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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조선 왕실의 현판 3 -1

능원묘 현판 陵園墓 懸板

 

조선 왕릉은 조선 시대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존재였던 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왕릉은 왕과 왕비가 사후에 묻히게 되는 영혼의 안식처로 생전에 기거했던 궁궐에 버금가는 명당에 조성하였다.

왕릉의 위치 선정 뿐만 아니라 건설과 의례의 전반적인 과정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에 규정된 예법에 따라

엄격하게 진행되었다. 또한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을 선례로 삼아 능침과 재실 및 정자각 등의 부속 시설, 설물의 규모를

정하였다. 국왕은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차례 왕릉에 참배하여 유교적 의례를 거행하고 선왕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왕의 능행陵行은 왕권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는 공식적인 행사이자 궁궐 밖에 있는 백성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

이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영조는 궁원제宮園制를 확립하여 왕의 사친 私親(왕의 생부나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인 묘墓를 원園으로 높였으며, 왕자와 공주, 폐위된 왕과 일반 후궁들의 무덤을 묘라고 칭했다. 조선왕릉은

북한에 소재한 2기를 제외한 40기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건원릉健元陵

건원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1335~1408, 재위 1392~1398)의 능이다.

태조는 먼저 세상을 떠난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1356~1396)의 능인 정릉貞陵에 함께 묻히기를 원하며,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아들 태종은 이를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능역)에 단릉으로 조성하였다. 건원릉은 조선왕릉의 표본으로 고려 공민왕릉(현릉玄陵)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곡장曲墻(봉분의 동·서 북쪽에 두른 나지막한 담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고 석물의

조형과 배치에 변화를 주었다. 또한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심었는데, 이는 고향

함흥을 그리워하며 고향의 억새풀로 무덤을 덮으라는 태조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고 전해진다.

 

 

 

 

 

 

 

정조가 1784년(정조 8) 건원릉 수리 공사를 친히 보러 갔을 때, 재실 벽에 걸려있는 영조의 어제시를 보고 화답한

시를 새긴 현판이다. 정조가 석물 공사의 감독을 마친 후, 지난 갑신년(1764) 봄에 영조가 정자각을 수리하고 지었던

시에 감모感慕의 마음을 담아 화답시를 지었다는 내용이다. 정지검(1737~1784)이 명을 받아 현판의 글씨를 썼으며

영조의 시 아래에 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는 1764년(영조 40) 2월 12일

건원릉 정자각에 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보수 공사를 명하였으며, 25~26일에 건원릉으로 행차하여 재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공사를 감독했다. 

 

 

 

 

건원릉 정자각

 

 

 

1891년(고종 28) 5월에 왕세자(순종)가 고종을 대신하여 건원릉을 참배하고 영조와 정조의 어제시에 차운한 시를 새긴

현판이다. 두 선왕이 지은 시의 아름다움과 나라를 세운 태조의 공을 찬하는 내용으로 김성근(1835~1919)이 글씨를

썼다. 왕세자가 건원릉에서 보았던 두 선왕의 시는 재실 벽에 위아래로 걸려 있던 영조의 시와 그것을 보고 화답한

정조의 시를 새긴 현판으로 추정된다. 

 

 

테두리 문양

 

 

 

 

정릉 貞陵

정릉은 조선의 1대 왕인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이다.

태조는 1396년(태조 5)에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취현방聚賢坊(현재 영국대사관 근처)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즉위 후 다른 능과 달리 정릉만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 9) 현재의 위치(서울시 성북구)

이장하였고, 옛 정릉의 석물을 홍수로 무너진 청계천의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기도 했다.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가

후궁으로 강등되면서 능은 묘로 격하되기도 했으나, 1669년(헌종 10) 송시열의 상소로 왕비로 복위되어

종묘에 부묘되었으며, 무덤도 왕후의 능으로 복원되었다.

 

 

 

1900년(광무 4)에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의 재각을 중건한 내용을 기록한 현판이다.

1900년(광무 4) 4월에 고종이 정릉을 참배하고 재각(재실)에 머물렀는데, 좁고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아

먼지가 가득하므로 10만 관貫을 들여 중건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승정원일기] 1900년(광무 4)

4월 19일 기사를 보면, 고종이 정릉을 참배한 뒤 재실로 갔다는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재각 중건 후 4개월

뒤인 8월에 정릉참봉 김경중(1863~1945)이 이와 같은 전말을 글로 짓고 현판의 글씨를 썼다.

 

 

 

 

헌릉獻陵

헌릉은 조선의 3대 왕인 태종(1367~1422년, 재위 1400~1418)과 태종비 원경왕후(1356~1420)의 능이다.

1420년(세종 2)에 원경왕후가 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현재 서울시 서초구)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태상왕으로 세상을 떠나고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묻히면서 쌍릉이 되었다.

 

 

 

 

영조가 1733년(영조 90 9월 10일에 태종과 태종비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을 참배한 감회를 새긴 현판이다.

갑술년(1694)에 헌릉을 찾은 뒤로 벌써 40년이 지났으며, 능에 자주 참배할 수 없었으나 오늘 오게 되어

다행이라는 내용이다. [영조실록] 1733년(영조 9) 9월 10일 기사에 따르면, 숙종이 갑술년(1694)에 헌릉

을 전알한 뒤 40년이 지나 영조 자신이 다시 오게 되었는데, 숙종이 헌릉을 방문했던 갑술년은 영조가

태어났던 해라서 감회가 배가 된다고 하였다. 현판에 '계축년(1733) 가을 9월 11일'이라는 간기가 있어

헌릉에서 환궁하며 쓴 글로 여겨진다. 헌인릉의 현판을 등사謄寫한 기록인 [헌인릉현판](1934)에

현판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어제어필. 헌릉 안향청

 

갑술년(1694)에 헌릉에 행행한 뒤로 40년이 지났으니,

이 날 헌릉을 배알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예로부터 이 능을 행행한 일이 매우 드물었으니,

예를 마치고 시를 지어 선조를 그리워하네

 

계축년(1733) 가을 9월 11일

 

 

 

 

1768년(영조 44) 왕세손(정조)이 영조를 모시고 헌릉에 갔다가 환궁하며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현판 뒷면에는 '임신년(1932) 7월 9일 참봉 이병욱이 개수했다'는 현판의

수리 이력을 기록한 묵서가 있다. 

 

 

 

 

 

 

 

 

1799년(정조 23) 8월 정조가 헌릉에 참배했을 때 지은 서문과 칠언율시를 새긴 현판으로 서유린(1738~

1802)이 글씨를 썼다. 정조가 지난 무자년(1768) 왕세손 시절에 영조를 따라 헌릉을 참배하고 지었던

어제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조상에게 예를 행하고, 선왕의 큰 덕과 상서로움

이 천지에 두루 미친다는 내용이다. [정조실록] 1799년(정조 23) 8월 19일 기사에 의하면, 정조가 동궁에

있을 때인 무자년(1768)에 영조를 모시고 헌릉으로 나아가 직접 제사를 지내고 재실에서 칠언율시 1편을

지은 바 있다. 그리고 다시 헌릉에 행차하여 지난 무자년을 회상하며 당시의 운자韻字로 또 칠언율시를

짓고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시를 올리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현판의 내용과 일치한다.

 

 

 

 

정조가 1799년(정조 23) 8우러 19일 헌릉을 참배했을 때 내린 윤음을 새긴 현판으로 홍양호(1724~1802)가

글씨를 썼다. 32년 만에 헌릉을 다시 찾아 제사를 지내면서 태종의 은덕을 높이 찬양하였다. 또한 현판에는

태종비 원경왕후의 아버지인 여흥부원군 민제(1339~1408)의 후손 민치검의 품계를 올려 재랑직에 임명

하고, 제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에게 상을 내려 노고를 치하한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1800년(정조 24)에 정조가 내린 절목을 새긴 현판으로, 헌릉의 능역에서 벌목을 금지하고 능을 보호라라는

내용이다. 1800년(정조 24) 5월 22일에 광주의 유생 이의가李義可가 헌릉 능역에서 나무를 몰래 베어가는

일이 발생한다고 상소를 올리자, 정조가 광주유수 김사목(1740~1829)에게 진위를 조사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더불어 나무를 기르는 절차와 벌목의 금지, 능역 순찰과 보고 체계 등 능침 보호와 관리에 폐단

이 없도록 여러 조항을 정하였다.

 

 

 

 

영조가 1749년(영조 25) 5우러 초순에 각 능의 재관들이 지켜야할 사항에 대해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으로

한성부우윤 이철보(1691~1770)가 글씨를 썼다. 영조는 제향 절차나 능의 수호 등과 관련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할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현판에 새겨 걸도록 하였는데, 이 현판에는 크게 다섯 가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재랑齋郞(재관)은 입직할 때 심신을 깨끗이 할 것, 둘째 능사陵司는 제기를 씻고 보관하는 일을 잘 관리

하고 아랫 사람에게 일임하지 말 것, 셋째, 능사와 전사관은 진설과 철찬(음식을 거둠)을 행하고 제물을 살피는 

데 실수가 생기면 반드시 상부에 보고하여 제사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다섯째, 능침을 관리하는 수복守僕


및 수호군守護軍을 구휼하라는 내용이다.

 

 

 

 

 

 

 

 

 

 

 

 

국기판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제삿날[국기일國忌日], 능호陵號와 위치 및 당시 생존해 있던 왕실 가족의 생일을

기록한 현판이다. 국기 부분에 국왕은 태조부터 현종까지, 왕비는 숙종 계비 인현왕후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생존해 있던 숙종의 자리는 사후에 새길 것을 감안하여 빈 공간으로 남겼다. 종묘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조천遷한 경우에는 묘호 앞에 '조祧'자를 새겼다. 이어서 당시 생존해 있던 숙종, 숙종 계비 인원왕후, 왕세자

(경종), 빈궁(경종비 단의왕후)의 탄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현판의 말미에 '갑오년 2월에 새겼다'는 간기가

남아 있어, 1714년(숙종 40)에 제작한 현판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단종의 기일이 10월 24일이 아닌 10월 14일,

덕종의 왕후도 소혜왕후가 아닌 소헌왕후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광릉

광릉은 조선의 7대 왕인 세조(1417~1468)와 세조비 정희왕후(1418~1483)의 능이다.

1468년(예종 즉위0에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주엽산 아래에 조성하였다. 본래 이곳은 동래 정씨

정창손(1402~1487)의 선대 묘역이 있었으나 세조의 능을 조성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장시켰다.

그 후 1483년(성종 14)에 정희오아후가 돌아가시자 세조의 능 동쪽 언덕에 봉분을 만들었다.

 

 

 

영조가 1754년(영조 30)에 세조와 세조비 정희왕후의 능인 광릉을 참배한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올해는 영조 자신이 회갑을 맞이한 해)1754)이며, 이듬해인 1755년 봄에 표식을 세워 세조를 추모하고

현판을 만들어 재실의 북쪽 벽에 걸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1755년(영조 31)은 세조가 즉위했던 해

(1455)에서 다섯 번째 회갑이 되는 을해년이므로, 이를 기념하여 광릉에 표식을 세우게 한 것이다.

 

 

 

 

1792년(정조 16) 정조가 광릉 행차를 위해 양주 행궁에 묵으면서, 양주와 포천의 부로父老들과 백성들에게

내린 글을 새긴 현판이다. 이 글에서 정조는 양주와 포천이 많은 인재가 나온 길지이며, 세조의 능인 광릉과

가까운 지역이므로 의미가 있는 곳이라 평가하였다. 그리고 두 고을의 부로와 백성들에게 농사의 형편을 물으며

민심을 살폈다. 또한 정조가 유생과 무사들의 시험을 열어주고 100살이 넘은 자에게는 쌀과 고기를 추가로

지급하며 백성들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는 등의 은혜를 베풀겠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판의 글씨는 서정수(1749~1804)가 썼으며 테두리에는 꽃과 당초 문양을 그려 넣었다.

 

 

 

 

1792년(정조 16) 9월 14일에 정조가 광릉을 참배한 후 광릉 주변에서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해 내린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홍살문을 지나갈 때는 소란스럽게 하지 말 것과 백성들이 축석령祝石嶺에 무덤을 만들고 화전을

일구는 일을 금할 것, 능의 조포사造泡寺(능의 제향에 쓰이는 두부를 만드는 사찰) 승려들의 폐단은 금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이 전교를 재소(재실)에 게시하도록 명하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현재 동일한 내용의 현판이 두 점 전해지는데, 한 점은 서정수가 썼고 다른 한 점은 누구의 글씨인지 알 수 없다.

 

 

 

 

좌) 앞면  우) 뒷면

세조와 세조비 정희왕후의 능인 광릉 재실에 걸었던 광재光齋 현판이다.

광재는 '광릉의 재실'이라는 뜻으로, 현판 앞 · 뒷면에 각각 초서체와 해서체로 글씨를 새겼다.

현판의 모서리를 활[弓] 모양인 궁양형弓讓形으로 깎아 장식했다.

 

 

 

 

정조가 1792(정조 16)에 광릉을 참배하고 신하들과 지은 연구시聯句詩를 새긴 현판으로,이병모

(1742~1806)가 글씨를 썼다. [승정원일기] 1792년 9월 12일 기사에 따르면, 정조가 시의 앞과 뒤에

'지세는 하늘과 같이 크고, 만년토록 대업이 무궁하게 열리도다' 라는 구절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이 현판의


처음과 마지막 구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정조 어제시의 기起와 결結 사이에 채제공, 박종악, 이병모,

서정수 등 52명의 신하들이 지은 연구시가 새겨져 있다.

 

 

 

 

경릉敬陵의 덕종릉

경릉은 추존 왕 덕종德宗(1438~1457)과 덕종비 소혜왕후(1437~1504)의 능이다.

덕종은 세조와 세조비 정희왕후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둘째 아들(성종)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후 1475년(성종 6)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묘(의묘懿墓)가 조성되었고, 이후 덕종으로 추존되면서

의묘에서 경릉으로 승격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소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덕종의 능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5개의 조선왕릉으로 이루어진 서오릉西五陵(경릉, 창릉, 명릉, 익릉, 홍릉)

경내에 있으며, 서오릉에서 가장 먼저 조성되었다.

 

 

 

 

창릉昌陵의 예종릉

창릉은 조선의 8대 왕 예종睿宗(1450~1469), 재위 1468~1469)과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1498)의 능이다.

세조와 세조비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인 예종은 형인 의경세자(덕종 추존)가 세상을 떠나자 왕세자에 책봉된

왕위에 올랐다. 1469년(연산군 4)에 안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9년(성종 1)에 의묘(훗날

경릉으로 격상) 북쪽에 능을 마련하였고, 1498년(연산군 4)에 안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9년

(연산군 5) 예종의 능 동쪽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현재 서오릉 능역 안에 위치해 있다.

 

 

 

 

 

정조가 1798년(정조 22) 8월 29일에 경릉敬陵(덕종과 덕종비 소혜왕후의 능)과 창릉昌陵(예종과 예종 계비인

안순왕후의 능)에 참배하고 내린 윤음綸音을 새긴 현판이다. 두 현판 모두 이만수(1752~18200가 글씨를 썼다.

이 글에서 정조는 덕종이 태어난 해(1438)와 같은 간지인 무오년(1708)을 맞이하여, 길일을 택해 경릉을 참배

하고 창릉으로 나아가 덕종과 예종의 업적을 칭송하였다. 도한 덕종의 국구國舅(왕의 장인)와 예종의 국구 후손

들을 우대할 것을 명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두 현판의 내용은 동일한데 앞 부분에 새겨진 제목에 따라

각각 경릉과 창릉의 재실에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묘燕山君墓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왕으로 폐위된 연산군(1476~1506)과 거창군부인(1472~1537)의 묘이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그러나 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대해 알게

후 폭정을 일삼아 1506년(중종 1) 중종 반정으로 폐위되었고,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 역병으로 사망하였다.

 본래 강화도 교동에서 장사를 지냈으나, 1512년(중종 7)에 거창군부인이 자신의 외조부 임영대군(세종의 넷째 아들)

의 땅이 있는 양주 해등촌(현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을 요청하였고, 이듬해인 1513년(중종 8) 왕자군의

예로 현재 위취에 개장되었다. 이후 1537(중종 32) 거창군부인이 사망하자 연산군묘 옆에 부장되었다.

 

 

 

 

1903년(광부 7) 8월에 연산군묘의 묘각을 중건한 사실을 기록한 현판이다.

연산군묘의 묘사가 세월이 흘러서 무너졌음에도 수리하지 못하였는데 양주군수 홍태윤이 고종에게

건의하여 보수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또한 연산군 외손자인 구엄의 후손들이 대대로 묘를 지켜 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홍태윤의 은혜에 감복하여 이민지(1833~?)가 기문을 지었는데, 그 역시 구엄의

외후손이다. 현판은 김의혁의 글씨이며 연산군묘의 재실에 걸려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영조가 1774년(영조 50) 5월 14일과 1775년(영조 51) 3월 4일에 네 묘(연산군묘, 회묘, 성묘)의 치제致祭와

관련하여 내린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먼저 앞의 전교는 네 묘소의 치제일을 비롯하여, 제수와 수묘군守墓軍의

공급, 묘의 보수에 대한 것이다 이듬해 전교즌 작년의 하교를 상고하며 치제일을 수정하여 정식으로 삼을 것,

봉사奉하는 사람에게 관례에 따라 관직을 주고 관대冠帶를 착용하게 하라는 등의 내용이다.

이 현판은 연산군묘 재실에 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효릉孝陵

효릉은 조선 12대 왕인 인종(1515~1545년, 재위 1544~1545년)과 인종비(1514~1577)의 능이다.

1545년에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능을 조성하였으며, 인성왕후가 1577년(선조 10)에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1578년(선조 11)에 인종의 능 옆에 봉분을 조성하여 쌍릉이 되었다.

현재 서삼릉 능역 안에 희릉, 예릉과 함께 위치해 있다.

 

 

 

 

영조가 1741년(영조 17) 8월에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을 참배한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요 임금과 순 임금의 태평성대에 빗대어 선왕의 성덕을 찬양하는 영조의 어제시가 새겨져 있다. 숙종이 효릉에

방문했던 을해년(1695)에 이어 영조가 두 번째로 행차하게 된 감회를 한 편의 시로 지어 재소에 걸어둔다는 내용으로

효릉별검孝陵別檢이었던 이민곤(1695~1756)이 현판의 제작을 감조監造하였다.

 

요순堯舜과 조종祖宗을 본받고자 하니

아! 임금의 덕이 하늘과 땅과 같구나

옛적 훌륭한 일 따라 행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창오蒼梧의 새벽 해에 안개 오히려 짙네.

 

황조 숭정 무진 기원후 114년인 신유년(1741) 8월에 효릉을 배알하였는데, 이는 곧 47년 만의 두 번째 행차이다.

을해년(1695)을 미루어 생각하니 감회가 더욱 간절하던 가운데 성조의 어필을 받들어 보니 더욱 더 슬픔이

일어남을 깨닫지 못하였다. 삼가 한 편의 시를 재소에 두노라.

 

별검 신 이민곤 감조

 

 

 

 

 

순창원順昌園

순창원은 조선 13대 왕 명종과 명종비 인순왕후의 첫째 아들인 순회세자(1551~1563)와 세자빈인 공회빈 윤씨

(1553~1592)의 무덤이다. 순회세자가 1563년(명종 18)에 1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무덤을 조성했을 당시는

순회묘라 칭하였다. 이후 1592년(선조 25)에 공회빈이 세상을 떠났으나, 임진왜란으로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창경궁에 가매장하였다. 이듬해 가매장한 시신을 찾을 수 없어 1594년(선조 27) 공회빈의 신주와 의대를

넣는 유의장으로 순회묘에 합장하였다. 1870년(고종 7) 순회묘에서 순창원으로 추승되었으며,

현재 서오릉 경내에 있다.

 

 

 

 

영조가 1754년(영조 30)에 명종과 명종비 인순왕후의 첫째 아들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무덤인 순회묘를

참배한 후 감회를 새긴 현판이다. 영조가 왕위에 올라 순회묘에 참배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회갑을 맞이하여

묘를 봉심하며 후손된 도리를 다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순회묘에 기록을 남기다

 

아! 자손된 자는 선조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아야 가히 자식이라 말할 수 있고 자손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왕위를 이어받은 지 30년이 되었는데 이 무덤에 절하여 뵌 것이 무릇 세 번째이다.

오호라! 나의 뒤를 이은 왕들은 이것으로써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이다.

해는 갑술년(1754)으로 나의 회갑이다. 아! 순회세자는 곧 우리 명종의 원자로 우리 조상님들의 뒤를 이었다.

세손의 도리가 덕빈에게 견줄 수 없음을 늘그막에야 알았으니 내가 항상 감정이 일어남에

일각이탑一閣二榻에서 나의 슬픈 감회가 배가 되었다.

 

이 해에 또 쓴다.

 

 

 

목릉穆陵

목릉은 조선의 14대 왕 선조와 선조의 비 의인왕후, 선조 계비 인목왕후의 능이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현재의 자리(동구릉 능역)에 유릉裕陵이 조성되었다.

선조가  1608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건원릉 서쪽 편에 능을 마련하고 목릉(처음에는 숙릉)이라고 하였는데,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를 따라 1630년에 의인왕후의 능이 있는 현 위치로 옮겼다. 1632년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가 세상을 떠난 뒤 선조와 의인왕후 옆 자리에 능을 조성하고 혜릉惠陵이라고 하였으나, 이후

유릉, 목릉, 혜릉의 능호를 목릉으로 통일하였다.

 

 

 

영조가 1747년 8월에 선조와 선조비 의인왕후, 선조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재실에서

감회에 젖어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감회를 적다

 

20여 년 동안 세 번 알현하는 예를 행함에

지난 해를 미루어 생각하니 슬픈 감회가 새롭구나.

본래부터 덕이 부족하니 어찌 계술繼述하리오?

능 앞에서 지난 날 돌이키니 마음 더욱 새롭네

 

아! 제왕의 효는 선왕의 유업을 이어 받드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

스스로 덕이 없음을 부끄럽게 여겨 오늘날의 세도世道를 돌아보니 장차 무슨 낯빛으로 날마다

성조聖祖를 배알하리오? 감개感槪가 가슴 속에 뻗쳐 또 시의 끝에 덧붙인다.

 

해는 정묘년(1747)으로 가을 8월 추분에 본릉本陵의 재실에서 쓰다.

 

 

 

장릉章陵

장릉은 추존 왕 원종元宗(15802~1619년)과 원종비 인헌왕후(1578~1626)의 능이다.

셋째 아들 정원군으로 생전에 왕이 되지는 못했으나, 1623년(인조 1)에 그의 아들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정원대원군으로 추봉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정원대원군에서 다시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현재 김포시 풍무동에 위치해 있다.

 

 

 

정조가 1797년 8월 15일에 추존 왕 원종과 원종비 인헌왕후의 능인 장릉을 참배하고 재실에서 이은 시를 새긴

현판을, 이병모가 글씨를 썼다. 이 시에는 정조가 작년(1796)에 장릉長陵(원종의 아들 인조와 인조비 인열왕후의 능)

에 참배했을 때 예제禮制를 중국 주나라의 종묘 제사보다 융성하게 했음을 회고하면서, 올해 가을에 이르러

장릉章陵에 전알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어제, 장릉章陵의 재실齋悉에 삼가 짓다.

 

지난 해에 장릉章陵을 배알했더니 덕음德音이 어스푸레 들린 듯하네.

예제禮制는 주나라 종묘의 제사보다 융성했고 경사慶事는 한나라 정자의 명문으로 증험하였네.

난수는 하늘의 감응으로 말미암고 높은 산은 땅의 영기를 본받았에.

선왕의 영혼 양양하게 오르내리니 가을날에 陵을 배알하노라

 

주상의 즉위 21년(1797) 8월 15일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 경연사감 춘추관사원임

규장각직제학 신臣 이병모가 전교를 받들어 삼가 쓰다.

 

 

 

 

태두리 문양

 

 

 

 

 

 

 

 

장릉長陵

장릉은 조선 16대 왕인 인조仁祖(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와 인조비 인열왕후(1594~1635년)의 능이다.

인조는 선조의 손자로 정원군定遠君(원종 추존)의 맏아들이다. 1635년(인조 13)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36년(인조 14)에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하였고,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세상을 떠

난 뒤 왕후의 능 옆에 쌍릉의 형태로 능을 만들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능침에 뱀과 전갈이 무리를 이루는 등의 문

제가 생기자 1731년(영조 7)에 지금의 자리(경기도 파주 탄현면)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되었다.

 

 

 

영조가 파주 운천리에 있었던 장릉을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파주 탄현면)로 이장한 후,

15년 만인 1745년(영조 21)에 찾은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뜻을 보이다

 

15년 이래로 예禮를 거듭 이루었으니 신령이 성대히 오르내리며 작은 정을 비추었네.

다른 날에 풍수가 말재주로도 지금 내가 경영해 놓은 것을 흔들지 못하리라.

 

을축면(1745) 8월 중순에 쓰다.

 

 

 

인용 :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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