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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지리산 I편>

김윤겸 <지리전면도智異山全面圖>, 18세기, 29.6×34.7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윤겸은 서얼 출신의 문인으로 산수화에도 뛰어났다.

선인들은 지리산을 종주하지는 않았으나 그 선경을 사랑하여 많은 시문을 남겼다.

이 그림은 지리산의 전경을 구도에 넣으면서 자잘한 수식을 떨어버리고 산의 본상에 육박하였다.

 

 

 

 

 

 

 

김종직金宗直, 「두류산 유람록遊頭流錄

 

 

 

 

신시(申時, 오후 4시) 에야 천왕봉을 오르자, 구름과 안개가 성하게 일어나 산천이 모두 어두워져서 중봉中峯 또한

보이지 않았다. 해공과 법종이 먼저 성모묘聖母廟에 들어가서 소불小佛을 손에 들고 날이 개게 해달라고 외치며

희롱하였다. 나는 처음에 이를 장난으로 여겼는데, 물어보니 말하기를 "세속에서 이렇게 하면 날이 갠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손발을 씻고 관대冠帶를 정제한 다음 석등石磴을 부여잡고 올라가

사당에 들어가서 주과를 올리고 성모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저는 일찍이 선니宣尼(공자)가 태산에 올라 구경하였던 일과 한자韓子(한유)가 형산衡山에 유람했던 뜻을 사모해 

왔으나, 직무에 얽매여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중추에 남쪽 지경의 농사를 살피다가 높은 봉우리

를 우러러보면서 그 정성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진사 한인효 · 유호인 · 조위 등과 함께 구름 사다리

를 타고 올라와 사당 밑에 당도하였는데, 비구름이 가로막는 방해를 받아 운물雲物이 뭉개뭉게 일어나므로 황급하고

답답한 나머지 좋은 때를 헛되이 저버리게 될까 염려하여 삼가 성모께 비나니, 이 술잔을 흠향하시고 신통한 공효로써

보답하여 주소서.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하늘이 말끔해져서 달빛이 낮과 같이 밝고, 명일 아침에는 만 리 경내가 환히 

트이어 산해山海가 절로 구분되게 해주신다면 저희들은 장대한 구경을 이루게 되리니, 감히 그 큰 은혜를 잊겠습니까."

 

술을 따라 제사를 하고는 함께 신위神位 앞에 앉아서 술을 두어 잔씩 나누고 파하였다. 사당집은 다만 세 칸인데,

엄천리 사람이 고쳐 지은 것으로, 이 또한 너와집이다. 못을 매우 튼튼하게 박았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람에 날릴 수밖에 없다. 두 중이 그 벽에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성모이다. 곧 석상이되,

미목眉目과 쪽머리에는 모두 분대粉黛를 발라놓았고 목에는 군데군데 빠진 부분이 있다.

그 사실을 물어보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태조가 인월역에서 왜구와 싸워 승첩을 거두었던 해에 왜구가 이 봉우리에 올라와

그곳을 찍고 갔으므로, 후인이 풀을 발라서 다시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 동편으로 움푹 들어간 석루石壘에는 해공 등이 희롱하던 소불이 있다. 이를 국사國師라 일컫는데, 세속에서

무슨 신神이라 하는가?" 하니, "석가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아, 이런 일이 있다니.

서축西竺과 우리 동국은 백, 천의 세계로 막혀 있는데, 가유국迦維國의 부인이 어떻게 이 땅의 신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했다' 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이니, 바로 고려 태조의 비妃인 위숙왕후를 가리킨다" 라고 하였다. 이는 곧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挑聖母에 관한 설을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격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설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해 놓았으니, 이 또한 고증하여 그 잘못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물며

승려들의 세상을 현혹시키는 황당무계한 말임에랴 어찌 그냥 두겠는가? 또 이미 마야부인이라 하고서 국사國師를

짝으로 배당하여 더럽혔으니, 그 외설스럽고 불경스럽기가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날이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매우 거세어져서 동서쪽에서 마구 불어와, 그 기세가 마치 집을 뽑고 산악을 진동

시킬 듯하였고 남기와 안개가 모여들어서 의관이 모두 축축해졌다. 네 사람이 사당 안에서 서로 베고 누웠노라니,

한기寒氣가 뼈에 사무치므로 다시 겹 솜옷을 껴입었다. 종자들이 모두 덜덜 떨며 어쩔 줄을 몰라 하기에, 큰 나무

서너 개를 태워서 불을 쬐게 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달빛이 어슴푸레하므로, 기뻐서 일어나 보니 곧바로 몹쓸 구름

에 가려져버렸다. 누壘에 기대대 사방을 내려다 보니, 천지와 사방이 서로 한데 연하여, 마치 큰 바다 가운데서

하나의 작은 배를 타고 올라갔다 기울었다 하면서 이제라도 곧 파도 속으로 빠져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웃으며 이르기를 "비록 한퇴지韓退之의 정성과 기미幾微를 미리 아는 도술道術은

없을지라도 다행히 그대들과 함께 기모氣母(우주의 원기)를 타고 혼돈의 근원에 떠서 노닐게 되었으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경진일에도 비바람은 아직 거세므로, 먼저 향적사香積寺에 종자들을 보내어 밥을 준비해 놓고 지름길을

헤치고 와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정오가 지나서는 비가 약간 그쳤는데 돌다리가 몹시 미끄러우므로,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여 조심조심 돌아 내려왔다. 서너 리쯤 가서는 쇠사슬 길이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므로, 곧바로 석혈石穴

꿰어 나와서 온 힘을 다해 걸어서 향적사로 들어갔다. 향적사에는 중이 안 산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계곡

물은 아직도 나무 홈통을 따라 졸졸 흘러서 물통으로 떨어졌다. 창문의 빗장과 향반香槃의 불유佛油가 완연히

모두 있었으므로, 깨끗이 소제하고 분향焚香하게 명한 후 들어가 거처하였다. 저물녘에는 운애雲靄가 천왕봉으

부터거꾸로 불려 내려오는데, 그 빠르기가 일순간도 채 안 되었다. 먼 하늘에는 간혹 석양이 있으므로, 나는 손

쳐들어 매우 기뻐하면서, 문 앞의 너럭바뤼로 나가서 바라보니 육천陸川이 길게 연햊 있고, 여러 산들과 섬들이

완전히 드러나고 혹은 반쯤만 드러낙도 하며, 혹은 꼭대기만 드러나서, 마치 겹겹으로 봉우리가 늘어서서

어제 어느 길로 내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당 곁에 서 있는 흰 깃발은 남쪽을 가리키며 펄럭이고 있었는데,

대체로 그림 그리는 승려가 나에게 그곳을 알 수 있도록 알려준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두 바위를 마음껏

구경하고 또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이때는 동방이 완전히 못한데다가 추위를 견딜 수 없어 등걸불을

태워서 집을 훈훈하게 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는 별빛과 달빛이 모두 환하였다. 

 

신사일 새벽에는 태양이 양곡陽谷(동쪽)에서 올라오는데, 노을빛 같은 채색이 반짝반짝 빛났다.

좌우 사람들은 모두 내가 몹시 피곤하여 반드시 재차 천왕봉을 오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생각건대, 수일 동안 짙게 흐리던 날이 갑자기 개었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대단히 도와주는 것이고,

지금 지척에 있으면서 힘써 다시 올라보지 못한다면 평생 동안 응어리졌던 가슴속을 끝내 씻어내지 못하고 말 것

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는 아랫도리를 걷어 올리고 곧장 석문을 통하여 올라가는데,

신에 밟힌 초목들은 모두 고드름이 붙어 있었다. 성모묘에 들어가서 다시 술잔을 올리고 사례하기를 "오늘은 천지

가 맑게 개고 산천이 환하게 트였으니, 이는 실로 신의 도움을 힘입은 것이라. 참으로 깊이 기뻐하며 감사드립니다."

하였다. 그리고서 극기 · 해공과 함께 북루北壘를 올라가니, 태허太虛는 벌써 판옥板屋에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높이 나는 홍곡鴻鵠일지라도 우리보다 더 높이 날 수는 없을 것이다.

(중략)

 

증봉甑峯을 거쳐 질펄의 평원에 다다르니, 단풍나무가 오솔길을 막아서서, 마치 문설주와 문지방의 형상으로

굽어 있었으므로, 그곳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모두 등을 구부리지 않고 갈 수 있었다. 이 평원은 산의 등성이에

있지만, 넓게 탁 트인 것이 5, 6리쯤 되고 숲이 무성하고 샘물이 돌아 흐르므로 사람이 농사지어 먹고살 만하였다.

시냇가에는 두어 칸 되는 초막이 있는데, 빙 둘러 섶으로 울짱을 쳤고 온돌도 놓아져 있다. 이것이 내상군內廂軍

이 매를 포획하는 막사였다. 내가 영랑재로부터 이곳에 이르는 동안 언덕이나 봉우리의 곳곳에 매를 포획하는

도구를 설치해 놓은 것을 본 것이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었다. 아직은 가을 기운이 그리 높지 않아서 현재 매를

포획하는 사람은 없었다. 매의 무리는 아득한 구름 사이를 날아가는 동물이니, 그것이 어떻게 이토록 험준한 곳에

큼직한 덫을 설치해 놓고 엿보는 자가 있는 줄 알겠는가. 그래서 미끼를 보고 탐하다가 갑자기 그물에 걸려 잡혀서

노끈에 매이게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 또한 사람을 경계할 만하다. 그리고 나라에 진상하는 것은 고작 1, 2련連에

불과한데, 귀족의 유희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너덜거리는 옷에 시원찮은 음식 먹는자들로 하여금 밤낮으로

바람과눈보라를 견뎌가면서 천 길 산봉우리의 꼭대기에 엎드려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인심仁心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다.

 

저물녘에 창불대唱佛臺를 올라가 보니, 깍아지른 절벽이 하도 높아서 그 아래로는 밑이 보이지 않았고, 그 위에는

초목은 없고 다만 철쭉 두어 떨기와 영양의 똥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두원곶 · 여수곶 · 섬진강의 굽이굽이를 내려

다 보니, 산과 바다가 서로 맞닿아 아주 기관奇觀이었다. 해공이 여러 골짜기가 모인 곳을 가리키면서 신흥사동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절도사 이극균李克均이 호남의 도적 장영기와 여기엣 싸웠는데, 영기는 개나 쥐 같은 자라서 험준한 곳

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이공 같은 지용智勇으로도 그가 달아나는 것을 막지 못하고, 끝내 장흥부사에게로 공이 돌아갔으

니, 탄식할 일이다. 해공이 또 악양현의 북쪽을 가리키면서 청학사동이라고 하였다. 아,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신선이 살

았다는 곳인가 보다. 인간의 세계와 그리 서로 멀지도 않은데, 이미수(이인로)는 어찌하여 이곳을 찾다가 못 찾았던가?

어쩌면 호사자好事者가 그 이름을 사모하여 절을 짓고서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인가. 또 해공이 그 동쪽을 가리키면서

쌍계사동이라고 하였다. 최고운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으므로 각석刻石이 남아 있다. 고운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기개를 지닌데다 난세를 만났으므로, 중국에서 불우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토東土에서도 용납되지 않아서,

마침내 정의롭게 속세 밖에 은둔함으로써 깊고 그윽한 계산溪山의 지경은 모두 그가 두루 찾아 노닐었으니,

세상에서 그를 신선이라 칭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겠다.

 

영신사에서 묵었다. 여기는 중이 한 사람뿐이었고, 절의 북쪽 비탈에는 돌로 만든 가섭 일구一軀가 있다.

세조대왕 때 매양 중사中使를 보내서 향을 내렸다. 그 가섭의 목에도 이지러진 곳이 있는데, 이 또한 왜구가 찍은

자국이라고 하였다. 아, 왜인은 참으로 못된 도적이로다. 산 사람들을 남김없이 도륙한데다가, 성모와 가섭의 머리

까지 또 베어버리는 화를 입혔으니, 어찌 비록 아무 감각이 없는 돌일지라도 사람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에 환난을

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오른쪽 팔뚝에는 마치 불에 탄 듯한 흉터가 있는데, 이 또한 "겁화劫火에 불탄 것인데

조금만 더 타면 미륵의 세대가 된다" 고 한다. 대체로 돌의 흔적이 본디 이렇게 생긴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허망하고

기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서, 내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투어 전포錢布를 보시하게

하고 있으니,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가섭전의 북쪽 봉우리에는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

라는 것이다. 그중 하나는 밑은 둥글게 서리고, 위는 뾰족한 데 꼭대기에 네모 돌이 얹혀져 그 넓이가 겨우 한 자

정도이다.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위에 올라가서 예불을 할 수 잇으면 증과證課를 얻는다고 한다. 이때 종자

從者인 옥곤과 염정이 능란하게 올라가 예배를 하므로, 내가 절에서 그들을 바라보고는 급히 사람을 보내서

꾸짖어 중지하게 하였다. 이 무리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거의 숙맥菽麥도 구분하지 못하는데도 능히 스스로

이와 같이 목숨을 내거니, 부처의 무리가 백성을 잘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알 수 있겠다.

 

 

 

위 내용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1431~1492)의 「두류산 유람록遊頭流錄」가운데 일부를 간추린 것이다.

함양 군수 시절, 조위曺偉(1454~1503)의 제의에 화답, 유호인兪好仁(1445~1494) 등 4인과 함께 8월 14일부터 5일간

지리산을 유람한 후 임진 8월 5일에 이 유람록을 작성하였다. 그의 문집인 <점필재문집> 권2에는「두류산 유람록

遊頭流錄」, <속동문선續東文選> 제21권에는  「두류기행록頭流記行錄」으로 되어 있으나 내용상의 차이는 없다.

조선 전기의 문인들은 백두대간에서 흘러간 산이란 뜻으로 지리산을 두류산이라고 불렀다.

선인들은 지리산을 백두산과 함께 한반도 남부를 대표하는 민족의 영산으로 여겨 유람과 더불어

많은 시문을 남겼다. 또 두류산을 일명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불렀다.

점필재는 두류산 유람의 감회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나가서 노닌 것이 겨우 닷새밖에 되지 않은데, 완전히 가슴속에 개운하고 신관이 맑아진 느낌이다.

비록 처자나 서리들도 나를 보면 역시 전날과 같지 않게 여기는 모양이다. 아! 두류산의 숭고하고 웅장한 모습은

중국에 있어서 반드시 숭산嵩山과 대산岱山보다 앞서 천자가 올라 봉하여, 금니 옥첩의 검을 옥황상제에게 

승중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연히 무이산武夷山과 형악衡岳에 견주어 한창려(한유) · 주회암(주희) ·

채서산(채침) 처럼 해박한 유학자들과 손흥공 · 여동빈 ·백옥섬처럼 연단을 만드는 도사들이 잇달아 옷자락을

연대고 발치를 맞대어 그 가운데 깃들이며 배회하고 휴식할 것이다. 지금은 어리석은 사내와 도망한 노예들이

숨어서 불도를 배우는 자들의 덤불이 되었고, 비록 우리들이 오늘에 한 번 등람하는 기회를 얻어 겨우 평소의

숙원을 풀었지만 공무에 매인 몸이라 감히 청학동을 찾고 오대五臺를 거쳐서 그윽하고 기절한 경치를 두루

구경 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 산만 불우한 것이랴. 두자미(두보)의 "방장산은 바다 건너 삼한에 있네"

라는 시구를 길게 읊으니 나도 모르게 혼이 날아가는 듯하다.

 

 

 

김종직 일행은 두류산을 등람하였으나 종주한 것은 아니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지리산에 올라 기행문을 남긴 사람 모두가 그러했다.

"기껏 주능선 25킬로미터 중에서 천왕봉과 세석 사이의 5킬로미터 남짓한 구간을 밟았을 |뿐,

세석에서 노고단까지의 나머지 능선길을 지나간 경우는 전무하다.

당시에는 남북간의 교통로로 화개재와 벽소령길이 열려 있었고, 또 주능선에 사찰이나 암자 등이 별로 없어

힘든 능선길을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었던 탓이다. 거기다 호환虎患의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막대한 장비와 인원이 필요하였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損91464~1498)은 1489년 4월 14일(임인)에 천령을 출발하여 16일 동안 두류산 일대를

유람하였는데, 성모를 위숙왕후라고 규정하고 제사 지내려다가 그만두었다고 한다. 곧 19일 저녁에 천왕봉 꼭대기

에 올랐을 때 진루에 한 칸쯤 되는 판잣집이 있고, 그 안에 천왕의 석상이 있는 것을 보았다. 지전이 어지러이 들보

위에 걸려 있고 "승선 김종직 계온, 고양 유호인 극기, 하산 조위 태허가 성화 임진 중추일에 함께 오르다" 라는 몇

글자가 씌여 있었다. 그는 사당에서 두터운 솜옷을 입고 솜이불을 덮고 잠을 자고는 다음 날(신해) 여명에

종들을 시켜 두 그릇의 제물을 차리게 하고 다음과 같은 제문을 지었다. 그의 「두류기행록」에 들어 있다.

 

 

옛날 선왕이 상하의 구분을 제정하여 오악五岳(태산, 화산, 형산, 항산, 숭산. 

사독四瀆(양자강, 황하, 회수, 제수) 은 오직 천자만이 제사할 수 있고, 제후들은 다만 자기네가 맡은 지역 안의

산천만을 제사하며, 공경대부들은 각각 그에 맞는 제사가 따로 있었습니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명산대천으로부터

각지의 사당에 이르기까지 문인과 여행객들이 그 아래를 나아갈 때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제전을 올리면서 거기에

고하고 거기에 빌었던 것은 모두 그런 유래가 있어서였습니다. 듀류산은 멀리 해동에 있으면서 수백여 리를 뻗치고

서려서 호남 · 영남 두 경계의 진산이 되고, 그 아래 수십 고을을 둘러싸고 있으니, 반드시 크고 높은 신령이 있어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정기를 쌓아 영원토록 백성에게 복리를 끼쳐 주실 것입니다. 나와 진사 정여창鄭汝昌은

정도를 지키고 사도를 미워하여, 평생에 성인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고, 지나다가 음탕한 사당을 만나면

반드시 부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금년 여름에 마음먹고 산 구경을 나서다가 이 산기슭에 다다르자, 안개와 비가 자욱하여 혹시 이 산의 남

다른 경치를 두루 마음대로 구경하지 못할까 걱정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구름과 음기가 풀어져 흩어지고

해와 이 광명하여 말끔해지는 것을 보니, 마음을 집중해서 묵묵히 빌면 형산의 신령이 반드시 한유 씨에게만

후한 응답을 내리는 것이 아닌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곳 주민에게 물으니 신을 마야부인이라 하는데

이는 잘못입니다. 점필재 김공은 우리나라의 박통다식한 큰 선비인데,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고증하여 이

신을 고려 태조의 왕비 위숙왕후라고 보았으니 이것이 믿을 만합니다. 무기를 들고 갑옷을 입었던 선왕의

선조들이 삼한을 통일하여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분쟁의 고통을 면하게 하였으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영구토록 백성에게 제향을 받는 것은 순리에 맞는 일입니다.

 

저는 젊은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노모가 살아계시지만 서산에 낙조가 지듯 세상을 버리실 날이 차츰 다가오니,

효도를 다 할 날이 부족하여 안타가워하는 간절한 정성을 반 발자국이나 한 발자국 옮기는 순간에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나라 무왕은 아버지 문왕이 90세 넘게 사시는 꿈을 꾸었고 송나라 태주 사람 곽종은 모친의 장수를

정성스럽게 빌어서 모두 그대로 들어맞았다는 사실이 서적에 증거가 있습니다.

이제 삼가 저의 산행을 위하여 고하고, 감히 저의 노모를 위하여 기도를 드립니다.

백반 한 그릇과 맑은 물 한 잔일망정 조촐하고도 정성이 들었음을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상향.

 

 

 

한편 김일손은 15일에 지리산 단속사 일대를 돌아보고, 당시 남아 있던 신라와 고려의 각자와 비문, 고문헌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골짝 어귀 작은 바위에 새겨져 있는 '광제암문廣濟巖門' 이란 네 글자는 최치원의 글씨라고 전한다.

단속사는 경을 새긴 목판을 보관하는 집이 있고 그것을 담장으로 둘렀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100보 쯤 돌아간 곳에

'지리산 단속사' 란 편액을 건 문이 있었다. 문 앞에는 고려 평장사 이지무李之茂가 쓴 대감사大鑑師의 비명이 있는데,

금나라 대정 연간에 세운 것이다. 문안의 옛 불전 벽에 면류관을 쓴 두 화상이 있다. 신라 신하 이순李純이 벼슬을 사

양하고 모을 바쳐 절을 지어 단속사라 이름 짓고 자기 임금의 상을 그렸는데, 그 판기가 당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랑을 따라 길 건물 아래로 50보를 가면 다락이 있고, 앞뜰에는 매화나무 두어 그루가 있다. 강문경공康文敬公

강군보康君寶의 조부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康淮伯이 젊을 때 여기서 글을 읽으면서 손수 매화나무 하나를 심었는데,

훗날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問學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른다.

 

북문 밖 시내 건너에는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憲貞이 지은 승려 신행의 비명이 있다. 당나라 원화 8년에 세운 것이다.

돌의 질이 나쁘고 그 높이도 대감사 비석에 비해 두어 자나 부족하며 글자도 읽을 수가 없다. 북쪽 담장 안 정사의

동편에 있는 집은 '치원당' 이라 전한다. 주지는 그집 아래 새로 집 한 칸을 지어 천불상을 안치하려고 하고 있다.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가 있는데, 석불 하나하나가 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 매우 기이하다.

 

또한 북쪽 담장 안 정사의 주지가 거처하는 곳으로 돌아와 절의 옛 물건들을 뒤져보니, 3폭을 연결한 흰 한지가 있다.

종이는 지금의 자문지와 같았는데, 첫째 폭에는 '국왕 왕해王楷' 라는 인종의 서명이 있고, 둘째 폭에는 '고려국왕 왕현

王晛' 이라는 의종의 서명이 있다. 대감사에게 보낸 문안인사장이다. 셋째 폭에는 '대덕大德' 이라 씌여 있고, 한 군데

에는 황통皇統이라 하였다. 김일손은 대덕은 몽고 성종의 연호인데 그 시대를 살펴보면 맞지 않으니 알 수 없고, 황통

은 금나라 태종의 연호라고 고증하였다. 또 좀 쓸다 남은 푸른 깁에 쓴 글씨, 노란 비단에 쓴 글씨와 붉은 비단에 쓴 글

씨 등이 있었고, 육부의 합서 한 통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24일(임자), 영신사에서 유숙하였을 때는 북쪽에 돌로 만든 가섭의 상이 있고, 사당에는 가섭의 화상이 있었는데,

비해당 안평대군이 그리고, 짓고, 쓴 것이었다. 김일손은 그 보물이 연기에 그을리고 비에 젖은채 버림받는 것이

안타까워 가져가려고 하였으나 승려 백욱이 "명산에 갈무리하여 보는 눈을 갖춘 사람에게 감상하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여 가져가지 않았다고 한다. 지리산은 신라 최치원의 글씨와 전설이 남아 있던 곳이다.

 

조선 정조 때에 활동한 이동항李東沆도 지리산을 유람하고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1767년에는 속리산을 올랐고, 1790년에는 지리산에 올랐다. 지리산 여행 때는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소매에 넣고 갔다.이동항이 1790년 음력 3월 28일부터 5월 4일까지 경상도 칠곡 - 함양 - 지리산

- 진주 등지를 유람한 뒤 지은 기행문을 보면, 등산 코스는 함양 군자사 - 제석봉 - 천왕봉 - 제석봉 - 백무동 -

군자사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백무동 코스로 3박 4일이 소요되었다. 그중 4월 17일의 기록에서 능중이 건네준

김종직의 「유두류록」을 꺼내 보고, 김종직이 지리산을 오른 것은 엄천사의 앞산에 있는 회람사에서 능선을 따라

올라갔으나당시의 백무동 길과는 동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또 그 길은 지금 없어지고 이른바 지장암과

선열 · 신열 · 고열 등과 같은 암자는 그 터만 남아 있다고 언급하였다.

 

 

 

불일빙폭

 

 

 

 

선인들은 지리산 가운데서도 불일암을 가장 사랑하였던 듯.

청학동에 이르러 앞으로 수십 보를 걸어 나가 동떨어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사다리 길을 지나면

불일암에 이르렀다. 동서쪽에 향로봉이 있어 좌우로 마주 대하고, 아래는 용추와 학연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불일암에 이르렀던 김일손은 다음과 같은 감회를 토로하였다.

 

 

 

 

 

 

불일암 하경

 

 

 

동구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두 16일이 걸렸다. 곳곳마다 수천 바위가 다투어 뻗어나가고

수만 골짝 물이 어울려 흘러 기쁘기도 하였고 놀라기도 하였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도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은 불일암 하나였다. 또 학의 이야기를 듣고 이미수(고려 이인로)가

찾던 곳이 거기가 아닌가 의심하였으나 골짝이 워낙 높고 동떨어져서 원숭이가 아니면 갈 수가 없으니,

처자와 소도 데리고 가기가 힘든 곳이었다. 암천이나 단속은 모두 불자들의 장소가 되어버리고

청학동마저 끝내 찾지 못하니 어찌하랴?

 

 

고려 때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에서 청학동에 관한 글이 처음 나타난 이후,

조선 전기의 지리산 유람록 기록은 이륙李陸의 <지리산 유람록遊智異山錄> (1453) ·

김종직의 <두류산 유람록遊頭流錄>(1472) · 남효온南孝溫의 「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1487) · 김일손金馹孫의

「속두류록續頭流錄」(1489) 조식曺植의 「두류산 유람록遊頭流錄」(1558) · 유몽인柳夢寅의 「두류산 유람록

遊頭流錄」(1611) · 조위한趙緯韓의 「두류산 유람록遊頭流山錄」(1618) 으로 이어졌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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