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傳 김응환金應煥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 중<표훈사表訓寺>, 18세기, 32×42.8cm, 개인 소장.
정조 때 도화서 화원 김응환이 그렸다고 전하는 《해악전도첩海嶽全圖帖》에 들어 있는 그림이다.
그는 1788년 늦가을에 어명을 받아 김홍도와 함께 50여 일 동안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남종화법을 배웠다 하고 인물도 중국화풍이라고 하지만 냇가의 백석을 그린 솜씨는 재평가하여야 하리라.
유몽인柳夢寅, 「풍악에서의 기이한 만남 楓嶽奇遊記」
어우於于 유柳 선생이 풍악의 표훈사에서 은둔하고 있을 때, 3개월 동안 앓다가 비로소 일어나서는 밤마다 남루南樓에
올라 울적한 마음을 달랬다. 그런데 홀연 이인異人이 나타났는데, 외모가 우람하고 훤칠하였다. 동자를 시켜서 이름을
통하게 하였더니 "견백주인堅白主人이 선생을 뵙자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동자로 하여금 부축케 하고 두 번 절한 후
자리를 털고 좌정하였다. 견백주인은 말하였다.
"나는 본래 이 산악의 주인으로, 이름은 석石입니다.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우리 석씨가 이 땅에 봉해진 것은 일만이천
인데, 모두 견백을 숭상하여서 공손걸자公孫乞子, 공손홍公孫弘의 동이지학同異之學을 하는 것을 즐겨합니다. 지금
선생께서 객들을 만나보신 지 여러 달이니, 청컨대 틈 있는 날을 이용하여 기이한 만남을 이루고 싶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다시 객이 와서 명함을 통하는데, 자호가 청계도류淸溪道流이고 자子는 중심仲深이라고 하였다.
그는 유 선생에게 읍례를 하고는 말 하였다.
"저는 안문鴈門에서 나와서 선파仙派와 청류淸流를 이끌고 동부洞府를 돌아서 누대 아래에 노닐다가, 주인 옹께서
선생을 받들어 아름다운 만남을 이룬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감히 와서 말석에 끼고자 합니다."
다시 객이 있어, 신장이 10장丈에 달하고 푸른 수염을 드리우고 붉은 갑옷을 걸쳤는데, 그가 흔연히 왔다.
동자에게 누구냐고 묻자, 동자는 말하였다.
"이분은 회계會稽 장장인張丈人이시고, 일족 모두가 오로지 이 산악에 거주하시는데, 몇천 몇만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유 선생은 그의 위엄있는 자태를 기이하게 여겨서 신발을 거꾸로 신다시피하면서 나가 맞았다.
다시 객이 있어, 어느 곳에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와서는 순식간에 들어와 앉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이 산악에서 나서, 상하사방을 내 가는 곳에 따라 노닙니다. 오늘은 밤이 고요하고 산이 적막하므로
뿌리를 찾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의 성명을 물었으나 "무심과객無心過客입니다"라고 할 뿐이었다.
또 단관노선丹冠老仙이 있어, 목이 길고 몸이 훌쩍 크다. 너울너울하면서 와서는 말하였다.
"동봉東峯의 바깥에 금강金剛이라는 대臺가 있는데, 동굴이 맑고도 깊습니다.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러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솟구쳐나는 매도 우러러보고는 미치지 못하죠. 나는 대대로 그 속에 서식하여 왔습니다.
30년 전에 선생과 교분을 맺었으므로, 감히 와서 인사드립니다."
또 어떤 객이 휘익 하고 들르니, 사람의 살과 뼈를 맑고 깨끗하게 만든다. 누구시냐고 묻자, 청빈일사靑瀕逸士인데
이름은 웅雄이라고 한다. 얼마 있다가 온갖 공짝이 모두 다 밝아지면서 뭇 봉우리들이 그 본모습을 다 드러내며,
상서로운 빛이 동쪽에서 온다. 견백주인은 놀라고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이분은 우리 지명정소극원원회태청태부인至明正素極圓元晦太淸太夫人이십니다. 동해의 해돋는 봉우리
왼쪽으로부터 소나무숲을 뚫고 와서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견백주인이 자리를 고쳐 않으면서 청하였다.
"오늘 일진이 좋고 여러 신이한 분들이 모두 다 모였는데, 마침 유 선생이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나으셨습니다.
어찌 술잔을 권하여 위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태부인이 말하였다. "아주 좋습니다. 오로지 주인의 뜻에 따를 따름입니다."
이에 견백주인 옹이 향성진선香城眞仙으로 하여금 청계자靑桂子를 각각 한 소반씩 올리게 하고,
송림암도석松林菴道釋으로 하여금 복령茯苓고를 한 그릇씩 올리게 하며, 만폭동주萬瀑洞主에게는
적포도밀장赤葡萄蜜漿을 바치게 하고, 구정동영九井洞靈에게는 오미향이五味香餌를 받들게 하였다.
노봉에게는 석지石芝를 따르도록 명하고, 미파䉲坡에게는 자지紫芝를 뜯도록 시켰다. 마하신인은 송하울황주
松芽鬱黃酒를 드리게 하고, 사후, 경명, 범패, 쟁고의 음악을 진설하여 즐겁게 하였다.
다시 홍하紅霞를 펼쳐 채전綵牋(비단종이)을 만들고, 동명東溟을 끌어와 연지硯池로 삼고, 오로봉五老峯을 쓰러뜨려
필영筆潁(붓)을 만들과는, 유 선생에게 시를 지어달라고 청하였다. 유 선생이 붓을 히둘러 쓰자, 산귀신과 숲 도깨비가
모두 흐느껴 울었다. 술이 몇 순배 돈 후, 태청태부인이 먼저 일어나 이별을 고하였다.
"지금 새벽 동이 트기 전에 곤륜崑崙을 지나 현포玄圃이 들러 서영선자와 약목若木의 터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극고 음기가 사방에 가득 들어차고 산기운이 아스므레 해졌다. 견백주인 옹이 이맛살을 찌푸릭 낯빛을 바꾸고는
"화산花山 백거사白居士가 다시 오는 군!" 하였다. 유 선생은 자리를 옮겨 기대어 사방을 둘러보니, 견백주인은 이미
파파 노수皤皤老叟(머리 허연 늙은이)가 되었고, 청계도류는 깊은 골짝 밑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무심과객은 고개 마루
로돌아갔으며, 회계 장장인은 몸뚱이가 아래로 축 늘어기고 푸른 수염은 전부 흰 털로 되어 다시는 앞서의 용모나
안색이 아니었다, 회계 장장인은 청빈일사를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지금 나는 고단하오. 일사께서 저의 무거운 짐을 풀어주시고, 저의 온갖 춤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유 선생이 마침내 옷매무시를 바르게 하고 누대를 내려가자, 단관노선이 뒤를 따랐다.
아무 지름길도 없고, 지상에서 105척 높이였다.
조선시대 다른 어느 유학자도 하지 못했던 이 기이한 만남의 이야기를 적은 인물은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로
잘 알려진 유몽인(1559~1623)이다. 그는 광해군 말기에 금강산에 은둔하였는데,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위의 기이한
이야기를 지은 것이다. 내용 중 견백주인은 금강산의 바위, 청계도류는 시내, 장장인은 소나무, 무심과객은 구름,
단관노선은 학, 청빈일사는 바람을 가리킨다. 향성진선 이하는 금강산의 봉우리들이다.
1611년(만력 39, 신해) 4월에 쓴 「두류산기행록」에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아, 나는 성품이 소탈하고 얽매임을 싫어하여 약관의 나이로부터 사방의 산수를 유람하였다. 벼슬길에 나오기 전
에는 삼각산에 머물며 아침 저녁으로 백운대를 오르내렸으며, 청계산 · 보개산 · 천마산 · 성거산에서 독서하였다.
사명을 받들고 외직으로 나가서는 팔도를 두루 돌아다녔다. 청평산을 둘러보고 사탄동史呑洞으로 들어갔으며,
한계산 · 설악산을 유람하였다. 봄 · 가을에는 풍악산의 구룡연과 비로봉을 구경하고, 동해에 배를 띄우고 내려오며
영동 아홉 군의 산수를 두루 보았다. 그리고 적유령을 넘어 압록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천령 · 마운령을 지나
험난한 장백산을 넘어 파저강과 두만간에 이르렀다가 북해에서 배를 타고 돌아왔다. 또 삼수 · 갑산을 다 둘러보고,
혜산의 장령에 앉아서 멀리 백두산을 바라보았으며, 명천의 칠보산을 지나 관서의 묘향산에 올랐고, 발길을 돌려
서쪽으로 가서 바다를 건너 구월산에 올랐다가 백사정白沙亭에 이르렀다. 중국에 세 번 다녀왔는데, 요동으로부터
북경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아름다운 산과 물을 대략 보고 돌아왔다.
그런데 유몽인은 두류산을 가장 사랑하여 "두류산은 살이 많고 뼈대가 적으니, 더욱 높고 크게 보이는 이유이다"
라고 하였고,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리라" 라고 하였다.
나는 일찍이 땅의 형세가 동남쪽이 낮고 서북쪽이 높으니, 남쪽 지방 산의 정상이 북쪽 지역 산의 발꿈치보다
낮을 거라 생각하였다. 또한 두류산이 아무리 명산이라도 우리나라 산을 통틀어 볼 때 풍악산이 집대성이 되니,
바다를 본 사람에게 다른 강은 대단치 않게 보이듯 이 꼭대기에 올라보니 그 웅장하고 걸출한 것이 우리나라
모든 산의 으뜸이었다. 두류산은 살이 많고 뼈대가 적으니, 더욱 높고 크게 보이는 이유이다.
유몽인은 금강산 은거 때 쓴 「건봉사 중 인은에게 주는 서序」에서
선문답과도 같은 우언을 통해 자득하여 얻은 진리의 중요성을 논하였다.
내가 금강산에 거처할 때 산중의 작은 암자에서 많은 이승異僧들이 솔과 잣을 먹고 오곡을 피하여 수십 년
동안 수련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승려가 돈오頓悟하여 도를 깨쳤다고 일컬어졌다. 내가 그 실상을 알아보니,
대체로 글자도 모르고 불경 하나도 읽지 않았으나, 그와 이야기하여 보니 심지心地가 툭 트여 있었다. 나는
두려워하기도하고 깜짝 놀라기도 하여서 "이 사람은 성불한 자로구나. 만약 선비였더라면 반드시 높은
관리가 되었을것이다" 라고 하였다. "어째서입니까?" 하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옛날 이 산속에 중 셋이 있었는데, 각자 큰 보자기로 옷과 식량을 싸서 길을 갔다. 그러다가 서로 약속하여
말하길 "우리 세 사람은 짐을 벗고 진 사람이 지면 어떻겠소?" 하니, 모두 그러자고 하였다. 한 중이 보자기를
놓고 논둑에 누우며 말하였다. "밤이구나. 난 자야겠소." "왜 그렇고?" "우리나라 말에 농사짓는 논(밭)이
밤과 음이 같지 않소?""구렇구려." 두 중은 그의 짐을 둘로 나누어 지고 갔다. 어떤 곳에 이르러 한 중이 가시
덤불 속에 들어가 앉으며 말하였다. "가사에 매여서 갈 수가 없소." "왜 그렇소?" "우리나라 말에 가시에 얽히는
것을 가사에 매인다고 하지 않소?""그렇군." 한 중이 세 보따리를 합쳐서 지고 가면서 말하였다. "등에 두 칸 집을
지고 있으니 어찌 괴롭지 않으랴?""왜 그렇소?" 그 중은 묵묵히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두 중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 보따리를 합하여지고 험한산을 올라가니, 땀이 흘러 온몸이 젖었다. 길에서 허름한 승복에 누더기를
걸친 노승을 만났다. "세 사람이 동행하면서두 사람은 들에 누워 있고 그대 혼자 짐을 지고 가는 건 어째서요?"
그 중이 세 가지 말을 일러주었다. 노승은 합장하고절하면서 말하였다. "그대만이 성불하였도다.
우리나라 말에 집의 보(들보)는 보(보따리)와 음이 같지 않은가?두 칸 집에는 3개의 보(들보)를 걸치지 않는가?
두 중이 말을 입 밖에 낸 것은 천기天機를 깨뜨린 사어死語다.그대가 말하지 않은 것은
천기를 온전히 보존한 활어活語다. 그대만이 성불하였도다."
나늘 늘, 조물주가 내성耐性이 없어서 괴기瑰奇하고 걸특傑特한 광경을 해좌海左의 조선국 관동지역에 시설하고
그 능력을 다하고 그 기교를 전부 펼쳐서 자긍하고 뽐내는 것을 두고 괴이하게 여기고 있다. 더구나 나라에서
유산遊山을 금지하는 영令도 없다. 그래서 겨우 걸음마만 할 줄 알면 모두 먹을 것을 싸매고 신발을 준비해서
동쪽으로향하여 간다. 그런데 늙고 병든 사람은 늘 동쪽으로 가려는 꿈을 꾸거늘, 조정이든 저자든 가릴 것 없이
사람들 발걸음은 나날이 꾸역꾸역 서쪽으로 향하면서 "연화燕貨(중국의 물화) 가 모이는 곳이라서" 라고 말하며,
북쪽으로 향하면서는 "곡속穀粟의 곳간이라서" 라고 말하며, 북쪽으로 향하면서는 "예쁜 계집들이 꽃처럼 아름다
워서" 라고 말한다. 오직 동쪽 한 길만은 풀이 신발을 안 보이게 뒤덮고, 종일토록 산새가 슬피 울면서 왕래한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마음은 화장火藏이므로 열처熱處에 가까이 하기를 좋아한다. 풍악은 비록 좋기는 하지만
청유淸遊이기 때문에, 그곳은 버려두고 열처로 내달려가는 것이다. 도서道書에 "동천영경洞天靈境(명승명경)에
발길을 옮겨가 본 사람은 선적仙籍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고 조금도 그 점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어찌 능히 이 산을 유람할 수 있겠는가?
유몽인은 광해군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피하여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표연히 옷자락을 떨치며 동쪽으로 향하였으니, 나갈 때에 마치 길 안내하여 이끌어 주는 자가 있듯이 하였다.
이 산과 숙연宿緣이 있어서 단대丹臺에 이름이 실려있지 않다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금강산의 산과 계곡, 구름과 물 그리고 바람이 귀한 손님으로 찾아오는 것을 경험하였다.
반드시 꿈속의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활법을 중시하였던 선문답 같은 그의 글을 보면,
자연과의 대화는 활법의 언어로 이루어졌으리라 생각치 않을 수 없다.
정선 <만폭동萬瀑洞>, 18세기, 33×22cm,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겸재가 그린 여러 만폭동 그림들 가운데 하나로 화제는 중국 동진 때 고개지顧愷之의
"일천 바위가 빼어남을 재고, 일만 골짝에 흐름이 다툰다.
초목이 뒤덮어 위에는 마치 구름이 일고 노을이 울창한 듯하다"를 사용하였다.
김금원金錦園,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
표훈사로 향하니, 오른쪽에는 중향성이 끼고 있고, 왼쪽으론 지장봉이 솟구쳐 있어 그윽하고 깊고 으슥하다.
오른쪽 길은 아주 험하다. 외나무 다리를 건너 절에 이르렀다. 문루는 능파루라 한다.
법당과 여러 암자를 구경하고 백운대에 올랐다. 팔뚝만한 굵기의 쇠줄을 붙잡고 오르는데, 마치 하늘에 오르기라도
하듯 벌벌 떨렸다. 1만 인仞 높이로 바위를 포개었다. 구리 기둥을 세워 허공에 얽고 걸쳐서 서너 칸 암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리 기둥에 쇠줄을 칭칭 동여매고 그 한 끝을 드리워서 사람들로 하여금 붙잡고 오르게 해두었는데, 흔들흔들
해서 아주 위험하다. 담이 떨리고 허벅지가 후들후들해서 감히 아래를 굽어 낼다볼 수가 없다. 옥 부처 하나를
안치하였고, 그 앞에는 대야만한 크기의 금향로를 두었는데,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
전하는 말에 정명공주貞明公主가 시주한 부처라고 한다.
암자는 크지 않았으나 생각건대 그 재물을 거만금 허비하였을 듯하다. 승려의 말에, 옛날에 한 비구니가
이 굴 속에서 수도하다가 그대로 좌화坐化하였으므로 무리들이 서로 상의하여 암자를 쌓아 예불을 하게 되었다고 하며,
그래서 암자와 굴을 모두 보덕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곁으론 폭포가 하나 있는데, 넓게 깔리듯 흘러 평평하고
너른하며, 바위면에 쏟아져 내린다. 절벽이 두 층을 이루어서, 담潭이 하나는 둥글고 하나는 모나다. 격하게 여울을
이루고 포말을 날려, 차가워서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다. 곁에 백천동이 있고, 동구에는 와폭이 있어, 바위 구멍
사이로 쏟아져 뚫고 나와 물이 모여 깊은 담을 이루었으니, 이른바 명연鳴淵이다.
그러나 내川는 볼 만하지 않다. 백천이란 이름을 어떻게 얻었는지 알 수가 없다.
서너 리를 가서 벽하담과 비파담이 지척 사이에 이어져 잇다. 옥이 바서지고 비단 폭이 옆으로 펼쳐진 듯하여, 갈수록
기이하고 장대하다. 냇가에 엎어진 바위는 위로 구멍이 뚫려 있어서 샘이 저절로 솟아 나온다. 길가에 궁륭穹隆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마치 빈집같아 비 올 때 들어가 피신할 수가 있으니 볼 만한 곳이 아님이 없다. 조금 위로 올라
가자 한 작은 못에 마주쳤다. 이름을 백룡담이라 하여, 그 백색의 뜻을 취하였으나 팔담八潭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물빛이 청흑색이다. 이름을 흑룡담이라고 한다. 가고 가서 앞으로 나아가자, 반석이 마치 절구처럼 파인 것이 있어서,
물이 그 안에 저장되어 있다. 이름을 세수분이라 한다. 수십 걸음을 지나자 폭포가 있어 그 물빛이 자못 푸르다.
이름을 청룡담이라 한다. 이것이 팔담의 원두源頭이다. 종일 폭포 속을 가니 소리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골짝이
갈라지는 듯하다. 기이한 꽃과 이상한 풀들, 날짐승과 길짐승들이 기기괴괴하여 이루 다 형용할 수가 없다. 오선봉 ·
소향로의 두 산 사이에서부터 첩첩 시내가 돌아 나오고 굽어 나와 합해서 하나의 큰 물 흐름을 이룬다. 곧 이름을
만폭동이라고 한다. 담 가에는 큰 바위가 있고 그 위에는 '봉래풍악 원화동천蓬萊楓嶽 元化洞天' 이라는 여덟 글자가
크게 적혀 있다. 전하는 말에 선인 양봉래楊蓬來(양사언)가 쓴 것이라고 한다. 은 갈고리 같고 쇠줄 같으며 용과 뱀이
날고 튀어오르는 듯한 글씨체이다. 그 위에는 작은 병풍석이 있고, 또 김곡운金谷雲 팔분八分으 글씨체로 쓴
'천하제일명산天下第一名山' 이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선봉에서부터 청학대가 끼고 있으면서 2개의 궁륭석이 서로 덮어 문을 이루고 있다. 이른바 금강문이다.
청학봉은 뭇 돌들을 겹겹이 포개어 마치 항아리 같기도 하고 대고리 같기도 하다. 뾰족한 바위 위에 곧 네모난
바위를 덮어 두어서, 마치 돌로 만든 불감佛龕 같은 것도 있고, 마치 모자나 복두를 쓴 것 같은 것도 있다.
바위 위에는 날아가는 까마귀가 똥을 떨어뜨린 자취가 어지럽게 찍혀 있다. 정말로 선학仙鶴이 서식할 만한 곳이다.
전하는 말에 옛날에는 청학이 둥지를 깃들여서 이 봉우리 에서 부화하여 태어났으나, 양봉래의 '원화元化' 라는
큰 글자에 기운을 빼앗겨서 날아가버리고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침내 그 곁에 이름을 새겼다.
시는 이러하다.
중향의 구역으로 방향 돌아드니 경지가 더욱 새로운데
낙화와 방초는 진세의 지난 모습을 연상시켜 슬프구나.
칠분의 나무 빛은 그림 같은 봄 풍경이고
일만 휘 옥이 쏟아지는 샘 소리에 동구는 가난하지 않아라.
달이 떠서 삼오야가 갓 지난 때이니
망향의 마음 일어도 몸뚱이를 천, 억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려워라.
깊은 산 해가 질 때 훌훌 학이 나니
이 곧 지난밤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이려니.
방향을 바꾸어 수미탑으로 갔다. 탑은 수미봉 아래에 있어, 완연히 백색의 능단이 골고루 섞여서 허공 속에
퇴적하여 높이 꽂혀 있는 듯하다. 앞에는 암석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폭포 물이 그 위를 흐르는데
빙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사대부 여성 김금원(1817~1851?)의 「호동서락기」 가운데 금강산 유람기의 일부이다.
김금원은 경인년 곧 1830년(순조 30) 춘삼월에 제천 의림지를 방문하고, 단양으로 가서 사인암을 보았으며,
영춘으로 향하여 금화굴과 남화굴을 구경하였다. 다시 청풍으로 가서 옥순봉을 구경하였고, 이렇게 사군四郡의
명승을 다 본 후에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금강산에서는 단발령 · 장안사 · 표훈사 · 수미탑 · 정양사 · 마하연암 ·
안문령 · 청련암 · 원통곡 · 사자봉 · 수렴동의 팔담八潭 · 유점사를 거치거나 돌아보고 구령狗嶺을 넘어
금강산을 벗어났다. 김금원은 금강산에 대한 총평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이 산의 명호名號는 아주 많다. 금강 · 기달怾怛 · 중향성衆香城 · 열반涅槃 · 개골皆骨 · 풍악楓岳 ·봉래蓬萊라고
하는데, 단칭하면 금강이라고 한다. 금강산의 내산과 외산은 어느 봉우리도 기이한 벽이 아닌 것이 없고 어느 내도
이름난 폭포가 아닌 것이 없다. 내산은 아스라하게 높아 뛰어나면서 백색이 많고 청색이 적다. 외산은 온자穩藉로
뛰어나면서 청색이 많고 백색이 적다. 봉우리로 말하면 비로 · 중향 · 대향로 · 소향로 · 청학 · 관음 · 석가 · 오선 ·
· 망고 · 혈망이 가장 기이하다. 담潭은 만폭 · 흑룡 · 벽하 · 분설 · 진주 · 구담이 뛰어나다. 암벽의 웅장함은
면경대 · 묘길상만한 것이 없다. 조망의 광대함은 혈성루 · 백운대만한 것이 없다.
동구의 경관은 모두 장안사를 추대하되, 표훈 · 보덕 · 마하는 모두 내산의 명찰이다.
칠보 · 불정佛頂의 대臺 · 석문의 동洞 · 채하彩霞 · 집선集仙의 봉峯은 산의 기이한 것들이다.
선담船谭의 정류渟流 · 비봉飛鳳의 요대 · 옥류의 갱장鏗鏘거리는 소리는 물의 아름다운 것들이다.
구룡연의 장쾌한 격랑과 험괴한 형상은 일만이천봉 가운데서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유점사의 유명한 기틀과
기이한 유적은 팔만 구암 안에서 으뜸이다. 이것이 외산에서 저명하여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대개 금강의 기이함은 천석泉石에 있지 않고, 오로지 산이 백색이라는 점이 가장 기이하므로,
외산은 명호의 안에 들어 있지 않다. 내봉內峯 색이 분칠한 것과 같은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이고,
또 사물의 형상으로서 형형색색하여 없는 것이없되, 노석老釋과 종고鐘鼓의 형상을 한 것이 열 가운데 아홉이다.
내산이든 외산이든 관계없이 볼 만한 곳이라면 뚫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온갖 나무들이 뒤덮어 조밀하고 어지럽게 겹겹이 포개진 바위 속에 시냇물이 시끄럽게 흐르니,
마땅히 호랑이나 범 따위가 있을 법하거늘, 옛날부터 그런 환난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지령地靈이 명산을 가호呵護
하여주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절의 고기古記는 중국의 신이한 승려 담무갈曇無竭이 나와서 중향성에 앉아,
일만이천 제자를 인솔하고 설법하여 성불하였고, 뭇 제자들은 일만이천봉으로 변환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큰 바위 하나를
가리켜 담무갈의 화신이라고 한다. 어찌 허망하고 허탄한 말이 아니랴. 내산을 두루 돌아본 것이 아마 6, 70 리인 듯하고,
외산을 두루 돌아본 것이 아마 100여 리인 듯하다. 외산은 전적으로 고성高城을 근거로 하여 북쪽 가지가 뻗어서 통천
通川으로 들어간다.
김금원은 금강산 유람을 마친 후 통천으로 가서 금란굴과 총석정을 구경하고, 고성으로 가서 삼일포 · 사선정 ·명사
鳴沙를 돌아보고, 간성으로 가서 청간정에 올랐다. 양양의 낙산사와 의경대를 보고, 강릉의 경포대 · 울진의 망양대
· 평해의 월송정 · 삼척의 죽서루에 올랐다. 관동팔경을 다 본 뒤에도 미련이 남아서 인제로 가서 설악산을 찾았다.
그리고 백담사와 수렴동을 구경한 후 비로소 경성으로 향하였다.
김금원은 산수유람을 떠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관동 봉래 사람이다. 스스로 호를 금원錦圓이라 하였다.
아이 적부터 병치레를 잘하여 부모님이 어여삐 여겨 바느질 등 여성이 해야 할 일에 종사하게 하지 않고
문자를 가르쳐 나날이 듣고 깨닫는 바가 있었다. 한 해도 되지 않아서, 대략 경전과 역사서에 통해, 고금의 문장을
본받고자 생각하여, 때로는 흥을 타서 꽃과 달을 소재로 시를 읊고 지었다. 가만히 나의 인생을 생각해 보면, 금수
가 아니라 인간이 되었으니 다행이다. 머리를 빡빡 깎아 불승이 되는 그런 이방의 지역에 태어나지 않고 우리 동방
의 문명한 나라에 태어났으니 다행이다. 하지만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되었으니 불행하다. 부귀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으니 불행이다.
하지만 하늘이 이미 내게 인지仁知의 성性과 이목耳目의 육신을 부여하였거늘,
어찌 산수 자연을 즐겨서 보고 들음을 넓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늘이 이미 내게 총명한 재주를 부여하였거늘, 문명한 나라에서 무언가 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미 여자가 되었으므로 장차 규방에 깊이 처박혀 문을 굳게 닫아 걸고 경법經法을 근실하게 지킴이 옳겠는가?
이미 한미한 가문에 처하였으므로 자기 처지를 따라서 자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겨,
스르르 없어져서 이름이 들리지 않게 됨이 옳겠는가?
세상에 첨윤詹尹같이 뛰어나게 거북점을 치는 사람이 없으니 굴원이 점친 일을 본받기 어렵다.
더구나 그 말에 "계책에는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더라도 지혜에는 장점으로 살을 바가 있으므로
자기 의지대로 결행하게 한다" 고 하였기에, 나의 뜻을 결정하였다.
아직 비녀 꽂는 성년의 나이에 강산의 경승을 두루 보아 증점曾點이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음영하면서 돌아 온 일을 본받는다면, 성인도 역시 나의 결정에 편들어 주실 것이다.
마음에 이미 계책을 정하고는 거듭해서 아버님께 간청을 드리자, 한참 뒤에야 할 수 없이 허락하여 주셨다.
이에 흉금이 드넓어져서, 마치 맹금이 새장에서 벗어나 곧바로 구층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기세를 지니고,
훌륭한 천리마가 굴레를 벗어나 천 리의 땅을 곧바로 내달리는 듯이 하였다.
그날로 남자의 의상으로 갈아입고 행장을 꾸려 동쪽으로 향하여, 그 처음 목적지는 사군四郡으로 향하였다.
때는 경인 봄 3월로, 나는 바야흐로 이칠二七의 나이이므로 외간에 함부로 나다닐 나이가 아니다.
그래서 동자처럼 편발編髮을 하고 교자轎子 안에 앉고, 청사靑絲의 장막을 빙 두르고는
앞면만 활짝 틔우고 제천堤川 의림지義林池를 찾았다.
여성으로 태어난 한계를 절감하되, 규방에 갇혀 있기보다,
이칠 곧 14세의 나이에 당당하게 산수를 유람하며
인仁과 知의 본성을 기르겠다는 그녀의 선포와 배포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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