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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금강산 1편>

정선, 《풍악도첩》 중 <백천교百川橋>, 1711ㄴㄴ, 36×37.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정선이 36세 되는 때에 엮은 《풍악도첩》에 실려 있다.

빽빽한 구도이지만 너럭바위에 앉은 수 사람을 중심에 두어, 그들의 한담에 주목하게 하였다.

그들은 필시 시내 소리로 시비 소리를 차단해 두고 흉금을 털어놓았으리라.

 

 

 

 

이곡李穀, 「동유기東遊記」

 

 

지정 9년(1349) 가을에 금강산에서 노닐고자 8월 14일 개성을 출발하였다.

이후 8월 21일에는 천마령을 넘고, 산 아래에 있는 장양현에서 잤다. 이곳은 금강산과는 30여 리 떨어져 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부리나케 식사를 하고 산에 오르니,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사방이 어두웠다.

마을 사람이 "풍악에 놀러 오는 분들이 많지만 구름과 안개 때문에 산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이가 허다합니다."

라고 하였다. 동행한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구름과 안개가 사라지기를 마음

으로 기도하였다. 그런데 금강산에서 5리쯤 못미친 곳에 이르자 어두운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새어나왔다. 배재령(절재)에 올랐을 때는 하늘이 맑게 개고 기운이 맑아서, 산이 마치 칼로 새긴 듯 

뚜렷하여, 일만이천봉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릇 금강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거쳐야 한다.

고개에 오르면 금강산을 볼 수 있고, 금강산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숙이게 된다. 그래서 이 고개를 '절재' 라

고 부른다. 이 고개에은 원래 집이 없었고,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어 쉴 수 있게 하였다. 그러다 지정 7년(1347)에

자정원資正院 영사인 강금강姜金剛이 중국 임금의 명령을 받고 와서, 큰 종을 만들어 배래령의 정상에 누각을 지어

거기에 달아 두고는, 그 옆에 집을 지어 승려를 거처하게 해서 종 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였다.

우뚝하게 금벽金碧(단청)의 빛이 설산雪山을 쏘니, 역시 산문山門의 일대 장관이다.

 

정오가 못 되어 표훈사에 이르러 잠깐 쉬고 나서, 한 동자승의 인도로 산에 올랐다.

동자승이 말하길 "동쪽에는 보덕관음굴이 있는데, 사찰에 참례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곳을 먼저 들릅니다.

다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깊고 험하지요. 또한 서북쪽에는 정양암이 있습니다. 이 절은 우리 태조(왕건)께서

창건하셨는데, 법기보살의 존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비록 가파르고 높긴 하지만 가까운 편이므로 오를 만합니다.

또 정양사에 오르시면 풍악의 여러 봉우리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관음보살이야 어디엔들

없겠느냐?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금강산의 형승形勝을 보려고 왔을 뿐이란다. 그러니 정양암에 먼저 가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뭇가지와 바위를 붙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하였다. 정양암에 오르니, 과연

듣던 그대로여서 여기 오려고 하였던 뜻에 아주 맞았다. 보덕관음굴에도 가려고 하였지만 날이 저물었고 산중에

무물 수도 없었기에, 신림암 · 삼불암 등 여러 암자를 거쳐 계곡을 따라 내려와 저물녘에 장안사에 이르러 잤다.

 

이튿날 일찍 산을 나왔다. 철원에서 금강산까지가 300리이므로, 서울인 송도에서는 500여 리인 셈이다.

하지만 강이 거듭 가로지르고 산이 겹겹이 가로막아 지세가 깊고 험하여 금강산을 드나드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일찍이 듣기로는, 이 산의 이름은 불경에 적혀 있고 천하에 널리 알려져 있어서, 인도처럼 멀리 떨어진 나라의 사람도 

종종 와서 구경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대개 보는 것은 듣는 것만 못하여서,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서촉西蜀

아미산峨眉算과 남월南越의 보타산을 구경한 이들은 모두, 그 풍광이 전해 듣던 것만 못하다고 말한다. 나는 비록 아

미산과 보타산을 보진 못하였지만, 금강산을 보니 듣던 것보다 훨씬 나았다. 비록 뛰어난 화가의 손과 시인의 입을 빌

리더라도 금강산의 모습을 흡사하게 형용하지 못할 것이다.

 

8월 23일 장안사에서 출발하여 천마산의 서쪽 고개를 넘어 통구에 이르러 잤다. 

무릇 금강산에 입산하려면 천마산의 두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고개에 오르면 금강산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천마산 고개를 넘어 금강산에 입산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금강산의 험준함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금강산에서 나올 때에야 천마산 고개를 넘어 금강산으로 들어오는 길이 험난함을 알게 된다.

서쪽 고개는 좀 낮지만, 오르내리는 거리가 30여 리나 되고 몹시 험준하여 발단령髪斷嶺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명산으로는 묘향산 · 금강산 ·두류산을 꼽는다.

묘향산은 웅雄, 금강산은 수秀, 두류산은 비요肥饒(풍만하고 넉넉함)를 친다. 

조선 중기의 시인 임숙영任叔英이 쓴 「임달지(효달孝達)에게 준 글」의 첫 머리에 이런 평가의 말이 있는 것으로 보면

금강산은 진즉부터 '수秀'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의 학자 이곡李穀(1298~1351)은 52세 되던 1349년의 8월에 내외 금강산과 해금강을 유람한 후 「동유기東遊記」

라는 기행문을 남겼다. 위의 글은 그중 금강산 유람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이곡은 대학자 이제현李齊賢(1287~1367)

의 제자이자 목은 이색李穡(1328~1396)의 아버지이다. 중국 원나라에서 급제하여 한림 국사원 검열이 되었다가 나중에

고려의 찬성사가 되었다. 그의 「동유기」는 현재 남아 있는 금강산 및 관동 일대의 기행 산문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이곡은 「동유기」에서 금강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괄하였다

 

 

"해동의 산수는 천하에 이름났는데 금강산의 기이한 절경은 해동의 산수에서도 으뜸이 된다.

또 불경에 담무갈보살이 거주하였다는 설이 있어 세상에서는 드디어 인간세계의 정토라고 한다.

향과 초 폐백을 가조오는 천자의 사신이 길에 연이었고, 사방의 남녀들 가운데 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소에 싣고 말에 싣고 등에 지고 머리에 이고와서 부처님과 스님에게 공양하려는 자들의 발길이 서로 이어졌다."

 

 

 

 

 

 

 

정선 <금강전도金剛全圖>, 1743년, 130.8×94cm, 호암미술관 소장.

 

 

 

 

남효온南孝溫, 「금강산 유람기遊金剛山記」

 

 

정축일(4월 26일) 금강산으로 들어가 5, 6리를 가다가 고개를 하나 넘어 남쪽으로 신계사의 절터로 들어갔다.

고개의 동쪽에는 관음봉이 있고, 북쪽에는 미륵봉이 있다. 미륵봉의 서쪽에는 봉우리 하나가 있어 미륵봉 보다도

빼어나지만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또 그 서쪽에 봉우리 하나가 있어 구름 밖에 드러나 있으니 비로봉의 북쪽 줄기

이다. 신계사는 신라 구왕九王이 창건한 절이다. 지금 지료智了라는 승려가 절을 중창하기 위하여 재목을 모으고

있다. 절 앞에는 지공백천동이 있고, 그 남쪽에는 큰 봉우리가 있는데, 바로 보문봉이다. 봉우리 앞에는 세존백천동이

있으며 동으로는 향로봉이 있다. 향로봉 동쪽에는 일곱 개의 큰 봉우리가 서로 잇달아 큰 산을 이루고 있어, 관음 ·

미륵봉과 비교할 때 그보다 몇 백배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일곱 개의 봉우리 가운데 첫째는 비로봉의 한 줄기이고,

둘째는 원적봉의 한 줄기이며, 셋째는 위가 평평한 것으로 안문봉의 한 줄기이고, 넷째는 계조봉의 한 줄기이며,

다섯째는 상불사의上不思議이고, 여섯째는 중불사의中不思議이며, 일곱째는 하불사의下不思議이다.

불사의思議는 암자의 이름으로 신라시대 승려인 진표眞表율사가 창건한 것이다. 일곱봉우리의 아래에는 대명·

대평 · 길상 · 도솔 등의 암자가 세존천가에 있다. 나는 지공천을 건너 보문암을 넘어 산길로 5, 6리를 갔다. 면죽

綿竹이 길을 이루었다. 암자 아래에 이르니 주지 조은祖恩이 운산雲山의 친구인지라 나를 대함에 자못 은혜로웠다.

 

암자에 앉으니 동북으로 바다가 보이고 동남으로는 고성포가 보인다.

암자 앞에는 나옹선사의 자조탑自照塔이 있다. 좌정하고 있는데 조은이 싱싱한 배와 잣을 대접하였다.

이것들을 먹고 나자 밥상을 들이는데, 목이버섯과 석이버섯 등을 삶아서 반찬으로 내고 산나물들을 고루고루 갖추었다.

마침두견새가 낮에 우니 산속이 얼마나 깊은 줄을 갈 수 있었다. 밥을 먹고 조은에게 치사한 후, 산길 5, 6리를 가서

세존백천수를 건너 다시 1, 2리를 가다가, 왼쪽으로 도솔암을 보면서 동으로 향했다. 다시 5, 6리 가다가 큰 내를

하나건너고 내를 따라 동으로 쏠려 올라가 5, 6리를 가서 발연鉢淵을 지나 다시 반리半里를 가니 발연암에 당도하였다.

 

그곳 중이 이르길, "신라 때 진표율사란 분이 있어서, 금강산에 들어오니 발연의 용왕이 살 곳을 바쳤으므로 이에

율사가 암자를 창건하고 발연암이라고 하였다" 고 한다. 암자 위로 조금 가면 수십 길에 이르는 폭포가 있는데,

폭포 왼쪽의 돌은 모두 흰색으로 곱게 간 옥처럼 반들거려서 앉을 수도 있고 누울 수도 있다. 나는 행장을 풀어

놓고 손으로 물을 떠서 입 안을 씻은 후에 꿀맛 같은 물을 마셨다. 발연의 고사에 따르면, 불자들 중에서 유희를

즐기고자 하는 자는 폭포 위에서 나뭇가지를 꺾어서 물 위에 놓고 그 위에 올라타고는 물길을 따라 떠내려 가는데

기술이 좋은 사람은 제대로 떠내려가고 기술이 없는 사람은 몸이 뒤집혀 떠내려간다고 한다. 몸이 뒤집혀 떠내려

가면 머리가 물에 잠겼다가 한참 후에 다시 물 위로 떠오르게 되는데, 곁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깔깔거리고 웃는

다고 한다. 그러나 물속의 돌이 반들반들하게 매끄러우므로 비록 몸이 뒤집혀 내려가더라도 몸은 다치지는 않으므로,

사람들이 이 놀이를 거리낌 없이 즐긴다고 한다. 나는 운산에게 먼저 시험해 보게 한 다음 따라했다. 운산은 여덟 번

해서 여덟 번 모두 성공하였다. 그러고서 나는 여덟 번 하여 여섯 번 성공한 후, 바위로 나오니

주위 사람들이 손뼉을 치며 크게 웃었다.

 

이에 책을 베고 바위 위에 누워 잠깐 낮잠을 잤다. 주지 축명이 와서 나를 데리고 절로 데려가 절 뒤쪽에 있는

비석을 보여 주었다. 진표율사의 뼈를 묻은 비로, 고려의 중 영잠이 비문을 지었는데, 때는 승안 5년(1199) 5월이었다.

비석 옆에는 말라 죽은 소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율사의 비석이 세워진 지 500여 년에 세 번 말라 죽고 세 번 살아

났는데, 지금은 다시 말라 죽었다고 한다. 비석을 보고 난 후 암자로 돌아왔다. 축명이 밥을 내왔으므로 밥을

먹은 후 다시 폭포에 갔다가, 밤이 깊어 깜깜해지고 추워진 뒤에야 비로소 절로 들어왔다.

 

 

이 글은 남효온이 1485년 4우러 15일부터 윤4월 21까지 40일간 금강산과 동해안의 명승을 구경하고 적은 것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간 첫날인 4월 26일(정축), 발연암에 이르렀을 때의 기록이다.

 

 

 

 

 

 

 

이인문李寅文, <발연鉢淵>, 18세기 말, 77.2×45.3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남효원과 거의 같은 시대의 이원李黿(?~1504)의 「금강유람록遊金剛錄」에도 물미끄럼 이야기가 나온다.

이원은 1489년(성종 20)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를 거쳐 박사에 이르러 봉상시 직장을 겸하였다가 견책당하자

여름에 금강산을 찾았고 1493년 5월 16일에 유람록을 마무리하였다.

 

 

 

다음 날 온 길을 따라 다시 마하연에 이르렀다.

행탁이 다시 비어 도중에 승려에게 양식을 부탁하니 승려가 이르길 "금년에는 어찌하여 양식이 떨어졌다는 선비가

이렇게도 많지요?" 라고 말한다. 나는 웃으며 묻기를 "우리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는가?" 라고 하였더니, 답하기를

"어제 양표라는 사람이 서울에서 와서 여기서 묵으며 양식을 구걸하였지요. 기금은 발연으로 향하였답니다. 라고 하였다.

비록 승려의 말이 우스갯소리에 가깝지만, 우리의 도道는 이처럼 궁하였다. 다음 날 양표의 발자취를 찾아나섰다.

안문령에 이르니 고개 북쪽에 한 봉우리가 있는데, 우지끈 힘을 쓰는 듯 울뚝불뚝하여 산세가 허공까지 닿아 있으니,

비로봉에 비교하면 아버지 같고, 망고대에 비교하면 형제 같으며, 지장봉 · 달마봉에 비교하면 자식과 같다. 초목은

북풍을 맞아 주먹을 쥔 듯 굽어서 빽빽이 우거져 있는데, 남쪽 가지는 길고 북쪽 가지는 짧다. 정오가 되어 대장암에

이르렀다. 백전에서 발연에 이르니 해가 이미 기울었다. 마하연에서 여기까지 80여 리이다. 그사이 오고간 길에 있던

산수와 초목의 기이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른바 양표라는 사람을 찾았는데, 그는 곧 나의 십년지기인 양준

楊浚이었다. 다음 날 아침 양준과 함께 절 옆의 폭포에서 놀았다. 폭포의 길이는 대략 마흔 걸음 정도 된다. 중들이 물

놀이를 좋아하여, 위에서 아래로 물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왔다. 어떤 자는머리를 앞으로 하고 발을 뒤로 하기도 하였고

또 어떤 자는 발을 앞으로 하고 머리를 뒤로 두기도 하면서, 옆으로 비끼고 뒤집어지고 하다가 아래에 이르러야 멈춘다.

비록 바람 맞은 돛배나 잘 훈련된 진중陳中의 말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도 폭포에서 내려오는 속도를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위가 넓고 완만하되 그 물살이 조금 빨라서 이로 인해 물속의 바위들이 갈려서 미끄럽기가 기름

간으므로, 하루 종일 놀아도 상처를 입거나 뼈가 부러지는 사람이 없다. 날이 저물어 고성에 이르러 묵었다.

 

 

 

 

위의 글 이외에도 발연鉢淵의 물미끄럼 이야기는

금강산을 찾았던 선인들의 유람록 여기 저기에

여러 다른 표현으로 찾아 볼 수가 있다.

 

 

 

 

인용: 심경호 著 <산수유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