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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조선 왕실의 현판 2

사묘 현판 私廟 懸版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는 종묘에 봉안하였으나, 왕을 낳은 후궁을 비롯하여 왕위 승계 상 자신은 왕이 되지

못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생부, 요절한 세자와 세손 등의 신위는 별도로 사당[私廟]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1753년(영조 29)에 영조가 사친私親의 사당과 무덤을 궁원宮圓으로 높이는 궁원제宮圓制를 확립하고 국가 의례로

제도화하였다. 숙빈 최씨의 소생인 영조가 자신의 왕위 계승을 확고히 하고 어머니에 대한 효孝를 실천하고자 한

것이다. 사친의 사당은 한양 곳곳에 세워졌으나, 현재는 경복궁 서북쪽에 일곱 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만이

남아 있다. 1870년(고종 7) 고종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후궁들의 사당을 숙빈 최씨를 모신 육상궁 권역에 합사

하였다. 이내 대빈궁과 선희궁은 본래의 자리로 되돌렸다가 1908년(융희 2)에 황실의 제사 제도를 개정하면서

저경궁, 경우궁과 함께 또다시 옮겨 왔다. 1929년에 마지막으로 덕안궁까지 더해져 현재의 칠궁 권역을 이루었다.

그 밖에도 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경우처럼 자신은 왕이 되지 못했으나 아들이

왕이 된 경우, 종가의 옛터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를 위한

사당으로는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신주를 모ㅛ셨던 경모궁이 대표적이다. 또한 태조 이성계와 조상들이 살던

함흥과 영흥에 사당[본궁本宮]을 짓고, 그들의 신주를 모신 뒤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저경궁儲慶宮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이자 추존 왕 원종元宗의 생모인 인빈 김씨(1555-1613)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본래 인빈 김씨의 사우는 종친인 이증(?-1752) 집에 있었는데, 1755년(영조 31)에 한성 남부 회현방 송현에

있었던 원종의 옛집인 송현궁의 신주를 옮기고 이름을 저경궁으로 바꾸었다. 아들이 살았던 옛집이 어머니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후 1908년(융희 2) 제사의 제도를 개정하면서

북부 순화방의 육상궁 경내로 이건되었고, 현재 칠궁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의 아버지이자 추존 왕 원종의 잠저濳邸에 걸었던 장묘고궁 현판이다. 1752년(영조 28)에 영조가 쓴 어필이며,

장묘고궁은 '장묘 章廟(원종)께서 살던 옛 궁'이라는 뜻이다. 현판에 '임신년(1752) 7월 26일에 손 모아 공손히 쓰다' 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가 육궁六宮에 대해 회상한 기록인 <육궁고사六宮故事>의 저경궁 항목에

'장묘고궁, 임신초추壬申初秋'라는 내용이 있으며, 1767년(영조 43) 제작된 '저경궁추기 현판'에는 "근년에 중수할 때

장묘고궁을 친히 써서 걸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따라서 이 장묘고궁 현판은 1752년(영조 28)에 제작된 영조의 어필

현판임을 알 수 있다. 현판은 흑색 바탕에 양각한 글자를 금색으로 칠하였는데, 지금까지도 화려한 금빛이 남아 있다.

 

 

 

 

영조가 1759년 6월 3일에 저경궁에 행차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읊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송현의 옛 궁의 상서로운 기운을 묘사하며, 보잘 것 없는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아

저경궁을 정성으로 봉심한다는 내용이다.

 

 

 

 

1767년(영조 43) 윤7월 24일 영조가 옛 장적帳籍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알게 된 저경궁의 유래 등을 기록한

현판으로 민백홍(1715-?)이 글씨를 썼다. 영조가 지난 20일 장묘(원종)의 고적을 어의본궁於義本宮(상어어궁)의

봉안각에 봉안하고, 한성부의 당상堂上과 낭관郎官을 시켜 장적을 살펴보게 했으며, 원종의 비 인헌왕후와

선조의 후궁이자 원종의 생모인 인빈 김씨의 장적 등을 발견하였다는 내용이다. 또한 근래에 자경궁을 중수할 때

'장묘고궁'이라는 글씨를 직접 써서 인수궁仁壽宮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2건을 써서 1건은 어의본궁의 봉안각에 두고 1건은 저경궁의 북쪽 기둥에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1755년(영조 31) 6월 2일 영조가 원종의 잠저였던 송현궁에 선조의 후궁이자 원종의 어머니인 인빈 김씨의

신주를 봉안하면서, 저경궁으로 칭한 내력 등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인빈 김씨의 신주를 송현궁으로 옮겨

궁호를 저경궁이라 하였으며, 묘墓를 순강원順康圓으로 격상하였다. 이러한 전말을 조명리(1697-1756)에게

글씨를 쓰게하여 재실의 정청正廳에 현판으로 걸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외에도 <승정원일기>

1761년(영조 37) 2월 14일 기사를 보면, 영조가 윤동섬(1710-1795)에게 저경궁 현판 제작을 명하면서, 을해

년(1755)에 조명리가 쓴 현판을 따라 흰 바탕에 칠자로 만들도록 지시했는데, 그 본보기가 된 것이

바로 이 현판이다. <육궁고사>의 저경궁 항목에도 현판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영조가 1761년(영조 37) 춘분일에 저경궁의 향대청에 나아가 춘향제를 지내고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는 1755년 인빈 김씨의 시호를 경혜敬惠로 추상追上하고 친제를 행하였는데, 7년 뒤에 다시 저경궁을

방문하여 친히 춘향제를 행하니 추모하는 마음이 든다면서 회포를 읊었다. 또한 이와 같은 글을 윤동섬에게

글씨를 쓰게하고, 저경궁의 향대청에 현판을 걸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육상궁毓祥宮

육상궁은 숙종의 후궁으로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1670-1718)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725년(영조 1) 경복궁 북쪽의 한성 북부 순화방(현재 종로 궁정동)에 지어졌으며, 처음에는 숙빈묘라고 불렀다.

1744년(영조 20)에 묘호를 육상묘로 고쳤고, 1753년(고종 7)에 사친의 사당과 무덤을 궁원으로 격상하면서

다시 육상궁으로 승격되었다. 1870년(고종 7)부터 다른 사친들의 사당을 육상궁 경내로 옮겨 합사를 거듭하면서

현재의 칠궁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육상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왕 진종(효장세자)의 어머니인 정빈 이씨

(1694-1721)의 신주를 모신 연호궁과 하나의 사우 안에 모셔져 있으며, 1763년(영조 39)에

영조가 친히 쓴 '육상묘 현판'과 한 건물에 걸려 있다.

 

 

 

영조가 1726년(영조 2) 11월 6일에 낳아주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숙빈묘를 참배하고 지은 칠언절구의

시를 새긴 어제어필 현판이다. 신축년(1721)은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난 지 3주기가 되는 해였는데, 3년 상을

마친 히후 6년이 지나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시로 읊었다. 현판의 좌측 아래에는 '운한雲翰'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이는 '어묵운한御墨雲翰'을 일컫는 말로, 임금의 글씨를 새겼다는 의미이다. 테두리는 꽃과 당초 문양을

그려 넣고, 가장자리에 굴곡을 주어 조각한 점이 특징이다.

 

 

 

 

 

영조가 갑술년(1754)에 즉위 30주년이자 회갑을 맞아 육상궁에 참배하고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실록> 1754년(영조 30) 11월 6일 기사를 보면, 영조가 돌아가신 어머니 숙빈 최씨의 생신을 맞아 육상궁에

들렀다가 돌아오면서, 풍수지탄風树之嘆의 눈물을 머금고 기회문記懷文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바로 이 현판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는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난 3주지인 신측년을 생각하며, 부모님을 봉양하고자 하나

이미 돌아가셔서 효성을 다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글을 지었다. 또한 이와같은 내용을 영조의 사위인

금성위 박명원(화평옹주의 남편)에게 쓰게 하여 육상궁의 향대청 동쪽에 걸도록 하고, 월성위 김한신(화순옹주의

남편)에게 그 옆에 '홍유심興惟深' 세 글자를 큰 글씨로 쓰게 하니 마음에 회포가

갑절이 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육상궁의 향대청에 걸었던 '흥유심' 현판으로 '깊이 생각하다'는 뜻이다.

영조의 사위 월성위 김한신(화순옹주의 남편)이 썼다.

현판의 테두리는 분홍색 바탕에 꽃과 당초 문양을 그려 장식했고, 가

장자리에는 사롱을 고정했던 편철이 있다.

 

 

 

 

1758년(영조 34) 영조가 자신의 생일인 9월 13일 아침에 진전眞壂, 낮에 효소전孝昭壂(인원황후의 혼전)

저녁에 육상궁을 참배한 뒤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자식된 자 모두가 영조 자신을 귀감으로 삼아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홍무정운洪武正韻의 서체로 현판에 새겨서 풍월헌風月軒의 서쪽

에 걸도록 명하였는데, 바로 이 현판으로 추정된다. 풍월헌은 육상궁의 부속 건물로 제례를 준비하는 재실

이자, 1772년(영조 48)에 숙빈 최씨의 시책諡冊과 시보諡寶를 봉안했던 건물이다. 현판은 엷은 청색 바탕에

꽃과 당초 문양이 그려진 테두리를 갖추었으며, 뒷면에는 '本'이라는 묵서가 남아 있다.

 

 

 

 

1766년(영조 42) 3월에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가 숙빈 최씨의 사당에 육상궁 내 냉천정冷泉亭에서

지은 시를 새긴 현판으로 추정된다. 영조를 모시고 정자에 올라 바라본 아름다운 봄의 풍경을 시로 읊었다.

 

오늘 군왕을 모시고 정자에 올라 풀이 고운 것을 보았네.

봄 산에는 기이하고 빼어난 것이 많으니, 벌과 나비가 꽃향기에 쉬어가네

 

병술년(1766) 늦봄에 어가를 모시고 육상궁을 알현함에 이 정자에 올라 삼가 짓다.

 

 

 

 

선희궁宣禧宮

선희궁은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1696-1764)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764년에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한성 북부(현재 국립서울농학교 자리)에 사당을 짓고, 시호인 의열義烈을

따라 의열묘(의열궁)라고 불렀는데, 1897년(광무 1)에 원래의 위치로 되돌렸고, 1908년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

현재 칠궁에 위치하고 있다. 선희궁은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 박씨(1770-1822)의 신주를 모신

경우궁과 하나의 사우 안에 모셔져 있다. 현재 국립서울농학교 안에는 육상궁으로 옮겨가기 전 

본래의 선희궁 터에 건물 한 채가 남아 있다.

 

 

 

 

영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선희궁에 걸었던 평락정 현판으로, '화평하고 안락한 정자'라는 의미이다.

현판 뒷면에 '경술계춘' 이라는 음각으로 보아 1730년(영조 6) 영조가 쓴 어필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에 1899년 7월 27일-9월 28일 기사에 의하면,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경모궁에서 종묘로 부묘하면서, 빈 공간이 된 경모궁의 망묘루 건물을 선희궁으로 이건하였다.

이때 선희궁 문 처마에 걸려 있었던 기존의 어필 편액 중에서, 평락정 편액을 이건한 망묘루 건물에 걸고

다섯 임금(정조, 순조, 익종, 현종, 철종)의 어진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평락정 현판은 본래의

건물(평락정)에서 선희궁 문을 거친 후, 이건해 온 망묘루 건물로 옮겨 걸게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판의 테두리에는 칠보 문양을 그려넣고 가장자리에는 굴곡을 주어 조각했다.

 

 

 

 

1764년(영조 40)에 영조가 영빈 이씨에게 하사한 '수의보사守義保社' 네 글자를 새긴 어필 현판으로

'의義를 지키고 사직을 보전하다'는 뜻이다. 1762년 임오화변壬午禍變 당시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자신의 결단을 따랐던 영빈 이씨를 기리기 위해 친히 쓴 것이다. 현판 좌측에

'내가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해인 갑신년(1764) 9월 초1일 영조가 영빈묘에 '수의보사' 네 글자를

써서 걸었는데, 이는 영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묘와 나라를 위해 후세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외에도 영조는 <표의록表義錄(1764)을 간행하여 사사로운 연을 끊고 나라를 위하였던

영빈 이씨의 의열義烈을 만세에 전하도록 하였는데, 영조의 이와 같은 행위는 아들을 제거한 일이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는 정당성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빈 이씨의 사당인 선희궁에 걸었던 태안헌泰安軒 현판으로, '크게 평안한 軒'이라는 뜻이다.

현판 좌측에 '을유년 초겨울'이라는 간기가 있어, 영빈 이씨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765년(영조 41)에

제작된 영조의 어필로 추정된다. <승정원일기> 1899년(광무 3) 7월 27일 기사를 보면, 고종이 영빈 이씨의

시호를 올리는 문제를 윤용선(1829-?)에게 선희궁의 문 처마에 걸려 있는 어필 편액 중 쓸 만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자, 태안현 현판이 있다고 답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태안헌 현판은 본래 건물(태안헌)에서 선화궁

으로 옮겨 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대 선희궁을 육상궁 경내로 옮겼다가 다시 본래의 선희궁

자리로 되돌리는 과정에서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제삿날[국기일], 능호와 위치 및 당시 왕실 구성원의 생일 등을 기록한 현판이다.

먼저 국기 부분에 태조부터 경종 대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영녕전으로 조천된 왕과 왕비는 제외되었다.

이어서 탄일誕日 부분에 당시 생존해 있던 왕실 구성원인 대왕대비전(숙종 계비 인원왕후), 왕대비전

(경종 계비 섡의왕후), 대전(영조), 중궁전(영조비 정성왕후), 세자궁(효장세자)의 생일이 기재되어 있다.

이를 통해 효장세자가 세자로 책봉된 1725년(영조 1)에서 사망한 1728년(영조 4) 사이에 제작된 현판으로

추정된다. 사기 부분에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 영조의 후궁이자 효장세자의 사친인

정빈 이씨의 기일을 기록하였고, 현판 끝부분에 영조의 국구인 달성부원군 서종제(1656-1719)의

기일까지 적혀 있는 점이 매우 이례적이다.

 

 

 

 

경우궁景祐宮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1770-1822)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1823년(순조 23)에 창경궁의 도총부에 수빈 박씨의 혼궁魂宮을 짓고 이름을 현사궁顯思宮이라 하였는데

사친의 신주를 궁궐 안에 모신 전례가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로 1824년(순조 24) 한성 북부 양덕방陽德坊의

용호영龍虎營 자리(현재 종로 계동의 현대사옥)에 별묘別廟를 지어 신주를 옮기고 경우궁이라 하였다.

1884년(고종 21)갑신정변이 일어났을 때 고종이 이곳에 피신하였는데 엄숙한 사당에서 척신들이 죽임을

당하는 곤욕을 겪자, 이듬해 경우궁을 육상궁 근처의 순화방 인왕동(현재 종로구 옥인동)으로 옮겨 세우도록

명하였고, 1886년(고종 23) 9월에 이르러 기건 공사가 완료되었다. 1908년에 제사의 제도가 개정되면서

경우궁은 다시 육상궁 경내로 옮겨져 현재 칠궁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를 모신 선희궁과 하나의 사우 안에 모셔져 있다.

 

 

 

 

「정당이하제처正堂以下諸處」 / 현사궁별묘영건도감의궤 顯思宮別廟營建都監儀軌 

 

1824년(순조 24)에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현사궁 별묘)을 영건하고

신주를 봉안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정당과 부속 건물을 그린 도설을 통해 경우궁의 규모와

건물 배치를 알 수 있다.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신주를 모신 경우궁의 현판이다.

현판의 테두리에는 붉은색 바탕에 칠보 문양을 그렸고, 가장자리에 턱을 내어 사롱을 고정하기 위한

편철을 둘렀는데, 현재 편철 안에 사롱 일부가 확인된다. 또한 좌우에 경첩도 남아 있어 여닫이문까지 달아

어필 현판을 이중으로 보호했음을 알 수 있다.

 

 

 

 

上 성일헌 현판. 순조 어필

下 일심재 현판. 순조 어필

 

 

 

 

낙유당 현판

 

 

 

 

<경우궁도>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의 도면이다. 창경궁의 도총부에 봉안되어 있던

수빈 박씨의 신주를 궁궐 밖의 용호영 자리에 사묘를 지어 이봉한 후 그린 것이다.

 

 

 

 

함춘문과 경모궁지(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안)

경모궁景慕宮

경모궁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1764년(영조 10) 봄 한성 북부 순화방에 사당을 세웠으나,

같은해 동부 숭교방(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사도묘라고 부르다가 영조가 사도세자

에게 '수은垂恩'이라는 묘호를 내리면서 사당의 이름을 수은묘라 칭했다. 1776년(정조 즉위) 정조가 즉위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면서, 무덤인 수은묘는 영우원永祐圓으로, 사당인 은은묘도 개축하여

경모궁으로 격상하고 정조의 친필 현판을 달았다.

 

 

 

 

사도세자의 신주를 봉안한 수은묘에 걸었던 영조의 어제어필 현판이다.

"어필, 이 사당에 자애로운 은혜를 온전히 한다 눈물을 삼키며 특별히 써서 여기에 걸어두니 엄히 방비하라"

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뒤주에 가두어 죽인 아들 사도세자에 대한 애틋한 심정과 그의 신주를 모신 수은묘의 방비를

엄히 하라는 영조의 당부를 담고 있다. 홍경모(1774-1851)의 문집 <관암전서>에는 이 현판이 진본으로 수은묘에

있으며, 다섯 글자는 두 行으로 새기고, 글자는 옻칠하고 바탕판은 흰색을 바르며, 테두리는 삼록三碌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문집에 기록된 현판의 재료와 색깔 등이 현재의 현판 상태와 매우 유사하다. 1776년(정조 즉위)

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수은묘를 개축하고 경모궁으로 격상하였는데, 현판 뒷면에 경모궁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景'이라는 묵서가 남아 있다. 각종 의궤에 따르면 구舊 정당의 정문 위에 영조의 어필 현판이 있다고

하는데, 이 현판을 기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수은묘도설」 『수은묘영건청의궤(垂恩廟營建廳儀軌)』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뒤 1764(영조 40)에 건립된 수은묘의 배치도이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중건한 경모궁에 비해 규모가 작다.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신주를 모신 경모궁에 걸었던 정조의 어필 현판이다.

 

 

 

 

 

본궁전도설 本宮全圖設   <景慕宮儀軌>

정조가 즉위한 뒤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승격하고 개건한 배치도이다.

경모궁 현판을 걸었던 외대문을 비롯하여, 정당과 이안당(예전의 정당), 재실, 망묘루, 제기고,

악기고 등의 여러 건물이 묘사되어 있다.

 

 

 

 

 

영회각 현판 (조선 후기)

 

영회각소지 현판 (조선 후기)

 

조선시대 왕실 관련 사당에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회각 현판'과 '영회각소지 현판'이다.

현판의 내용을 보면, 고모姑母의 효성스러운 성품과 고운 용모를 칭송하고, 사우 곁에 영회각을 세워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곳에서 재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영회각이 어느 사당의 새실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왕의 고모라고 한다면 공주나 옹주를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

 

 

영회각 소지

효는 모든 행실의 근원이며 요순의 도는 효제孝悌일 따름이다.

옛 사람 중에 색동옷을 입고 그 부모를 즐겁게 한 사람도 있고 <시경>의 「육아」를 외우며

눈물을 멈추지 못한 사람도 있으니 그 살아 섬기는 정성과 돌아가심에 추모하는 정을

가히 천년 뒤에도 상상할 수 있다. 오직 우리 고모姑母가 하늘이 부여한 지극한 성품으로

효성이 우뚝하고 남달라서 그 부모님 곁에 있으면서 얼굴빛을 기쁘게 하고 용모를 곱게하여

반드시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것에 힘 썼으니 그 즐거움 가득하고 화기애애하였다

갑신년 이후로 그 효를 다할 수 없어 이에 따로 사당의 곁에 누각 하나를 짓고는 늘 제사 때마다

반드시 이곳에서 재계를 다하였다. 때때로 다시 가서 머물며 우러러 의지하는 마음을 부쳤으니

아마도 일찍이 하루도 효를 잊지 않은 것이다. 비록 옛 사람의 효가 지극하다 할지라도

어찌 다시 우리 고모보다 더 함이 있겠는가?

내가 이에 감탄을 이기지 못하고 그 누각에 이름을 지어 '영회永懷'라고 하였으니

오직 그 뜻을기술하고 그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고모의 덕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이 누각을 보면 또한 그 효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영조가 1766년(영조 42) 동짓날 3일 전에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를 추억하며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가 13세였던 병술년(1706)에 영빈 김씨를 모시고 잔치에 갔는데, 다시 병술년(1766)을 맞이하여

영빈을 추억하며 특별히 '억성흥회億昔興懷(옛일을 추억하니 회포가 일어나다)' 네 글자를 써서 걸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영빈 김씨의 5촌 친척인 김상복(1714-1782)으로 하여금 기문을 써서 걸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실록> 1766년(영조 42) 11월 18일 기사에 의하면, 영조가 영빈방에 들렀다가 의열궁으로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날의 감회를 현판에 새겨 영빈방에 걸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영빈 김씨는 서인의 노론

가문 출신으로 1686년(숙종 12)  3월에 처음 숙의淑儀에 봉해졌으며, 1689년(숙종 20) 기사환국으로 복권되었다.

1702년(숙종 28) 정1품의 영빈이 되었으나 숙종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영조는 영빈을 자신의 어머니나 다

름 없는 존재로 여겼으며, 영빈 사후에도 영빈방을 찾아 추모하였다. 영빈방은 영빈 김씨의 생전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죽은 뒤에는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사당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가 1795년(종조 19) 4월 26일에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와 어머니 의혜왕후를 영흥본궁에 향사하고, 신하들

79명과 함께 지은 연구시와 그 전말을 기록한 현판이다. 정조는 환조가 태어난 지 여덟 번째 회갑이 되는 해를

맞아 영흥본궁에 제관을 보내 추제(위판을 추가하여 예를 올림)를 섭행하게 하고 홍낙성, 유언호, 채재공, 심환지

정약용 등의 신하들과 조상의 공적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 이병모가 전교를 받들어 썼으며,

현판에 새겨진 내용은 <홍재전서>에 「영흥본궁에 향사하는 날에 연구를 짓다. 소서小序를 아울러 쓰다」라는

제목으로도 수록되어 있다. 영흥본궁은 태조가 흑석리에 살 때 별에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태조 사후에는 태조와

태조의 비 신의왕후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695년(정조 19)에는 환조와 의혜왕후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영흥본궁은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에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불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영흥본궁의 본전 유리건판 / 20세기 초

 

 

 

인용: 국립고궁박물과 편찬 <조선왕실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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