에서 눈물을 머금고 쓴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앞서 3월 숙종의 세 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기일에 친제를 하였고, 내년 가을에 숙종의 두 번째 왕비 

인현왕후의 기일에 제사를 지내고자 하는데, 오늘 숙종 기일에 기신제忌晨祭를 지내지 않으면 자식된 도리가 아니라

고 하였다. 또한 명릉에 모셔진 세 분 모두에게 기신제를 행하여 효를 펼쳤으니, 선왕을 뵐 면목이 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영조는 이와 같은 글을 현판에 새겨 재실의 동쪽 벽에 걸게 하였다.

 

 

 

 

 

 

영조가 1762년(영조 38) 8월 15일에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을 참배했을 때, 재실에 날아든 제비를 보고

감회에 잦어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현판의 글에 따르면 영조가 지난 1760년(영조 36) 6월 초7일에 숙종의

기신제를 행하기 위해 재실에서 묵었을 때, 제비의 한결같음을 칭찬하며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공자의 말씀처럼 사람이 새보도 못할 수 있겠는가를 되뇌고, 매해 부모님의 능에 참배하여 효심을 표현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유교 경전인 [예기禮記]의 「월령月令」을 비롯하여, 상(은)나라의 시조 설화 등에

등장하는 제비와 관련한 여러 고사를 인용하였다.

 

 

 

 

영조가 1769년(영조 45) 8월에 명릉을 참배하고 재실에서 눈물을 삼키며 친히 짓고 쓴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실록] 1769년(영조 45) 8월 10일 기사에 의하면, 영조가 명릉 상설象設 옆의 이슬 맺힌

풀에 엎드려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날짜의 [승정원일기]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재실에서 초지草紙를 들이게 하고 '올해에 펼친 정성 참으로 뜻밖이니, 재실에서 글을 남겨 만 분의 일

이나마 감회를 기록하네' 라는 글 한 구句를 쓰고, 즉시 새겨져 재실에 걸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바로 이 현판을 가리킨다.

 

 

 

 

 

영조가 1770년(영조 46) 9월 1일 명릉에 나아가 재실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환궁하며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재실에서 머물며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정성을 펼친 후 비록 궁궐로 돌아가지만 마음만은

명릉, 즉 부모님 곁에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제어필. 재실에서 감회를 기록하다

 

오늘 이곳에서 머물고 자면서 저의 정성을 조금이나마 펼쳤네.

옛날 사람들은 병아리를 희롱하였고, 요즘 신하들은 말안장에 걸터앉았네.

 

해는 경인년(1770)으로 9월 1일에 와서 초2일에 돌아가니 송백松柏에 눈물을 뿌리면서 기록하였다.

 

오호라! 오늘날 배알함은 천만가지로 바라던 것 이상이라.

몸은 비록 다시 길에 오르지만 마음만은 홍문紅門에 걸려있네.

 

 

 

 

정조가 1787년(정조 11) 8월 15일에 숙종의 탄신일을 맞아 명릉과 소령원을 참배한 뒤 고양행궁에 유숙

하면서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정조실록] 1787(정조 11) 8월 15일 기사를 보면, 정조는 명릉에서 작헌례

酌獻禮를 행하고, 제릉陵과 순회묘에 들렀다가 고양행궁으로 돌아왔다. 이때 정조가 칠언율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화답시를 짓도록 명하였는데, 현판에는 이날 지은 어제시가 기록되어 있다.

이 현판은 소령원에 걸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전략...)

삼가 선릉 배알하고 이어 소령원도 배알했노니 맑은 가을 좋은 계절 오늘이 바로 중원中元이로다.

용이 서리고 땅이 보호하사 앵봉은 거대하고 석물은 천연으로 이뤄져 고령은 높다랗네.

일 년 중에 밝은 달은 이 밤이 제일이요 사방 들판의 누런 벼는 앞마을에 가득하여라.

행궁에서 문관과 무관 함께 시험하니 두 고을에서 위열의 은혜 먼저 후앙하누나

 

소자 즉위 11년 정미년(1787) 중원

 

 

 

 

의릉懿陵

의릉은 조선 20대 왕 경종景宗(1688~1724년, 재위 1720~1724년)과 경종 계비 선의왕후(1705~1730년)의

능이다. 1724년(경종 4)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고 현재의 위치(서울 성북구 화랑로)에 능을 마련하였으며, 1730년

(영조 6)에 선의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경종의 능 아래에 부장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능역이 훼손되기 시작

하였는데, 해방 이후에는 중앙정보부가 능역 안에 청사를 짓고 연못을 만들면서 변형되기에 이른다.

의릉은 1996년에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고, 2006년부터 단계적인 복원을 거쳤다.

 

 

 

 

 

 영조가 1750년(영조 26) 8월 중순에 사도세자를 권면하기 위해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열성어제]에 의하면 영조는 이 시를 써서 한 본本은 재실에 보관하고, 다른 한 본은

승선宣이 써서 세자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자가 이를 보고도 감흥이 없다면

가르침을 저버린 것이니 반드시 명심할 것을 당부했다.

 

감회가 일어 시를 지어 우리 세자를 권면하네.

오늘의 감회를 어찌 억누르겠는가 시를 지어 울먹이며 세자를 권면하네.

나를 섬기는 마음을 한결같은 뜻으로 받들어서 [술편]에서 이미 자세하게 말했네.

 

경오년(1750) 8월 중순

 

 

 

홍릉弘陵

홍릉은 조선 21대 왕 영조의 첫 번째 왕비인 정성왕후(1692~1757년) 한 분을 모신 단릉이다. 

1757년(영조 33)에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서오릉 내)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본래 정성왕후의 능을 마련하면서, 오른쪽 자리를 비워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정해 두었다.

그러나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세상을 떠난 뒤 정조는 효종의 구舊 영릉 자리에 영조의 능을

조성하고 원릉元陵이라 이름 붙였다. 이로 인해 홍릉은 정성황후만을 모신 능으로 남아 있다.

 

 

 

 

영조가 1758년(영조 30) 봄에 영조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에 거둥한 감회를 새긴 현판으로

정휘량(1706~1762)이 글씨를 썼다. 영조는 홍릉이 창릉昌陵(예종과 예종비 안순왕후의 능)의 왼쪽

산등성이에 있어 선대의 능과 가까이 있으므로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또한 앵봉이 눈에 들어오며

교하河의 월롱산山이 손가락으로 가리킬 만한 곳에 있다는 점 등의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이곳에 능 자리를 선정한 뜻을 밝혔다. 그리고 백 번 듣는 것보다 몸소 홍릉에 와보니 과연

그 위치를 잘 정했다면서 이와 같은 내용을 재실에서 써서 후세에 보이게 하였다.

 

 

 

 

영릉永陵

영릉은 추존 왕 진종眞宗(1719~1728년)과 진종의 비 효순왕후(1715~1751년)의 능이다.

진종(효장세자)은 영조와 후궁 정빈 이씨의 아들로 1728년(영조 4)에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에 위치한 지금의 자리(파주 삼릉 안)에 효장세자의 묘가 조성되었다.

1751년(영조 27)에 효순왕후가 왕세자빈(효순현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에 효장세자의 묘 옆에

부장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정조의 계승상 양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은 효순왕후로 추승하고 묘 또한 영릉으로 격상하였다.

 

 

 

 

영조가 1745년(영조 21) 8월 첫째 아들 효장세자(진종)의 묘에 와서 느낀 애달픈 심정을 기록한 현판이다.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장례를 치른 기유년(1729)에서 17년이 지난 지금, 효장묘에 와서

옛날을 떠올리니 슬픈 감성이 배가 되어 눈물이 흐른다는 내용이다.

 

기유년(1729)에서 지금까지 17년이 지났으니 이때 묘소를 찾을 줄 어찌 생각했겠는가.

옛날 일을 떠올리니 내 감회는 배가 되고 섬돌 위를 배회하니 눈물이 절로 흐르네

 

을축년(1745) 8월에 짓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제삿날, 능호와 위치 등을 기록한 국기판國忌板이다.

국왕은 태조부터 추존 왕 진종까지, 왕비는 태조비 신의왕후부터 진종비 효순왕후(1715~1751)까지 기록되어 있다.

현판 제작 당시 생존해 있던 영조 계비 정순왕후(1745~1805)의 자리는 영조 옆에 빈 공간으로 남겨져 있다.

 종묘의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조천된 왕의 경우에는 앞에 '조祧' 자를 새겼고, 왕의 재위 기간과 상왕으로 있던

기간, 추존 왕의 경우 추존된 시기도 기록되어 있다. 왕을 낳은 후궁과 일찍 세상을  떠나 보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의 원묘墓까지 기록된 점이 종묘에 걸었던 국기판과 다른 특징이다. 현판 끝부분에 '숭정 기원후

세 번째 계축년 정월' 이라는 간기가 있어서, 1793년(정조 17)1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판은 꽃과 당초 문양을그려 넣은 테두리를 둘러 장식했으며, 진종과 진종비

효순왕후의 능인 영릉이 속해 있는 파주 삼릉에서 이관되었다.

 

 

 

 

 

 

 

융릉隆陵

융릉은 추존 왕 장조莊祖(사도세자, 1735~1762년)와 장조의 비 현경왕후(혜경궁 홍씨, 1735~1815)의 능이다.

사도세자는 1762년(영조 38)에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난 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안장되었다. 처음에는 사도

세자의 묘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으나, 1776년(정조 즉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장헌이라는 존호를 올리고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했다. 1789년(정조 13)에 영우원을 수원 화산(현재 경기도 화성시)으로 이장하고 이름을

헌륭원園이라 하였으며, 1815년(순조 15)에 혜경궁 홍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1899년(광무 3)에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존하였으며,

현릉원도 능으로 격상하여 융릉이라 칭하였다.

 

 

 

 

 

영조가 1750년(영조 26) 9월 13일에 쓴 계석행 현판으로 '옛날의 행차를 계승한다'는 뜻이다.

어목헌禦牧軒에 걸었던 현판으로 왼쪽에 '경오년(영조 26) 9월 13일'이라는 간기가 있다.

영조는 온양온천 행차를 위해 수원부에 머무를 때 '계석행' 세 글자를 써서 현판에 새기고, 어목헌의 동쪽

상방에 걸도록 명했다. 현판의 글씨를 썼던 당시 어목헌은 수원부 관아의 건물이었으며, 왕의 행차 시에

침실로 사용되었다. 영조가 숙종이 지난 정유년(1717)에 온천에 행차했던 일과 어목헌을 침실로 삼았던

선례를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아 '계석행'이라는 세 글자를 친히 쓴 것으로 여겨진다. 어필 현판을

보호하기 위해 여닫이문을 달았으나 일부가 파손된 채 전해지며, 노란색 바탕에

꽃과 당초를  세밀하게 그린 테두리를 둘러 장식했다.

 

 

 

 

1792년(정조 16) 현륭원의 재실인 어목헌에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면서 만든 어진봉안각 현판이다.

정조는 1792년 1월 25일 현륭원을 참배하고 지난해 제작한 자신의 어진을 현륭원 재실에 봉안 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에 어진을 봉안했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의 망묘루와 무덤인 현륭원의 재실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여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표현했다. [정조실록] 「승정원일기」및 「일성록」 1792년(정조 16)5월 25일 기사를 보면, 서유방(1741

~1798)이 강화부의 장녕전長寧殿에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면서 전각의 이름을 만녕전萬寧殿으로 바꾼 예를

들며, 전조의 어진을 봉안한 어목헌의 이름을 고치는 것이 좋겠다며 아뢰었다. 이에 정조가 어목헌 현판은

본부(수원부)에 보관하고 '어진봉안각'이라는 호칭을 새로 지어 쓰도록 했다. 현판의 좌측에 '성상 16년 임자년

 여름에 원임原任 규장각 제학 의정부 좌의정 신 채제공이 받들어 쓰다' 라는 내용이 음각되어 있어, 정조의

명으로 1792년에 채제공이 글씨를 써서 제작한 현판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정조가 서거한 뒤 순조가 1801년

(순조 1)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현륭원 재실에 있던 정조의 어진을 옮겨 봉안했다.

 

 

 

 

정조가 1789년(정조 13) 10월 11일에 수원의 父老 등에게 내린 윤음을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園寢(현륭원)을 수원으로 이장하였을 때, 수원 백성들의 노고가 컸으므로

환곡을 탕감해주고 여러가지 은택을 베풀었다. 또한 수원은 아버지의 원침이 있는 곳이므로 이곳의 백성

들을 가족처럼 생각한다면서, 원침을 잘 보살필 것을 당부하는 윤음을 내렸다.

 

 

 

 

정조가 1790년(정조 14)2월 15일에 현륭원에 참배하고 돌아오면서 수원에 생긴 새로운 고을의 부로父老와

백성들에게 내린 글을 새긴 현판이다. 정조는 현륭원 근처에 사는 백성들의 생활이 넉넉치 못한 사실에

안타까운 심정을 표현하며 여러 가지 혜택을 내렸다. 10년 동안 토지 500결을 급복給復(부역이나 조세

등을 면제하는 것)하고, 곡식을 나누어 주어 백성들의 먹을 것을 풍족하게 해주라는 내용이다.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의 백성들에 대한 정조의 각별한 마음이 담겨 있다.

 

 

 

정조가 1798년(정조 220 8월 초6일에 수원부유수 겸 장용외사 서유린(1738~1802)에게 내린 전령을

새긴 현판이다. 백성들을 고려하여 현륭원의 나뭇가지를 치는 일을 농한기인 10월에 하는 것으로 정식定式을

삼으라는 내용이다.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학자들이 나무를 베고 금수禽獸를 잡는 일을 적절한 시기에 해야

한다고 했던 뜻을 인용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서유린이 썼으며 그는 당시 수원부유수이자 장용영을 지휘

하는 장용외사壯勇外使, 화성행궁을 관리하는 행궁정리사도 겸하였다. 이 전령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현륭원을 관리하는 일은 수언부유슈의 업무 중 하나였다. 한편 테두리에 직사각형의 칸으 구획하고

난초, 모란 등의 꽃 문양을 그려 넣어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테두리 문양

 

 

 

 

정조가 1798년(정조 22) 4월 25일에 수원부유수 겸 장용외사 서유린徐有鄰에게 내린 전령傳令을 새긴 현판이다.

현륭원 주변 나무에 생긴 충해蟲害의 해결 방법에 대해 지시한 것으로, 벌레를 잡는 관원들의 노고를 염려하여

벌레를 사들이는 법식을 만들도록 하였다. 벌레 또한 생명이니 불태워 죽이기보다는 늪으로 내치도록 하였는데,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신과 미물인 벌레에 대한 측은지심을 엿볼 수 있다. 서유린이 글씨를 쓴 현판으로

테두리에는 칠보와 꽃 문양을 그렸는데, 능화창을 구획하여 패랭이, 국화, 모란 등의 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점이 특징이다.

 

 

 

 

테두리 문양

꽃 문양

 

칠보 문양

 

 

 

 

정조가 1796년(정조 20)에 현륭원 화소火巢 내외의 나무와 관련하여 수원부유수 조심태(1740~1799)에게

내린 전교와 1856년(철종 7)에 수원부유수 김도희(1782~1860)가 쓴 후기를 새긴 현판이다. 화소는 능원

주변에 있는 나무를 불태우고 그 밖으로 해자垓字를 파서 능역의 경곌글 표시하는 것으로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설정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의 화소를 직접 답사하거나 신하들에게 살펴보게 하고 그 경계를 몇 차례

개정하였으며, 화소의 경계에 위치한 백성들의 무덤과 인가에 피해를 줄이고 그 보상을 해주는 조치를

취하였다. 현판에는 정조가 지난 번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화소 내외의 백성들 무덤으로 나무 뿌리가

뻗어 피해를 입힌 것을 보고 나무를 뽑도록 하였는데, 즉시 시행하지 않은 자들을 처벌한다는 내용의

전교가 새겨져 있다. 또한 이 전교를 관아 및 재소, 현륭원 근처의 민가 등에 써서 붙이도록 명하였다.

현판의 끝부분에는 정조가 전교를 내린 60년 후인 1856년(철종 7)에 김도희가 짓고 글씨를 쓴 후기가

새겨져 있다. 김도희는 정조의 효심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칭송하며 오래되어 전하지 않는

정조의 전령을 겨우 찾아내어 현판에 새기고, 관아 및 능원, 재소에 걸어

항상 선왕의 지시를 따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용: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현판]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왕실의 현판 5  (0) 2022.06.05
조선 왕실의 현판 4  (0) 2022.06.04
조선 왕실의 현판 3 -1  (0) 2022.06.02
조선 왕실의 현판 2  (0) 2022.06.01
조선 왕실의 현판 1  (0) 2022.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