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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김구선생 은거지 보성 쇠실마을

기러기재(雁峙)를 넘는데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 안내판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 전부터 팻말을 봐 왔지만 오늘에야 작정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

 

 

 

 

 

 

 

 

김구선생이 쇠실마을을 다시 찾은 건 1946년 9월, 선생의 나이 71살 때.

헤어짐의 아쉬움을 담은 한시를 남기고 떠난 지 48년 만이었다.

이름도 '김두호'가 아닌, 민족의 지도자 백범 김구 신분으로.

 마을을 다시 찾은 백범은  '감격에 넘치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기념관

 

백범 김구선생 은거 추모비

 

 

 

 

 

 

 

 

 

 

 

 

 

기념관 뒷편의 우물인데 괜찮은 물맛으로 소문이 난 모양.

사진상의 빨간 옷차림의 청년은 광주에서 여기까지 찾아와

페트병에 물을 담아가고 있었다.

 

 

 

 

 

 

 

 겨레의 큰 스승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선봉에 섰다.

 '아기 접주'라는 별명으로,교육자로서 애국 계몽운동도 펼쳤다.

신민회 사건에 연루돼 15년 형을 선고받고, 4년간 옥살이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해 임시정부가 결성되자 '문지기'를 자처했다.

이어 국무령, 주석으로 일하며 항일에 앞장섰다.

한인애국단을 조직,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주도했다.

한국광복군을 창설, 미국·영국 등 연합군과 공동작전도 폈다.

해방이 되자 11월 조국에 돌아와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국토와 민족의 분단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추진 중

49년 6월 26일, 친일 반민족·반통일 세력의 흉탄으로 서거하게 된다.

 

백범이 이곳 쇠실마을에 찾아든 것은 1898년 음력 5월  23살 청년 김창수 신분으로.

대동강변에서 일본군 장교 쓰치다(土田)를 맨손으로 죽인, 치하포 의거로

인천감리서에 투옥 중 탈출한 직후로 쓰치다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하수인.

공주 마곡사를 비롯. 함평 등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 숨어든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안동 김씨 집성촌이자 종친이었던 쇠실마을 김광언의 집이었던 것. 
백범은 이 집에 40여 일 머물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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