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취월당 (740) 썸네일형 리스트형 선인들의 유람록 <금강산 2편> 김하종金夏鐘, 《해산도첩海山圖帖》, , 1815년, 29.7×43.3cm, 국립중앙박물관. 이원李黿, 「금강산 유람록遊金剛錄」 날이 늦어 장령獐嶺(노루목)을 넘어 계곡을 따라 내려가 남쪽으로 돌아서 서쪽으로 들어가니 유점사 골짜기 입구였다.뭇 산이 빼어남을 경쟁하고 수많은 계곡은 흐름을 다툰다. 가파른 봉우리와 끊어진 바위벽이 시내를 끼고 둘러 서 있다.뒤를 잠깐 보고 다시 앞을 보니, 들어온 길을 알지 못하겠다. 봉우리들과 바위 벽들은 훌륭한 사람과 열사烈士들이 옷깃을 여미고 서 있는 것처럼 단정한 모습이다. 하나는 움직이고 하나는 고요하며, 점잖은 외형이나 묵묵한 언색이 거의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이에 시를 지었다. 계곡 북쪽에는 고개 하나가 있는데, 환희령이라고 부른다. 걸어갈 수는.. 선인들의 유람록 <금강산 1편> 정선, 《풍악도첩》 중 , 1711ㄴㄴ, 36×37.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이 36세 되는 때에 엮은 《풍악도첩》에 실려 있다. 빽빽한 구도이지만 너럭바위에 앉은 수 사람을 중심에 두어, 그들의 한담에 주목하게 하였다. 그들은 필시 시내 소리로 시비 소리를 차단해 두고 흉금을 털어놓았으리라. 이곡李穀, 「동유기東遊記」 지정 9년(1349) 가을에 금강산에서 노닐고자 8월 14일 개성을 출발하였다. 이후 8월 21일에는 천마령을 넘고, 산 아래에 있는 장양현에서 잤다. 이곳은 금강산과는 30여 리 떨어져 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부리나케 식사를 하고 산에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어두웠다. 마을 사람이 "풍악에 놀러 오는 분들이 많지만 구름과 안개 때문에 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선인들의 유람록 <지리산 2편> 이징李澄, , 1643년, 89.3×5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동방 오현東方五賢 중 한 사람인 정여창鄭汝昌의 옛 별장인 악양정岳陽亭을 그렸다. 그림 윗부분에는 전서체로 '화개현구장도花開縣舊莊圖' 라 적혀 있고, 아랫부분에는 정여창의 「악양정」 칠언절구와 유호인兪好仁의 시서詩敍와 시 · 신익성申翊聖의 후지後識 · 조식曺植의 「유두류록游頭流錄」 일부 · 정구鄭逑의 「유가야산록遊迦倻山錄」 일부가 신익성의 글씨로 적혀 있다. 선현을 추모하는 뜻과 누워서 산수에 노니는 운치를 함께 담은 화폭이다. 조식曺植, 「두류산 유람록游頭流錄」 5월 23일. 아침에 산을 오르려 하니 옥륜이 밥을 차려주며 우리를 전송하였다. 두류산에 크고 작은 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지만 유독 신응사의 물과 돌이 최고라고 .. 선인들의 유람록 <지리산 I편> 김윤겸 , 18세기, 29.6×34.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윤겸은 서얼 출신의 문인으로 산수화에도 뛰어났다. 선인들은 지리산을 종주하지는 않았으나 그 선경을 사랑하여 많은 시문을 남겼다. 이 그림은 지리산의 전경을 구도에 넣으면서 자잘한 수식을 떨어버리고 산의 본상에 육박하였다. 김종직金宗直, 「두류산 유람록遊頭流錄」 신시(申時, 오후 4시) 에야 천왕봉을 오르자,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날이 개게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 선인들의 유람록 <한라산 > 윤제홍尹濟弘, 윤제홍은 63세 때인 1825년에 경차관으로 제주에 갔다가 한라산을 올랐다.그리고 81세 때인 1844년에 이 화첩을 만들었다. 한라산에 올랐던 감회가 여전히 생생하여화면의 위 아래에 빼곡하게 감상을 적어놓았다. 그림 왼편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을 수 있다."무릇 산들은 모두 상봉이 있지만 이 산은 다만 사면에 봉우리들이 둘러서 있을 따름이다.가운데는 큰 못으로 사방이 40리라고 한다. 임제林悌, 「남명소승南溟小乘」 2월 15일.향불의 연기가 꼿꼿이 오른다. 맑은 해가 창문을 비추고 바람은 따스하고 새가 지저귀었다.잔설이 다 녹아 봄물이 흘렀다. 동행들이 모두 즐거워하며 "오늘의 유람은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식사를 재촉해 끝내고 행장을 단속하여 영곡.. 선인들의 유람록 <백두산> 조선팔도여지지도朝鮮八道與地地圖 16세기 후기, 106×68, 개인 소장. 홍세태洪世泰, 「백두산기」 『백두산기(白頭山記)』는 홍세태(洪世泰 : 1653~1725)의 문집인 『유하집(柳下集)』권9에 수록되어 있다. 1712년(숙종 38) 청의 목극등이 양국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파견된다는 통지를 받고 우리 조정에서는 박권(朴權)을 접반사로 삼아 청의 관원들과 함께 경계를 정하도록 하였다. 일행은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분수령을 찾아 사람 인(人)자 처럼 생긴 지형 가운데 정계비를 세우고 돌아왔다. 이 때 청의 목극등은 직접 백두산에 올라갔으나, 접반사 박권과 함경감사 이선부는 늙고 허약하다는 이유로 백두산에 올라가지 않고 역관 김경문이 목극등과 함께 올라갔다. 이 글은 김경문의 이야기를 직접 전해들은.. 장성의 의혼 (義魂) 장성의 의혼(意魂) 유적지를 돌아보기 위한 행로. 북이면 소재 '개천정사'를 향해 다리를 건너는데 '국토종단' 이란 깃발을 배낭에 꽂은 위 사진상의 일행이 시야에 들어 온다. 어른 한 명에 세 명의 귀여운 꼬맹이들. 곡절을 물으니, 파주 임진각에서 부터 내려 오는 길이라고. 살아있는 교육을 위해 홈스쿨링으로 자녀들을 케어하고 있다는 아빠의 설명. 하도 기특하고 대견해서 한참을 붙잡고 이런 저런 궁금증을 해소한 다음 돌아서는데 웬지 모를 가슴 뿌듯함이 일시에 몰려든다. 느낌상, 아빠의 대범하고도 올곧은 신념을 아이들이 일백 퍼센트 잘 소화하고 있는 듯. 부디 이 가정과 아이들의 앞날에 밝은 서광만이 가득하길... 개천정사(介川精舍) 국도종단 아빠가 방금 지나쳐온 '개천정사'의 내력을 내게 물었는데 아이들에.. 남문창의비와 오산창의사 남문창의비각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좌랑을 지낸 김경수(金景壽)가 김제민(金齊閔) · 기효간(奇孝諫) · 윤진(尹軫) 등과 함께 전라도 일대에서 의병을 모아 장성 남문(현재의 북일면 오산리 소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활동을 전개 했는데 이를 가리켜 ‘장성 남문 창의’라고 한다. 당시 장성현감 이귀(李貴)가 의병 창의 및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의병들은 김경수를 맹주로 삼고,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하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대부분 전사했다. 그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호남지역 유림에서 1802년(순조 2)에 남문 오산창의비를 건립했다. 비각 안에 놓여 있는 비석은 사각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이 비석은 두 개의 제목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앞면 중앙에..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9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