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궁 현판
조선 시대에는 정궁에 해당하는 궁궐 뿐 아니라 도성 곳곳에 왕실 가족들의 생활이나 의례와 관련한 별궁이
있었다. 별궁은 궁궐 밖에 독립된 건물로 존재했는데 왕자나 공주가 궁궐을 나와 살던 집인 궁을 포함하여,
왕이 돌아가신 후 후궁들이 기거하던 궁이나 방이 있다. 별궁은 재산을 관리하고 물품을 조달하는 내탕內帑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이곳에 살던 인물이 세상을 떠나면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용도
가 전환되기도 했다. 왕세자가 아닌 왕자는 혼례를 치르고 궁궐 밖의 별궁에서 생활하였는데, 본래 왕위 계승
자는 아니었으나 특별한 연유로 왕이 된 왕자의 옛 집을 잠저潛邸라고 칭했다. 그 밖에도 왕실 혼레와 관련
한 의식을 안국동별궁과 같은 궁궐 밖의 공간에서 치르기도 했다.
비록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는 별궁은 전무하지만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어의궁於義宮과
효종의 잠저이자 왕실 가례가 행해졌던 용흥궁龍興宮, 영조가 왕세자에 책봉되기 전까지 살았던 창의궁
彰義宮, 그리고 고종이 세자의 가례를 위해 세웠던 안국동별궁과 관련한 현판이 국립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다. 특히 영조는 효종과 자신이 인조와 숙종의 둘째 아들로 본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지만, 형이 일찍
사망하여 대통을 이었다는 동질감을 갖고 있었기에 효종을 각별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자주 용흥궁에 거동
하여 특정한 날을 기억하며 효종을 추모하는 글을 지었고, 이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 별궁에 걸었던
현판의 기록을 통해 궁궐 바껭 있던 또 다른 궁의 면모에 대해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다.
어의궁於義宮(상어의궁)
어의궁은 仁祖(1595~1649년, 재위 1623~1649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로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봉림대군)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한성 중부 경행방慶幸坊(현재 종로구 낙원동 일대)에 있었으며, 효종의
잠저인 하어의궁(용흥궁)과 구분하여 상어의궁上於義宮 또는 향교동鄕校洞 본궁本본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어의궁에 잠룡지潛龍池라는 연못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국왕들은 어의궁
에 자주 행차하여 봉안각에 배례하였고, 인조의 장적帳籍과 三曹삼조(효종 · 현종 · 숙종)의 어휘御諱를 봉심하였다.
특히 영조는 어의궁을 방문하여 인조를 추모하는 글을 다수 남겼다.
영조가 인조반정이 일어났던 계해년(1623) 이후, 1743년(영조 19)에 다시 계해년을 맞아 인조의 잠저였던
어의궁 於義宮을 찾은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어의궁의 봉안각奉安閣을 바라보며 선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심정을 표현하였다.
인조의 잠저인 어의궁에 걸었던 인묘고궁仁廟 古宮 현판으로 영조의 어필이다.
인묘고궁은 '인조께서 살았던 옛 궁'이라는 뜻으로, 현판의 왼쪽에 '숭정 기원후 세 번째 병자년'
이라는 간기가 있어 1756년(영조 32)에 제작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의 잠저인 어의궁의 봉안각奉安閣에 걸었던 영조의 어필 현판이다.
봉안각은 '편안하게 받들어 모시는 각'이라는 뜻으로, 인조의 잠저 시절 호적과 삼조三朝(효종, 현종, 숙종)의
어휘御諱를 보관 하였던 전각이다. 현판의 오른쪽에 새겨진 '계해구궁癸亥舊宮'은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계해년91623)과 잠저인 어의궁을 가리킨다.
용흥궁龍興宮 (하의어궁)
용흥궁은 효종孝宗(1619~1659년)의 잠저로 한성 동부 崇敎坊(현재의 종로구 효제동 일대)에 있었다.
1631년(인조 9) 봉림대군(효종)이 가례를 올리고 용흥궁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인조의 잠저이자 효종이 태어났던
상어의궁과 구분하여 하어의궁下於義宮 또는 어의동 본궁本宮, 별궁別宮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도성도> 등의
고지도에는 주로 본궁으로 표기되어 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봉림대군은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1645년(인조 23)에 귀국하였다. 얼마 뒤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봉림대군이 왕세자에 책봉되어
입궐하였고,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봉림대군이 용흥궁에 살았던 기간은 길지 않다. 용흥궁은 효종의
잠저 외에도 1638년(인조 16)에 인조와 인조 계비 장렬왕후가 이곳에서 가례嘉禮를 올린 이후, 1851년(철종 2)에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가 가례를 올리기까지 16차례 왕실 가례가 치러지는 장소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龍興宮의 계경헌啓慶軒 현판으로 '경사스러움을 여는 헌軒'이라는 뜻이다.
숙종 대 편찬된 [宮闕志]에 계경헌은 조양루朝陽樓 동쪽에 있는데, 처음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금상今上 계유년
(1693)에 이 호칭으로 어필 현판을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계경헌 현판은
1693년(숙종 19)에 숙종이 쓴 어필 현판으로 추정된다.
1693년(숙종 10) 숙종이 친히 쓴 '용흥구궁龍興舊宮' 네 글자와 용흥궁의 내력 등을 새긴 현판이다.
용흥구궁은 '용(왕)이 발흥한 옛 궁' 즉 효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잠처를 말하며, 임금의 자리에 올라
왕업을 계승하였음을 내포하고 있다. '계유년(1693)11월 초하루 아침'이라는 간기와 숙종이 사용했던
인장인 '신묵宸墨(왕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영조가 1759년(영조 35) 윤6월 27일에 종묘에 나아가서 기우제를 지내고, 28일 환궁하면서 용흥궁을 방문한
감회를 새긴 현판이다. 현종, 숙종, 경종이 가례를 올렸다는 용흥궁의 내력과 중요성에 이어서, 숙종이 친히 쓴
'용흥구궁' 네 글자의 빛나는 모습에 대한 묘사와 현판의 사롱紗籠을 새로 수리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조는 이와 같은 내용을 원인손(1721~1774)에게 글씨를 쓰게하고, 현판에 새겨
바깥채[外舍]에 걸게 하였다.
영조가 1739년(영조 15) 1월 17일에 선농단先農壇에서 풍년을 기원하고 용흥궁에 방문하여 지은 글을 새긴
현판이다. 영조가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에서 친히 '지나가다가 살펴보니 새로운 감회가 일어나다'는 뜻의
'역성감신歷省監新 네 글자를 쓰고, 효종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사롱을 덮어 현판을 보호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현재 현판에 사롱은 남아 있지 않다.
영조가 1751년(영조 27)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의 조양루에 걸었던 현판으로, '용잠고궁龍潛古宮에 세 분의 왕이
임하셨다'는 내용이다. 현판 왼쪽에 '황조 숭정 기원 후 124년 신미년(1751) 10월 초순'이라는 간기가 새겨져 있다.
용잠고궁은 용이 잠겨있던 옛 궁, 즉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던 잠저를 의미한다.
영조가 1762년(영조 38) 10월 13일에 창덕궁의 진전을 전배展拜하고 효종의 잠저인 어의본궁(용흥궁)
에 나아간 회포를 기록한 현판이다. 임오년(1702)은 숙종 계비 인원왕후와 어의본궁에서 가례를 올린
해로, 영조가 다시 임오년(1762)을 맞이하여 어의본궁을 방문하고 추모의 마음을 읊은 것이다. 임오년
(1702) 외에도 어의본궁에서 왕실 가례가 여러 차례 행해졌음을 상기하였고, 홍무정운洪武正韻의 글자
로 현판을 만들어 본궁에 걸도록 명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영조가 1765년(영조 41) 3월 27일에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에 행차하였을 때, 함께한 세손(정조)에게 내린
글을 새긴 현판이다. '금년의 입첩에는 세손이 따라왔으니, 추모의 마음 깊고 간절하여 어린아이(세손)를
더욱 면려하노라' 라는 내용이다.
영조가 1765년(영조 41)에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에 걸었던 어제어필이다.
'다시 을유년을 맞이하여 추모하고 와서 바라본다'는 의미의 여덟 글자와 '소손小孫의 나이
72세에 눈물을 머금고 쓴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을유년은 청에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사망하고
동생인 봉림대군(효종)이 왕세자에 책봉된 해(1645)이다. 따라서 영조가 다시 을유년(1765)을 맞아
효종이 왕세자에 책봉되었던 날짜인 9월 27일에 맞춰 어의궁(용흥궁)을 방문한 것이다.
1765년(영조 41) 11월에 영조가 효종의 잠저인 용흥궁에 있던 옛 우물과 소나무 등을 바라 보고 지은 글을
1781년(정조 5) 4월 조윤형(1725~1799)의 글씨로 중각重刻한 현판이다. 이 글에서 영조는 신축년의 일이
을유년의 고사와 부합하다고 하였는데, 신축년은 영조가 원래 왕위 계승자는 아니었으나 형 정종이 후사가
없자 왕세자에 책봉된 1721년(정종 1)을 의미하며, 을유년은 봉림대군(효종)이 형 소현세자가 죽자 왕세자로
책봉된 1645년(인조 23)을 가리킨다. 이 외에도 영조는 용흥궁 안의 오래된 우물 주변에 흩어져 있는 사물들
이 용의 형상을 방불케 하듯 상서로웠음을 술회하였고, 비록 지금은 없지만 예전에는 반송盤松이 있었음을
추억하였다. <안평대군방전도>의 용흥궁 부분을 보면, 계경헌과 조양루 근처에 소나무 두 그루와 작은 원이
그려져 있는데, 영조가 묘사한 반송과 우물로 추정된다.
창의궁彰義宮
창의궁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잠저로 경복궁의 영추문 맞은편(현재 종로구 통의동 일대)
에 있었다. 본래 이곳은 효종의 부마였던 인평위 정제현의 집이었으나, 숙종이 구입하여 연잉군(영조)에게
하사 하였다. 숙종은 창의궁의 건물 한 채에 양성헌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친히 지은 시 두 수를 현판에 걸게
하기도 했다. 연잉군은 1712년(숙종 38) 2월에 창의궁에 기거하기 시작했으나, 1721년 9월에 왕세자가 되어
입궐하였으므로 창의궁에 살았던 기간은 10년도채 되지 않는다. 영조가 창의궁에 기거하는 동안에 생모 숙빈
최씨가 병환으로 사망했고 첫째 아들효장세자가 태어나기도 했다. 영조가 왕위에 즉위한 뒤 창의궁은 요절
한 세자와 세손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묘 역할을 하였다. 영조는 창의궁 안에 아들 효장세자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건립하였다. 효장세자와 효명세자의 신주는 정조와 헌종에 의해 진종과 익종으로 추존
되어 종묘로 부묘되었고 문효세자와 의소세손의 신주를 모신 사당은 1900년에 영희전의 옛 터로 옮겨졌다.
1907년~1908년에 황실재산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창의궁 역시 국유화되었으며, 이후 일제의 동양척식
회사에 매각되었고, 1910년에 사택단지와 도로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훼철되었다.
<창의궁 도형> 1910년 경
영조가 1726년(영조 2) 11월 6일에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인 숙빈묘를 참배한 뒤 창의궁을 방문하여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왕위에 오르기 전 살았던 옛 집을 찾은 감회를 시로 표현하였으며,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운한雲翰'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영조실록]과 [승정원일기] 1726년 11월 6일 기사를
보면, 영조가 숙빈묘에서 전배례傳拜禮를 행한 후 신하들의 만류에도 창의궁에 들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어제어필
왕위를 이은 지 벌써 2, 3년인데
경물은 완연히 나를 위해 늦추었네.
오늘 참배하는 길에 오를 줄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교방敎坊의 아악이 문 앞에 이르렀도다.
때는 병오년(1726)으로, 11월 초6일 사묘를 참배하는 날에
옛집을 들러서 보며 감흥이 일어나서 짓다.
乾九古宮 현판
건구고궁 현판의 내력을 기록한 현판
1730년(영조 6) 영조가 친히 쓴 '건구고궁'과 '건구고궁 현판의 내력을 기록한 현판'으로 창의궁의 正堂에 걸려 있었다.
영조가 어필로 '건구고궁' 네 글자를 초서로 크게 쓰고 판에 새겨 창의궁 정당에 걸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九'의 뜻은 [주역] 「건괘乾卦」의 초구初九에 나오는 '잠룡潛龍'과 구오九五에 나오는
'비룡飛龍'이라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1730년(영조 6) 6월에 영조가 지은 창의궁의 이안와易安窩에 대한 서문과 지난 날을 추억하며 읊은 시를
기록한 현판이다. 경자년(1720)에 창의궁 양성헌養性軒 서쪽에 2칸 규모의 초당을 지었는데, 이는 1718년(숙종 44)
에 어머니 숙빈 최씨가 돌아가시자 영조가 상제喪制가 되어 여막에 머물기 위해서였다. 초당의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무릎만 겨우 들일 작은 집도 편안 줄을 알겠네 [審容膝之易安]"라는 구절에서 취하였다는 내용이
현판에 새겨져 있다. 현판 끝 부분에 '경술년 6월 상순에 짓다'라는 간기가 있다.
양성헌 오른쪽에 집이 있으니
그 이름이 이안이라네
왼쪽 연못은 앞쪽으로 물이 흐르니
완연하게 눈 속에 들어오네
옛날에 이 집 속에 높이 누웠으니
마음이 한가하고 편안하였네
지난 10년의 일을 떠올려 보니
오히려 오늘을 보는 것 같네.
해는 경술년(1730)으로 6월 상순에 짓다.
1754년(영조 30)에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의 거려소居廬所로 사용되었던 창의궁의 이완와에 대한 관리 지침을
기록한 현판이다. 영조가 신축년(1721)에 상제喪制가 되어 살던 거려소를 지나치게 수리하지 말라는 내용이 새겨
져 있다. 겨려소는 상제가 돌아가신 분을 모시기 위해 살던 여막廬幕 등의 건물을 말하며, 신축년(1721)은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가 1718년(숙종 44)에 병환으로 별세한 후 삼년상이 치러진 해이다.
영조가 1765년(영조 41)에 잠저였던 창의궁에 나아가서 지은 대풍가大豊歌에 신하들이 화답한 시를 새긴 현판
이다. 한나라 고조가 고향인 패현을 지나다가 고향 사람들과 술을 마시며 대풍가를 불렀다는 풍패의 고사를
따라 고조처럼 몸소 대풍가 2장章을 지은 영조의 시에 영의정 홍봉한(1713~1778) 등 16명의 신하들이
'혜兮', '전前', '연淵', '년年'을 운자韻字로 하여 화답한 시가 새겨져 있는데, 영조의 덕을 칭송하고 장수를 기원
하는 내용인데, 신하들 중 좌의정 김상복(1714~17820은 왕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반대하였고, 동부승지
홍술해(1722~1782)는 정후겸 등의 벽파僻派와 결탁하여 정조를 시해하고 은전군恩全君을 옹립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주살당하였기 때문에, 현판에 새겼던 그들의 이름이 파내어져 있다.
영조가 1770년(영조 46)에 잠저였던 창의궁을 돌아보고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초서체의 크고 유려한 필체로 '50년이 지나서 닷시 예전에 살던 집에 임하다' 라는 뜻의 여덟 글자와
'칠십칠세'가 작게 새겨져 있다. 글자는 금색으로 칠하였으며, 테두리에는 엷은 청색 바탕에
꽃과 당초 문양을 그려 장식했다.
영조가 1772년(영조 48) 2월 12일 창의궁에 나아갔을 때 지은 기문記問을 새긴 현판이다.
창의궁 내에 있던 효장세자, 의소세손의 신주 앞에 술잔을 올리고, 함일재咸一齋에서 여러 종친들을 만나 음식을
베풀었다는 내용으로 옛 임진년(1712)에 함께 했던 종친 및 신하들에게 갱운시를 짓도록 명하였는데, 1부는
김귀주에게 글씨를 쓰게 하여 청廳의 남쪽에 걸게 하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영조 어제, 신광수 글씨
영조 어제, 김귀주 글씨
영조가 창의궁에서 환궁하면서 감회를 읊은 시와 왕세손(정조)과 여러 종친 신하들이 화답한 시를 새긴 현판이다.
[승정원일기] 1772년(영조 48) 2월 22일 기사에 의하면, 영조가 창의궁에서 환궁할 때 두 구의 시를 짓고 신하
들에게 화답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또한 화답시 중 종친과 도위都尉가 지은 시는 영성위永城尉 신광수(17
31~1775)에게, 시임詩任과 원임原任, 승지와 사관이 지은 시는 도승지 김귀주(1740~1786)에게 쓰게 하고
현판에 새겨 걸도록 하였다. 이때의 전말을 기록한 '구저에 대한 기문을 새긴 현판'에도 갱진시賡進詩를 영성위
와 도승지에게 쓰게 하고 각각 청廳의 남동쪽과 남서쪽에 걸게 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두 현판 중에서 영성위 신광수가 쓴 현판에는 신광수를 비롯하여, 금성위 박명원, 학성군, 순의군 등 13명의
종친들이 '배倍', '절切'을 운자로 하여 지은 시가 기록되어있는데, 나라의 경사스러움과 임금의 은혜에 대한
송축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한편 도승지 김귀주가 글씨를 쓴 현판에는 김귀주를 비롯하여, 영중추부사 김상복
영의정 김치인, 좌의정 한익모, 우의정 김상철 등 18명의 의정부, 승정원, 예문관 소속 신하들이 '요料',
'강康'을 운자로 하여 지은 시가 새겨져 있는데, 임금이 베풀어준 성찬과 은혜에 감복하고
만수무강과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1772년(영조 480 1월 15일에 영조가 친히 쓴 구저회갑舊邸回甲현판으로, 좌측에선 '임진상완壬辰上浣'
이라는 간기가 있다. '구저'는 영조가 살던 창의궁을 말하며, '회갑'은 영조가 창의궁에 거처하기 시작했던
임진년(1712)에서 60년이 지나 다시 임진년(1772) 상원일上元日(1월 15일)에 창의궁에 갔다가 경희궁
으로 환궁하였으나, 마음만은 창의궁에 있다고 술회하면서 '구저회갑' 네 글자를 써서 유숙하던 곳의
남쪽 문 처마에 걸도록 하였다.
창의궁에 걸었던 영조의 어제어필 현판으로 '61년 나의 회포가 간절하니, 앞뒤의 임진년에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네' 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앞의 임진년은 영조가 영잉군 시절 궁궐을 나가 창의궁에 거처
하기 시작하던 1712년(숙종 38)을 가리키고, 뒤의 임진년은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772년(영조 48)을 가르킨다.
영조가 1770년(영조 46)에 지난 중춘仲春(2월)의인정人定(밤 9~11시) 전과 중동仲冬(11월)의 정오正午
뒤에 어느 장소를 방문했던 일을 떠올리며 지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영조가 기쁨과 다행스러운 심정을
시로 읊은 것인데, 방문했던 곳과 이 현판을 어느 건물에 걸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제어필
중춘에는 인정 전에 왔고 중동에는 정오 뒤에 왔다.
낮에나 밤에나 모두 함께였는데 처음에는 밤이었고, 두 번째는 낮이었네.
해는 즉위 46년(1770)인 76세 되던 때로, 기쁨과 다행스러움 모두 부치다.
영조가 1731년(영조 7) 5우러 28일에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사당인 효장묘를 찾은 감회를 기록한 현판이다.
해는 신해년(1731)으로 여름 5월 27일에 북교北郊에서 백성을 위해 기우제를 올리고 28일 돌아오면서 효장묘
를 찾았으니 건물을 지은 후 처음 들른 것이다. 병오년(1726)으로부터 지금까지 5년이 지나서야 이곳에 왔다.
안국동별궁 安國洞別宮
고종이 왕세자(순종)의 가례를 위해 지은 별궁으로 한성 북부 안국방(현재 서울시공예박물관 자리)에 있었으며
안동별궁이라고도 하였다. 본래 이 자리는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인 영웅대군의 집이 있던 곳으로, 그의 사후
1471년(성종 2)에 부인 송씨가 집을 나라에 바친 다음에는 연경궁延慶宮으로 칭해졌다. 이후 의경세자의 사당인
의경묘가 연경궁 후원에 세워졌고, 월산대군, 혜순옹주, 정명공주, 연령군의 집이었다가 철종의 즉위 후에는 아버
지 전계대원군의 사우가 건립되었다. 1869년(고종 6)에 전계대원군의 사우를 다른 장소로 이전하고, 1879년(고종
16) 이 터에 별궁을 짓기 시적하여 이듬해 완공하였다. 이 때 완공된 별궁 안에는 경연당, 정화당, 현광루, 정상루
등의 건물이 있었다. 안국동별궁서는 1882년(고종 19) 2월에 왕세자(순종)와 제자빈(순종비 순명효황후)의 친영
례가 치러졌고, 1906년(광무 10)에는 황태자비(순종 계비 순정효황후)가 가례를 치르기 전 머물며 예의범절을
배우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1910년 이왕직의 소유가 되어 나인과 궁녀들의 거처로 사용되었다가., 1936년에 최창
학, 1937년에 민대식에게 매도된 후 휘문소학교가 들어섰고, 1944년에 풍문여학교로 개편되었다. 1965년에 학교
의 운동장에 위치하고 있던 별궁의 건물들을 해체하여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정화당은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현
메리츠화재 연수원)으로, 현광루와 경연당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의 골프장(한양컨트리클럽)으로 이전했다.
이후 경연당과 현광루는 2009년에 부여의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경내로 다시 옮겨졌다.
안국동별궁의 정화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올바르게 화합한다' 는 뜻을 담고 있다.
안국동별궁의 경연당에 걸었던 현판으로 '경사가 이어진다' 는 뜻을 담고 있다.
이유원(1814~1888)이 지은 「경연당상량문」에는 "음양의 조화 이뤄 부드러운 교화 펼치며, 현자를 찾고 관직을 살펴
아름다운 명성을 이어감은 진실로 모든 복의 근원이요, 밝은 덕이 이르는 바이다. 이에 특별히 두 글자를 편액으로
걸어 그 명칭을 돌아보며 생각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다. 현판의 바탕판은 뒷면에 나비장으로 연결하였으며,
앞면에는 흑색 칠을 하고 양각한 글자 위에 네모난 금박을 붙였다.
금박을 붙여 만든 흔적
인용: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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