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은 약관의 나이로 집현전 학사들과 문학을 논하고 예술의 향유와
한글 연구에 기여하면서, 당송의 대문호 시선집을 여러 권 엮어냄과 동시에
고대 중국에서 원나라에 이르는 글과 그림을 수집한 컬렉터 이기도 하였으며
그의 유려한 송설체松雪體는 중국에까지 알려졌을 정도였다고.
그의 나이 29세 봄이 막 지나갈 즈음인
음력 4월 하순 20일 밤 특이한 꿈을 꾸었노라고 스스로 기록하였다.
심산유곡에서 신비로운 안내를 받아 도원桃源에 이르는 꿈이었던 것.
그 꿈에서 안평대군은 네 명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시종 동행한 벗, 그를 안내한 산山 사람, 그리고 문득 도원에서
마주친 두 명의 학사들이었다고.
화가 안견安堅(1440-60년대 활약)에게 꿈 속 풍경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리게 하고, 꿈의 감회를 곡진하게 기록한 「몽유도원기夢遊桃源圖記」를 짓는다.
후로 그를 방문한 스물 한 명의 문사들에게 그림을 보이고 시를 청해 받았다.
안평은 다시 시를 짓고 이를 모두 이어 장대한 두루마리 축軸을 만들었다는 정도가
보통의 우리네가 <몽유도원도>에 대해 알고 있는상식.
동네 도서관에 들렀다가 서울시 종로구에서 발행한
<몽유도원夢遊桃源>을 보게 되었는 바
이 책은 안평대군의 숨결이 묻어있는
이용집 터가 소재한 종로구에 '몽유도원도 전시관'을 건립하고
이를 기념 소개하기 위해 발간하게 되었다고.
궁금증 해소차원에서 새롭게 알게된 점 등을
이 자리에 옮겨가며 공부 해보기로 한다.
그림의 우측 부분으로 기암 괴석에 둘러싸인 분지에 도원桃源이 펼쳐져 있다.
그림의 좌측 부분
위 내용을 받들어 안평대군은 자신의 집을 '비해당匪懈堂'이라 하고, 서재는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1447년에 쓴 「몽유도원기」 말미에 송설체로 적은 '서우비해당지매죽헌, 비해당 매죽헌에서 쓰다'
맨 아래 인장은 '낭간琅玕'과 '청월이장請越以長'이다. '낭간'은 비취석의 일종이며 세종이 안평에게 내린
'해남낭간海南琅玕(해남에서 캔 비취)에서 취한 이름으로 '해남낭간'은 비해당의 정원 장식이었으며,
'청월이장'은 맑고 길게 이어지는 옥소리의 울림을 뜻한다고.
조선의 송설체松雪體로 이름을 날렸다는 안평대군의 서체.
1450년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한 말이다.
내한(예겸)이 우사(사마순)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전에 셋째 왕자(안평대군)를 보았을 때 모습과 태도가 매우 훌륭하였지요.
또 한묵翰墨까지 이러하군요." 하고 두세 폭을 어서 볼 수 있도록 써 주기를 청하자, 상(세종)이 기뻐하며 써 주라 명하니,
두 사신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였다. 다음 날 연회석에서 비해당에게 직접 요청하여 묘적妙跡을 얻어다 중국에 전하고
싶다고 하자, 비해당이 하룻밤에 행초行草 수백 장을 휘둘러 써 보냈다. 두 사신은 기대 이상에 크게 기뻐하고
또한 그 신속함을 신기하게 여겨 각각 시를 지어 사례하였다.
그 해 가을, 중국에서 온 정선鄭善이 새로 등극한 문종에게 "예겸과 사마순이 안평대군의 필적을 가지고 가서 바치니
황제께서 '매우 좋다, 꼭 이것이 조자안趙子昻의 서체로다.'라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조자앙의 서체'는 원나라 관료문인이자 서화로 이름 높은 조맹부의 송설체이다. 우아하면서 힘이 있어서
고려 말기로부터 조선전기 한반도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높이 인정받은 안평대군의 글씨는 '갑오자甲午字'라는 활자로 주조되었다.
세종의 서거 후 신도비를 세울 때 그 비문으 글씨를 안평대군이 썼으며, 안평의 명필을 모아 첩을 만들기도 했다.
위 · 진 이래 중국 명필과 신라 이후 한국의 명필을 모은 《비해당집고첩(1443)》이 그것으로
이는 조선시대 법첩法帖의 효시였다고.
세조 치하에 들면서 갑오자의 활자는 녹여 없어졌고, 세종의 신도비문의 안평대군 글씨는 거의 지워졌으며,
《비해당집고첩》 또한 온전하게 전하지 못하고 있다. 훗날 판각본으로 만들어진 안평대군의 글씨를 보고,
숙족대의 관료 학자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토로한 감회는
안평대군의 글씨를 칭송하며 그리워한 많은 글들 중 한 예라고.
구름을 헤치고 안개를 휘모는 듯 마음대로 기울이고 세우니
굳세고도 고운획이 가로지르는 데 격률이 기특하구나
안평대군은 젊어서 죽어 그의 서체가 성숙해질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그나마 전하는 작품이 희소하다.
「몽유도원기」가 얼마나 귀중한지, 여기서 알 수 있다 하겠다.
<세종영릉신도비> 세종대왕기념관, 보물
1970년대 발굴한 비석에는 안평대군의 글씨가 지워져 있다.
《신편산학계몽新編算學啓蒙》 청주고인쇄박물관, 보물
원나라에서 들여온 수학서적으로 조선에서 전문기술과목의 수험서가 되었다.
1451년 조선에서 처음 간행할 때 '갑오자(안평대군 서체로 만든 활자)'로 인출하였다.
《당송팔가시선》 청주고인쇄박물관
안평대군이 엮은 '당송팔가시선' 제1권의 첫 면으로 이백의 시 부분이다.
권의 제목 아래 '비해당찬'이 보인다.
《당송팔가시선》에 선정된 여덟 명의 시인은 널리 알려져 있는 '당송팔대가'가 아니다.
안평대군이 선정한 시인은 당나라의 이백과 두보, 위응물, 유종원, 송나라의 구양수, 왕안석, 소식, 황정견이며,
이 책에 실린 작품수를 헤아리면 두보의 식 가장 많고, 왕안석, 소식이 그 뒤를 잇는다.
안평대군이 왕안석의 시를 각별히 애호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안평대군은 또한 그가 좋아하는 중국 시인들의 시집을 별도로 출간하였다.
이 시선집들의 편찬방식은 오늘날의 학자들에게도 흥미로운 연구거리이다.
의학서와 불경 등의 편집에서도 안평대군의 역할은 실로 활발하였다. 안평대군에 관련된
조선초기 출판의 내역을 살피노라면 젊어서 죽은 사람의 흔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훗날 누군가 관련 문헌을 모아 《안평사적安平事迹》을 내고 또한 시문을 모아 《안평유고》를 냈으며,
이를 낭선군 이우가 보관하고 있었다고. 또한 누군가는 《비해당집》이란 제목으로
안평대군의 시문집을 냈던 것으로 보인다.
완성된 시축은 제작자의 사회적 위상과 취향을 보여주는 물건 혹은 예술품이 된다.
- 중략 -
1450년, 안평대군은 오늘날 부암동 일대를 노닐다가 꿈에서 본 도원과 그 지형이 유사함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이에 터를 닦아 '무계정사武溪亭舍'를 만들고 그 이듬해 1451년 이를 기리는 시를 짓고 여러 문사들의 시를 받는다.
근래에 발굴된 고서 중 안평대군을 포함한 10인의 시가 모아진 창수시집이 있다.
이 또한 시축을 위한 시모음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완성된 시축을 풀어서 어루만지며 친애하는 명사들의 친필시문을 다시 보는 것은 얼마나 뿌듯하고 즐거운 일이었을까.
안평대군과 문사들의 빈번한 교제를 빌미삼아 수양대군에게 다음의 제안을 하였다. 이는 한명회가 30대 후반에
들 무렵, 즉 몽유도원도 시축이 완성되어가선 1450년 즈음의 기록이다.
이 때 여러 왕자가 다투어 손을 맞아드리는데 문인文人 재사才士는 모두 안평대군에게로 돌아가 당시 수양대군
세조도 그보다 나을 수 없었다. 한명회가 찾아가 보니 (수양대군에게는) 크게 인재가 없는지라 비밀스럽게 책략을
바치기를 "세상에 변동이 있게 되면 문인으로서 대우를 받음은 쓸모가 없으니, 나으리께서는
모름지기 결탁하여 두세요" 라고 하였다.
안평대군의 모임은 번화했지만 문인들의 모임이라 정치적 실속이 없다는 한명회의 판단이
위와 같은 기록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왕자의 신분으로 무리를 지어 이목을 끄는 것은 오래 유지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사회구조에서 왕자라는 신분은 매우 독특하여, 과거시험의 절차가 없이도 1품의 벼슬에 제수되지만
정치를 하여서는 안된다. 특히 무리를 짓는 일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된다. 성간(成侃, 1427-1456)의 어머니는
아들이 안평대군에게 초청되더라도 그에게 가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녀는 무리를 짓는 왕자의 말로가 좋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평대군의 문화적 위상이 높아질 때, 그의 곁에서 오랜 총애를 받던 화가 안견도
불안감을 느꼈다. 이에 대하여는 다시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 '꿈' 이란 무엇인가
꿈(夢)은 고대로부터 예언력을 가지는 조짐이자 현실과 미래에 관여하는 강력한 메시지로 이해되거나, 활용되고 있었다.
하늘天이 올바른 의지로 인간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에게 '꿈'이란 하늘의 의지가 은밀하게
드러나는 단서 혹은 징험이었다. 유학자들이 이상적인 국가로 간주하여 본받고자 하는 중국의 고대국가 주周나라에는
'점몽관占夢官'이라는 관리가 있어서 왕의 꿈을 해몽하고 해, 달, 별 등의 운행을 관찰하여 중요한 나랏일의 길흉을
가름하였다. 주나라의 제도를 정히한 책이자 유가의 경전이었던 《주례周禮》에 따르면, 점몽관은 제도를 관장하는
춘관春官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는, '점몽' 즉 해몽의의 중요성에 대하여 왕실은 물론
현명한 학자들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근거가 되었다.
주나라 이전 삼황오제라는 전설의 시대에서 첫번때 황제의 꿈 또한 한반도 학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황제가 낮잠을 자다가 화서씨華胥氏의 나라에 방문하였는데 이 나라에는 임금이 없고 백성들은 욕심이 없으며
자연히 나서 살다가 죽은 뿐, 산단ㄴ 것을 좋아할 줄 모르고 죽는다는 것을 싫어할 줄 모르며, 비명에 죽는 일도
없고 어려서 죽는 일도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황제는 그의 나라를 화서씨의 나라처럼 다스렸다고 한다.
《열자列子》의 황제편에 전하는 이 이야기는 '몽유화서夢遊華胥'라 일컬어졌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꿈'을 논할 때 가장 많이 거론한 것은 은나라 고종의 부열傅說 꿈과 성현 공자孔子의 주공周公
꿈이었다. 은 고종은 꿈에 하늘이 그를 보필할 자를 보여주자 초상화로 그리도록 하여 마침내 부암傅說을 찾았다.
부열은 명재상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유가 경전인 《서경》과 역사서 《사기》에 모두 실려있으며, 조선시대 내내
그림으로 그려졌다. 한편 공자는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한다고 통탄하기를 "심하도도, 나의 쇠함이여! 오래구나,
내가 다시는 꿈속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다니."라 하였다고 한다. 이는 《논어》에 실려있다. 고종의 꿈은 꿈의
신통력과 예언력을 말했다면, 공자의 통탄은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꿈으로 이어진다는 꿈의 속성을 말해준다.
안평대군이 활동하던 조선초기에는, 종교적 · 정치적인 꿈 이야기들이 특별하게 만연하고 있었다.
한반도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불교계에서의 꿈의 위력은 상당하여, 큰 스님들의 출생에는 신통한 태몽이
어김없이 뒤따랐고, 거대한 사찰의 건립과 불력의 대단함을 받쳐주는 황당하고 신이한 꿈 이야기들이
수도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받쳐주는 꿈들이 또한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태조 이성계가 왕에 오르기 전에
꾸었던 금척金尺 꿈이다. 꿈에 신인神仁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성계에게 금척을 주며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될 것을 예언하였다. 여기서 척이란 세상을 측정하고 다스리는 힘을 상징한다. 조선의 관료들은 이 꿈을 찬양하였고
또 악곡으로 만들었다. 세종시절 왕실의 잔치에서 이 악곡은 무용과 함께 연주되었다.
제목은 '계몽금척지기' 였다.
안평대군의 「몽유도원기」는 이러한 '꿈夢' 기록의 전통에 기반하여, 꿈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혹은 어딘가로 가는
꿈 기록의 일반적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안평대군의 꿈은 벗들과 도원을 노니는 봄날의 소망을 표현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혹은 그가 도달한 도원의 쓸쓸함 속에 아무도 모르던 그의 종말을 암시하는 징조가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정치적 꿈의 효력과 예언력이 상식처럼 만연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평대군은 하필 '꿈'을 기록하였다.
「몽유도원기」
때는 정묘년(1447) 음력 4월 20일 밤, 내가 잠자리에 들려는데 정신이 아른거려 잠에 푹 들었고 꿈을 꾸었다.
홀연히 인수仁叟(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 이르렀는데 겹겹의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에 산세가 험준
하고 말쑥하며 복숭아꽃 나무 수십 그루의 숲이 있었다. 오솔길로 그 숲의 끝에 이르자 길이 갈라져서 머뭇
거리며 우두커니 서서 갈 곳을 모르고 있었는데, 마침 산관야복山冠野服 차림의 사람이 나타나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하에게 말하였다.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가시어 골짜기에 들면 곧 도원입니다."
나와 인수가 말을 채찍질하며 그곳으로 찾아가노라니 절벽의 길이 빼어나고 숲이 울창한데 계곡이 휘돌고
길도 휘돌아 백번이나 꺾어지니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 골짜기로 들어가니 동굴 안으로 탁 트인 곳이
이삼리가 되겠는데 사방으로 산은 벽처럼 솟아있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엉키어, 멀고 가까운 복숭아
숲에 짙은 노을이 어리비치고 있었다. 대나무 숲에 있는 초가집에는 사립문이 반쯤 열려있고 흙섬돌이 이미
무너졌으며, 닭, 개, 소와 말은 없었다. 그 앞의 냇가에는 작은 배 하나가 물결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경이 고요하여 마치 신선의 마을 같았다. 이에 서성이며 한참을 둘러보다 인수에게 말하였다. "바위에
나무 걸치고 골짝을 파서 집을 지은 것이 이와 같지 않을까? 어찌 도원의 마을이 아니겠는가! 곁에는 몇
사람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이들은 정보貞父(최항)와 범옹泛翁(신숙주) 등으로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
을 찬술하는 이들이다. 함께 신발을 가다듬고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돌아보며 즐기다 꿈에서 깨었다.
아! 사방으로 통하는 큰 도읍지는 번화하여 높은 관료들이 노니는 곳이요, 깊은 골짝에 절벽은 그윽한 장소라.
은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이런 이유로 화려한 색 옷을 몸에 두른 사람은 족적이 산림에 이르지 아니하고, 산수
에서 정서를 도야한 사람은 꿈에도 조정을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 고요함과 시끄러움은 길이 다르니 이치가
반드시 그러함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낮에 생한 것이 밤에 꿈꾸는 것' 이라 하였거늘, 나는 몸을 궁전에
의탁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하는데, 어찌 나의 꿈이 산림에 이르렀던가. 또 어찌 이르러 도원까지 도달
했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데, 도원에 노닐며 따른 이가 하필 이 몇 사람인가. 생각건대, 그 성품이
그윽함을 좋아하고 본래 산수에 품은 뜻이 있으며 이 몇 사람과 사귐이 더욱 두텁기에 이에 이른 것이다.
꿈을 꾼 지 3일에 그림이 완성되었다.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쓰노라.
- 꿈속의 등장 인물들 -
첫 번째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1417-1456)이다.
그는 백번이나 꺽어지는 깊은산 속 험한 길을 안평대군과 함께 달려 도원에 당도한 동지로 등장한다.
박팽년은 1417년생으로 안평대군(1418년생)보다 한 살 많으니, 당시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그는 집현전 학사 제2세대의
'젊고 명민한' 엘리트군에 속한 학자로, 안평대군이 엮은 《찬주분류두시》와 《당송팔가시선》에 모두 서문을 쓰며 안평의
재능과 업적을 칭송하였고 안평대군의 시축 제작에도 빠짐없이 동참했던 인물이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포부가 담긴 책들
의 서문을 그에게 맡겼고, 기획하는 시축의 시문 제작을 요구하였으며, 박팽년은 매양 기꺼이 안평대군을 돕고 응원하였다.
안평대군이 《몽유도원기》를 작성하여 이를 가장 먼저 보이고 또 서문을 부탁한 인물도 응당 박팽년이었다.
박팽년은 《몽유도원기》를 받아보고 「서」를 지으면서, 《열자列子》에 실린 구절, '정신(神)이 만나면 꿈이 되고
형체(形)가 만나면 일이 된다" 를 인용하였다. 이로써 꿈의 예언적 효력을 강조하기보다는 꿈이 한갓 꿈이 아니라는
합리적인 내용을 전개하였다. 무엇보다, 몸에 의지하지 않은 정신의 자유로움을 피력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화가 안견이 <몽유도원도>를 그릴 때 꿈속 등장인물들의 '형'을 그리지 않은 근본적 이유를
제공해주고 있다. 안평대군의 사후, 세조로부터 높은 벼슬을 받았지만 문종을 복위하고자 목숨을 건 모의를 꾀하고
세조의 고문에도 세조의 왕권을 끝내 부정하다가 죽으멩 이른 심지 굳은 학자 박팽년을 생전의 벗으로
곁에 두었던 안평대군은 그 삶이 짧았지만 행복했을 것 같다.
일찍이 세종이 안평대군에게 석류꽃에 대한 시문을 짓도록 하고 흡족하여 직접 화답시를 지어 하사한 일이 있었다.
안평대군은 얼마나 기뻣던지, 여러 문사들에게 축하시를 받아 석류꽃시의 시축을 만들었다. 이 시축의 서문도
박팽년에게 부탁했다. 박팽년의 서문은 다음과 같다.
비해당은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이 날로 새롭다. 육경六經의 심오한 뜻을 연구하지 않은 바가 없으며 그 중에서
시詩에 있어서 더욱 깊이 연구하여 체득하였으므로 독실하게 좋아하였고 독실하게 좋아하였으므로 그의
시법詩法의 오묘함은 옛 사람보다 뛰어나다. 오호라, 그 성盛함이여.
두 번째 등장인물은, 도원으로 안내한 산관야복山冠野服 차림의 산사람이다.
그는 안평대군이 갈림길에 서있을 때 나타나 가는 길을 안내한 신비로운 인물이다. 산관야복이란, 산사람의 모자와
평상의 옷이란 의미로 소박한 차림으로 해석되곤하는데, 이 표현은 북송의 학자 소식蘇軾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는 하충何充(호 수재秀才)에게 쓴 시에서 자신의 모습을 '황관야복黃冠野服'으로 표현하였던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내 모습을 그리느라 수고하시는가.'
그대가 말하기를, '이것이 좋아 그저 스스로 즐기는 것이지요.'
황관야복黃冠野服의 산山 사람의 모습으로 하시니,
생간건대 나를 산과 바위 속에 두고자 하시는군요.
소동파가 그 자신을 재현한 초상으로 흡족하게 여긴 모습은 '황관야복黃冠野服의 山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소동파 이미지를 끌어다가 안평대군은 자신을 안내하는 사람의 형상으로 삼았다.
실로 근사한 꿈길의 출발이 아닌가.
안평은 꿈을 꾼 지 3년 뒤 <몽유도원도>를 다시 펼쳐보며 이 꿈의 이야기가 그림과 함께 후세에 전해질 것을
기대하였다. 이를 위해 시축을 꾸리고자 하여 그 앞머리에 붙일 시를 새로 지었다. 이 시에서 안평대군이
소환한 인물은 꿈에 등장했던 여러 인물들 중 오직 한 사람, 산관야복의 안내자였다.
"야복산관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세간 어디에서 무릉도원으로 꿈꾸랴
야복산관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그림으로 그려놓고 보노라니 정녕 좋은 일이구나
절로 천년 너머 전할 것이라 생각하노라
- 3년 뒤(1450), 정월 초하루 밤 치지정致知亭에서 펼쳐보고 짓노라 - 청지淸之
세 번째 등장인물은 최항(崔恒, 1409-1474)과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이다.
도원에 이른 안평대군은 문득 곁에서 뒤딸는 두 인물을 발견하였고, 이들을 일러 「몽유도원기」에서는
'동찬운자同撰韻者.' 즉 '같이 운서韻書를 찬술하는 사람'이라 하였다. 훈민정음 반포 후 우리나라 한자음을
바로잡을 필요에서 1448년에 출간된 이 책의 서문 「동국정운서東國正韻序」(신숙주)에 소개된 집필자
아홉 명의 명단에 안평대군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를 통해 안평대군이 이 운서 편찬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최항은 1409년생으로 안평대군보다 9년의 연장자이다.
최항은 장원급제로 집현전에 들었으며, 문장력이 탁월하여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한 인물이었고, 한글창제
에서도 그 역할이 뚜렷하였다. 한평대군의 글씨가 중국 황실에서 칭송받은 것을 기리어 시축을 만들 때, 안평
대군은 최항에게 서문을 부탁했고, 최항은 안평대군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36세의 안평대군이 계유정난
(1543)으로 죽을 때, 최항은 계유정난의 1등공신이 되었다. 최항은 세조를 모시고 또 성종을 모시면서
《경국대전》 편찬과 실록 편찬을 담당하였고 벼슬은 좌의정에 올랐으며 65세까지 살았다.
신숙주는 1417년 생으로 안평대군과 더욱 가까이 지낸 인물이었다.
특히 그림에 관련하여 안평대군은 신숙주의 의견을 청하여 듣기를 좋아하였다.
자신의 수장고를 정리한 뒤 신숙주에게 보여주며 글을 써달라고 요청하였고, 안견이 그려준 25세 초상화에
발문을 부탁하였으며, 문종의 귤과 시를 내린 사연을 그린 그림을 성삼문으로 하여금 신숙주에게 보이고
서를 받도를 하였다. 신숙주는 서화를 수장한 안평대둔의 기량을 높이 칭송하였고, 초상화 속 안평대군을 보며
"영특한 자태는 세상에 뛰어나고, 기우氣宇는 높고 우람하다." 라고 칭송하였다.
그 가운데 눈길을 붙드는 것은 안평대군과 함께 할 자신의 미래를 축복한 다음의 구절이다.
"바라옵기를 스스로를 돌아보며 일취월장하시어 덕을 이루고 도가 완숙하게 되기에 이르신 연후에,
노인반점과 백발이 있는 초상화를 다시 만들어 나 숙주로 하여금 덕을 찬미하고 도슬 칭송하도록
붓을 들게 하신다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백발의 노인이 되어 함께 그림을 펼치며 우정과 도덕을 나누는 안평대군과 신숙주의 미래라니, 그것은 정치가
태평하던 시적ㄹ 그들이 나눈 찰라의 '꿈'이었고, 그때에는 진심의 바람이었으리라. 그러나 수년 후 계유정난으로
안평대군이 죽을 때 신숙주는 2등공신이 되었다. 신숙주는 세조 곁에서 영의정에 올랐고 또 성종을 보필하며
높은 관직을 지내다가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신숙주는 여러 측면에서 능력이 출중한 학자요 행정가였지만,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벌까지 주도하였다고 하여 후대 도학자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된 인물이다.
도원桃源이란,
복숭아꽃잎桃花이 흘러내리는 물길이 시작되는 곳源이다.
그곳에는 평화로운 작은 사회가 있었다는데
아무도 그곳을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
안평대군이 꿈을 꾸어 도착한 곳이
바로 그 도원이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도달한 도원에는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없었다.
안평대군은 왜 스스로 도원에 든 꿈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일까.
도원은 안평대군의 시절에 어떠한 의미로 혹은 어떠한 풍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장소였을까.
안평대군은 도원을 통하여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도원의 의미와 풍경은 안평대군이 꿈을 꾸기 천년 전 중국의 문학작품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비롯하지만
그 후 오랜 역사와 기억의 굴곡을 거치면서 안평대군에게 전달되어 있었다. 중국의 당나라와 송나라의 문인들은
'그곳이 신선의 마을이었을까' 아니면 '역사 속에 실존한 사람들의 성취였을까'를 논하였고, 고려의 문인들은
한반도의 마을 이름 한 곳을 '도원' 이라 붙여놓고 그곳이 「도화원기」에 묘사된 평화로운 마을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안평대군은 당나라와 송나라는 물론 고려의 시문학을 충분히 익히고 사랑했기에,
도원이란 장소에 담긴 오랜 그리움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안평대군이 도원의 꿈을 특별하게 여겼던 이유이다.
그런데 안평대군이 펼쳐 보인 도원은 빛이 자욱한 고요의 공간이었다.
안평대군은 도원의 의미를 제안하지 않았다. 이를 본 문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학식과 상상력을 찬으로
펼쳐 내도록 하였으니, 몽유도원을 읊은 시축에는 그 시절 여러 문인들의 꿈이
용광로처럼 녹아들게 되었다.
《천고최성첩千古最盛帖》 <도원도> 작가미상, 조선 17세기 말~18세기 초, 국립중앙박물관
대개의 '도원도'에는 이와 같이 도연명의 「도화원기」 속 마을, 어부, 마을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도원의 유래가 있다 -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우연히 '도원'에 다녀왔으나 그곳을 다시 찾아갈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중국의 4세기 문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이 쓴 「도화원기」라는 기록문으로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이 기록인지 소망의 상상인지 오늘날까지 해석이 분분하지만 「도화원기」에 기록된
도원은 동아시아의 유토피아가 되었고, 시인과 화가들에게 불멸의 주제가 되었다.
깊은 산 동굴을 통과하여야 나타나는 작고 평화로운 사회, 어부가 떠나온 후
아무도 그곳을 다시 가지 못했고, 아무도 그런 마을을 만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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