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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취월당

선인들의 유람록 <칠보산 >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

19세기 초기, 118×69.5cm,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칠보산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남쪽에 있는 해발고도 906m의 산으로 칠보산지의 주산이며 북서쪽으로

천불봉天佛峰(663m), 남서쪽으로 옥태봉玉泰峰(774m)이 위치하고, 백두화산대에 속하는

화산군의 하나이다. 북서쪽에 있는 개심사開心寺는 고려시대 절로 관북 사찰의 본산이다.

 

 

 

 

 

아래는 연암 박지원이 중국 북동부 요동을 여행할 때 회상하여 한 말이다.

《열하일기》의 「인신수필馹迅隨筆」 서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높은 산에 오르는 일은

현실의 나를 초월하는 정신 활동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다.

 

 

 

 

내가 전에 묘향산妙香山에 올라가 상원암上元庵에 묵을 때, 밤이 다 하도록 달의 밝기가 낮과 다름 없었다.

창을 열고 동쪽을 바라보니, 상원암 앞에 흰 안개가 질펀하게 깔려서 위로 달빛을 받아 수은의 바다처럼

되었으며, 그 바다 밑에서는 우르릉 소리가 나서 마치 누군가가 코 고는 듯하였다. 절의 스님들이 말하기를

"하계下界에는 시방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고 하였다.

 

며칠 후 산에서 나와 안주安州에 이르러 보니, 전날 밤에 과연 폭우가 내리고 천둥과 번개가 쳐서, 평지에

물이 한 길이나 흘러 백성들의 집을 떠내려 보냈다. 나는 고삐를 붙잡아 말을 멈추고, 감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에 나는 구름과 빗발의 바깥에서 밝은 달을 끌어안고 누웠다. 저 묘향산을 태산에 비한다면 겨우 한 개

의 둔덕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높낮이의 차이가 이렇게 경계를 전혀 다르게 만들었구나. 하물며 성인(공자)

께서 태산에 올라 천하를 보셨을 때야 어떠하였겠는가?"

 

 

 

 

 

총길이 30m로 칠보산에서 가장 큰 용소폭포. 사진 조선향토대백과

 

 

해칠보 무지개바위(북한 천연기념물 제313호). 사진 조선향토대백과

 

 

해칠보 달문(북한 천연기념물 제310호). 사진 조선향토대백과

 

 

 

 

 

 

임형수林亨秀,  「칠보산 유람기遊七寶山記」

 

 

문암령을 다 내려오자 구름과 안개가 차츰 열렸다. 바야흐로 계곡의 그윽함과 산봉우리의 늠늠함을 보매,

그 모습은 티끌세상의 산수와 전혀 다르다. 북쪽으로 20여 리를 가서 환희령에 이르렀다.

환희령은 개심사로부터 오리도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다지 높고 험하지는 않으나 길이 아주 아슬아슬하다.

절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이미 기운 후였다. 절은 새로 세 칸을 얽었는데, 거처하는 승려가 서너 사람 있다.

노대춘 등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바둑도 두다가 고단해서 슬며시 잠이 들었다.

한밤 삼경 즈음에 홀연 사람 소리가 시끄럽고 횃불 빛이 창에 어른댄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고을 사또가 왔다고 한다.

 

밤에 눈이 내려 아침까지 이어지다가 늦게야 조금 갰다. 모두들 나막신을 챙겨 산에 올랐다.

임사숙과 세필, 군관 김자숙이 먼저 금강굴로 향하고 나와 김명윤, 노대춘은 개심사 뒤의 고개로 올라갔다.

멀리 천불암과 나한봉이 아름다운 옥처럼 천 길이나 우뚝 솟아서 층을 이루어 태만상으로 기괴하다.

아무리 세밀하게 아로새긴다고 하여도 그 모습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벼랑 바위의 가장 높은 곳에 관음굴과 천신굴이 있는데, 사람의 발길이 이른 적이 없는 듯하다.

그 아래 제자굴과 계종굴이 있다. 또 천보암이 암석 위에 있어, 볼래 쇠사슬을 붙잡고 건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암자가 비어 있는 틈에 쇠사슬을 도둑맞았고, 암자 또한 산불로 불탔다고 한다.

 

그 아래 벼랑바위는 담벼락 같아서 길이가 수십 걸음이나 된다.

그 안에 청송굴이 있고, 그 동쪽에는 용혈굴이 있다.

돌길이 너무 험해서 모두 더듬더듬 타고 가볼 수가 없을 것 같다.

서성이면서 감탄만 할 뿐, 다른 곳으로 갈 겨를도 없었다.

 

시각이 흘러, 음침한 부슬비가 다시 일어나므로, 서글프게 고개의 절(개심사)로 내려가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임사숙 등이 금강굴에서 돌아와 그 장엄한 경치를 말하는데, 우리들이 본 것도다 나은 점이 있었다.

그래서 먼 곳을 먼저 가고 가까운 곳은 뒤로 미루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날이 바햐흐로 저녁 무렵이 되어가자 비기운이 잠시 멈추었다.

다시 산에 오르자고 약속하여, 앞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가니, 구름과 이내가 잔뜩 끼어 봉우리는 잠기고 골

짝은 어둡고, 흐릿하고, 망망하여 시선을 주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모두 한을 곱씹으면서 되돌아왔다.

이날 임세필과 임사숙은 먼저 산을 내려갔다.

 

다음 날 밥을 서둘러 먹고 일찌감치 산에 올라 금강봉 아래서 말을 내린 후 봉우리를 따라 남쪽으로 갔다.

산길이 기울고 가팔랐으므로 지팡이와 말채찍으로 끌고 잡아당기고 하면서 가까스로 산허리에 이르렀는데,

험하기 짝이 없었다. 걸어서 바위 한 굽이를 감싸듯 둘러가, 이른바 금강굴이란 곳에 이르렀다.

굴 안은 수백 명이 들어갈 정도인데, 두 칸짜리 암자가 구획되어 있다. 창과 문의 빛깔이 영롱하다.

 

영남의 한 승려가 거처하는데, 온 지 서너 날밖에 되지 않는다.

산 여울이 뚝뚝 떨어져 처마 끝으로 진다.

여름 장마 때가 되면물이 머물렀다가 흘러서 폭포를 이룬다고 한다.

우물이며 절구며 사람이 살던 흔적이 완연하다. 세속의 검은먼지가 이르러 오지 않기에,

불현듯,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일어나 주체키 어려웠다.

앞에 높은 대臺가 있어서 멀리까지 두루 조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옷자락을 걷고 지팡이를 버린 채 벼랑을 타고 대 위로 올라갔다.

붉은 골짜기에 임해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은 보이지 않고 산 전체의 형상이 눈 아래 죄다 펼쳐져 있다.

아까 말한 천불암이나 나한봉이란 것들도 대의 북쪽에 있다.

 

 

 

임형수는 본관이 평택平澤, 자는 사수, 호는 금호錦湖로 나주 출생이다.

1531년(중종 26)에 진사, 1535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가독서한 후 설서 · 수찬을 거쳐 회령 판관으로 나갔다.

회령 판관을 마치고 돌아올 대 칠보산에 올랐다. 26세 되던 1539년(중종 34) 7월에 홍문관 수찬의 직에서 회령판관

으로 나아갔다. 동년(같은 과거에 합격한 자)이자 회령의 교수로 있던 윤세신에게서 칠보산의 승경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1542년 3월에 칠보산을 유람하고, 3월 21일에 유산록을 지었다.

동행은 명천현감 김순, 경성교수 노연령, 그리고 회령군수 임종 등이다.

 

 

 

 

 

한시각韓時覺, 《북관수창록北關酬唱錄》 중 <칠보산전경>

1664년, 30×46.5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 그림은 김수향이 북도 시관詩官으로 함경도에 와서 여러 문인들과 주고받은

시와 칠보산 주변의 승경을 그린 32첩의 산수화를 한데 엮은 것이다.

그 그림을 한시각이 그렸다. 칠보산의 전경을 청색과 백색의 암산으로 대비시겼다.

 

 

 

칠보산은 함북의 금강으로 내칠보 · 외칠보 · 해칠보로 나뉜다.

칠보산 등산은 천덕泉德을 거쳐 칠보산에 들어가 금장사金裝寺를 보고, 

개심대와 금강굴에 오르는 것이 주행로였다.

내칠보의 오봉산에는 신라 흥덕왕 원년826에 발해가 창건한 개심사가 있는데,

고려 말 1377년(우왕 3)에 나옹선사가 중창하였다.

칠보산은 산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계곡물도 그다지 풍부하지는 않다고 한다. 

하지만 북관 10경의 하나였다. 숙종 대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북관십경도>를 모사한 글에서 칠보산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명천부明川府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문암門巖이 있다.

문암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하늘에 닿는 큰 산들이 사면에 둘러있다.

그 속에 바위산이 있는데, 산의 빛깔이 붉은 노을 같다.

봉우리들은 우뚝 뽑혀나서 기이하고 수려하며, 어디든 산이 없는 곳이 없이 천태산상을 드러낸다.

그 가운데 아주 기이한 것들은

사암寺巖, 책암冊巖, 주암舟巖, 천불봉天佛峯, 만사봉萬寺峯, 호상대虎像臺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혹은 새가 날고 짐승이 달리는 모습이고 혹은 사람과 사물이 웅성웅성 모여 있는 모습이다.

구름 기운이 모이고 흩어지는 듯하다고 묘사한다든가 신기루의 변환 같다고 묘사하더라도

그 기이함을 온전하게 비유할 수 없을 정도이다.

문암에서 10리를 가면 금장사가 있다. 그 절에서 다시 20리를 가면 개심사가 있다.

절의 뒤에 대臺가 있는데, 그곳에 앉으면 온 산의 진면목을 다 파악할 수 있다.

 

절에서 조금 동쪽에 망해대望海臺가 있다.

망해대에서 바위 봉우리를 넘으면 글강굴이다.

또 금강굴에서 10리를 가면 도솔암이다. 이 암자는 사암 아래 있는데, 지세가 아주 높다.

전하는 말에, 옛날에는 일곱 개의 산이 나란히 대치하였으므로 산의 이름을 칠보라 하였는데,

중고시대 이후로 여섯 산이 바다에 잠겨 남아 있는 것은 이 산뿐이라고 한다.

산의 가장 높은곳에는 버려진 조개나 소라 껍질이 쌓여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어느 해에 여섯 개의 산이 다시 육지로 나올지, 혹은 바닷물이 이 산 위로 달리게 될지 모르겠다.

이 산에서 기이하게 여길 점은 메꽃이 산에 가득하여, 씨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자생한다는 점이다.

산에 거처하는 승려들이 이것을 양식으로 삼는다고 한다.

 

 

칠보산은 임형수가 등반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알려진 산이 아니었다.

그 후 이안눌李安訥과 이동언李東彦이 유람기를 남겼을 따름이다.

임형수는 칠보산의 기괴한 봉우리, 동굴, 골짝에 이름을 붙였고,

산에서 돌아와 자신의 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 하였다.

 

 

 

아아, 하늘이 이 산을 비밀로 해서 바다 구석에 갈무리해 두어,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한 것일까?

아니면 이 산을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험하고 멀어서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없었던 것일까?

것도 아니면, 이 산을 본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감히 바위 봉우리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것일까?

여기 와서 노닌 사람이 또 누가 있느냐고 물어보니, 산승이 기억하는 바로는 다만 이항李沆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만일 이공이 유배의 처지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이 산은 끝내 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므로, 바위며 봉우리가

아무 명칭을 갖지 못한 것이 당연하리라. 이공이 또 여기서 죽었으므로,

그가 본 바를  남에게 전할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나는 임금을 경연에 모시던 신하로서 분수 때문에 변방 구석에 기탁하게 도어 이곳에 와서 노닐었으니,

정말 크나큰 행운이다. 그런데 백 년, 천 년 동안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둔 구역이 하루아침 나에 의하여

온 나라 안에 승경의 이름을 떨치게 된다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장차 지리산을 심상하게 여기게 되고

풍악에 물릴 대로 물려서, 기쁜 마음으로 칠보산으로 발길을 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산이 시절을 만난 의미가

크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바위와 봉우리들 가운데 명칭 없는 것들을 어찌 내가 명명하지 않으랴?

 

 

임형수는 이름 없는 바위와 봉우리들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칠보산의 승경을 온 나라 안에 알리겠다고 하였다.

자신보다 앞서 이항이 이곳에 귀양을 와서 칠보산을 유람하였으나 이 산의 이름을 나라 안에

알리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그와는 달리 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항은 중종 때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영의정 김안로와 찬성 채무택과 함께 선비들을 탄압하였다.

사람들은 그들을 삼흉三凶이라고 지탄하였다.

이항은 재주는 있었지만 심술心術이 부정하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북관에서 죽고 말았고, 칠보산의 이름을 나라 안에 알리지 못하였다.

 

산수의 발견을 덕 있는 사람의 우불우遇不遇(시대 현실에서 받아들여짐과 그렇지 못함)와 연계시키는 방식은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영주팔기永州八記」에서 비롯되었다. 유종원은 영주에 좌천되었을 때,

그곳 산수를 8편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기록하여 당시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승경을 자신의 글로 세상에 알렸다.

그러면서 유력자가 자신을 중앙으로 불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다.

 

임형수는 회령 판관의 임기를 마친 후 전한의 벼슬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하지만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제주목사로 쫓겨났다가 파면되었다.

그리고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났을 때, 소윤 윤원형에게 대윤 윤임의 일파로 몰려

섬에 안치된 후 곧 사사되었다. 훗날 신원되어 1702년(숙종 28) 나주 송재서원松齋書院에 제향되었다.

 

임형수는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했던 이황 · 김인후 등과 친교를 맺었다.

선조 말, 광해군 때 활약한 문인 이춘영은 친구에게 부친 서한에서

"근세의 임금호(임형수)는 사림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추앙하는 분이니, 그의 문장은 가히 헐뜯을 수가 없었다"

고 말하고, 그의 「칠보산 유람기」가 어떠하냐고 환기시켰다.

선조 때 김성일金誠一은 임형수는 칠보산에서 쓴 시를 읽고

「명천 객관에서 금호 임형수의 유산시를 읊다」라는 시를 남겼다.

임형수의 유람을 천상의 유람이라고 예찬한 것이다.

 

 

 

 

          明川館讀林錦湖遊山詩


七寶山何在                     칠보라 그 산은 어디에 있는가
明原碧海湄                     명천 고을 푸른 바닷가에 있지.

沖融會元氣                    융융하게 원기가 모여
磅礴擅雄奇                   넓게 서려 웅장함을 독차지 했네.

地護靈仙宅                  지세는 신선의 집을 보호하고
人傳學士詩                  사람들은 학사(임형수)의 시를 전하네.

天遊空有願                 천상의 유람을 부질없이 원한다면
幾日果幽期                 어느 날에 그윽한 기약을 이루랴.

 

 

 

 

인용: 심경호 著 <산문기행>