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연/취월당

夢遊桃源(몽유도원) 2

'몽유도원'의 주인공은 안평대군이지만,

'몽유도원' 을 기억하도록 해준 공功은

<몽유도원도>에 있었다.

 

이어지는 21편의 시문은 어떠한가.

그것은 한 편 한 편,

세종시절 학계, 정치계 그리고 종교계 명사들이

공들여 짓고 친필로 남긴 보물들이다.

 

이들이 모두 이어져

거대한 시축을 이루었다.

 

여기서는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

그리고 21인의 명사들과 그들의 시문을 살펴보겠다.

 

 

 

 

 

1446년 안견이 그린 <팔준도八駿圖>, 1448년에 그린 <의장도儀仗圖> 등은 모두 왕실을 위한 그림으로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안견이 세종으로부터 서반西班 4품의 호군護軍 벼슬을 이유를 헤아릴 수 있다.

안견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464년 명나라 사신 김식金湜에게 줄 대나무 그림을 그렸다는 내용이다.

 

 

 

 

 

윤휴(尹鑴,1617-1680)의 기록이다.

2백여년 전의 일을 이 같은 탄식으로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안견과 안평대군의 결별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사詩事의 위태로움' 이란 1453년 음력 10월 10일에 발생한 계유정난의 조짐이었다.

안견이 위태로운 세상사에 휘말리지 않고자 떨치고 나온 결단을 사람들은 지혜롭다고 평가하였다.

아름답게 꾸며진 왕자의 저택과 왕자의 총애를 떨치고 나온 안견의 모습에서 옛 경전이 가르치는

'知止, 그칠 때를 알다' 의 경지를 보았던 것일까.

 

<몽유도원도>를 그린 뒤 수년이 지날 무렵, 안견은 안평대군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정국의 불안함 속에서 안평대군이 여전히 교제를 즐기는 모습에서 안견은 위태로움을 감지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안평대군에게 시시때때로 그림 요청을 받고 총애를 받고 있던 안견이 안평대군을 훌쩍 떠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와 안평대군의 관계는 실로 각별했다. 여러 해에 걸친 그들의 교유는 최상의 예술세계에서

재기발랄한 왕자와 실력있는 화가가 호흡을 맞춘 화려한 동행이었다.

 

안평대군의 죽음 후에도 안견은 살아남았으며, 세조 치하의 왕실에서 화원으로 남아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안견의 활동기록은 1450년대 이후로 현격하게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안견의 마음 속에 사라진

안평대군의 소장품들과 <몽유도원도>를 그리던 분홍빛 시절이 어떻게 비통하게 남아 있었을지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훗날 율곡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출중한 그림 실력을 설명하느라 신사임당이 어렸을 때 안견의 산수화를

그대로 베끼면서 학습한 일화를 소개했다.  조선시대 여성의 산수화 작품이 당대의 고위관료 소세양과 정사룡 등에게

칭송의 시를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로 이어지는 조선의 그림에 대한 기록에서도 안견을 칭송하는

내용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안견은 조선시대 화가의 으뜸으로 또 놀라운 지혜의 소유자로 기억되었다.

안견의 그림과 인격에 대한 기억과 기록에서 우리는 작은 흠결도 찾을 수 없다.

 

 

 

 

 

 

 

 

 

 

 

몽유도원의 시축이 완성될 즈음

 

몽유도원의 미래는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안평대군과 그의 다들이 죽임을 당했고

안평대군의 유해와 그의 소장품은 사라졌다.

 

《몽유도원도》가 장착된 시축은 어찌 되었을까.

16세기 야사로 기록된 짧막한 목격담이

조선에 남은 모든 기록이다.

 

<몽유도원도>가 나타난 것은

20세기 초 일본에서였다.

그때까지 우리는 <몽유도원도>를 잊고 있었다.

 

 

 

 

 

 

 

 

 

(좌) 비해당터,  (중) 무계정사터,  (우) 담당정터

 

 

 

비해당

기린교가 놓인 그곳에 있었다

1429년, 안평대군이 12세에 혼인하여 살며 22세에 첫 아들을 얻은 곳으로 25세에 세종으로부터

'비해'라는 당호를 하사받은 곳이 '비해당'이다. 이곳에서 매죽헌에서 안평대군은 독서를 하고 문사들을 불러 모아

시모임을 가졌다. 안평대군이 「몽유도원기」를 작성한 곳도 비해당의 매죽헌이었다.

(좌) 인왕산 아래 기린교가 놓인 비해당 터(현 수성동 계곡),  (중) 기린교

(우) 겸재 정선의 수성동 '기린교' 부분

 

 

 

 

 

 

 

 

 

 

 

무계정사 터

<몽유도원도>에 그려진 도원의 경치와 무계정사 터를 비교해 보면 어떨가?

이를 위해서는 우선 무계정사 터의 특징을 찾아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무계정사에 관한 내용은 이개가 지은 「무계정사기」에 자세하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들은 그 위치와 경관을

재구성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될 것이다. 우선 기문 전체를 소개하고 세부적인 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① 경성京城의 북문을 벗어나 우거진 소나무 숲길을 2리쯤 가다가, 잿마루로 올라가 서쪽으로 조금 꺾어져서

동부洞府를 굽어보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툭 트여서 자못 사람이 사는 곳과는 다르게 여겨지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비해당의 정사가 있다.

② 이 골짜기는 백악산의 서북쪽 기슭에 붙어 있으며, 안쪽은 완만하고 외부는 조밀하여 은은하게 하나의 구역

을 이루고 있다. 동서의 거리는 2, 300보 남짓하고 남북은 그 절반이 된다. 시냇물이 그 가운데로 흘러서

돌에 부딪쳐 포말을 형성하고 세찬 물소리를 내며 아래로 쏟아져 계곡 입구에 이르면 높다랗게 매달려

두어 발 길이의 폭포가 되는데, 이른바 무계武溪라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③ 못에는 연꽃을 심었고, 채소밭에는 외를 심었으며, 수백 주에 달하는 복숭아나무와 수백 떨기에 달하는 대나

가 주변을 에워싸고 잘 배열되어 있다. 정사精舍가 동구洞口를 웅거하고 있는데 동구는 서남쪽으로 방

을  잡고 있으므로 채연과 시비가 산을 베고 시내를 굽어 보고 있었다. 올라가서 한 번 돌아다보니 풀과

나무는 무성하고 연기와 구름은 뭉게뭉게 피어 올라서 비어 있는 듯도하고 그윽한 듯도 하여 완연히 도원동

의 기이한 운치가 있었다.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 근원을 찾아보고자 했더니, 다래 넝쿨이 엉클어져 있

고 바람 소리와 물소리가 요란하며, 새들은 숲에서 놀라고 다람쥐는 구멍으로 도망치는데, 아득해서

찾아갈 수가 없었다.

 

 

④ 드디어 북쪽으로 조그만 능선의 비탈길을 올라가서 멀리 바라보니, 겹겹으로 높고 낮은 봉우리가 원근을 에워싸고

읍하는 듯하고 합장하는 듯하였으며, 또한 규圭를 받든 듯도 하고, 구슬이 죽 벌여 있는 듯도 하였다. 여러 계곡

에서 쏟아지는 물이 큰 내에 합류하였는데 치닫는 물결과 반석을 두고 몇 리를 이리저리 바라보다 구불구불한 길

을 따라 다시 정사로 돌아와 쉬노라니, 정신은 맑아지고 뼈까지 상쾌하여 그대로 머물 수 없는 것을 느꼈다.

⑤ 이에 비해당이 나를 데리고 산책차 나가서 나에게 술을 따르며 명하기를 "내가 일찍이 도원에서 노는 꿈을 꾸었는데

여기 와 보니 꿈속에서 보던 도원과 너무도 흡사하였다. 어쩌면 조물주가 기다렸던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

겠다. 어찌 천 년 동안이나 감춰 두었던 곳을 하루아침에 드러내어 기어이 나에게 돌아오게 하였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여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초를 캐 먹으면서 주린 배를 채워 은사隱士가 되기 위한 것도 아니며, 노을을 반찬으

로 삼고 형체를 단련하여 신선이 되고픈 것도 아니다. 또한 고상한 뜻으로 세상을 경시하고 신선을 가탁하여 스스로

고고한 척하려는 것도 아니다. 흥취가 산에 있으면 언덕에 올라 조용히 휘파람을 불기도 하고, 흥취가 물에 있으면

가에 나가 시를 읊으면서, 사물의 변화에 따라 소식消息하는 이치를 살펴보고 천도天道의 유행을 즐기며, 마음

대로 루 노닐어 나의 천성을 온전하게 하기를 구할 따름이다. 그대가 한 마디 하여 나의 뜻을 넓혀 주는 일이

어서야 되겠는가." (하략)

경태景泰 신미년(1451년, 문종 원년) 가을에 한산韓山 이개李塏는 삼가 기문을 쓰다.

 

 

 

 

 

 

 

김석신, 담담장락澹澹張樂  18세기 종이에 담채, 32.1×46.8cm, 간송미술관

'자연 > 취월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교 동창 고희연古稀宴  (0) 2023.06.25
夢遊桃源(몽유도원) 3  (2) 2023.06.03
夢遊桃源(몽유도원) 1  (1) 2023.06.03
장성 황룡강변에 배치된 소방 헬기  (0) 2023.03.06
김구선생 은거지 보성 쇠실마을  (0) 2023.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