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1847) 썸네일형 리스트형 임인년 필암서원 추향제 장성 필암서원 '우동사'에서의 제향 임인년 필암서원 추향제 초헌관 국회의원 이개호 「하서 김인후 선생」 추모 한글 백일장 시상식 우로부터 으뜸상: 장성중앙초교 5년 최현지 버금상: 장성성산초교 5년 박서영 장려상: 장성사창초교 5년 최민우 고난 천품과 결합되면서 비상한 상승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나 짐작된다. 현실에서 느끼는 깊은 좌절감과 실의를 하서는 흥취의 미학으로 발산하거나 승화시켰던 것이 아닐까. 요컨데 하서의 시가 보여주는 흥취는 개인적인 요인 이외에도 시대적 현실 및 그가 속한 문화적 풍토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할 것이다. - 사서시선 246~251 쪽에서 가져옴 선운사 도솔천 꽃무릇 선운사 도솔천에 피어난 꽃무릇 천왕문에 내걸린 뉴 선운사 현판. 서체를 보아하니 과거의 것을 모사 모각한 느낌이다. 신축 건물에 어디선가 본듯한 편액이 보이길래 다가가 보니 원교 이광사 특유의 뼈다귀 서체에 새롭게 채색한 '정와'가 내걸린 모습이다. 이 현판은 본디 관음전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다시 도솔천과 꽃무릇의 어울림에 눈길을 보내며 서서히 걸어 오른다. 해마다 양지녘인 이 지점의 꽃무릇이 가장 먼저 피어나는 듯. 바리깡질을 해댄 차밭을 따라내려가니 전엔 없었던 신축 건물이 차밭을 파헤치고 들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여느 사찰과 마찬가지로 선운사 역시 소위 템플스테이 명목의 건물을 비롯 이런 저런 명찰을 내건 신축 건물들이 녹색의 공간을 서서히 점령해가는 듯. 고창이 자신의 나와바리임.. 사진 속 근대 한국 <2> 江原道 외금강 옥녀봉의 절정 천선대天仙臺의 기암괴석. 춘천 일본군 수비대가 점령한 옛 관아. 초가지붕이 물결치는 원주읍내. 1937년에 읍이 되고 1955년에 시로 승격되었다. 울진의 옛 모습으로 당시는 읍이라기보다 작은 마을과 같은 느낌이다. 1963년에 경상북도에 예속되었으며 안일왕 산성, 능허루 등의 명소가 있다. 상), 주문진 철원 전경 (1920년대) 철원 공립 심상고등소학교 교사와 학생들. 명경대의 절경(내금강) 상), 만폭동 팔담 중에서 가장 빼어나다는 흑룡담 만폭동 팔담 중에서 이채로운 진주담. 상), 묘길상妙吉祥 보덕굴 한 개의 쇠기둥에 중력을 지탱하는 바위 꼭대기의 작은 암자. 옥류동 계곡의 아름다움. 오봉산 구만물상 중 제일의 기경 귀면암(외금강) 상), 구룡연 대폭 하), 비룡폭 신.. 사진 속 근대 한국 <1> 黃海道 해주 부용당 해주목사 김망金望이 중수했다는 부용당. 일제는 이곳을 곡물검사소로 사용하여, 부용당 본래의 멋을 찾을길 없게 되었다. 재령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였고, 부근의 재령철산은 유명하다. 사진은 1900년대 초의 재령시가 모습이다. 平安南道 모란봉에서의 조감 노송 가지 사이로 도도히 흐르는 대동강이 보인다. 평양남문통의 번화한 모습. 평양 주작문 거리 평양의 구시가 모습으로 뒤쪽에 우뚝 솟아 있는 대동문이 보인다. 평양 대동문 거리 대동강을 굽어보는 연광정과 종각 1406년에 창건된 대동문의 위용 평양 개선교 대동교 공중에서 본 당시 평양의 새로운 얼굴 평양 연광정 밑 대동강에서 빨래하는 여인네들과 고깃배가 보인다. 대동강변에 쌓아놓은 항아리 대동강변의 청류벽으로 단애에 음각된 명필들의 서체.. 조선 말엽 생활과 풍속 <2> 양반과 장죽長竹사랑채에서 빈객과 장기를 두는 윤웅렬 군부대신(좌).담뱃대가 길수록 양반이었던 시절답게 장죽의 꼭지가 재떨이에 닿아 있다 (1890년). 좌), 창의氅衣 차림의 선비창의는 벼슬아치들이 평상시에 입는 웃옷으로 소매가 넓고 뒷솔기가 갈라져 있다.고종 21년 이후에는 폐지되었다.우), 소년 시절의 김규식임시정부의 외무총장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의 6살 때 사진.그는 고아로 언더우드 집에서 서양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바둑을 즐기는 부부 조선조의 관복외국인에게 한국인의 정복으로 소개된 사진으로 각기 다른 차림에호피를 앞에 깔고 도열해 있다. 이 양반네 가족 역시 호피를 깔고 사진을 찍었다. 윤웅렬가尹雄烈家윤웅렬 군부대신과 그 아들, 손자, 손녀들로 군부대신 집안답게 모두 .. 조선 말엽 생활과 풍속 <1> 아이들의 지게조혼이 성행하던 시절이라 아이들이라면 고작 열 서너살 때까지다.무렵의 아이들은 여덟 살쯤이 되면 벌써 그 크에 맞는 지게를 만들어주고 어른의 심부름으로 짐 나르는 일부터 배웠다. 걸상이 있는 서당제법 책상 같은 것이 있으나 실상은 맨 앞줄 아이들처럼 책을 바닥에 놓고 배운다.처음에는 천자문으로 글자 하나하나를 익힌다. 암송이 첫걸음책은 모두 소리를 내어 낭독한다. 읽는 내용이 모두 다르므로 시끄러울 듯하나제 책만 소리 높여 읽으므로 과히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땅바닥에서의 글씨 연습 (1900년대)글씨 연습도 서당 공부의 하나다. 훈장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땅바닥에다 열심히 글씨를 쓰고 있다.옛날에는 종이가 귀해 요즘처럼 노트가 따로 없고 꼬책이나 숯으로 땅바당에서 글씨 연습을 ..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4> 1910년 4월 국내 정치비밀결사 「신민회」 주동인물인 이동녕李東寧 · 이시영李始榮 · 양기탁梁起鐸 선생 등이 국내 정치투쟁의 종말을 예견하고 가족 등을 대동하여 서간도 삼원보로 망명, 자치기관으로 경학사와 교육기관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한 것이 근대적 독립운동기지 마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의 「권업회」, 간도의 「중광단」, 「부민단」 등의 조직이 잇달았다. 미주에서는 박용만 선생의 주동으로 1914년 6월 10일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이라는 무력단체를 조직했다. 특기할 것은 최근에 밝혀진 것으로 1914년 3월 이상설 선생이 정통령에 취임한 최초의 망명정부 「대한광복군정부」 를 수립한 일이다. 이 망명정부는 노일전쟁 10주년을 기념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 보스틴의 양해하에 수립되었던 것이.. 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 <3> 호남 항일 의병투쟁 한일합방을 전후해서 전국 의병들의 60.1%, 교전회수의 47.3%를 차지할 만큼 호남지방은 의병투쟁의 중심지역이었다. 일본경찰과 헌병대가 집계한 통계에 따르면 1908년에는 교전 회수에 있어서 전남 · 강원 · 황해 · 전북 · 충남 · 경북 등의 순이었고, 1909년에는 전남 · 전북 · 경기 · 경북 · 충남 · 강원의 순이었다. 일제는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40일간에 걸쳐 보병 2개 연대 2, 260명을 동원, 전남지역을 휩쓰는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였다. 이때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운 의병 수가 17, 570명으로 집계되었다. 일본의 소위 「남한대토벌작전」에 끝가지 항전하다 체포된 호남의병장들. 가슴에 포로 번호를 달고 있다. ..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23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