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현판 宗廟 懸板
임진왜란으로 종묘가 모두 소실된 후 광해군 대 가장 먼저 종묘를 재건할 만큼
종묘는 조선왕실의 상징이자 500년 유교문화 정치사를 모두 담고 있는 상징이라 하겠다.
<종묘전도>
종묘의 중심 건물로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을 비롯, 왕이 종묘 제레 때
목욕재계를 하고 머무는 재전과 망묘루, 황대청, 전사청 등이 그려져 있다.
<양녕전전도>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하여 조천된 왕, 추존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영녕전의 모습이다.
제기와 제물 등을 보관하는 제기고, 전사청 등의 건물도 살펴볼 수 있다.
<망묘루望廟樓>
신주가 모셔진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평소에는 종묘의 관리들이 숙직하는 곳이었으며, 왕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게하고 머무는 곳이기도 했다.
망묘루 앞에는 '천원지방'의 형식을 취한 연못이 있다.
남구만의 글씨로 추정되는 <망묘루 현판> 17세기 말.
테두리에는 꽃 문양을 비롯하여 모서리마다 卍자문을 그려 장식하였다.
<망묘루기 현판>
망묘루의 규모와 내력 등을 새긴 현판으로 1699년(숙종 25)에 예조참판 오도일吳道一(1645-1703)이
기문을 짓고, 종묘서 부봉사 이정천李珽天(1614-?)이 글씨를 썼다. 임란으로 불탄 종묘를 재건하면서
현판을 바꾸어 쓰게된 경위과 망묘루의 위상과 주위의 성스러운 풍경, 망묘루 앞 연못과 나무의 모습
등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영조 어제, 김재로 글 · 글씨 1745년(영조 21)
영조가 4월 7일에 종묘 제사에 쓰일 제물을 살펴보고, 다음날의 하향대제夏享大祭를 왕세자에게 대신 지내도록 한
심정을 표현한 시와 김재로가 후기를 새긴 현판이다. 흑색 바탕에 음각으로 새기고 붉은색으로 칠했으며, 꽃과
당초 문양을 그린 테두리를 둘러 장식했다. 이 현판은 여닫이 문이 있는 매우 드문 형태를 보인다.
1762년(영조 38)에 영조가 종묘에서 친히 하향대제를 지내고 망묘루에 올라, 지난 1745(영조 21)에 제작한 '망묘루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심정을 기록한 현판'을 보고 느낀 회포를 기록한 현판이다. 52세 을축년에 건강이 좋지 못해
친히 제사를 지내지 못하고 하루 전날 희생과 제기만을 살폈는데, 지금 69세의 나이에 친히 제사를 지내게 된
감격을 시로 읊었다. 김치인(1716-1790)은 영조의 명을 받들어 지난 날 선친 김재로처럼 어제시에 글을 쓰게 된
정황을 설명하고, 임금이 조상께 드리는 정성을 칭송하였다. 흑색 바탕에 양각한 글자는 금칠을 했으며,
테두리는 꽃과 당초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1763년(영조 39) 4월 4일 영조가 종묘에서 하향대제를 지낸 뒤의 회포를 읊은 글을 도제조 신만申晩(1703-1765)이
글씨를 쓴 것으로 이 글 1본本을 써서 춘방관春坊官으로 하여금 동궁에게 읽게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테두리에는 꽃과 당초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이 역시 영조 40년 7월 7일 종묘를 참배한 감회를 읊어 망묘루에 걸었던 현판이다.
테두리에는 꽃잎이 6개인 꽃과 네 모서리에는 연꽃 문양을 그려 넣었다.
1759년(영조 35) 영조가 종묘에서 숙종 계비 인원왕후仁元王后(1687-1757)의 부묘례를 마친 뒤 지은 기문이다.
어머니 인원왕후를 추모하는 마음을 담아 좌부승지 구윤옥具允鈺(1720-1792)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망묘루에 걸었다.
망묘루에서 왕과 신하들이 지은 연구시聯句詩를 새긴 현판으로 이복원의 글씨다.
망묘루에서 재계하던 밤에 왕과 신하들이 지은 시를 새긴 현판으로 이 역시 이복원이 쓴 것이다.
<오향천제친행성기성생의도> 《종묘친규제도설》 병풍 19세기 후반.
친제를 지내기 하루 전날 제기와 제물의 상태를 살피는 성생기를 행하는 모습이다. 정전과 영녕전의 각 실을
봉심한 후 계단 위에서 성기례를 치르고 동쪽 문 밖의 판위에서 성생례를 치렀다.
영조를 비롯한 여러 임금이 친향과 성생기를 행한 날짜를 현판에 새겼는데, 이를
망묘루 등의 건물에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종묘 친향親享과 성생기省牲器를 행한 날짜를 새긴 현판
1776년(정조 15) 11월에 만든 현판으로, 영조가 1726(영조 2) 10월 13일에 경종의 신주를 종묘로 모신 부묘에서
부터, 1776년(영조 52) 1월 25일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가 영조 대신 숙종의 추상존호를 새긴 책보冊寶를
올린 것까지, 총 55 차례의 친행과 성생기를 행한 날짜가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 '자남변 소1自南邊 所一' 이라
는 묵서가 있는데 이는 현판을 걸었던 방향이나 장소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 대의 종묘 친향과 성생기를 행했던 날짜를 기록한 것으로 1802년(순조 2) 11월에 제작한 현판이다.
순조 대의 종묘 친향과 성생기를 행했던 날짜를 기록한 것으로 1837년(현종 3) 7월에 제작한 현판이다.
익종(효명세자)이 부왕인 순조 대신 대리청정을 하면서, 종묘 섭행葉行과 성생기를 행했던
날짜를 기록한 것으로 1837년(현종 3) 7월에 제작한 현판이다.
헌종 대의 종묘 친행과 성생기를 행했던 날짜를 기록한 것으로 1851년(철종 2) 8월에 제작한 것이다.
철종 대의 종묘 성생기를 행했던 날짜를 기록한 것을호 1866년(고종 3) 2월에 제작한 현판이다.
향대청香大廳
향대청은 제사에 사용되는 향香과 신에게 고하는 축문, 신에게 올리는 예물인 폐백 등을 보관하고,
제향 때 헌관들이 대기하던 장소이다.
1765년(영조 40 1월 11일 영조가 종묘 제향을 정해진 의식대로 행하지 않는 자를 경계하고자 ≪시경詩經≫의
「소아小雅」 중에서 '초자楚茨'와 '신남산信南山'을 강론한 소회를 기록한 것으로,
1781년(정조 5) 5월에 다시 만든 현판이다.
정조가 1794년(정조 18) 1월 3일과 4일에 내린 전교를 새긴 현판으로, 종묘 제사의 의례를 바로 잡는 내용이다.
정조는 먼저 제사 지내는 사람들이 태만하고 정성이 부족하다는 점과 현재 제사상을 차리는데 사용하는 도식이
원래 정한 의절과 어긋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시 일의 경과와 정조의 전교는[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도 수록되어 있다.
1864년(고종 1) 12월 17일 고종이 내린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이듬해 정월 춘향대제를 지낼 때, 헌관 이하
집사의 품계를 제한하지 말고 선파인(전주 이씨 종친)을 임명하라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칠사당
칠사당은 인간 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처벌하는 일곱 소신小神에게 제사를 지낸 사당으로 정전의 남쪽에 있다.
일곱 신은 길 위에서 일어나는 왕래往來와 사건들을 관장하는 '국행國行', 후손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제후인
'공려公厲', 나라의 성문의 출입을 관장하는 '국문國門', 궁중의 당堂이나 실室의 거처를 담당하는 '중류', 음식을
담당하는 '사조', 문지방 출입을 담당하는 '사호', 인간의 삼명三命을 감찰하는 '사명'의 신을 가리킨다.
제사는 조선왕실의 유교사상에 토속신앙이 결합된 국가 의례였다.
칠사의 시기와 신의 역할, 천신월령을 할 때 다달이 올리는 물목을 기록한 현판이다.
조선왕실은 종묘의 칠사당에서 각 계절에 해당하는 신들에게 제향을 행하고, 조상신에게 매월 특산물을
바치면서 계절이 순행하고 궁중의 안위와 백성들의 일 또한 순조로울 수 있도록 기원했다.
재실齋室
왕과 세자가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전 목욕재계를 하고 의복을 정제하는 곳이다.
왕이 머물며 제사를 준비하던 어재실과 세자가 머무는 제자 재실, 그리고 목욕을 하던 어목욕청이
각기 별도의 건물로 하나의 담장 안에 조성되어 있다.
1743년(영조 19) 윤4월 20일 영조가 종묘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재계하며,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담아
아음을 깨끗이 하고 비가 오기를 기원하였으나, 임금의 정성이 부족해서인지 비가 올 기미가 아득하다는 탄식이 담겨
있는 글과 시를 새긴 현판이다. 그 밖에도 현판의 끝 부분에는 강관講官의 요청으로 옛날의 어시御詩를 받들어 감상
하니 추모하는 마음이 깊어진다는 내용과 '계해년(1743) 윤달 여름 중순 뒤 3일' 이라는 간기가 있다.
영조가 1749년(영조 25) 5월 초순에 종묘의 묘사와 제관들이 지켜야할 사항에 대해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으로,
한성부우윤 이철보(1691-1775)가 글씨를 썼다. 이철보에게 글씨를 쓰게 하면서, 글자의 모양과 크기에 대해
논의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수복방守僕房
수복방은 종묘를 수위하고 청소와 제사 준비를 담당하는 수복들이 거처하던 공간이다.
왕이 제사를 지내기 전 잠시 대기하는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06년(광무 10) 종묘 수복의 명단{좌목}을 새긴 현판으로
총 44명의 관직과 이름, 생년, 자, 본관이 기록되어 있다.
종묘 대제(춘하추동의 첫째 달과 납일에 지내는 제사)와 삭제朔祭(매달 음력 초하루마다 지내는 제사) 때,
제관이 지켜야 할 사항에 대한 전교를 새긴 현판이다.
국기판國忌板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제삿날 능호陵號와 위치를 새긴 국기판이다.
태조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를 비롯하여, 국왕은 태조부터 철종, 왕비는 순종비 순명효황후까지 종묘와
영녕전으로 구분하여 기록하였다. 국기판 제작 당시 생존해 있던 왕의 자리는 대개 빈 공간으로 남겨 두었다가
사후에 새겨 넣는데 반해, 이 현판의 경우 철종비 철인황후 다음에 고종과 순종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고 고종비
명성황후와 순종비 순명효황후를 잇달아 새겨 넣었다. 또한 진종, 헌종, 철종이 황제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908년
순종이 세 분의 왕을 황제로 추존한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판의 테두리에 칠보와 과실, 꽃 문양을
그려 넣었으며, 운두형의 봉 조각을 장식했다.
<종묘서宗廟署>
종묘서는 종묘와 왕릉을 관장하는 관청인데, 종묘 앞에 있었다.
종묘의 위치는 모두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위치를 쓰지 않은 듯하다. 종묘에는 도제조와 제조가 1명씩 있었지만
모두 재상이 겸직했고 실무자로는 영令이 책임자였다. 정문의 위치만 현재 모습과 조금 다르고 정전正殿(국보 제227호)
과 영년전永寧殿(보물 제821호)을 중심으로 공신당功臣堂, 칠사당七祀堂, 전사청典祀廳, 재실齋室, 악공청樂工廳,
망묘루望廟樓 등의 위치가 지금 그대로이다. 전사청 옆의 제정祭井이라든가 정전 옆의 연못까지
그리고, 길도 붉은 선으로 표시하여 화공이 세밀하게 그렸음을알 수 있다.
종묘를 봉심奉審하는 의식과 종묘서 부장의 입직에 대한 근무 수칙을 새긴 현판이다.
1741년(영조 17) 8월 11일 영의정 김재로(1682-1759)는 종묘의 수복이 봉심을 할 때 바깥쪽만 살펴보는 등의 소홀함을
지적하며, 영조에게 봉심하는 날을 정해 일정한 규식을 둘 것을 아뢰었다. 이에 영조는 장내를 봉심하는 일은 매달 5일,
25일, 30일마다 할 것을 명하였다. 또한 종묘서 부장의 출입이 일정하지 않은 잘못된 관례를 지적하며, 자리를
성실히 지키고 공사를 막론하고 사사로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종묘 관원 봉심에 대한 논의는
<영조실록>, <승정원일기>를 비롯한 <종묘의궤속록>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직단 현판
태조는 1392년(태조 1)에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고 1395년(태조 4)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경복궁 왼쪽에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사직단을 건립하였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나라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사직제를 지냈던
곳으로,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이치에 근거하여 방형의 제단을 건립하였다. 사직단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훼손된 후
광해군 대에 복구공사를 시행하였고, 숙종 대에 사직의 신주를 모시는 신실과 제례에 필요한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을
중건했다. 사직단에서 정월 신일辛日에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를 비롯하여, 2월과 8월 술일戌日에 춘향제와
추향제, 납일에 납향제를 지냈다. 그 밖에도 가뭄이나 홍수,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나라의 위기 때마다 제사를 행하여
환란을 타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1908년(융희 2)에 국가 제사를 개정하면서 사직제례는 축소되었고,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을 피탈당한 이후에는 폐지되기에 이른다. 1911년에는 사직단 부지와 건물의 소관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면서 신실 등의 건물이 철거되었고, 1924년 제사를 지내던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바뀌었다.
이후 사직단 주변에 도로가 확장되고 근대 시설물이 들어서는 등 큰 변화를 맞았다.
上 <사직서전도>, 下 <단유도설> {사직서의궤}
안향청安香廳
숙종이 1702년(숙종 28) 2월 6일 사직단에서 춘향대제를 올리고 안향청 앞의 소나무를 주제로 지은 시를
1772년(영조 48) 4월에 다시 새긴 현판이다. 오랜 세월 동안 추위를 이기며 버텨온 소나무의 절개글 숭상하며
벗으로 삼았다는 내용의 오언율시이다. <사직서의궤>(1783년)의 「사직서전도」를 보면, 안향청 앞에 이 시의
주제인 소나무 한 그루가 묘사되어 있다. 영조가 1727년(영조 3) 1월 4일에 재실(안향청) 안에 있는
이 시를 보고 화답시를 지었는데, 현재 현판으로도 전해진다.
1727년(영조 3) 1월 4일 영조가 사직단에서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기곡제를 행한 뒤,
재실 안에 있는 숙종의 어제시를 보고 감회에 젖어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영조가 보았던 어제시는 1702년(숙종 28) 2월 6일 숙종이 사직단에서 춘향대제를 지내면서
안향청 앞의 소나무를 주제로 지은 오언율시로, 1772년(영조 48) 4월에 편판으로 만들어 걸기도 했다.
<사직노송도> 정선, 18세기, 고려대박물관
겸재 정선(1676-1759)이 그린 사직단의 소나무 그림으로 구불구불 넓게 퍼진 가지를 나무 기둥으로 지탱한 모습이다.
안향청 앞마당의 반송이 을해년(1755) 이후로 고사하여, 1791년(정조 15)에 다시 심었으며, 1815년(순조 15)에
반송의 가지를 받치는 탱주목이 썩어 교체하였다는 사실이 <승정원일기>와 <사직서등록(1819)>등에 기록되어 있다.
1742년(영조 18) 8우러 영조가 사직단에서 추향대제를 지내며 지은 시와 그 배경을 기록한 현판이다.
1702년(숙종 28) 2월 초2일 숙종이 지낸 춘향과 영조 자신이 지낸 8월 초2일 추향의 날짝 같은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칠언절구의 시 한 수를 읊고 현판으로 만들어 재실의 벽에 걸도록 했다는 내용으로 도승지
이익정 등 12명의 신하가 어제시의 운에 맞추어 화답시를 지어 올렸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도 1860년(철종 11) 철종이 기곡제를 지낸 뒤 이 현판의 시에 차운하여
지은 시를 새긴 현판도 함께 전해진다.
안향청과 소나무 모습 유리건판 / 20세기 초 / 국립중앙박물관
사직단의 안향청에 걸었던 현판
사직단의 안향청에 걸었던 숙종과 영조의 어제시를 새긴 현판에는 공통된 특징이 확인된다.
테두리에 반원형을 구획하고 그 안에 작은 꽃을 그리고 사이사이에 당초 문양을 그려 넣었다.
테두리 위에 얇은 띠 모양의 편천을 박아 사롱(어제어필을 현판을 덮어 보호는 직물)을 고정했으며,
경첩이 일부 남아 있어 여닫이문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가 1749년(영조 25) 5월 초순에 사직단의 단사와 재관들이 지켜야할 사항에 대해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으로 한성부우윤 이철보(1691-1775)가 글씨를 썼다.
1906년(광무 10) 10월 3일 고종이 사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단사와 재관들에게 내린
칙유를 새긴 현판으로 장례원 부경 박봉주(1868-1936)가 글씨를 썼다.
1724년(영조 18) 9월에 사직서의 관원들이 사직단을 관리하기 위해
의논하여 합의한 내용[완의完議]를 새긴 현판이다.
인용서적 : 국립고궁박물관 편찬 <조선왕실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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