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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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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령산 맨발걷기 백련동을 들머리로 '삼림치유센터' 오름길 폭염과 정면으로 맞선 4인조의 행보. 맨발의 청춘 ㅎ~ 휘튼치트 세례를 받으며 잠시 쉬어가기로... 다시 행선길로... 울울창창 편백림 속을 맨발로... 어마무시한 폭염은 딴나라 야그~ ㅎ 잠시 탁족 타임... 맨발 인증 샷. 발바닥이 시원찮은 이 사람은 운동화를 신고... 한양에서 내려오신 맨발걷기 전도사 항민 선생님과 함께... 찍고 박히고~~~ ㅎ 입추, 축령산 편백림에 초대된 상큼 맨발의 행진. 힐링 타임 리듬 조코, 좌우 율동은 더욱 조코~~~ㅎ 에어콘 아래 꿈쩍 않다가 숲에 드니 그 청량함에 나도 모르게 절로 반성케 되더라는 사실 오늘날의 축령산 편백림을 일군 독림가 춘원 임종국 선생 수목장지에 이르는 입구. 무더위가 절정임에도 계곡물에 담근 발은 그저..
보령 일원 충남 대천항의 아침 보령 무궁화 수목원 성주사지 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인데 양쪽의 사자상은 1986년 도난당해 현재의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라고. 무량사 무량사 당간 지주 (고려 초) 절 마당 나무그루터기에 자라난 영지버섯 맨 앞 건물에 김시습의 초상이 모셔져 있다. 북으로는 만주, 동쪽으로는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는 다도해와 경주, 심지어는 이내 거처 불태산 등. 평생을 정처 없이 사방팔방 떠돌던 김시습. 효령대군의 권유로 잠시 불경을 번역하는 일을 맡기도 했지만 현실정치에는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김시습은 성종 12년(1481)에 승적을 버리고 환속해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특유의 방랑벽이 도져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다시 서울을 등졌다. 그가 만년에 찾아간 곳은 충남 부여 무량사. 김..
잠시 비가 뜸한 가운데... 부안변산해수욕장 고군산군도 흐리고 해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저 앞 장자도 바위에 위에 소개한 '할매바위'가 자리하고 있고 그 아래엔 무슨 '사당' 같은 건물도 있었는데... 장마 가운데 흐드러진 참나리
도피안사到彼岸寺 '도피안사' 화개산 도피안사 일주문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 865년(경문왕 5)에 도선(道詵)이 향도(香徒) 1,000명과 함께 이 절을 창건하고 삼층석탑과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을 봉안하였다.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수록되어 있는 사적기에 의하면, 도선이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고 하였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았더니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으므로 절을 창건하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도선은 이 절을 800의 비보국찰(裨補國刹)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화개산이 마치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약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석탑과 철불로 산세의 약점을 보완하여 국가의 내실을 굳게 다지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였다고 ..
초교 동창 고희연古稀宴 물경 7시간을 달려 당도한 강원도 철원 장수촌 식당. 1959년 초등학교 입학으로 초교 동창이 된 여자 친구의 '고희연'에 참석케 된 것. 건물 뒷편에 선 밤나무꽃을 한동안 바라보며 잠시 지나간 세월을 추억. 6인의 코흘리개 초교 동창이 한 자리에... 먼저 가족들과의 스냅 스무 살에 낳은 아들이 쉰한 살이 되었다는군요. 그가 어느덧 중년에 접어들어 어머니의 고희연에 촛불을... 왼쪽 마이크를 든 사위는 현역 육군 대대장이라고. 친정 여동생과 우측에 선 딸의 축하를 받으며 촛불을 끄는 친구의 모습. 장모님께 드리는 사위의 '감사장' 낭독. 잠시 이내 콧날이 시큰. 해피버스테이 투유♬ 홀로 된 장모님 고희연을 축하드리는 사위의 힘찬 포옹 '고희연'을 축하드리는 아들과 딸의 축하 포옹 딸과 손녀도 축하 대열..
가마골의 신록 담양 가마골 가마골 그 농밀한 신록 속으로 산딸나무 뒤돌아 보니... 이른바 영산강의 시원이라는 '용소' '용소' 위로 내걸린 출렁다리 출렁다리에서 내려다 본 가마골 '용소'에서 솟아오른 정심 선녀님!! ㅎ~ 만만세~~~ 무사히(?) 출렁다리를 건넜어욤. ㅎ~ 이름하야 '봄단풍'이라 한다던가...? 일포 선생님 내외와 함께 순창 복흥 고원을 지나 담양으로 이어지는 792번 도로를 따라 찾아든 가마골. 몇 년만에 찾아왔는지 기억이 가물대는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는 가마골을 전세내어 걸었다는 사실. 고요한 신록의 적막 가운데 계곡의 물소리를 감상하며 최상의 힐링을 맛 볼 수 있게해 준 이 땅 자연 앞에 그저 한없는 찬사를...
夢遊桃源(몽유도원) 3 안평대군, 「몽유도원기」 때는 정묘년(1447) 음력 4월 20일 밤, 내가 잠자리에 들려는데 정신이 아른거려 잠에 푹 들었고 꿈[夢]을 꾸었다.... .... 또 어찌 이르러 도원[桃]까지 도달했는가.... .... 도원에 노닐며[遊] 따른 이가 하필 이 몇 사람인가 .... ....꿈을 꾼 지 3일에 그림[圖]가 완성되었다 .... 몽유도원도 축의 서두에 실린 안평대군의 詩 박팽년의 서문
夢遊桃源(몽유도원) 2 '몽유도원'의 주인공은 안평대군이지만, '몽유도원' 을 기억하도록 해준 공功은 에 있었다. 이어지는 21편의 시문은 어떠한가. 그것은 한 편 한 편, 세종시절 학계, 정치계 그리고 종교계 명사들이 공들여 짓고 친필로 남긴 보물들이다. 이들이 모두 이어져 거대한 시축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를 그린 안견, 그리고 21인의 명사들과 그들의 시문을 살펴보겠다. 1446년 안견이 그린 , 1448년에 그린 등은 모두 왕실을 위한 그림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안견이 세종으로부터 서반西班 4품의 호군護軍 벼슬을 이유를 헤아릴 수 있다. 안견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464년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에게 줄 대나무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다. 윤휴(尹鑴,1617-1680)의 기록이다. 2백여년 전의 일을 이 같은 탄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